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itch Mode

EP.68

       무거운 눈꺼풀을 힘겹게 들어 올리면, 망막에 아로새겨진 악몽이 속눈썹 사이로 끈적하게 눌어붙습니다. 꿈과 현실의 경계 중간쯤에서 느낄 수 있는 몽롱한 상태. 지금 보고 있는 것이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하기 어렵습니다.

       

       셋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졸음으로부터 벗어났습니다.

       

       타라에게는, 가족의 온기가 느껴지지 않는 쌀쌀한 이곳이 현실이었고.

       

       니오레에게는, 구하지 못한 이들의 비명이, 자신의 실수가 남아있는 이곳이 현실이었으며.

       

       베네트에게는, 매듭짓지 못한 결말이, 분명한 목표가 존재하는 이곳이 현실이었습니다.

       

       번민하는 흑마법사는 칼을 뽑아 들었습니다. 칼날의 한쪽 면에는, 지금껏 베어 온 생명들의 얼굴이 스치고. 다른 한쪽 면에는, 구해내야 하는 여동생의 모습이 비쳤습니다. 

       

       타라와 니오레의 인생사를 제대로 들어본 적은 없지만, 그녀들과 자신의 차이가 있다면 실낱 같은 희망일 터. 성공 확률은 희박할지언정 매 순간 희망을 품을 수 있었으므로, 베네트는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만약에 목표를 잃어버렸을 때.

       

       결국 『공포 먹는 시체꽃』이 약속을 지키지 않아, 여동생과는 영영 재회할 수 없게 되어버렸을 때. 무너지고, 희망을 잃은 뒤에, 비틀려야 하는 걸까요. 

       

       그 뒤에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걸까요?

       

       비밀 안가에는 무장을 손질할 수 있는 도구가 있었으므로, 베네트는 자신의 애검을 기름먹인 천으로 닦아냈습니다. 정성스레 닦아낸 검면에는 베네트 자신의 얼굴이 비추었습니다.

       

       적어도 지금 생각하고, 결론을 낼 주제는 아니었습니다. 손목의 시계 문신은 그들을 재촉하고 있었으니까. 악신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진, 이 끔찍한 세상을 헤쳐 나갈 시간이었습니다.

       

       “일어나라. 귀환까지 얼마 남지 않았어. 하루를⋯⋯ 마무리 할 시간이다.”

       

       베네트의 말을 들은 타라는 부스스 일어나서, 웅얼거렸습니다. 그녀의 눈가에는 짙은 피로가 머물러 있었으며, 영혼 일부는 과거의 식탁에 머무르는 듯도 보였습니다.

       

       어제까지만 해도, 아브라함에게 이렇게 아침 식사 메뉴를 물어보았던 것입니다. 

       

       “⋯⋯아침 식사는?”

       

       “토마토 통조림.”

       

       “요리해 줄 거야?”

       

       “그냥 먹어. 요리할 시설도 시간도 없다. 영양을 공급한다고 생각해라.”

       

       “⋯⋯아브라함이었으면, 요리해 줬는데.”

       

       타라는 토마토만 덩그러니 들어 있는 통조림을 보며, 토마토 스파게티나, 피자 등을 떠올렸습니다. 그런 멋진 요리가 함께했던 저녁 식사 시간도.

       

       베네트는 혀를 쯧 차고, 반쯤 지나가다시피 말했습니다.

       

       “요리는⋯⋯ 나가서 해 주지.”

       

       “⋯⋯해 준다는 소리구나.”

       

       묘한 기분. 

       

       타라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묘한 감정을 느꼈습니다. 좋으냐, 나쁘냐고 물으면 좋은 것 같았습니다. 우울하던 기분이 좀 나아졌으니까요. 하지만 정확히 어떤 감정인지는 감이 안 와서, 베네트에게 몇 마디 말을 더 붙이려는데.

       

       “니오레, 정신 차려라. 졸지 말고.”

       

       [저어ㄲㅐ어잇서요]

       

       “글씨가 산으로 가잖나. 잠 깨고, 조금이라도 먹어 둬. 여기.”

