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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69

       *

         

         소파에 앉은 채로 침대를 노려보기를 잠시.

         

         침대가 꿈틀거리더니, 이부자락이 부드럽게 밀려 흘러내렸다.

         

         밀밭처럼 펼쳐지는 금발과, 그 사이에 삐죽 솟은 날렵한 귀. 엘피헤라였다.

         

         

         “어? 일어났어요? 잘 잤어요?”

         

         

         이반은 빠르게 엘피헤라의 몸을 훑었다. 비단으로 짜인 잠옷을 잘 챙겨 입고 있었다. 그는 내심 안도하며 단검을 내려 놓았다.

         

         

         “내가 왜 여기에 있지?”

         “기억 안 나요?”

         “음.”

         “으흠… 후후, 그으래요? 그렇단 말이죠?”

         

         

         엘피헤라는 쿡쿡 웃으며 침대에서 기어 나왔다.

         

         그녀는 떨어진 옷자락들을 장난스럽게 힐끔거리며 말했다.

         

         

         “뭘 했을까요?”

         “아무것도.”

         

         

         이반은 훈련받은 첩보 요원이다. 자신의 절제력을 믿는다는 의미가 아니라, 상대의 복장이나 체모의 상태만 보고도 충분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는 뜻이다.

         

         그가 자는 도중에 ‘무언가’를 했다면 엘피헤라가 저렇게 말끔한 상태일 리가 없다.

         

         그의 시선을 느낀 엘피헤라는 입술을 삐죽거리며 툴툴거렸다.

         

         

         “아무것도 안 하긴 했는데요, 마냥 아무것도 안 한 건 아니에요.”

         “…뭐?”

         “성녀님이 왔다 가셨어요.”

         

         

         그녀는 투덜거리며 박수를 짝, 쳤다.

         

         곧 방문이 열리며 시종이 걸어와 테이블 위로 다과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자연스러운 손짓으로 시종을 다시 물리고는, 그녀는 홍차가 담긴 찻잔을 들었다.

         

         

         “뭐라도 좀 드세요. 많이 허기지실 텐데.”

         “내 영양바는 어딨지?”

         “네? 그게 뭐예요?”

         “내 조끼에 있던 것 말이다. 슬릿에 넣어둔.”

         “어… 개껌 말하는 거예요? 그거 우리 몽블랑 경한테 줬더니 안 먹길래 상한 줄 알고 버렸는데… 그, 그게 사람 먹는 거였다고요?”

         “몽블랑 경…?”

         “제 개요. 귀여워요. 보실래요?”

         

         

         이반은 테이블 위에 깔린 화려한 핑거스낵들을 바라보며 한숨을 애써 삼켰다.

         

         당과 탄수화물로만 이루어진 이런 음식은 필요 이상의 열량과 필요 이하의 영양만을 제공하는 한심한 음식이었다.

         

         완전식품 영양바를 개한테 던져줬다는 이야기에 한 소리를 하려다가, 그는 찻잔을 들며 생각을 정리했다.

         

         그런 것보다 중요한 것이 있다. 영양바야 원장실에 가면 얼마든지 있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현재 상황이었으니.

         

         그는 이토록 합리적이며 아량 넓은 사람이다.

         

         

         “성녀가 왔다 갔다고.”

         “아, 네. 그쪽 상태를 보고 갔어요. 아 맞아! 세상에, 왜 아무 일도 없다고 그랬어요?!”

         

         

         엘피헤라는 찻잔을 탁, 내려놓으며 화를 냈다.

         

         사춘기 소녀(아니다.)의 감정을 따라가는 것은 어렵고도 어리석은 행동이었으므로, 이반은 가만히 귀를 기울일 뿐이었다.

         

         

         “저주! 그거 해체한다고 성녀님이 어제 아주 밤을 꼬박 새우셨어요. 세상에, 그게 다 뭐에요?”

         “불행.”

         

         

         이반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성녀가 아무 말도 없던가.”

         “자세히는…. 그냥 오셔서 한참 우시다가 밤새 기도하시고 떠나셨어요. 일주일에 사흘은 성사실로 찾아오라 전해달라고만 하시고요.”

         “예상 범주 내의 일이었다.”

