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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69

       “어…… 그러니까, 지금 너희 아버지가 여기로 오시고 계신다고?”

        

       “어, 그게…… 그렇게 되어버렸네.”

        

       나는 결국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었다.

        

       “아냐! 분명 괜찮을 거야! 아빠는 그렇게 보여도 꽤 개방적인 성격이거든!”

        

       세상 어느 개방적인 부모라도 자기 친구를 가정부로 쓰겠다는 친구를 보면 별로 좋은 생각을 하지는 못할 것이다. 아니, 개방적이기에 오히려 더 그렇지 않을까? 그 왜, 진보적인 사람일수록 돈 많은 사람들에게 좀 더 엄격하게 생각하고 그런 거 있잖아. 특히 ‘동등해야 할’ 동갑의 친구를, 돈을 주고 시종으로 부린다고 하면 특별히 진보적이지 못한 부모라도 둘의 관계를 동등한 관계로 보지는 않을 것이다.

        

       아니, 그보다, 내가 말한 ‘허락’은 기왕이면 집에 가서 받아서 다시 오라는 말이었지, 그냥 전화로 ‘나 여기서 일할게!’하고 통보하라는 말이 아니었다. 애초에 부모 동의가 그냥 전화로 이루어져서 될 일도 아니고.

        

       “…….”

        

       나는 조용히 생각을 정리했다.

        

       ……그래도, 아주 망한 건 아니라고 본다. 소희의 아버지께서 허락해 주실거라는 기대는 별로 하지 않았지만, 만에 하나 허락만 받을 수 있다면 소희에게 일을 맡기는 것도 나쁘지 않을지 모른다.

        

       뭐…… 물론, 양혜인 수준의 일 처리를 바라는 건 너무한 일이겠지만. 뭐, 정 부족하면 일하는 사람을 늘리면 그만이고. 어차피 회장 측에서도 양혜인 대신할 사람을 보낼 테니, 소희는 그냥 내 개인 메이드로만 있어도 상관없다.

        

       아직 십 대라고는 하지만, 소희는 원작 게임에서 어마어마한 행동력을 가지고 있던 히로인이었다. 거기에 나름대로 히로인 보정까지 받아서 절망에 빠진 하늘이를 그 상황에서 구원해내기까지 했던 캐릭터였으니, 도움을 받아도 나쁠 것은 없다.

        

       혹시라도 나중에 진짜 예사라가 돌아왔을 때 큰 도움이 될 테니까.

        

       그런 생각을 하다가 문득, 내가 아직 파자마를 입고 있다는 것이 떠올랐다.

        

       나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면서 말했다.

        

       “……일단은 옷부터 갈아입자. 너희 아버지를 뵐 때 이런 차림으로 갈 수는 없으니까.”

        

       “오, 좋아! 맡겨 둬!”

        

       소희가 팔을 걷어붙였다.

        

       어, 아니, 나는 당연히 내가 갈아입으려고 했는데.

        

       그보다 너 아직 여기 취직한 거 아니거든. 옷도 여전히 츄리닝이면서.

        

       *

        

       결국 내가 입을 옷은 하나밖에 없었다.

        

       외출복이라곤 지난번에 하늘이와 함께 쇼핑 가서 산 옷 한 세트뿐이고, 나머지는 보는 사람이 심히 부담스러워지는 드레스 종류나 실내에서나 입을만한 얇은 옷들이 전부였으니까.

        

       문제는 그 한 세트 있는 일상용 외출복이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청바지랑 점퍼는 그대로 있는데 까만 티셔츠만 없었다. 생각해보니, 지난번에 이 저택에 놀러 왔던 하늘이가 그걸 입고 있었다. 빨아서 돌려주겠다는 것은 속옷 얘기만 하는 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러고 보니까, 얘도 내 교복 하나 가지고 갔던 것 같은데.

        

       “응? 왜 그래? 할 얘기라도 있어?”

        

       내가 슬쩍 올려다보자, 소희는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되물었다.

        

       “아냐.”

        

       나는 고개를 저었다. 뭐, 본인이 세탁해서 가져다주겠다고 했으니까 언젠간 가져다주겠지. 대학생 시절 때 자취방에 놀러 왔던 친구가 춥다고 입고 갔던 패딩을 깜빡하고 있다가 거의 일주일 지나서야 돌려준 적이 있었다. 아마 소희도 그런 경우겠지.

        

       그래서, 결국 내가 입을만한 옷은 교복뿐이었다. 사실 디자인이 그리 나쁘지만은 않긴 했지만, 그래도 주말에도 입을 옷이 교복밖에 없다는 것은 조금 우울한 일이었다. 옷장을 뒤지던 소희도 비슷한 말을 했다. “주인님, 시간 되시면 나중에 옷 사러 가셔야겠어요.”하고, 농담처럼 말했는데, 솔직히 좀 오그라들었다. 굳이 말로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양혜인이 아가씨라고 불렀을 때는 별생각 없었는데. 역시 사람은 평소의 인상이 엄청 중요한 모양이다. 뭐, 양혜인은 작은 움직임에서도 프로라는 분위기가 팍팍 풍겨서 전혀 어색하지 않아 보였던 것도 있지만.

