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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69

       

       

       

       

       

       11월의 북부령.

       

       녹았던 모든 것들이 꽁꽁 얼어 겨울나기를 준비하는 달이 찾아온 제 땅을 내려다보는 로건 윈터펠.

       창가에 선 그의 손에는 와인잔이 들려있었다.

       바쁘디 바쁜 가주의 공무 탓에, 설원의 왕으로써 져야 할 책임이 너무도 많은 탓에, 술 한잔 기울일 시간이 없었던 그가 실로 오랜만에 와인을 들고 있는 것이었다.

       

       80일이 넘어서고 있었다.

       

       가문의 전통을 지키기 위해 내린 결정이, 조금 더 조심스럽지 못 했던 안일한 방조가 최악의 결과를 불러왔던 날로부터 어느새 80일이 지나고 있었다.

       

       또한.

       

       수색이 성과를 내지 못 한 날이 80일째 이어지고 있음을 뜻했다.

       

       [제발, 저를 찾지 말아주세요. 소중한 이를 두번이나 잃었어요. 더 이상, 아무도 잃고 싶지도 다치게 하고 싶지도 않아요.]

       

       쪽지 하나를 남겨둔 채, 그날 밤 데론 켈리드처럼 대공성에서 도망쳐버린 르미앙.

       겔우드가 다급히 들고 온 쪽지를 받은 순간, 창문 너머로 제 딸이 말을 타고 질주하는 것을 보았지만 그는 추격을 명하지 않았다.

       르미앙은 마음 먹은 것을 해내지 못 하면 시들어간다.

       그것이 저주로 인한 것일지 모르지만, 스스로 주체할 수 없는 것이라 질책을 할 생각은 없었다.

       

       아카데미로 가고 싶다는 걸음을 억류한 순간부터 시름시름 앓아가던 르미앙이었고, 한번 파고들고자 했던 것은 잠도 걸러가며 집요하게 집착하는 르미앙이었다.

       

       괴인족장의 저주로 인해 갓난아기 때부터 숨는 법을 배워야 했던, 평생을 그늘 아래에 속박된 채 숨어 지내야 했던 것이 빚어낸 극단적인 집착일 터였고, 그렇기에 그것을 책망할 생각은 없는 로건이었다.

       영문도 모른 채 이름과 얼굴을 숨기며 살아야 했던, 남들은 햇살 속에 어울려 하하호호 웃을 때, 홀로 고독을 삼켜야 했던 고통은 감히 헤아릴 수 없는 것일 테니까.

       

       이제 와 돌이켜보면, 그 저주는 진작 시작되어 제 딸을 궁지로 내몰고 있었던 것인지도 몰랐다.

       그렇기에 붙잡지 않은 것이었다.

       억지로 붙잡는다 한들, 르미앙은 붙잡힌 그곳에서 시름시름 앓아갔을 테니까.

       

       그때처럼.

       

       그리고 대대적인 수색을 통해 쪽지의 간청마저 거절당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르미앙은 더 깊숙히 숨어들 것이다.

       다시는 빠져나올 수 없는, 다시는 찾을 수 없는 깊은 구렁텅이로.

       하여, 조용히 뒤를 쫓을 수밖에 없었다.

       

       평생을 숨어 살았던 르미앙이다.

       숨는 방법에 대해선 그 누구보다 일찍 깨우쳐야 했던 딸이었고, 자연스레 체득해버린 은둔법은 추적에 난항을 불러오고 있었다.

       

       -똑똑.

       

       “들어오게.”

       

       노크소리와 함께 집무실을 찾은 겔우드가 고개를 조아렸다.

       로건이 창문 너머, 고즈넉한 밤의 평안이 찾은 제 땅을 둘러보며 물었다.

       

       “진전은 있느냐.”

       “르미앙 대공녀께서 타고 나갔던 말을 발견했다고 합니다.”

       “…르미앙은 없었나보군.”

       “예.”

