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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69

       지붕에 귀를 댄 채로 리나는 방금 자신이 들은 내용들을 빠르게 정리했다.

       

       그러니까 디안 교수가 전쟁 때 라이너스 경하고 같이 이 마을 사람들을 구출했다는 거야?

       

       그럼 디안 교수도 특임대였다는 건가? 아니면 우연히 라이너스 경과 만나 일시적으로 함께?

       

       리나는 여러 가지 가능성을 살폈지만 정답이 뭔지 확신하기 어려웠다.

       

       지금 디안 교수가 마을 사람들에게 한 이야기만 가지고는 그림의 윤곽만 그릴 수 있을뿐이었다.

       

       어쨌든 디안 교수가 여기 마을에서 라이너스 경과 함께 작전을 펼쳤다는 것은 알았으니 좀 더 파보자.

       

       두리번거리던 리나는 소리도 없이 지붕 아래로 훌쩍 뛰어내렸다.

       

       지면에 착지하기 직전 리나의 몸이 흐릿해지며 시야에서 사라졌다.

       

       

       # # # # #

       

       

       점심 때 시작된 잔치는 저녁까지 계속 이어졌다.

       

       음식은 끝이 없었고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고 연극을 하며 완전히 대축제 분위기.

       

       몇 번이나 끌려 나가서 춤과 노래를 하고 진이 빠져서 돌아온 나는 라이너스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야, 라이너스. 원래 매년 이러냐?”

       

       “아니. 올해는 네가 온다고 해서 이러는 거다. 통상은 조촐하게 식사만 하고 끝났어.”

       

       “그러냐…. 힘들어 죽겠네….”

       

       “힘들다니. 네 입에서 그런 소리가 나오는 건 처음 듣는다.”

       

       “이게 그냥 체력의 문제가 아니거든. 기가 빨린다고 해야 하나? 어휴.”

       

       시원한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키자 라이너스가 낮게 웃으며 내 앞으로 음식접시를 밀어 주었다.

       

       “어쩔 수 없는 거야. 여기 사람들은 사실 나보다 너를 더 기다려 왔거든.”

       

       “말도 안 되는 소리. 마왕 사살자이자 대륙의 영웅이자 지성종족의 구원자인 라이너스 경이 떡하니 있는데.”

       

       “하지만 사실인 걸 어떡하나. 그래서, 심경의 변화가 좀 생겼나?”

       

       라이너스의 물음에 나는 잠시 말없이 음식을 집어 먹었다.

       

       여기 오는 길에 라이너스가 그랬지.

       

       지금의 나는 10년 전 브룬스웰로 떠나며 세상이 어떻게 변했는지 알지 못하고 또 황성의 복잡한 사정으로 의도적으로 숨겨지고 있다고.

       

       그건 부당한 일이며 내 처우는 제3자가 아닌 내가 직접 결정해야 한다고.

       

       그러기 위해서는 모든 것을 직접 눈으로 확인한다며 여기 타타노크 마을 재건 기념 행사에 데려왔다.

       

       쉽게 말해서, ‘너 지금 자의로 타의로 내려치기당하고 있는 거야. 제발 현실을 직시해!’라고 하는 격.

       

       그렇게 따라온 여기 타타노크 마을에서 나는 내가 단지 엔딩까지 닫기 위해 밟고 지나오며 무심하게 던져둔 것들이 사실 얼마나 가치 있는 일이었는지 깨닫게 되었다.

       

       물론 이전 이브로니크 성에서 참전용사들의 눈물을 보면서도 비슷한 생각을 했었다.

       

       아마 지금 라이너스는 ‘거봐, 내가 뭐라고 그랬나’라고 생각하고 있을 터.

       

       “거봐, 내가 뭐라고 그랬나.”

       

       내 속내를 이야기하자 라이너스가 예상대로 내가 짐작한 것과 똑같은 말을 했다.

       

       저 녀석은 정말 너무도 단순해서 항상 내 손바닥 위란 말이지.

       

       “앞으로 이런 자리에 자주 다니자. 베푸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야. 우리가 도움을 준 사람이 우리에게 감사를 표할 수 있게 해주는 것 또한 미덕이다.”

       

       “그런가. 나는 너처럼 고결한 놈이 아니라 거기까지는 생각한 적이 없다.”

       

       “이건 고결한 것과는 전혀 관계없는 거다. 사회적 맥락에서의 중요한 상호작용이지.”

       

       “그래그래. 너 잘났다.”

       

       하지만 라이너스가 한 가지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게 있다.