        

       그러고 보니, 얘가 메이드로 일한다고 하면…… 인수인계는 누구한테 받아야 하지? 내가 고용했다고 해도 소희가 다른 사용인들과 친하게 지낼 수 있을 가능성은 적었다.

        

       사용인들은 어쨌거나 내 생활을 위해 고용된 이들이니 식사나 난방 같은 건 내가 말하지 않아도 제공하겠지만…… ‘추가로’ 살게 된 소희에게 그런 것들을 제공해주려 할지는 또 별개의 문제였다.

        

       ……양혜인을 다시 찾아서 불러야 하나?

        

       뭐, 이건 일단 나중에 생각하기로 하자.

        

       소희가 여기서 일하기로 정해진 것은 아니니까.

        

       그렇게 이리저리 머리를 굴리고 있는데, 소희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진동모드로 해두었는지 우웅- 하고 낮게 울리는 소리가 났다.

        

       “아, 아빠다.”

        

       소희는 바로 전화를 받았다.

        

       “어, 아빠. 응. 다 왔다고?”

        

       “…….”

        

       나는 전화를 하는 소희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게임에서 소희의 집은 꽤 화목한 가정으로 나왔다. 뭐, 내가 모든 캐릭터의 루트를 본 것은 아니라 확신할 수는 없지만, 아무래도 ‘if you wish’속의 캐릭터들은 대체로 돈이 없는 집일수록 가정이 화목했다. 제작자의 의도인지, 편견인지, 아니면 클리셰라서 넣은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윤다호의 집안도 별로 화목하다고는 할 수 없고, 이렇게 직접 겪어보니 예사라의 집안도 결코 화목하지는 못했다. 반면에 소희의 집안이나 하늘이의 집안은 ‘부자는 아니지만 행복한’ 가정의 클리셰를 거의 그대로 따른다.

        

       하긴, 그런 설정이라도 없으면 게임에 위기가 없기는 하지.

        

       “어…… 그런데 입구에서 못 들어오고 있다고?”

        

       “…….”

        

       나는 작게 숨을 내쉬고, 몸을 일으켰다.

        

       그 동작을 보고 소희는 바로 눈치를 챘는지,

        

       “아, 그럼 금방 나갈게!”

        

       그렇게 말하고는 황급히 전화를 끊었다.

        

       전화를 끊은 소희의 눈동자가 갈 곳을 잃고 파르르 떨렸다.

        

       “……왜 그래?”

        

       “아, 그게, 아빠가 좀 화가 난 것 같아서.”

        

       내가 이상하다는 듯 올려다보면서 물어보자, 소희는 내 눈을 살짝 피하면서 대답했다.

        

       그야 그렇겠지. 딸이 다른 집 메이드가 되겠다고 하는 것은 둘째치고, 이 집의 정문을 관리하는 경호원들의 태도는 이 집 바깥사람들이 보기에 엄청나게 속 터지는 태도였으니까. 뭐랄까, 사람을 좀 깔보는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부잣집에서 일한다고 부자가 되는 것도 아닐 텐데, 꼭 그렇게 돈 많은 사람 밑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꺼드럭대더라.

        

       아니지, 다시 생각해보면 양혜인이 연봉 5억이라고 했었으니까…… 다른 직종도 비슷비슷할지 모르겠다.

        

       억대 연봉이라고 꺼드럭대는 거면 좀 그럴싸하긴 하네.

        

       그래도 거슬리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나는 소희를 다시 한번 올려다보았다.

        

       그러고 보니, 얘가 들어올 수 있었던 것도 그 사람들이 일을 태만하게 해서 그런 거 아닌가? 정문만 지킬 뿐이지 따로 순찰을 다니는 것 같지도 않고.

        

       ……설마, 아직도 담벼락에 사다리가 놓인 채로 방치되어있는 건 아니겠지?

        

       이것 참, 예사라가 가만히 있으니 일하는 인간들도 나태해진 모양이다.

        

       덕분에 소희가 무사히 집에 들어올 수는 있었지만……

        

       기왕 건수 잡은 거 한 번 개같이 털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소희의 아버지는 경호원과 소리를 지르며 싸우고 계시지는 않았다.

        

       물론 얼굴은 분노로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었고, 우리가 조금만 늦게 왔어도 바로 소리 지르며 싸울 기세이긴 했지만.

        

       “아빠!”

        

       소희가 자신의 아버지를 소리쳐 부르자, 정문에 있던 사람들의 얼굴이 전부 이쪽으로 휙 돌아왔다. 오히려 놀란 것은 소희의 아버지와 마주 서 있던 경호원 두 명이었다. 자신들이 들여보낸 기억이 없는 사람이 당당하게 나와 함께 나왔으니까.

