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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69

        

         “전략적 동반자라… 나쁘지 않네요. 아니, 오히려 신선해서 더 좋군요.”

         

         “하아…….”

         

         내 손에 뭐가 따로 묻었던 기억도 없는데, 악수를 마친 자신의 손을 조명에 비춘 채 이리저리 돌려보며 중얼거리는 아론에게서 눈을 돌렸다.

         

         아무리 허술하고 형식적인 일처리도 당사자가 만족했다면 그걸로 된 것 아닐까… 조심스럽게 단언해보겠다. …만족을 넘어서 조금 과한 희열을 느끼는 것 같기도 한데 저 인간의 머리속을 내가 굳이 들여다보기는 싫으니 그냥 넘어가겠다.

         

         이제 얼른, 더 꼬투리가 잡히기 전에 빠져나가는 일만 남았으니.

         잠시 신세를 졌던 시술소 선생에게만 인사를 드리고 이 도시에는 절대 재방문하지 않는 걸로 하자.

         

         “음? 어디를 그렇게 급하게 가십니까?”

         

         “뭐… 말했잖아? 나는 네오 헤이븐에서 할 일이 있다고.”

         

         아직도 내 발길을 멈출 만한 특별한 용건이 남지는 않았을 터.

         

         기적적으로. 어찌저찌 타협점을 찾기는 했어도 야인이나 다름없는 내가 기업 심장부에 오래 머물러서 좋을 건 없었다.

         그나마 이제 내 존재를 남들로부터 숨기는 게 더 유리해진 아론이 입단속 정도는 알아서 해줄 게 분명하니까, 그런 점은 안심한다고 치더라도….

         

         “받으러 오신 유족 위자료의 검토는커녕, 마땅한 추산조차 해드리지 못했는데 어찌 그냥 보내드리겠습니까?”

         

         “아? 하지만 그건….”

         

         더는 들추지 않기로 한, 암묵적인 거짓말을 왜 지금 와서?

         괴롭힐 빌미로 삼기에도 터무니없이 부족한 자질구레한 지적으로부터 꺼내진 이야기는 생각이상으로 솔깃한 내용이었다.

         

         “미스 아나스타샤의 언니분은. 햇수로만 따져도 6년을 근속한 데다가 근무평가도 항상 최상으로 평가받은 우수경찰이자 모범시민이셨죠. …불행한 사고를 막기위해 노력하시다가 순직한 유공자에 대한 보상정도야 제 재량을 발휘해 아주 넉넉하게 지급해드릴 수 있습니다.”

         

         “…….”

         

         금방이라도 위아래로 끄덕이려는 머리를 가까스로 붙들었다.

         위험한 사탕발림이라는 걸 알면서도 하마터면 바로 넘어갈 뻔했다.

         

         들어올 예정이 아예 없던 추가수입이 생기는 건 굉장히 고맙다. 마땅한 일자리도 없는 지금이라면 더더욱.

         그러나 단발성 자금 원조라 하더라도, 영문도 모른 채로 덥썩 받아먹기는 후환이 두려웠다.

         

         “과분한 친절은 고맙지만, 무작정 돈을 받을 생각은….”

         

        “예를 들어, 귀하의 목표를 이루기 위한 새로운 조직을 일으키시는데 필요한 자본금에 조금이라도 보태신다든가… 하는 용도로 말이죠.”

         

         …아하.

         

         난 고작해야 파라다이스랑 또 엮일 문제가 생기면 눈 감아 달라는 부탁이나 할 예정이었는데, 시작부터 꽤 본격적인 지원으로 관계성을 확실히 할 생각이던가. 아니면 역시 부잣집 집사답게 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일에는 아끼지 않는 걸지도….

         

         “자, 어떠십니까? 파라다이스에서 내미는 백지수표는 정말 흔치 않습니다?”

         

         “음….”

         

         하지만 조직이라니… 대체 무슨 오해를 하는 건지 모르겠다.

         

         언제나 크레딧에 쪼들렸던 건 사실이지만… 또 막상 모든 경제적 어려움을 날려주겠다는 악마의 유혹을 받으니 말문이 막혔다.

         애당초 임플란트로 나갈 크레딧이 제로가 되어버린 시점에서 당장 급한 소비처는 딱히 없었다.

         

         더군다나 쾌적한 생활과 일신의 안전을 유지하는 것도 힘든 상황은 아니니 벌써부터 이런 빚을 질 필요는….

         

         ……잠깐만, 빚?

         

         “…1억 크레딧.”

         

         “1억 크레딧, 입니까?”

         

         무척이나 이상야릇한 표정을 짓는 아론을 애써 무시하고 확실하게 반복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1억이면 충분해.”