       

       그것은 이 세계가 라이너스라는 주인공이 마왕을 처단하는 과정을 그린 용사소설이라는 것.

       

       거기서 나는 엔딩까지 라이너스를 도와주는 조력캐였으며 마왕척살의 엔딩 이후 잠적한 것도 모두 그것 때문이라는 것.

       

       현실을 직시하지 못해 브룬스웰로 내려간 게 아니다.

       

       조력캐에게는 조력캐만의 엔딩이 있는 법.

       

       나는 엔딩 후 조용히 물러나는 길을 택했고 거기에 라이너스가 우려하는 요소들은 전혀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예를 들면 황성의 협잡질이라든지 내가 내 스스로의 가치를 깨닫지 못했다든지 하는 것들 말이다.

       

       그건 모두 다 저 착하디 착한 라이너스가 나를 걱정해서 혼자 하는 생각들이지.

       

       나는 정말로 귀찮은 일들이 싫어서 조용히 살려고 브룬스웰로 갔고 라이너스의 어려운 사정을 듣고 아카데미의 교수가 되었을뿐.

       

       황성에서 나를 어떻게 이용하려고 하는지는 관심 밖이며 내 의지에 반하는 행보를 보이면 가만히 당하고 있을 리도 없다.

       

       하지만 어쨌든 오늘은 좋은 날이니까 이런 심각하고 민감한 이야기는 관두자고.

       

       어차피 라이너스에게 모든 진실을 밝힐 생각도 없으니까.

       

       “디안 님!”

       

       이제 슬슬 집에 가자는 말을 하려는 찰나 메릴다가 달려와 내 손을 잡았다.

       

       “기쁜 날에 뭐하고 계세요? 같이 놀아요!”

       

       “아니, 나는 방금까지 놀다가….”

       

       “어서요!”

       

       메릴다가 나를 끌고 회관 한가운데로 나아갔다.

       

       거기에는 이미 수많은 마을 사람들이 춤을 추는 정신없는 곳.

       

       그때 마침 신나는 음악이 딱 끊겼고 이어서 비교적 잔잔하고 부드러운 음악이 연주되기 시작했다.

       

       메릴다가 내 허리에 팔을 감고 손을 잡으며 물었다.

       

       “출 줄 아시죠?”

       

       “몰라.”

       

       “그럼 제가 알려드릴게요.”

       

       메릴다가 나를 리드하면서 천천히 돌며 춤을 췄다.

       

       그냥 아무렇게나 추는 거라면 몰라도 이렇게 격식을 갖춘 춤은 처음.

       

       예전에 마왕을 죽이고 참석한 환영회에서 로르마네와 반강제로 춘 것 빼고는 전혀 모른다.

       

       그때 사실 로르마네도 애초에 춤을 출 줄 몰랐고 또 춤이 진짜 목적이 아니었지.

       

       그냥 내가 다른 여자들에게 눈을 돌리지 못하게 하려고 일부러 끌고 나간 것에 불과하니까.

       

       어쨌든 그래서 나는 메릴다의 리드대로 몸을 움직이기만 했다.

       

       “디안 님. 돌아오셔서 기뻐요. 대체 10년 동안 어디 가셨던 거세요?”

       

       “저기 멀리 이름없는 항구도시에서 놀고 먹었어. 그런데 너 정말 몰라보게 컸구나?”

       

       분명 10년 전에는 내 허리에도 미치지 못하던 작은 아이가 이제는 나와 제법 눈높이가 맞는 어른이 되었다.

       

       “이게 다 디안 님 덕분이죠. 디안 님이 아니었다면 저는 그때 죽었을 테니까요.”

       

       “라이너스 덕분이지 무슨.”

       

       “아니요. 다 알고 있어요. 디안 님께서 같이 가자고 하셨기에 라이너스 경께서도 저희를 도울 수 있었다고요.”

       

       “누가 그래?”

       

       “라이너스 경이요.”

       

       허참, 웃기는 녀석이네.

       

       하긴 아주 틀린 말은 아니지.

       

       라이너스는 용사이긴 하지만 웹소설에 나오는 먼치킨은 아니다.

       

       여신의 간택으로 성검을 하사 받아 하늘을 가르고 산을 지우는 그런 류가 아니야.

       

       주변 동료들과 함께 고난과 역경을 극복하며 결국 정의를 구현하는 인간찬가형 소년만화 주인공 같은 거지.

       

       게다가 라이너스가 본격적으로 성장하기 시작한 것은 마왕사살특임대가 창설되는 프롤로그 이후.