       

       그럼에도 그가 르미앙의 뒤를 조심히 쫓고 있는 이유는 하나였다.

       쪽지에 적힌 ‘소중한 이를 잃었다’는 것을 정정해주기 위함이었다.

       그 상실이 가출의 결정적인 이유라면, 그러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함이었다.

       

       “데론, 그 녀석은.”

       “엘토른 마을에서 발각되었으나, 폭포 아래로 몸을 던졌다고 합니다. 하류에서도 시신이 발견되지 않은 것으로보아 아직 살아있는 듯합니다.”

       “그 시건방진 놈은 무조건 생포해야 한다. 내 직접 주둥이를 찢어버릴 테니까.”

       “알겠습니다.”

       

       기회를 주었음에도 기대를 저버린 놈.

       생포가 아닌 사냥으로써 즉결 처분해도 무방할 테지만, 죄를 심문하기 전에는 속단할 수도, 심판할 수도 없었다.

       뒤늦게 쳐들어간 호위병들의 사후 증언을 제외하고선 그날 밤 은밀히 자행된 죄악에 대한 명백한 증인이나 증거가 없었으니까.

       그렇기에, 재차 묻는 로건이었다.

       

       “시녀는 어떻느냐.”

       “신체 반응이 조금씩 돌아오고 있다 합니다. 데미르 경의 말로는 빠르면 수일 내에 깨어날 수도 있을 거라고 합니다.”

       “그런가….”

       

       [시녀]

       그날 밤의 죄악을 직접 겪은 시녀였고, 꺼졌던 맥박이 죽음 선고 직전, 기적적으로 돌아온 시녀였다.

       애석하게도 이미 르미앙은 떠나버린 후였지만.

       그 시녀가 깨어난다면 데론의 죄악을 입증하고도 넘칠 것이고, 제 막내딸이 강제적으로 겪어야 하는 죄책감도 덜어줄 것이다.

       그렇기에 북부령 최고의 의료품과 더불어 자신의 주치의까지 붙여 르미앙의 전속시녀, 마리엔의 소생을 도모하고 있는 로건 윈터펠이었다.

       

       “흐음…….”

       

       한숨을 내쉰 로건이 재차 와인을 들이켰다.

       

       

       **

       

       

       깨어난 것이 믿기지 않아 한참을 멍하니 누워있는 르미앙.

       모처럼 단잠에 빠졌던 것이 믿기지 않아 한참을 멀뚱히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피부를 감싸는 따스한 온기가 믿기지 않아 한참을 멍하니 있었다.

       모닥불이 타오르고 있는 소리가 믿기지 않아 한참을 멍하니 있었다.

       

       그리고.

       

       눈앞에 놓인 얼굴이 믿기지 않아 한참을 바라보았다.

       분명 눈을 감기 전에 보았던 것은 죽음의 파수꾼이라 여겼던 사자(使者)의 모습이었는데, 눈을 떠 다시 보니 엘든 라펠리온의 얼굴이었던 것이다.

       죽음을 바른 듯한 새까만 머리와 피를 갈구하는 듯한 붉은 눈동자가, 엘든 라펠리온의 것이었던 것이다.

       

       “다행입니다. 깨어나셨군요.”

       

       혼란스러웠다.

       느닷없이 눈앞에 나타난 그가.

       눈을 떠 처음으로 마주한 이가 엘든이라는 것이.

       그가 눈을 뜬 자신을 보며 안도하는 것이.

       모든 것이 혼란스러워 꿈을 꾸는 것만 같았고, 말도 안되는 망상 같았다.

       

       윤기가 흐르는 새까만 흑발과 루비처럼 빛나는 적안이 믿기지 않아 그리 한참을 바라보는 르미앙.

       죽음 직전에 보이는 허상인지, 죽음에서 벗어난 현실인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깊은 잠에서 깨어난 직후의 몽롱함만 가득할 뿐이었다.

       몸을 움직여보려 했으나, 고장난 수레처럼 말을 듣지를 않는다.