       

       [감ㅅㅏ함니다ㅇ]

       

       니오레는 비몽사몽인 상태로 숟가락을 퍼 올렸지만, 입으로 도달한 것은 반의반도 되지 않았습니다. 나머지는 비밀 안가의 바닥에게 양보 되었습니다.

       

       “⋯⋯반은 흘리고 있잖아. 숟가락 이리 내. 입 벌리고.”

       

       “으아아.”

       

       베네트는 으깨진 토마토를 니오레의 입 안에 한 숟갈씩 넣어주었습니다. 시큼한 맛에 니오레는 표정이 오그라들었지만, 먹여주는 대로 곧잘 먹었습니다.

       

       타라가 옆에서 짜증을 부렸습니다.

       

       “니오레가 애도 아니고⋯⋯ 혼자 먹게 두면 안 돼?”

       

       베네트는 바닥에 떨어진 가엾은 토마토를 가리켰습니다.

       

       “이거 보이나? 잠이 덜 깨서 다 흘리고 먹잖아.”

       

       “나도 잠 덜 깼어.”

       

       “그럼 뭐, 너도 먹여 달라는 소리인가?”

       

       “응.”

       

       타라는 고개를 끄덕였다가, 잠시 생각하고는, 자신이 Yes라고 대답했다는 것을 깨닫고, 펄쩍 뛰었습니다. 쪽팔림으로 얼굴이 새빨갛게 된 채로, 베네트에게 삿대질을 하며.

       

       

       “⋯⋯아니, 아니! 이상한 소리 하지 마!”

       

       “확실히 너도 잠이 덜 깬 게 맞군⋯⋯.”

       

       꿈에서 깨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그 흔적이 남아있기 때문이었는지. 비몽사몽 중에 여정을 준비해 나가는 시간은 제법 화목했습니다. 가족과는 살짝 다른, 장미 향이 느껴지는 형태로.

       

       ===============================================================

       

       “타라, 먼저 뛰어나가지 마!”

       

       “괜히 걱정하지 말라니까, 기껏해야 광신도 하나잖아!”

       

       으지직.

       

       타라가 주먹을 꽂아 넣으니, 광신도의 머리가 이상한 각도로 꺾여나가며 쓰러졌습니다. 베네트는 빠르게 따라붙으면서 후방을 엄호했습니다.

       

       “그리고, 공격은 위협적이지만 방어가 별 볼 일 없는 적이라면. 빠르게 처리하는 게 맞잖아!”

       

       “동의하지만, 굳이 네가 손을 쓸 필요는 없어⋯⋯!”

       

       “있어!”

       

       타라는 옆의 담벼락을 후려쳐 부순 뒤, 깨진 벽돌 조각을 집어 들고 모퉁이의 광신도를 향해 던졌습니다. 벽돌은 조준이 빗나가, 광신도의 귀를 스치고 지나가 애꿎은 창문을 깼습니다.

       

       쨍그랑-! 퍼억-!

       

       베네트가 따라붙으며 던진 암석이 광신도의 미간에 꽂혔습니다. 타라는 엉뚱한 곳으로 날아간 자신의 벽돌을 보며 툴툴거렸습니다.

       

       “한 번 빗나갈 수도 있는 거지⋯⋯.”

       

       “너⋯⋯ 후우. 끝나고 얘기하자.”

       

       베네트는 목 끝까지 올라온 말을 삼키며, 주변을 둘러보았습니다. 전투가 시작된 것은 미스캐토닉 대학의 정문을 통과할 때였습니다. 마치 기다리기라도 한 듯, 은의 황혼 교단의 광신도들이 습격을 가해 온 것이었습니다.

       

       베네트는 이대로 돌파해 금서고에 도달, 농성하면서 아브라함의 연구 자료를 획득한 후에 이탈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고. 현재 도서관에서 한 블럭 떨어진 거리에서 광신도들과 대치 중이었습니다.

       

       담쟁이덩굴이 우거진, 미스캐토닉 대학의 역사가 담긴 담벼락은 이곳저곳이 뚫리고 깨져나간 꼴이 되었습니다. 대학의 쇠락을 암시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대학을 거니는 평범한 대학생들은, 갑작스러운 괴현상에 비명을 지르면서 도망치거나 건물에 숨어서 오들오들 떨었습니다. 그들은 몇 번이고 경찰에 신고했지만, 꽤 긴 시간이 지난 지금에도 경찰들은 출동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광신도들은, 일반인을 잡아서는.

