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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69

     

    ―훅.

     

    아셀라의 귓가에 라스가 램프를 불어 끄는 소리가 들렸다.

     

    은은하게 커다란 그림자를 만들던 마지막 불빛마저 없어지고 어둠이 가라앉았다.

     

    창가로 들어오는 달빛이 비추는 실루엣만이 라스의 위치를 어림짐작하게 해주었다.

     

    사락.

    아셀라는 덮고 있던 이불을 가슴팍 위까지 끌어당겼다.

     

    시야가 안 보이니 다른 감각이 더 예민해진 느낌이다.

     

    소리도 크게 들리고, 손가락 끝의 천의 감촉도 어째 더… 예민하다.

     

    이렇게 부드러웠었나?

     

    어쩐지 자신의 숨소리를 라스에게 들키기 싫어져서 이불로 입을 덮어버렸다.

     

    “그럼 황녀님, 안녕히 주무세요.”

     

    그런 목소리가 들리고 라스가 바닥에서 바스락거렸다.

     

    쟤 뭐해?

     

    아셀라는 의문을 가지고 고개를 들었다.

     

    “공자, 왜 거기 있어?”

     

    “예? 자려고요.”

     

    “잔다니… 바닥에서?”

     

    “예. 아, 침낭 있습니다.”

     

    아셀라는 자기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이 남자는 자신을 놀리는 게 분명하다.

     

    대체 어디부터 계획했을까. 밤에 급하게 진찰하러 들어왔을 때부터?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열 받는 행동을 할 리가 없어.

     

    “후우우….”

     

    아셀라는 화를 참으며 심호흡을 했다. 언성을 높여봐야 추해지는 건 자신이다.

     

     

    …아니지.

     

    애초에 내가 왜 화가 났지?

     

    한 침대에서 잘 거라고 생각했는데 공자가 당연하다는 듯 바닥에 누워서?

     

    그 자체로는 이렇게까지 화가 안 난다.

     

    아, 이걸 문제 삼으면 업무상 당연하다고 말하며 자신을 이상하게 쳐다볼 공자의 태연한 태도를 상상해버려서 화가 났나.

     

    아니면… 정말로 한 침대에서 잘 거라 생각한 게 나뿐이었다는 사실에?

     

    어라? 진짜 나만 그렇게 생각했어?

     

    아니, 벌써 두 번이나 한 침대에서 잤잖아.

     

    심지어 내가 애착인형 대신으로 써줬는데.

     

    당연히 한 침대라고 생각해야 하지 않나?

     

    쟤가 이상한 거 맞지?

     

     

    아셀라는 머릿속으로 대답이 돌아오지 않을 질문을 마구 던져댔다.

     

    그럴수록 짜증은 늘어만 간다.

     

    결국 제 풀에 지쳐 팡, 양손으로 이불을 내리치고는 눈을 감았다.

     

    ‘잠이나 자자.’

     

    공자는 죽었는지 살았는지 숨소리도 안 들린다.

     

    전에도 느꼈는데 이 남자는 잘 때 이상하리만치 기척이 사라진다.

     

    마치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처럼.

     

    ‘얘는 지금 무슨 생각일까.’

     

    요즘 라스에게 점점 화가 나는 건 결국 그의 생각을 알 수 없어서, 같았다.

     

    언제는 세상 전부인 것처럼 자신만 신경 쓰다가도 또 돌아보면 다른 일을 하느라 눈길도 주지 않는다.

     

    처음에 그에게 슬쩍 관심이 갔을 땐 이렇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이용가치가 있다면 권력으로 그를 부리고, 다른 신하처럼 발밑에 둘 생각이었다.

     

    이래서야 마치 주종이 역전된 것 같지 않은가.

     

    ‘내가 아니었으면 여전히 엉망인 채로 있었을 주제에.’

     

    괘씸해.

     

    괘씸해 죽겠어.

     

    아셀라는 허전한 품에 찬바람이 드는 느낌을 받으며 슬며시 눈을 감았다.

     

     

     

    ***

     

     

     

    “위대한 제국의 황제 폐하께서 장대한 위용을 드러내십니다! 예를 갖추십시오!”

     

    아셀라는 눈앞에 들어오는 강렬한 빛에 깜짝 놀랐다.

     

    그러기도 잠시, 몸이 멋대로 움직여 앞으로 걸어나간다.

     

    ―오오오오!

    ―황제 폐하!

    ―제국의 새 시대!

     

    그녀가 걸어나간 곳은 황궁과 연결된 제도 광장의 높은 단상이었다.

     

    수많은 제국민이 그녀를 맞이하며 환호한다. 아셀라의 이름이 사방에서 울려퍼진다.

     

    ‘내가 황제가 됐어?’

     

    연호가 바뀌었다.

     

    아셀라가 즉위한 직후의 시점이었다.

     

    스멀스멀, 행복감이 차오른다.

     

    ‘아냐.’

     

    아셀라는 물밀 듯이 몰려드는 성취감에 몸을 맡길 뻔 했다가 금방 정신을 차렸다.

     

    제도 하늘에 떠 있는 다섯 개의 마법진.

