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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68

       ─ SYSTEM : <흑사병> 시련의 진행도가 100퍼센트에 도달했습니다.

         

       이걸로 첫 번째 고비는 넘겼다.

         

       막바지에 이르러서 로테 살리에르가 흑사병에 걸리는 일이 있었지만, 그 전부터 자신이 세피아 글리스턴과 접촉해 가능한 빨리 치료제를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었기 때문에 어떻게든 고비를 넘길 수 있었다.

         

       그간의 노력 덕분에 아카데미 내 사망자는 0명.

         

       실로 이례적인 기록이었다. 커뮤니티에 접속할 수만 있다면 당장 인증을 하고 싶을 정도로.

         

       버멜은 작게 소리내어 시스템창을 띄웠다.

         

       ─ SYSTEM : 인과 데이터를 종합하여 세계가 멸망을 맞이할 확률을 계산하고 있습니다.

         

       눈앞에 나타나는 반투명한 창. 이 세상을 관장하고 있는 여신이 자신에게 내린 특전이었다.

         

       잠시간의 로딩이 끝난 시스템창이 카랑한 방울소리를 내며 눈앞에 바라 마지않던 결과를 띄웠다.

         

       ─ SYSTEM : 현재 배드엔딩 확률을 75퍼센트입니다.

         

       예상대로 확률이 내려갔다. 이로써 해피엔딩에 한 발자국 가까워졌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버멜은 에테르에게 세 가지 빚을 졌다.

         

       첫째, 원래 자신이 만들어서 보급하려고 했던 흑사병 예방 스크롤을 먼저 제작해낸 것.

         

       둘째, 흑사병이 창궐하던 시기 지하수로에 같이 내려가 달라고 부탁했을 때 흔쾌히 수락해준 것.

         

       그리고 셋째.

         

       ‘이게 가장 이해가 안 돼.’

         

       흑사병에 걸린 살리에르를 24시간 간호하며 그녀의 철화 증상을 막아낸 것.

         

       펄스 스크롤을 만들고 있던 건 우연의 일치라고 넘어갈 수 있다. 워낙 손재주가 뛰어난 캐릭터인데다가 타락하기 전까진 학교생활을 어떻게 하고 있었는지 게임에서 자세하게 묘사된 바가 없었으니까.

         

       자신과 같이 지하수로로 내려갔던 일도 히든 루트에 존재했던 것이었으니 이해할 수 있다. 운 좋게 극악의 확률을 뚫었다고 생각하면 될 뿐이리라.

         

       그러나 자신의 몸까지 버려가며 살리에르를 24시간 간호했다는 것만큼은 이해할 수 없었다.

         

       ─ 미안한데 나 돈 좀 꿔줘.

         

       룸메이트 살리겠답시고 전화로 그런 말을 꺼냈을 땐 정말이지, 망치로 머리를 두들겨 맞은 듯한 기분이었다.

         

       “…….”

         

       분명 원작을 알고 있어서 조금이나마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패턴이 지나치게 변칙적이다. 이래서야 아예 처음부터 다시 조사해야 한다.

         

       버멜은 당분간 에테르를 깊이 관찰하기로 했다. 

       

       아니나 다를까, 등교가 재개된 날부터 원작에서 벗어난 이상행동을 하기 시작했다.

         

       아침 일찍 도서관에 들렀던 모양이다. 에테르는 틸레트 인장이 찍혀 있는 책을 한 아름 교실로 들고 들어왔다. 몇 권을 흘겨보니 전부 대륙사에 관한 도서였다.

         

       ‘왜 뜬금없이 역사…?’

         

       1학년엔 역사를 거의 안 배운다. 기말고사가 코앞인 마당인데 저런 걸 할 여유가 있나 싶었다.

         

       “얘들아, 모두 오랜만이야! 너희 얼굴 보니까 정말 좋다. 흑사병이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겠지만 그래도 다들 등교해 있는 모습을 보니 이 선생님은 감개무량하단다.”

       “그러면 오늘 수업을 짧게 끝내주시나요?”

       “아니? 기말고사 기간 맞추려면 보강까지 다이렉트로 빼야지. 자, 다들 책 피렴.”

         

       급우들의 볼멘소리가 곳곳에서 터져나오는 와중에도 그녀만큼은 흔들림 없는 자세로 역사책을 읽고 있었다. 에테르는 자신이 가져온 책을 몰래 넘겨보며 무언가를 그리고 있던 중이었다.

         

       ‘뭘 그리고 있는 거지?’