       그럼에도 무언가 산뜻한 느낌이 들었다.

       

       “도와드리겠습니다.”

       

       작은 미동을 눈치챈 건지, 엘든이 부축을 해주었고 상체를 일으킨 르미앙이 벽에 기댔다.

       

       “마십시오. 기력 회복에 도움이 될 겁니다.”

       

       그리고 엘든이 쇠그릇을 건네었지만, 그것을 쥘 힘이 없어 르미앙이 멀뚱히 쳐다보았다.

       그에, 엘든이 가까이 다가가 르미앙의 입술에 그릇을 대주어야 했다.

       

       “힘드시더라도 삼키십시오.”

       

       엘든이 컵을 기울여주자, 르미앙이 조금씩 마시기 시작했다.

       모이를 받아먹는 아기새처럼.

       따뜻한 물이 식도를 타고 흐르는 것이 느껴졌고, 텅빈 속에 따스한 온기가 채워지는 것이 느껴졌다.

       언제 느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 온기였다.

       그리고 그 온기로 인해, 어쩌면 지금 이 순간이 허상이 아닐 거란 생각이 들었다.

       물론 아직까지는 꿈인지 생시인지 단정짓기 어려웠지만 말이다.

       

       “조금만 늦었어도 큰일날 뻔했습니다. 우선 응급조치만 취한 것이라, 전문의에게 진단을 받아보는 게 좋을 겁니다.”

       “…….”

       

       점차 선명해지는 감각이 불어오는 바람, 내리쬐는 햇빛이 허상이 아님을 알리지만, 그것이 도무지 믿기 어려워 그저 퀭한 눈으로 엘든을 살펴보는 르미앙.

       대체 어떻게 된 걸까.

       죽음이 들이닥치던 절명의 순간에, 이 이름 모를 땅에서 6개월 전 대공령을 떠났던 이와 마주칠 수 있는 확률은 몇에 수렴할까.

       그것도 일면식이 짙은 이와.

       그것이 인연이든, 악연이든 말이다.

       아마도 계산이 불가능할 정도로 희박한 수치일 것이며, 기적이라 칭해도 손색없을 확률일 것이다.

       지금의 이 재회가 환상이나 환각이 아니라면 말이다.

       

       “제게 하실 말씀이 있으시다면 여기 적으시면 됩니다.”

       

       엘든이 적을 것들을 손에 쥐어주었다.

       손가락조차 움직이기 힘들 정도로 온몸이 무겁지만, 펜을 잡았다.

       그리고 물었다.

       

       (엘든… 맞아?)

       

       자신의 회복에 안도하는 저 흑발과 적안의 사내의 이름을.

       엘든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

       

       직접 들었기에 믿어야겠지만, 아직 실감이 나진 않는다.

       그만큼 지금의 재회는 시기적으로도 상황적으로도 말이 안되는 일이었다.

       재차 무언갈 적은 르미앙이 종이를 보였다.

       

       (어떻게…?)

       

       이 모든 상황의 진실에 대해 함축적으로 묻는 것이었다.

       

       “에리스 후작령으로 가기 위해 이곳에서 하룻밤 묵으려던 차에, 우연히 대공녀님의 울음소리를 듣게 되었습니다. 그 직후 쓰러진 대공녀님을 야영지로 모시고 와 보살펴드린 것이고요.”

       “…….”

       

       그런가.

       정말 이 드넓은 땅에서 우연히 재회한 거란 말인가.

       그리고, 생각지도 못 한 곳에서 상상치도 못 한 도움을 받은 것인가.

       그렇다면 왜.

       살고 싶을 때는 눈길 한번 주지 않더니, 죽고 싶을 때는 왜 도움을 건네는 걸까.

       살고 싶을 때는 못 살게 굴더니, 죽으려하니 불쑥 나타나 죽지도 못 하게 하는 걸까.