       

       “으, 으아아아아아악!!”

       

       우드득, 으득. 

       

       그들을 희생해서 강력한 마법을 날려오는 것이었습니다. 

       

       광신도에게 목을 붙잡힌 일반인은, 몸 전체가 풍선처럼 부풀어 오르더니 펑 하고 터져나갔습니다. 그리고 그 피보라 안에서 박쥐 날개를 단 괴물이 기어 나옵니다. 그것은 이목구비가 없고, 한 쌍의 뿔이 있었으며, 인간과 엇비슷한 형태를 갖추었습니다.

       

       괴물은 날개를 퍼덕이며 베네트에게 달려들었습니다. 그리고 가시 달린 꼬리를 채찍처럼 휘둘러 공격해옵니다. 

       

       “⋯⋯흐읍!”

       

       카가각, 스걱!

       

       흘려내고, 꼬리 중간을 베어내며. 베네트는 눈살을 찌푸렸습니다. 손으로 전해져오는 단단함이 예사롭지 않았습니다. 칼날에 마력을 어느 정도 불어넣지 않으면 베어낼 수 없을 만큼.

       

       당해낼 수 없는 적은 아니지만, 소모의 문제였습니다. 대학에 일반인들은 한가득이고. 그 모든 이들을 희생시켜 이 괴물을 뽑아낸다면, 말라 죽을 겁니다.

       

       콰악! 끼기기긱⋯⋯.

       

       날아오는 괴물의 손톱을 장검을 방패처럼 뉘여 막아내고, 길항하고 있을 때.

       

       “sir’k⋯⋯ A’stra.”

       

       니오레가 쌕쌕거리는 소리로 영창을 내뱉었습니다. 괴물 발아래의 그림자가 부글부글 끓더니, 커다란 촉수 한 가닥이 솟아나 괴물을 휘감고, 빨아들였습니다. 괴물은 허우적대다가 그대로 잠겨 들어갑니다.

       

       스스로의 그림자에게 삼켜진 괴물이 있던 자리에는, 정체불명의 검은 점액질만이 남아있을 뿐이었습니다.

       

       “⋯⋯고맙다, 니오레.”

       

       니오레는 무언가가 흘러나오는 감각에 손등으로 코를 훔치면서 밝게 웃었습니다. 그녀의 손등과 얼굴에 피가 묻어납니다. 

       

       니오레는 마침 잘됐다는 듯, 흘러나오는 코피를 이용해서 다음 주문을 완성했습니다. 마법진을 그리고 피를 바치자, 반지름 1미터가량의 새빨간 점액질이 소환되어 꾸물거렸습니다.

       

       [저게 입구를 막아 줄 거예요!]

       

       “⋯⋯알겠다. 타라! 뛰어나가지 말고 얌전히 들어와!”

       

       “한 놈 더 죽일 수⋯⋯ 있었는데!”

       

       휘익-!

       

       성질을 내며 날뛰던 타라는, 마지막으로 근처의 촛대를 쥐고 투창처럼 던졌습니다. 촛대는 광신도 하나의 복부를 꿰어버리며 지면에 박혔습니다. 타라는 고통에 경련하는 광신도의 모습을 보고 씩 웃고는, 도서관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니오레와 베네트까지 도서관 안으로 들어간 뒤, 새빨간 점액질은 문에 달라붙으며 외벽을 따라 스멀스멀 퍼져갔습니다. 건물 전체를 지켜, 시간을 벌어 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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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서관 안에도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피칠갑인 채로, 칼을 뽑아들고 있는 세 사람을 발견하자 안쪽은 아비규환이 되었습니다. 누군가는 창문을 깨고 밖으로 탈출하려고 했으나, 새빨간 점액질에 막혀 나갈 수 없었습니다.

       

       [해칠 생각은 없어요! 어딘가에 숨어 계세요!]