         

       수업 시간도 모자라 쉬는 시간이나 점심시간에도 펜을 놓지 않고 있었다. 클리온 황자가 거짓 시비를 걸었을 때조차도 별다른 반응 없이 끄적거리기만을 반복했다.

         

       “뭐 해?”

       “아무것도.”

         

       궁금증을 참다 못한 버멜이 앞자리를 기웃거릴 때마다 에테르는 황급히 종이를 접은 뒤 책상 밑으로 숨겨버렸다.

         

       직접 물어볼 필요까지는 없다. 바로 옆자리에 앉아 있던 살리에르라면 봤겠지.

         

       “쟤 뭐 그리고 있었어?”

         

       버멜은 에테르가 종이를 들고 자리를 비운 틈을 타 로테에게 물어보았지만 만족스럽지 못한 대답이 돌아왔다.

         

       “나도 잘 모르겠어. 처음 보는 글자로 글을 쓰고 있었는데….”

         

       그녀의 기행은 하루 치 분량만으로 끝나지 않았다.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그 다다음 날도.

         

       ‘벌써 일주일째다.’

         

       에테르는 매일같이 대륙의 역사를 담은 책을 살펴보며 무언가를 끄적여댔다. 틈날 때마다 버멜이 뒤에서 접근했지만, 언제 눈치챘는지 종이를 숨기고는 베시시 웃어댔다.

         

       “그렇게 알고 싶냐?”

       “저번에 나한테 금화 열 장 빌려간 거 퉁쳐줄 테니까 좀.”

       “그거 살리에르 가문이랑 잘 얘기해서 끝난 거잖아.”

         

       얘가 적어도 뭘 하고 있는지 알아야 그에 맞는 대처를 할 수 있다. 절대로 시답잖은 호기심 때문에 그러는 건 아니다.

         

       “그러면 금화 한 장 줄 테니까.”

       “싫은데?”

         

       최근에 에테르와 한 대화의 대부분이 이랬다. 그리고 그때마다 대차게 까이기를 반복.

         

       “뭐에요, 둘이 썸타는 거예요?”

       “와, 대박.”

         

       급기야 학급 여자애들에게 이딴 소리를 듣기도 했다. 안 그래도 아팠던 머리가 아작날 지경이다.

         

       에테르와 썸을 탄다고? 식인상어로 서핑보드 타는 것도 그것 보다는 안전하겠다.

         

       버멜은 손을 휘휘 내저으며 급우의 탈을 쓴 파파라치들을 내쫓았다. 세계 망하기 일보 직전인데 연애할 시간 따윈 죽어도 없었다.

         

       와중에도 시간은 흘렀다. 어느덧 기말고사가 코앞까지 다가왔다.

         

       ─ SYSTEM : ‘흑주(黑晝) 에테르’가 당신을 주도면밀하게 관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버멜은 신변에 위협을 느끼기에 이르렀다.

         

       ─ SYSTEM : 각별히 주의하십시오.

         

       ‘대체 나한테 왜 이러냐고!’

         

       그동안 잠잠했잖아!

         

       안 되겠다. 이러다간 두 번째 시련조차도 제때 대처하지 못한다.

         

       두 번째 시련, <단두대>.

         

       이 시련을 수월하게 통과하거나 아예 스킵하기 위해선 황성을 주시해야 한다. 제국에 뻗친 마수들이 본격적으로 기지개를 켜는 시점이 이때이기 때문이다.

         

       집중적으로 봐야 하는 사람은 현재 유폐되어 있는 제1황자. 그는 황성의 어딘가에서 칩거 생활을 하고 있었기에 엘프인 버멜이 2번 시련을 막아내기 위해선 황실과 연줄을 쌓아야만 했다.

         

       클리온 제2황자. 정신을 차린 그와 어떻게든 얘기를 해 봐야 하는데.

         

       막상 두 번째 시련을 막으려고 하니까 네 번째 시련의 기폭제인 에테르가 이상행동을 보이고 있다. 한번에 두 시련을 감당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미쳐 돌아버릴 지경이었다.

         

       그러던 중.

         

       ─ SYSTEM : 현재 배드엔딩으로 향할 확률은 67퍼센트입니다.

         

       “말 도 안돼. 내려갔잖아?”

         

       분명 얼마 전까지만 해도 75%였었다.

         

       그런데 별다른 사건을 거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확률이 내려갔다는 건 자신 외에 다른 누군가가 스토리를 진행하며 세상의 진실에 가까워지고 있단 소리였다.