         

         “…….”

         

         돌연 찾아온 정적은 짧았고. 그걸 뒤잇는 웃음소리는 길었다.

         

         “하하하핫!! 이거 꽤나 귀여운 면도 있으셨군요…? 되는대로 큰 숫자를 꺼내 보신 겁니까? 적은 지출에도 벌벌 떨면서 같이 성장하는 것도 괜찮지만, 자신의 가치를 객관적으로 파악할 줄 아는 것도 정말 중요하다고 말씀드리고 싶군요.”

         

         …이 인간이 누굴 바보나 난민으로 아나.

         게임 후반부에 가서 상위 티어 특수장비나 개조된 차량 좀 맞추려면 진짜 십억 단위로 줄줄 빠져나가는데, 내가 세상물정 몰라서 꺼낸 말이라 여긴다면 실망이 크다.

         

         그리고 해커가 나쁜 마음먹으면 돈 벌 방법이 무궁무진하다는 것도 아주 잘 안다. …물론 내가 그러겠다는 건 아니지만.

         

         “누가 내 가치가 1억 크레딧이래? 미안한데, 갚아야할 목숨 빚을 진 상태라 그것부터 처리하겠다는 거야.”

         

         실컷 비웃어도 상관없다.

         아론과 얽혔던 끈도 확실하게 매듭지었겠다. 이것까지 해결하면 비로소 나는 마음의 빚도, 갚아야할 원수도 없는 오롯한 개인으로서 살아갈 수 있다.

         

         “그건… 콜드 슬립(Cold Sleep : 급속 냉동으로 세포 파괴 없이 인체를 보존함)으로부터 같이 깨어난 동료 애기입니까?”

         

         “…도무지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네요.”

         

         …아무래도 생각도, 의심도 지나치게 많은 사람은 스스로의 꾀에 빠지는 모양이다.

         

         뭐, 마지막까지 뜬구름 잡는 말만 하면서도.

         아론은 성실하게 보상금 문제를 처리하고, 흠잡을 곳 없이 깔끔한 태도로 나에게 작별인사를 건넸다.

         

         “그저 당신이 그렇게 애틋하게 여기는 상대가 궁금했을 뿐입니다. 게다가 겨우 이런 푼돈으로 기억에 남았다는 건… 상당히, 질투나는 군요.”

         

         “별….”

         

         과연 그걸 인사라고 불러야 할지, 나중을 기약하는 범행예고로 봐야 할지는 지금으로선 알 수 없었지만 어쨌거나. 마침내 나는 파라다이스의, 아론 드레이퓨스라는 괴물의 손아귀에서 무사히 빠져나올 수 있었다.

         

         한데, 1억 크레딧이라는 거금에 홀려서 잊은 게 있지 않나…?

         ……그럴리가, 부탁할 일이 생기면 망설임없이 연락하겠다는 그의 오싹한 선고 때문이 틀림없다.

         

         빨리 가서 이 부담되는 크레딧부터 써버리도록 하자.

         

         미리 말해 두겠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적법한 보상금 명목으로 수령한 크레딧이니 내가 그에 상응하는 더러운 일을 무조건 맡아줄 거라 여긴다면 큰 오산이다! 정말로!

         

         

         

         ★ ☆ ★ ☆ ★

         

         

         

         “이런….”

         

         서서히 닫히는 사무실 문틈으로도 아론은 눈을 떼지 않았고, 아나스타샤가 건물을 나설 때까지도 카메라를 계속 지켜보았다.

         

         아쉬움이 입가를 타고 흘러 넘친다. 손에 거의 쥐었던 불빛이 도심속으로 스러져간다.

         

         조금 더 얘기를 나누고, 조금 더 이념을 교류해서 그녀가 속에 품은 그림을 보고싶었으나… 아쉽게도 마감시간이 되어 버렸기에 그는 자신의 전략적 동반자를 더 붙잡지 않았다.

         

         미련이 남더라도 일단은 여기까지. 개인적인 욕망만 너무 우선시하다가는 대업을 그르칠 수도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아론이라 하더라도 절대 무시못할 중요한 손님이 금방이라도 저 문을 열고 나타날 수 있었으니.

         

         “미… 미스터 드레이퓨스으으…? 주문하신 아침 식사 3인분, 조리가 끝나자마자 분부 받은 대로 지체없이 가져왔습니닷!!”

         

         문가에서 처량하고 애달픈 비명 소리가 울려 퍼졌다.

         

         소리의 근원지는 방금 막 도착한 직원.