       

       “⋯⋯너희들에게는 관심 없다! 구석에서 얌전히 숨어 있도록!”

       

       베네트는 니오레가 들어 올린 화이트보드를 보고, 큰 목소리로 한 번 외친 후. 일행을 이끌고 금서고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여러 책자와, 아브라함의 금고가 보였습니다. 금고는 육중하고 견고했으며, 부피가 컸습니다. 트럭이라도 있는 게 아니라면 옮기기는 어려워 보였습니다.

       

       “⋯⋯옮기기에는 무리겠군. 내용물만 챙겨야 할 것 같다. 『핀 보레이의 열쇠』.”

       

       베네트는 금고의 잠금장치를 쥐고 마법을 시전했습니다. 어느 도둑이 개발했다고 전해져 내려오는, 유서 깊은 자물쇠 해제 마법이었습니다.

       

       그러나, 들려와야 할 짤깍 소리가 없었습니다. 손잡이를 쥐고 열어봐도, 금고는 요지부동이었습니다.

       

       “마법이 먹히지 않아⋯⋯?”

       

       [구조가 달라서 그런 것 같아요. 이 세계는 자동차도 그렇고, 기계가 많이 발전했으니까⋯⋯ 자물쇠가 더 복잡하게 생긴 게 아닐까요?]

       

       “비밀번호로 짐작 가는 건 없나?”

       

       “⋯⋯그 이사악인지 이삭인지 하는 애, 생일이라도 되는 거 아닐까.”

       

       “혹시 아는 사람⋯⋯ 은 당연히 없겠군.”

       

       일행들에게는 단서가 없었습니다. 금고의 비밀번호도 모르고, 옮길 수도 없다면. 억지로라도 뜯어내야 할 터. 베네트는 롱소드에 마력을 한계까지 불어넣었습니다. 푸르스름한 기운이 넘실거리고, 선명한 칼날이 되었습니다.

       

       카가가가가가각-!

       

       불똥이 튀면서, 금고가 조금씩 잘려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얼마나 걸려?”

       

       “내용물이 상할지도 모르니 신중하게 자르고 있다. 10분은 걸릴 것 같은데.”

       

       “니오레가 이상한 마법으로 입구도 막았다며? 그러면 10분 정도야 뭐⋯⋯.”

       

       [⋯⋯⋯⋯!]

       

       움찔. 니오레가 몸을 크게 떨더니, 도서관의 입구 방향을 돌아보았습니다. 타라는 설마 싶은 얼굴로 중얼거렸습니다.

       

       “⋯⋯아니지?”

       

       [방금, 뚫려 나갔어요. 공간이 도려내진 것처럼⋯⋯.]

       

       “10분이랬지? 시간을 벌어 볼게, 베네트. 자르고 있어!”

       

       [잠깐만요, 타라!]

       

       타라는 베네트와 니오레를 남겨둔 채, 금서고의 문을 열고 나왔습니다.

       

       도서관의 입구는 무언가가 뜯어먹은 것처럼 휑하게 뚫려있었으며, 그곳으로부터 수많은 목걸이를 목에 건 남자가, 광신도들을 이끌고 걸어왔습니다.

       

       광신도들은 그와 함께하는 것이 일생의 영광인 것처럼 황홀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그렇기에, 환희 속에서도 홀로 무심한 표정을 짓고 있는 남자의 존재감이 더욱 선명하게 느껴졌습니다.

       

       목걸이를 찬 남자. 보고서에서 읽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는 은의 황혼 교단의 교주였습니다.

       

       교주는 여유롭게 말을 걸어왔습니다.

       

       “여러분은 누구십니까. 어째서 유구한 전통을 자랑하는 대학에 들어와, 소동을 벌이는 것입니까?”

       

       “⋯⋯당신이 교주야?”

       

       “그렇습니다. 제가 너그러이 대답을 해주었으니, 돌아올 대답을 기대해 봐도 되겠습니까?”

       

       “어째서, 아브라함을 죽였어. 대체 왜!”

       

       “저는 물어보았고, 친절하게 대답까지 해드렸건만. 돌아오는 건 덧없는 원망이라⋯⋯. 대화할 생각이 없으시군요.”