         

         

         이반은 차를 한 모금 마시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놈이 행복이란 관념을 다루는 녀석이었으니, 놈의 단말마가 남길 부작용은 예측 가능했지. 행복의 결여는 불행이니까.”

         “어… 어어, 그럼…. ‘그 함정’과 같은 정도의….”

         

         

         보는 순간 심령을 사로잡던 그 압도적인 ‘행복함’과 같은 용적의 ‘불행’을 끼얹는 저주였다고?

         

         엘피헤라는 그 방에서 막 빠져나왔을 때의 이반을 떠올리며 침을 삼켰다.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었다. 이 대학엔 성녀가 있고, 성녀는 이 대륙에서 저주 해제에 가장 능통한 사람이니까.”

         “…다 예상을… 했다고요?”

         “음.”

         “진짜… 진짜 미친 인간인가 봐!! 그럼 말을 하든가요! 성녀님한테 바로 안 가고 그쪽이 깰 때까지 기다렸으면, 그랬으면 어쩌게요!”

         “어쩌긴. 저주의 종류가 시급한 것이었다면 내가 먼저 말을 했을 테고, 불행을 불어넣는 정도의 저주는 생명에 지장이 없으니 급할 것도 없지.”

         “당신은…!!”

         

         

         엘피헤라는 눈물 젖은 눈으로 소리쳤다.

         

         

         “당신은 이상해요. 그쪽 진짜 이상하다구요. 그냥 인간이라서 좀 그런 건가 싶었는데, 대체 왜 이렇게 변했어요? 당신 원래 그런 사람 아니었잖아!”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라.”

         “그래! 그쪽은 원래…!”

         “주제 넘다.”

         

         

         이반은 옷을 챙겨 입으며 자리를 정리했다. 그는 유틸리티 조끼와 슬링백(자체제작이다.) 따위의 소모품을 빠르게 점검한 뒤 고개를 돌렸다.

         

         

         “엘피헤라. 네가 할 일은 날 걱정하는 것이 아니다.”

         “뭐… 라고요?”

         “너는 학생이잖느냐. 잘 배우고, 가끔 이런… 현장 학습도 하는 것이 네 역할이다.”

         

         

         용사 파티의 자제, 차기 용사 파티이며 향후 시나리오의 주역이 될 인물에겐 경험과 학습을 제외하면 다른 것 따윈 필요하지 않다.

         

         그러므로, 그 외의 모든 일들은 이반, 그의 몫이었다.

         

         이 녀석들이 엔딩으로 향하는 것. 무사히, 그리고 완벽하게 시나리오를 밀어내고 마침내 엔딩 크레딧을 마주하는 것.

         

         그 과정이 그의 ‘이야기’일 것이다. 그가 펼칠 마지막 페이지는 아마도, 그리고 반드시 그곳에 있다.

         

         그러니 그 자신의 안전, 용사 파티 자제들의 안전, 시나리오 외의 위협 요인, 그 모든 것들은 이 녀석이 고민하고 걱정해야 할 문제가 아니다.

         

         그건 그의 몫이다. 그리고 그는 이기적인 사람이므로, 그의 업무 분장에 다른 인물이 손을 거드는 것을 싫어한다.

         

         이반은 멍하니 그를 바라보는 엘피헤라에게 까딱, 짧게 인사를 건네고 방을 빠져나갔다.

         

         

         엘프들의 거주지로군.

         

         

         이반은 쨍한 대낮에 눈살을 찌푸리며 걸었다.

         

         대학의 바로 옆, 극도로 사치스러운 거리가 있다. 일반적으로 ‘엘프 기숙사동’이라고 불리는 이 구획은, 칼리온 출신의 귀족들이 모여 사는 거주지였다.

         

         그를 힐끔거리는 엘프들을 무시한 채로, 그는 대학을 향해 곧장 걸어갔다.

         

         쉴 때 쉬더라도, 보고가 우선이니까.

         

         그는 마지막으로 엘피헤라의 저택을 일별하며 잠시 후회했다.

         

         그렇게 쏘아붙일 일은 아니었다. 꼬마에게 하기엔 적잖이 공격적인 언사였을 수도 있다.

         

         하지만 쉽지 않았다. 저주는 모두 해제된 상태였겠으나, ‘기억’은 성녀의 축복으로도 사라지지 않으니까.