       물론 이제 와 원망을 담아낼 것도 없었고, 변화한 그를 부정하고픈 생각도 없었으며, 과거에 사로잡혀 있을 생각도 없었기에, 해줄 수 있는 말은 하나뿐이었다.

       

       

       (나, 돕지마.)

       

       

       도움을 받을 처지도 아니었고, 도움을 받기엔 너무도 멀리 와버렸다.

       소중한 이를 다치게 만들 뿐인 자에게 도움이란 건 과분한 법이니까.

       갑작스레 급사한 전속시녀 로니카에 이어 마리엔까지 잃었다.

       제 곁에 선 이의 말로는 모두 비참하게 끝난 것이다.

       저주 받은 이는 도움을 받을 자격이 없음을 진작 깨닫지 못 한 것을 후회하며 그리 얘기한 르미앙이었다.

       

       “…어째서 돕지 말라하는 것입니까?”

       

       (더 이상 아무도 아프게 하고 싶지 않아.)

       

       “그저 도움을 받는 것이 상대를 아프게 할 수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엘든의 물음에, 르미앙이 고개를 힘없이 끄덕였다.

       그리고 적었다.

       

       (데론이 살아있다면 날 죽이러 올 거야.)

       

       아직 끝나지 않았을 위기에 대해.

       그 위기가 시작됐을 때, 그 누구도 옆에 있지 않기를 바라며 종이에 적은 것을 보여준 르미앙이었고, 그 마지막 말에 엘든은 짐작할 수 있었다.

       

       6개월 간 벌어진 사태에 대해서.

       데론 켈리드, 그 악질이 저지른 일들에 대해서.

       

       혼자였다면 응당 그녀를 돕고자 하겠지만, 일행들의 의견을 듣지 않고선 섣불리 답할 수가 없었고, 엘든이 머뭇거리는 사이 각자의 몫을 챙긴 채 돌아온 일행들에 의해 잠시 부산스러워지는 야영지였다.

       

       “꺗! 대, 대공녀님! 깨어나신 거에요? 정말 다행이다아…!”

       

       환한 미소와 함께 손뼉을 치며 자신의 소생을 기뻐하는 아리엘.

       

       “허어-! 어쩐지 오늘따라 날이 좋다 싶더니, 대공녀님께서 깨어나시려 그랬나 봅니다.”

       

       감격스런 얼굴로 자신의 소생을 축복하는 엘든의 노집사.

       

       “…….”

       

       무뚝뚝한 얼굴로 목례를 하고선 꺼져가는 불씨에 불쏘시개를 넣어 온기를 피워주는 엘든의 호위기사까지.

       

       6개월 전, 혼약대전 퍼레이드에서 보았던 그들은 변함없이 어울려 생기를 나누고 있었고, 죽어 마땅한 자신의 소생을 기뻐하고 안도하며 축복하는 그들이 이해되지 않는 르미앙은 쇠약해진 몸에 도망치지도, 닫혀버린 입에 무어라 답하지도 못 한 채, 그리 얼떨떨한 하루를 맞이하고 있었다.

       

       꼬륵.

       

       아리엘이 어제 손질해둔 코볼트의 살점과 오늘 채집해온 채소로 국을 끓이기 시작한 순간, 르미앙의 배에서 하나의 소리가 울렸다.

       미처 막지 못 한, 참으로 가증스럽고 부끄러운 소리였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늦어서 죄송합니다. (_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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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migrated Into A Tragic Romance Fantasy

Transmigrated Into A Tragic Romance Fantasy

후피집물의 후회캐가 되었습니다
Score 10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4 Native Language: Korean
I was curious about what a female-oriented tragic romantic fantasy was like, so I skimmed through only the free chapters. And then… “…Ha.” I found myself transmigrated into one of the main male characters, destined for tears of regret, exhaustion, and obsession. So, the first thing that had to be done was… “I, Elden Raphelion, hereby declare my withdrawal from the competition for the betrothal of the Third Northern Duchess.” To escape this traged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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