         

         한 손에 치켜든 큼직한 트레이에는 무려 세명이서 먹을 식사와 음료가 가지런하게 올려져 있었다.

         미동도 없는 팔과는 달리 얼굴과 몸은 사시나무 떨 듯 끊임없이 진동하느라 바빴지만 아론은 불쌍한 직원을 굳이 타박하지 않았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테이블에 올려놓고 이만 가보셔도 됩니다.”

         

         “넵…!”

         

         거의 울음을 터트릴 기세로, 직원이 후다닥 임원진들의 식사준비에 돌입했고.

         자연스럽게, 그 직원과 어깨동무를 한 채로 삐딱하게 서있던 여성도 입실하게 되었다.

         

         “에잉… 쯧쯧. 요즘 아가들은 너무 배알이 없어서 데리고 놀기도 힘들만 말이지.”

         

         “글쎄요… 회장님께서 만드신 사회의 격차와 간극을, 다들 분수를 알고 잘 지키고 있다는 뜻 아닐까요?”

         

         풀썩!

         

         윤기 도는 외모에 어울리지 않는 구수한 억양, 안하무인에 파천황 같은 태도를 고수한 여성은 아예 신발도 벗지 않고 소파에 호쾌하게 드러누워 버렸다.

         

         소파에 선명하게 찍히는 부츠 자국과 자꾸 휘저어지는 팔에 종업원이 안절부절 못했지만.

         직전까지 경직된 반응을 즐기던 그녀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크게 하품을 하면서도 언제나 실망시키는 법이 없는 부하에게 대꾸했다.

         

         “흐아앗…! 생활수준이든, 사회적 위치든. 확실하게 구간을 나눠 놔야 순응하지 않고 그 틈을 뛰어넘으려는 이단아들이 잘 보이니 어쩔 수 없지 않느냐?”

         

         하베스트 플래닛의 기형적인 구조부터, 철저한 상명하복의 회사기조. 심지어는 전세계적으로 고착화된 시민권 등급까지.

         

         스스로의 철학과 사상을. 살아남은 수십억 인류에게 강제한 괴물 중 하나가, 물끄러미 방 풍경을 구경하다가… 늘상 보이던 안드로이드 무리가 그림자조차 없는 걸 보고 뒤늦게 방문 목적을 떠올렸다.

         

         “그래서! 너를 시원~하게 맥였다던 고 맹랑한 꼬맹이는 어디 있더냐? 꼭 만나보고 싶었는데 말이야.”

         

         “아, 그 해커라면….”

         

         천천히 말끝을 잡아 늘이며, 그는 입속으로 다양한 핑계들을 굴려봤다.

         

         가장 깔끔하게, 집착이 강한 회장의 관심을 없애는 방법은 아나스타샤가 별볼일 없는 인물이었다고 보고하는 것. 그렇지만… 사람은 반드시 올바른 결정만 내리며 사는 동물이 아니었다.

         

         

         

         가까스로 올라가는 입꼬리와 뒤틀리는 얼굴을 관리한 아론 드레이퓨스는 여느 때와 다름없는 수상한 표정을 완성하고 몸을 돌렸다.

         

         살짝 흐트러진 머리를 다시 뒤로 쓸어 넘긴 그가. 왕이자… 스승이자… 반평생을 모셔온 회장에게, 딱 절반만큼의 경애만을 담아 새빨간 거짓을 고하였다.

         

         “죄송합니다, 회장님. 제 능력이 부족해서 그 숙녀분을 식사 자리에도 똑바로 초대하지 못했습니다.”

         

         “…별 일도 다 있구먼.”

         

         기껏 행차한 게 헛수고가 되었다는 불쾌함도 잠시. 회장은 이번엔 공석이 된 식사자리에 한 번 끼지 않겠냐며 퇴실하던 종업원을 불러 세우고는 괴롭히기 시작했다.

         

         그리고 터무니없는 반역을 저지르는데 성공한 아론은 희미한 웃음과 함께, 그윽한 원두와 부드러운 우유향이 감도는 커피를 먼저 쟁반에서 빼 들어서 입가로 가져갔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보상금이자 혈채.

    블러드 머니 에피소드가 끝났습니다~ 와~….

    전능하신 아카라트여 저에게 정시연재와 일일연재를 지킬 힘을 주소서… 흑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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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Became a Sub-Heroine in a Cyberpunk Game

I Became a Sub-Heroine in a Cyberpunk Game

Status: Ongoing Author:
No matter how many times I repeated the episodes, I couldn't clear the true ending of the open-world shooting RPG, Neo Haven. Just when I thought I finally cleared the hidden true ending... they want me to actually clear it without any help from the game system or save/load featur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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