         

         불행의 저주가 불러 일으켰던 과거의 기억은, 그가 세월 속에 잊고 있던 사소한 부분마저 정교하게 불러일으켜 날 것 그대로의 감정을 강제했었다.

         

         북풍과 태양이라.

         

         이반은 쓴웃음을 지었다.

         

         아무래도 그는 태양보단, 북풍에 더 취약한 여행자였던 모양이다.

         

         회고했듯이 이 세상의 지난 세월 동안 모든 행복은 수명을 다했고, 이 땅에 남은 것은 의무뿐이었으므로.

         

         이를 다시 설명하자면, ‘행복’의 결여는 ‘불행’이다.

         

         즉, 그가 떠올릴 수 있는 모든 과거는 대개의 경우 불행했다.

         

         그는 그 방 안에 홀로 남아 30년의 불행을 곱씹으며 견딘 후에 벗어날 수 있었다.

         

         실신으로 잠시 잊혀졌던 기억이 대화를 통해 다시 떠오르며, 이반의 감정을 잘근잘근 물어 뜯고 있었다.

         

         어른스럽지 못하다.

         

         이반은 언젠가 엘피헤라에게 사과하기로 하고, 발길을 돌렸다.

         

         

        *

         

         

        -탁.

         

         

         건조한 소리와 함께 닫힌 문을 한참 동안 바라보며 엘피헤라는 훌쩍거렸다.

         

         

         낯설게 변한 그 시절의 인간.

         

         인간의 빠른, 그리고 짧은 삶.

         

         행복의 유혹과 불행의 저주.

         

         은혜와 상처.

         

         

         그녀의 머릿속을 헝클이던 단어들이 점차 또렷한 조각이 되어 맞물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마법사였다. 마법사란 자고로 감정보다 이성으로 사태를 바라봐야 하는 직군이다.

         

         따라서, 그녀는 반쯤은 직업적 소명으로, 그리고 나머지 반절은 오랜 세월 인이 박힌 버릇으로 침착을 되찾았다.

         

         

        -달그락.

         

         

         식은 찻물을 들이키며 눈을 가늘게 떴다.

         

         

         ‘대상이 가장 바라는 것으로 유혹하는 함정.’

         

         

         그녀가 유적지에서 마주했던 함정은 금은보화와 각종 희귀한 마도서, 그리고 천금이 있다한들 구하기 어려운 시약들이었다.

         

         그리고 저 남자가 마주한 것은.

         

         

         ‘빗.’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생각했다. 결론은 단순했다. 저 남자는 그 당시 당장 바라는 것이 고작 그것뿐이었다는 뜻이다.

         

         그건 빗을 기이할 정도로 좋아했다기보다는 (어느 정도 사실이다.) 그저 바라는 것이 그나마도 없었다는 뜻이었을 터.

         

         

         ‘욕망이 없다.’

         

         

         엘피헤라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칼리온 최고의 미녀가 바로 옆에 있는데, 인간의 입장에선 가히 ‘신화적인 미모’의 엘프가 멀쩡히 서 있는 와중에 미약이 아닌 빗을 떠올렸다는 것이 그 사실을 반증한다.

         

         엘피헤라는 이 타당한 결론에 고개를 끄덕였다.

         

         

         ‘고장났어.’

         

         

         추론이 틀려도 결론이 맞다면 문제가 없다는 사실이 여기에서 증명되고 있었다.

         

         성녀는 알고 있을까? 그녀의 아버지는? 저 사내와 동료였던 그들이 눈치채지 못했다면, 그리고 그런 사실을 이 세상에 오직 그녀 혼자 알고 있다면….

         

         

         ‘내가 해야 해.’

         

         

         엘프는 기본적으로 욕망에 충실하다. 그것이 저급한 쾌락을 탐닉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귀한 것이라면 마땅히 엘프가 소유해야 한다는 자못 당연한 논리의 결과다.

         

         귀한 물건을 성급한 단명종에 손에 맡겼다가 망가트릴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그러니, 엘피헤라는 훌륭한 한 사람의 엘프로서 결론을 내렸다.

         

         

         ‘나 말곤 없어.’

         

         

         행복을 모르는 사내에게 행복을 가르쳐주는 것은 제법 흥미진진한 일이 될 것이다.