     

    천리안의 술식이었다.

     

    ‘꿈? 무의식 시전일까?’

     

    어느 쪽이든 이건 진짜가 아니다.

     

    환상 따위에 만족할 아셀라가 아니었다. 현실이 아니라면 의미는 없다.

    그녀의 머리가 금방 차갑게 식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가능성.

     

    결코 현실에서 이어지는 미래가 아니다.

     

    아셀라는 그 사실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도파민을 미뤄놓은 채 단서를 쫓았다.

     

    혹시나 현실에서 써먹을 재료가 있을지도 모른다.

     

    인물의 비밀이나 행동, 변화.

    경제, 민중, 그 모든 것이 단서다.

     

    수많은 가능성 중 하나여도 시행횟수를 늘려 조합하면 현실을 추측할 수 있다.

    그것이 아셀라가 생각한 천리안의 가능성이었다.

     

     

    “반역자들을 데려와라!”

     

    아셀라가 던져진 곳은 광장 가운데에서 집행이 이뤄지는 상황 한복판이었다.

     

    처형인은 하나. 주위를 둘러싼 기사가 잔뜩이다.

     

    자신은 전대 황제가 그랬듯, 그것을 관전하고 민중에게 위엄을 드러내려 자리했다.

     

    ‘반역이라.’

     

    흥미로운 키워드라고 아셀라는 생각했다.

     

    적이 누구인지 미리 확인할 좋은 기회다.

     

    반역자들이 포승줄에 묶여 끌려온다.

     

    그들의 얼굴을 보고 아셀라는 조금 충격을 받아 미간을 찌푸렸다.

     

    잘 아는 인물들이었다.

     

    ‘폐하의 주치의들이잖아.’

     

    앰브로시아를 포함한 세 명의 주치의, 그 외에도 더 있다.

     

    ‘고트베르크 후작…?’

     

    발두어 고트베르크.

     

    라스의 아버지인 그 남자다.

     

    ‘왜?’

     

    아셀라는 긴박하게 돌아가는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제대로 그의 죄를 읊을 새도 없이 처형식이 시작된다.

     

    ‘잠깐만. 무슨 반역을 저질렀는데.’

     

    아셀라는 처형식을 멈추려 했지만 천리안에 개입할 수는 없다.

     

    그저 미래의 자신이 보는 광경을 보고 느끼는 감각을 느낄 수밖에 없다.

     

    그때 광장 구석에서 충돌이 일어났다.

     

    “멈춰라! 전부 누명이다! 모든 건 현 황제가 꾸민 짓이다!”

     

    한 기사의 무리가 처형식을 막으려 광장 중앙을 향해 강행돌파한다.

     

    그 선두에 선 것은 다름아닌 타냐였다.

     

    “고트베르크 후작은 전 황제를 암살하지 않았다! 증거는 여기 있다! 전부 누명이다!!”

     

    충돌이 격해진다.

     

    황실 기사단이 타냐와 기사들을 향해 무자비하게 검을 휘두른다.

     

    끈질기게 저항하는 타냐였지만 결국 숫자에 밀려 검을 허용하고 만다.

     

    그녀의 왼쪽 눈을 예리한 롱소드가 찌르자 붉은 선혈이 터졌다.

     

    타냐가 가지고 있던 서류들은 공중을 날고, 기사들의 발에 밟혀 갈기갈기 찢겨진다.

     

    일부 기사들의 소동은 봉화가 되지 못하고, 수많은 제국민들은 그들을 목격조차 하지 못했다.

     

    ―스릉!

     

    그 즈음 고트베르크 후작의 목이 떨어졌다.

     

    제국민들이 환호한다.

     

    마침내 전대 황제를 시해한 반역자를 처단하고, 수년간 공석이던 옥좌에 올라 새 시대를 연 황제 아셀라를 칭송한다.

     

    ‘윽.’

     

    아셀라는 심장이 벌벌 떨렸다.

     

    몸을 움직일 수 있었다면 눈앞에서 펼쳐진 참혹한 광경에 바로 고개를 돌렸으리라.

     

    하지만 이 미래의 자신은 오히려 이 상황을 오래오래 즐기려는 듯, 시선도 귀도 광장에서 떼지 않는다.

     

    슬쩍, 자신이 고개를 돌렸다.

     

    벽에 붙어있던 전신거울에 눈이 간다.

     

    성인이 되었을까. 아셀라는 완연하게 성장한 자신의 모습을 목격했다.

     

    ‘왜.’

     

    그리고 가장 끔찍한 장면은 잘린 목도, 쓰러진 타냐도 아닌, 그 거울 속에 있다고 알게 됐다.

     

    ‘왜 즐거워해?’

     

    거울 속의 황제 아셀라는 실소를 참으며 악마처럼 입꼬리를 올리고 있었다.

     

    ‘뭐가 그렇게 재밌어? 라스의 집안을… 라스를 망가뜨려 놓고, 타냐 공을 짓밟고.’

     

    아셀라는 천리안의 환상 속에 있었음에도 이빨을 꽉 악물었다.