        

       나는 그 둘의 얼굴들을 한 번씩 쳐다보았다. 둘 다 내 눈을 슬쩍 피했다. 한눈에 봐도 당혹스러움이 표정으로 드러나 보인다.

        

       “요즘일 하시는 게 많이들 편하신 모양이에요. 손님께서 오셔도 저한테 말씀도 안 해 주시고. 그렇게 보고하기가 귀찮으셨나요?”

        

       생각해보니 그렇다. 하늘이가 왔을 때도 양혜인이 아니었다면 하늘이가 정문에서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 나에게까지 알려지지 않았을 테니까.

        

       내 말에, 경호원들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저, 저희는…….”

        

       “제가 ‘아무도 들이지 말라’는 말을, 한 적이 있던가요? 제 기억에는 없는데.”

        

       그야 당연히 없지. 애초에 예사라는 이 집 사용인들과 대화를 거의 하지 않았으니까. 그나마 대화해도 양혜인과 대화하는 게 전부였을 것이다.

        

       “저희는 회장님의—”

        

       “하지만 이 저택의 소유는 ‘저’잖아요.”

        

       다른 경호원이 최나경 핑계를 대려는 것 같아서, 나는 다시 한번 그 경호원들의 말을 막아버렸다.

        

       “이 저택에 당신들이 있을 수 있는 것은 제가 당신들의 존재를 묵인하고 있기 때문이잖아요. 만약 제가 나가라고 하면 그대로 해고 될 텐데, 제 말을 그렇게 안 들어서 괜찮겠어요?”

        

       그렇다. 고용은 최나경이 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이 집은 ‘예사라’ 소유다. 예사라가 암묵적으로 허락하기에 이 안에 사용인들이 있을 수 있다는 소리다. 만약 내가 ‘싫다’는 말을 한마디라도 하면, 이 사람들은 그대로 나가야 한다. 문자 그대로 불법침입이 되는 셈이니까.

        

       최나경이야 내가 봐야 할 일이 있으니까 오는걸 막지 않는다고 해도, 사용인들은 어떻게 되건 내 알 바 아니다. 정이 들 정도로 살가운 사이도 아니었고.

        

       “그리고, 지금 당장 저택 뒤쪽 담으로 가보시겠어요? 거기 사다리가 하나 당당하게 기대어져 있을 텐데요. 넘어온 사람이 제가 아는 사람이라서 망정이지, 만약 나쁜 마음을 먹고 넘어온 사람이라면 어쩌시겠어요?”

        

       그것도 내 방문 앞까지 당당하게 들어올 수 있을 정도였다.

        

       생각해보면 섬뜩한 이야기다. 만약 정말로 강도였다면 나는 강도에게 문을 열어준 격이 될 테니까.

        

       최나경은 나에 대한 무시를 주문하긴 했지만, 나의 안전까지 위협하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애초에 그렇게 끔찍하게 생각하는 대상이 누군가에게 해를 입는다면 최나경은 나쁜 의미로 미쳐버릴 것이다.

        

       예사라를 가두어 두는 것은 최나경 나름대로 완벽한 계획이라고 생각해낸 것이겠지만, 그 계획에는 허점이 너무 많았다. 돈 많이 줘서 입을 막은 것까지는 그럴싸했다. 인원을 그럭저럭 많이 배치한 것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모든 것을 포기해버려서 이곳을 지휘할 생각도 하지 않는 주인과 매일같이 반복되는 단조로운 일만으로도 수억 원씩 받아 가는 일꾼들이 가득해져 버린 이 닫힌 세계 안에서 제대로 된 업무를 할 이유가 없다.

        

       물론 오히려 ‘이런’ 곳이니까 강도가 들기는 힘들긴 하겠지만…… 어쨌거나 결과적으로는 이렇게 되지 않았던가.

        

       “회장님 이름을 대시려면, 오늘 있었던 이런 일도 ‘전부’ 보고해야 하지 않을까요?”

        

       내가 방긋 웃으며 말하자, 경호원 둘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그래, 생각해보니 이것도 좋을 것 같다.

        

       단순히 돈으로 회유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하나 약점을 잡는 거다. 그렇게, 그만둘 수도 없고 그렇다고 내 날을 거스를 수는 없는 상황을 만들면…… 앞으로의 일이 훨씬 더 편해질 것이 분명했다.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면서, 나는 자신보다 한참 작은 여자애한테 쩔쩔매는 경호원 두 명의 얼굴을 실컷 감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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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Don’t Want to Become a Villainess

I Don’t Want to Become a Villainess

Q악역 영애가 되긴 싫어
Status: Completed Author:
I fell into the single-player game 'If You Wish' and decided to struggle to avoid becoming a villainess with a terrible end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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