       

       교주는 품 안에서 기이하게 생긴⋯⋯ 보석을 꺼내 들었습니다. 마구잡이로 컷팅된, 새빨간 부등변다면체. 목표라는 빛나는 부등변다면체는 저것을 의미할 터.

       

       타라는 경계심을 끌어올리며 보호 마법을 시전할 준비를 마쳤습니다. 『여신을 지키는 세 마리의 개』. 어떤 속성의 마법이라도 저항할 수 있는 신성 방패. 이미지를 그려내고, 여신으로부터 내려받은 마력을 끌어올려서⋯⋯.

       

       “⋯⋯어, 어?”

       

       여신이 부여해 준 마력. 신성력이, 잘 끌어올려지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억지로 움직여보려고 했으나, 평소와 비교하면 반절도 안 되는 정도.

       

       삐걱였습니다. 언제나 몸에 충만하던 신성력의 부재는, 섬뜩할 정도로 선명하게 느껴졌습니다. 텅 비어가는 것 같은 느낌. 차갑고, 시린. 외면할 수 없는 공백.

       

       타라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습니다.

       

       어째서. 어째서⋯⋯. 

       내가⋯⋯ 의심을 품었기 때문에?

       

       교주는 가볍게 손을 뻗었습니다. 주변에 시립한 광신도 중 다섯 명이 단숨에 쪼그라들었습니다. 그 모습을, 살아남은 광신도들은 복되고 영광스럽다는 듯 황홀경에 빠져 보고 있었습니다.

       

       “미래에서 보았습니다. 당신들이 우리의 위대한 계획을 방해하는 모습을. 이는 불경이니, 죽음을 달게 받아들이십시오.”

       

       공간이 일그러지며, 무언가가 날아왔습니다.

       

       형체 없는 주먹. 볼 수도 없고, 피할 수도 없는 일격이, 무방비한 타라에게 적중했습니다. 푸른빛이 번뜩였습니다.

       

       빠악-!

       

       타라는 가해지는 물리력에 그대로 날아가, 금서고의 문을 부수고, 바닥에 한 번 튕기며 책장에 처박혔습니다. 있을 수 없는 각도로 허리가 꺾인 타라는, 잠시 경련하다가. 눈동자에 머무르던 빛이 픽 하고 꺼졌습니다.

       

       그 위로 와르르. 책들이 쏟아집니다.

       

       “⋯⋯⋯⋯!!”

       

       니오레가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습니다.

       

       그때, 푸른 빛에 감싸인 타라의 몸이 지워지듯이 사라졌습니다. 니오레가 패닉에 빠져, 어쩔 줄을 모르고 있을 때. 베네트는 금고를 여는 것을 멈추고 침착하게 상황을 판단했습니다.

       

       “⋯⋯안전장치가 발동했다. 방금 전의 푸른빛, 원래 세계로 돌아간 거야.”

       

       “⋯⋯⋯⋯.”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군.”

       

       베네트는 손목의 시계 문신을 바라보았습니다. 거의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0에 가까워진 상태. 어차피 곧 있으면 귀환하게 될 터.

       

       “여기 남아 있어, 니오레. 곧 귀환할 거다.”

       

       니오레는, 금서고를 나가려는 베네트의 옷자락을 잡아당겼습니다. 그녀의 손이 덜덜 떨렸습니다. 방금 전, 타라의 시체는⋯⋯ 끔찍했습니다. 아무리 안전장치가 작동한다고 해도, 그런 모습을 다시 보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그게 베네트라면 더더욱.

       

       곧 귀환할 거라면, 이대로 시간을 끌면 되었으니까. 기다리자는 뜻을 담아서, 니오레는 베네트의 옷을 잡고 늘어졌습니다. 하지만 베네트는 니오레의 손을 풀어내며.

       

       “⋯⋯언젠가 쓰러트려야 할 상대다. 저자가 들고 있는 물건이, 빛나는 부등변다면체로 보이는군. 그러니까.”

       

       타라가 당한 게 화가 나서 덤비는 게 아니라. 필요하니까 덤비는 거다.