         

       “…또한 이번 흑사병 사태를 무사히 넘어갈 수 있도록 아카데미 내부에서 최선을 다해 움직여 준 버멜 호르데 군과 에테르 양의 공로를 치하하고자 이 표창을 내립니다.”

         

       마침내 종강. 학기 종업식에서 로베스피에르가 준 상장을 받아들은 버멜은 깊은 생각에 잠겼다. 바로 옆에선 금안족 소녀가 자신을 흘겨보며 의뭉스럽게 입꼬리를 올려댔다.

         

       뭔가 재수없다.

         

       ‘제발 방학 동안에 아무 일도 안 일어나길.’

          

       두 사람은 교실로 돌아가기 위해 복도를 걸었다.

         

       이때 에테르가 돌발행동을 벌였다. 뒤에서 거리를 벌린 채 잘 따라오던 그녀가 갑자기 자신의 옆으로 따라붙은 것이다.

         

       “……?”

         

       순간 머리가 백지처럼 변했다.

         

       평소 로테나 프레이 정도를 제외하면 항상 타인과 1m 거리두기를 실천하던 그 에테르였다. 그런 그녀가 별다른 예고도 없이 버멜과 나란히 걷기 시작했다.

         

       겨우 한 뼘 남짓한 수준의 거리. 자칫하면 서로 팔꿈치가 닿을 만한, 아슬아슬한 간격.

         

       길 가다가 여사친이 갑자기 이러면 그린라이트라며 좋아라 날뛰었겠지만, 지금은 다르다.

         

       ─ SYSTEM : 시스템상 경고합니다. 생명의 위기가 있을 수 있습니다.

         

       버멜은 그 어느 때보다도 죽을 맛이었다.

         

       사백안을 쳐들은 채 무뚝뚝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기 시작한 에테르.

         

       예쁘긴 더럽게 예쁘다. 아, 참고로 악센트를 잘 줘야 한다. 정말 ‘더럽게’ 예쁜 거다.

         

       경국지색(傾國之色), 까딱하면 제국을 불바다로 만들어 줄 얼굴과 맞닥뜨리고 있자니 속이 울렁거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에테르는 들고 있던 상장 위에 종이 한 장을 포개어 올려놓았다.

         

       “……?”

         

       그 종이 위에는 짤막한 글귀 하나가 적혀있었다. 그간 에테르가 그리고 있는 그림을 미치도록 보고 싶었던 게 무의식에 있었던 버멜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은 채 그 종이에 적힌 글귀를 훑었다.

         

       [Q. 수백 킬로미터 떨어진 거리까지 볼 수 있는 괴물이 있을까 없을까?]

         

       [있다/없다]

         

       [있으면 눈 깜빡임 두 번, 없으면 한 번.]

         

       넌센스 퀴즈. 진짜 뜬금없었다.

         

       흑사병 이후로 얘가 맛이 간 건지는 모르겠지만, 자꾸 원작과는 다른 기이한 행동을 벌였다.

         

       얼떨떨한 기분이었다. 그럼에도 버멜은 자신의 미래 지식을 동원해서 답을 내렸다.

         

       깜박, 깜박.

         

       “오키.”

         

       에테르는 그 말을 끝으로 발걸음을 재촉해 먼저 떠났다. 홀로 남은 자신은 뒤늦게 치명적인 실수를 저질렀다는 걸 깨달아버렸다.

         

       “…기억 돌아온 건 아니겠지?”

         

       그러면 진짜 좆된 건데. 

       

       

       **

         

         

       [아니, 그래서 한 달동안 뭔 짓거리를 하고 다니신 거예요?]

         

       “뭐가.”

         

       [빙의자한테 빠른 시일 내에 자기 밝히겠다고 해 놓고 안 하고, 큰 그림이랍시고 파인만 다이어그램 비스무리한 걸 하루 종일 그리고 앉아 있질 않나, 뜬금없이 역사 공부한답시고 대륙사 도서만 줄창 찾아다 보고 있질 않나! 이래서 마법은 언제 공부하고 수소폭탄인가 뭔가는 또 언제 만드실래요? 이게 주인님이 말하던 큰 그림인가 뭔가에요?]

         

       “그런데.”

         

       [우리끼리는 염화로 되니까 속마음으로 말해 보세요. 왜 답답하게 말 못 하고 있었는지!]

         

       “알았다, 알았어.”

         

       왜냐면.

         

       [왜냐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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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Magic Academy’s Physicist

The Magic Academy’s Physicist

마도 아카데미의 물리학자
Score 4.0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In an era when the power of Fire Magic was considered to have reached its limit, one girl began researching nuclear fu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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