     

    그 바람에 잇몸에서 피가 터져 입가로 한 줄기 흘러내렸다.

     

    ‘내가, 이렇게 돼?’

     

    아냐.

     

    이건 지금부터 일어날 일이 아니야.

     

    애초에 천리안도 아니야. 악몽이야. 가끔 씩 보이는 기분 나쁜 꿈.

     

    “아냐!!”

     

    아셀라는 비명을 질렀다.

     

    숨이 가쁘다.

     

    푹신하고 좋은 감촉이었던 이불은 땀으로 흠뻑 젖어 불쾌해졌다.

     

    아냐, 아냐.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리며 어둠 속을 헤매고 있는 동안.

     

    그녀의 귓가에 목소리가 들렸다.

     

    “황녀님, 괜찮아요.”

     

    “윽, 흑, 라스.”

     

    아셀라는 자기도 모르게 그의 옷깃을 끌어당겼다.

     

    라스는 거부하지 않고 그녀에게 다가와 주었다.

     

    아셀라는 천천히 그를 감싸 안았다.

     

    자신의 애착인형을 끌어안듯, 그게 없을 때면 막스를 끌어안듯.

     

    “하아, 하아… 흐으.”

     

    조금씩 호흡이 가라앉았다.

     

    꿈은 환상처럼 머릿속에서 사라져간다.

     

    “라스으….”

     

    “예, 황녀님. 여기 있어요.”

     

    그의 목소리를 들으니 안심이 됐다.

     

    언제 어디서 아프더라도 자신을 낫게 해줄 주치의가 곁에 있었다.

     

    아셀라는 깨달았다.

     

    처음에 그의 방을 찾았던 건 암살자 때문에 판단이 흐려져서라고 생각했다.

     

    두 번째로 그를 안았던 건 약 기운 때문에 몽롱해서였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확신할 수 있었다.

     

    오히려 그것이 가장 올바른 판단이었다.

     

    아셀라는 라스를 끌어안았을 때, 비로소 걱정 없이 잠들 수 있는 것이었다.

     

    이성은 거부해도 본능이 알고 있었다.

     

    본능이 시킨 행동이었다.

     

    “라스.”

     

    “예.”

     

    “반역하면 죽어.”

     

    “에이, 그럴 리가요.”

     

    “진짜야.”

     

    “명심할게요.”

     

    아셀라는 라스의 살냄새를 맡으며 새근새근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

     

     

     

    전보다는 아셀라와 편하게 잘 수 있었다.

     

    아셀라는 잠버릇이 좋은 편은 아니었다. 혼자 잘 때면 이리저리 뒤척이고 호흡도 불규칙하다.

     

    그럴 때마다 끌어안아 주면 인형처럼 얌전해진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조금 귀찮긴 해도 써먹으면 혼자 잘 때처럼 조용해진다.

     

    체온이 낮은 편이라 질감 좋은 죽부인을 안고 있는 느낌도 들고.

     

    숙면을 취한 덕에 컨디션이 쌩쌩했다.

     

    일어날 때 아셀라가 빤히 나를 쳐다보고 있을 땐 조금 놀라긴 했지만.

     

    뭐, 버틸 만한 범위 안이다.

     

     

    아셀라를 방으로 돌려보낸 후 활동을 준비, 아침 검진을 마치고 내의원으로 향했다.

     

    내가 가장 먼저 찾을 사람은 당연히 팔켄하인이었다.

     

    1층, 게오르크 파벌이 사용하는 업무실에 들어섰다.

     

    어째 치유사가 드문드문 한산하다. 출근이 늦는지, 집단으로 휴가를 냈는지.

     

    안쪽의 팔켄하인의 사무실까지 가서 똑똑, 노크를 하고 들어섰다.

     

    “오오, 고트베르크 선생!”

     

    나를 맞이하는 그의 표정은 상당히 밝았다.

     

    어떻게 보면 게오르크를 몰락시킨 건 나와 아셀라라이기에 나를 증오하겠다고 생각했는데 의외였다.

     

    “오랜만에 뵙는군요, 팔켄하인 경.”

     

    “그렇소. 글쎄, 이것 좀 보시오!”

     

    팔켄하인이 흥분하며 쓰고 있던 주케토를 단숨에 벗었다.

     

    몇 달 전, 그의 휑했던 정수리의 바닥에서 희끗희끗한 기운이 올라오고 있었다.

     

    “머리가, 머리가 돌아오고 있소이다!!”

     

    어린아이처럼 행복해하는 팔켄하인을 보며, 나는 협상이 잘 풀리겠다고 직감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r1r1ka님 후원 감사해요! 저도 마음 같아서는 2연참… 3연참… 하고 싶은데요…! 최근 자꾸 시간삭제마법을 당하고 있어요…! 매일 연재분이라도 최대한 맞춰보겠습니드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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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Doctor Cured The Villainess And Ran Away

The Doctor Cured The Villainess And Ran Away

주치의는 악녀를 고치고 도망쳤다
Score 3.6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Becoming the physician of the villainess who brought about the world’s destruction, I tried to escape to survive, but the reactions were stran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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