       

       베네트는 스스로에게 그렇게 되뇌며 금서고를 빠져나갔습니다. 교주에 대해서는 보고서를 몇 번이고 읽었습니다. 그에게는 마법적인 방벽이 있다고 했습니다. 뚫어낼 수 있는지, 확인해 보는 게 좋을 터.

       

       교주는 걸어오는 베네트를 보며, 태연하게 다시 한번 물었습니다.

       

       “앞서 여성분의 영혼은 그분의 것이 되었을 테니, 이번엔 당신에게 묻겠습니다. 대학에 들어와서 소동을 벌인 이유는?”

       

       “어째서 신을 강림시키려는 거지? 듣기로는, 모든 것이 지워질 뿐이라던데.”

       

       “⋯⋯마음에 드는 질문이니, 기꺼이 대답해 드리겠습니다. 그분에게 거두어진 영혼은, 우주가 소멸할 때까지 그분의 품 안에서 영생을 누리게 됩니다. 저는, 지구상의 모든 사람에게 그러한 은혜를 베풀고 싶은 겁니다.”

       

       롱소드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습니다.

       

       “나도 대답해 주지. 대학에 온 이유는, 널 죽이기 위해서다.”

       

       베네트는 다리의 근육이 버틸 수 있는 한계치까지 마력을 쏟아붓고 땅을 박찼습니다. 으직, 하고 바닥의 타일이 조각나 사방으로 튀며, 그의 몸이 화살처럼 날았습니다.

       

       세상에 완벽한 것은 없고, 어딘가에는 틈이 있습니다. 

       

       상대방의 공격이 필중이라도, 시야에서 보이지 않으면 사용할 수 없을 터. 

       

       “『펄선의 검은 연기』, 『어둠을 꿰뚫는 눈』!”

       

       퍼어엉-!

       

       새까만 연기가 솟아나 주변의 시야를 차단했습니다. 그러나 연속해서 시전한 마법 덕분에, 베네트는 연기 속이 훤히 보였습니다.

       

       연기가 만들어 낸 어둠 속에서, 베네트는 발소리를 최대한 죽이며 내달렸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교주의 앞까지 도달했습니다.

       

       가까운 거리.

       

       엉뚱한 곳을 바라보고 있던 교주의 눈동자가, 스윽 하고. 베네트에게 돌아갔습니다. 아니, 조금 다릅니다. 교주가 바라보는 곳은⋯⋯ 베네트가 마력을 불어넣은 롱소드. 그리고 베네트의 다리.

       

       교주의 눈동자는 탁한 회색빛이었습니다. 시력이 거의 없는 듯 보였습니다. 그럼에도, 새까만 연기 속에서도 베네트의 위치를 정확하게 파악했던 건.

       

       그는 마력을 감지해서 시력 대신으로 삼는 것 같았습니다.

       

       베네트는 급히 모든 마력을 가라앉혔지만, 늦었습니다. 천천히 일그러지는 공간이 보입니다. 그는 몸을 웅크려 방어 자세를 취했습니다.

       

       빠아악-!

       

       베네트의 몸이 날았습니다. 타라와 마찬가지로, 베네트의 몸은 금서고까지 날아갔습니다. 안에 있던 니오레는, 팔이 이상한 방향으로 꺾여나간 베네트의 몸이, 푸른빛에 휩싸여 사라지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때, 시간이 다 되어. 니오레 역시 세상에서 지워지듯이 사라졌습니다.

       

       “⋯⋯기척은 더이상 느껴지지 않는군요. 저는 이만 물러날 테니, 뒤처리를 부탁드립니다. 형제님들.”

       

       교주는 고개를 한 번 까닥이고, 천천히 걸어 도서관을 빠져나왔습니다. 그의 뒤로는 증거 인멸을 위해 죽어 나가는 일반인들의 비명이 울려 퍼졌습니다⋯⋯.

       

       1회차 종료.

       

       ===============================================================

       

       “⋯⋯허억.”

       

       베네트는 눈을 떴다. 마법진에서 몸을 일으키려고 힘을 주었지만, 묘하게 몸이 무거워서 움직이기 힘들었다. 시선을 아래로 향하니, 울상을 지으며 자신의 몸에 달라붙은 니오레가 보였다.