         

         개도 견종에 따라 수명이 다르듯이, 저 사내 또한 인간치고도 굉장히 짧은 수명을 타고난 모양이니.

         

         우선 수명을 회복시켜 저 몰골을 조금 더 젊게 가꿔주고, 주기적으로 체질을 개선시켜 주고, 그 개껌 말고 조금 더 나은 음식을 먹여주고, 그래. 그렇게 거둬주면 당연히 ‘행복’을 느끼겠지.

         

         그녀는 그녀의 발치에서 헐떡거리는 조그마한 푸들을 부드럽게 안아 쓰다듬으며 웃었다.

         

         

        *

         

         

         “유적지에서 뭘 만났다고?”

         “자신이 신이라 주장하는 것을 마주했습니다. 정체를 파악하는 것은 현장 상황 상 불가능했지만, 이에 대해 성녀에게 자문을 구해 보고서에 별첨하겠습니다.”

         “아니, 아니아니. 이해가 가지…. 함정? 마법? 2천년 전의 봉인?”

         “예.”

         

         

         엘리자베타는 이마를 감싸쥐고 중얼거렸다.

         

         

         “그딴 게 대체 왜 대학 지하에 있는 것이냐… 왜 궁정 사서에선 언급조차 없던 거지? 그딴 것이 수도 지하에 잠들어 있다면 내가… 이 나라가 알았어야 하지 않았나….”

         “….”

         

         

         이반은 굳이 이 중세 세상 사람들에게 ‘상식’에 대해 설명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수도 지하에 고대의 악이 봉인된 것은 상식의 영역이었으니까.

         

         

         “그래, 그래서 그걸… 어떻게 파괴했다고?”

         “그것이 할 수 있는 것이라 해봐야 고작 인간의 욕망으로 장난을 치는 것뿐이었습니다.”

         “오, 그건 좀… 서사시 같은걸. 마왕이 죽은 시대에 이런 이야기를 듣다니, 그대는 괜찮은가? 다치진 않았고?”

         “예, 전하.”

         

         

         이반은 한쪽 무릎을 꿇은 채 말을 이었다.

         

         

         “그것에겐 물리력을 행사할 능력이 없었습니다.”

         “그래, 그럼 어떻게 파괴했는지 말해주겠나.”

         “머리를 부쉈습니다.”

         “…???”

         

         

        *

         

         

         이자벨과 에시디스는 사이 좋게 벤치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대체 왜…?”

         “아저씨가 왜…?”

         

         

         엘프의 집에서, 그것도 ‘그 기집애’의 집에서 나오는 거지?

         

         아침부터, 삐죽삐죽 솟은 머리와 허름한 차림으로. 누가 봐도 외박하고 왔던 몰골로…?

         

         그녀들은 오랜 친구답게 동시에 같은 결론에 도달했다.

         

         

         “바람…?”

         

         

         바람을 피운다는 명제가 성립할 수 없는 관계라는 것은 이 두 사람에겐 어떤 의미도 갖지 못했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그 기집애’의 집에서 이반이 나타났다는 것뿐이었으니.

         

         두 사람은 역시 오랜 친구답게, 같은 결론을 도출한 후 향후 계획을 대화 없이 합의했다.

         

         이번만큼은 ‘동맹’이다.

         아아, 물론이지.

         

         사악한 엘프 마녀에 대항하기 위한 용사 파티 결성!

         

       

       

       *

       

       

         

        EP11. 성 얀스크 대학과 비밀의 방.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개표 결과(와 개인 사정으로) 엘리자베타가 당첨되었습니다! 축하합니다!!

    첫 핸드메이드-프로페셔널-그림은 엘리자베타로 정해졌으니,

    첨단 과학기술을 활용한 ‘딸깍’ 그림을 주말 동안 잔뜩 준비해두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여러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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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Years Have Passed Since the Prologue

30 Years Have Passed Since the Prologue

프롤로그에서 30년이 흘렀다
Score 7.8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3 Native Language: Korean
I got transmigrated into a game I’ve never seen before. I thought it was a top-notch RPG and spent 30 years on it. I retired as a war hero and planned to spend my remaining time leisurely. But it turns out, it was an academy 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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