       

       “⋯⋯⋯⋯.”

       

       “⋯⋯나는, 괜찮다. 봐, 이렇게 멀쩡하게 살아있지 않나.”

       

       많이 놀랐던 모양인지, 니오레는 눈가에 눈물방울도 매달고 있었다. 남에게 이렇게나 걱정을 받아본 적이 언제였던가. 기분이 묘했다.

       

       베네트는 니오레의 머리카락을 쓱쓱 쓰다듬어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고개를 돌리면, 몸을 웅크리고 떨고 있는 타라의 모습이 보였다. 

       

       베네트가 놀라서 물었다.

       

       “⋯⋯타라, 뭔가, 문제라도 있나? 혹시 안전장치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은 거냐?”

       

       “아니, 아니야. 나도, 나도 멀쩡해. 그냥, 조금 놀라서.”

       

       그저 놀랐다기에는, 무언가 중요한 것을 잃어버린 아이처럼. 그녀는 패닉에 빠져 있었다. 베네트는, 무언가 위로의 말을 건넬까 하다가. 입을 다물었다. 그런 말에는 익숙하지 않았으니까.

       

       대신, 타라의 옆으로 걸어가 그녀의 정수리에 손을 툭 하고 얹었다.

       

       여동생이 불안에 떨고 있으면, 이런 식으로 응원하고는 했으니까. 베네트는 타라가 당장 손을 치우라고 성질을 낼 거라고 생각했으나, 그녀는 별 반응이 없었다. 그만큼 위로가 필요했으리라 여겨, 베네트는 말없이 머리를 쓰다듬었다.

       

       낯선 세계에 떨어져, 정을 주던 사람을 끔찍한 방법으로 잃어버리고. 마지막에는 죽음 직전까지 몰려버렸으니. 

       

       타라도, 니오레도, 마음이 많이 소모된 것처럼 보였다. 베인 상처는 꿰매면 되지만, 갈려 나간 상처는 쓰라리고, 처치도 쉽지 않다.

       

       곱씹어보면, 실패투성이였다.

       

       세 사람은, 각자가 바라던 바를 모두 이루지 못했다. 베네트는 여동생을 구할 실마리를 원했으나 얻지 못했고, 타라는 가족을 원했으나 잃어버렸으며, 니오레는 사람을 구하고 싶었으나 마음의 빚만 늘어나고 말았다.

       

       실패. 하지만.

       

       “⋯⋯하지만, 다음이 있지 않나. 그러니까.”

       

       베네트는 괜찮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 말을 입에 담기에는 본인 스스로도 떳떳하지 못하여. 침묵을 골랐다.

       

       정적 속에서, 그들은 어설픈 방법으로 서로를 위로했다.

       

       

       이 사태를 일으킬 장본인, 미치광이 마법사가 방 안으로 들어온 것은. 세션 종료 시점으로부터 30분이 지난 뒤였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마춤뻡검사기는 좀있다 돌리고 수정하겠습니다…!

    +(2 : 14)
    맞습니다⋯⋯ 오늘은 좋은 점심이에요⋯⋯.
    필라프를 좀 더 빨리 먹었더라면 늦지 않았을 텐데!

    다음화 보기


           


Otherworld TRPG Game Master

Otherworld TRPG Game Master

Another World TRPG Game Master, 이세계 TRPG 게임마스터
Score 8.6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3 Native Language: Korean
I became a wizard of the Illusion Magic School and decided to create a virtual reality with illusion magic to play a tabletop role-playing game (TRPG). It was great to create a virtual reality, but I was in trouble because there were no suitable players. During that time, I received an offer to be the professor from the Royal Academy. The offer was to use illusion magic to fill the students’ lack of practical experience safely. And so, I became a professor at the academy. “Send me back, send me back to that world right now-!” “Outer god, someday an outer god will be our doom, we’ll all die!!” “I am not the bastard of the Redburn Ducal Family. I am the foremost disciple of the Great Namgung Clan, Namgung Qinghui!” But it seems there is a bit of a misunderstanding. This isn’t a spell for dimensional travel, kids. It’s fic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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