       

       그러니 그때 내가 아니었다면 라이너스는 혼자서 마을을 구하지 못했을 것이다.

       

       “어쨌든 디안 님을 다시 뵐 수 있어서 정말 좋아요.”

       

       “나도 네가 이렇게 잘 커주어서 정말 고맙고 기쁘다.”

       

       메릴다가 웃으며 내 가슴에 얼굴을 파묻었다.

       

       품에 안긴 메릴다의 온기가 상당히 서글프다.

       

       마왕군이 마을을 습격하던 때에 메릴다는 부모와 떨어져 갓난아기 동생을 업고 도망쳤다.

       

       그러다 발을 헛디뎌 넘어졌고 우리가 도착했을 때 이미 아기는….

       

       그것을 보고 눈이 뒤집어진 우리는 마을을 공격한 마왕군을 하나도 남김없이 모조리 죽였다.

       

       궁지에 몰려 살려 달라고 무릎을 꿇는 놈들도 모두 목을 치거나 불타는 집안으로 던져 버렸다.

       

       물론 그렇게 한다고 해서 죽은 아기가 살아 돌아오는 건 아니지.

       

       라이너스는 그 후로 한참이나 스스로를 자책했다. 자신이 조금 더 일찍 마을을 발견했더라면, 이라고.

       

       나 역시 마찬가지. 그때 라이너스가 마을을 도우러 가자고 했을 때 곧바로 뛰쳐 나갔다면 어땠을까….

       

       “너무 늦어서 미안하다. 조금 더 일찍….”

       

       “괜찮아요.”

       

       메릴다가 손가락으로 내 입술을 막았다.

       

       “디안 님은 제때 오셨어요.”

       

       10여 년 전의 그때를 말하는 것인지 아니면 오늘을 말하는 것인지….

       

       “올해 딱 성인이 됐거든요.”

       

       “응?”

       

       “어른이 되면 디안 님과 결혼하겠다고 했잖아요. 그 약속, 설마 잊으신 건 아니죠?”

       

       메릴다의 농담에 소리내어 웃었다.

       

       

       # # # # #

       

       

       “후우, 힘들다.”

       

       음악이 바뀌자 메릴다가 내게서 떨어지며 웃었다.

       

       “우리 바람 쐬러 가지 않을래요?”

       

       “그럴까?”

       

       이제 때는 초여름. 날씨가 상당히 더워졌다.

       

       회관의 창문을 모두 열어두기는 했지만 그래도 사람이 많고 춤까지 춘 터라 땀이 나는 상태.

       

       메릴다와 함께 회관을 나서자 초여름밤 특유의 미지근한 바람이 불어온다.

       

       “하아, 밤에도 이제는 별로 시원하지 않네요.”

       

       “어쩔 수 있나. 여름인데.”

       

       “그러지 말고, 더 시원한 곳으로 가요.”

       

       “더 시원한 곳이 어딘데?”

       

       “따라와 보세요.”

       

       메릴다는 앞장서서 마을을 가로질렀다.

       

       회관의 떠들썩한 소음도 거의 들리지 않을 무렵, 메릴다는 마을의 외곽에서 걸음을 멈췄다.

       

       그곳은 마을 주변의 산자락에서 평지로 이어지는 숲의 경계.

       

       마을의 불빛이 닿지 않아 상당히 어두웠고 너머로는 졸졸 흐르는 물소리가 들려왔다.

       

       대충 주변 지형을 살피니 나와 라이너스가 잠시 쉬었던 그 계곡에서 이어지는 지류인 듯.

       

       “자요, 디안 님. 여기서 우리 잠깐 쉬어요. 발을 담가 보세요. 정말 시원해요.”

       

       메릴다의 말대로 시냇물에 들어가니 계곡에서부터 내려온 얼음장 같은 물이 굉장히 차갑다.

       

       “와, 진짜 시원하다. 너도 들어와, 메릴… 다…. 너 뭐하냐?”

       

       메릴다가 나체로 서있었다. 입고 있던 옷은 발치에 허물처럼 흘러내린 채였다.

       

       “그 약속, 지키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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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Retired Supporting Character Wants To Live A Quiet Life

The Retired Supporting Character Wants To Live A Quiet Life

The Retired Supporting Character Wants to Live Quietly 은퇴한 조력캐는 조용히 살고 싶다
Score 3.9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Instead of causing chaos with my knowledge of the original work, I assisted the protagonist.

I successfully completed the story and now planned to retire and live peacefully.

However, it seems the protagonist still needs my help.

An academy professor? That’s nothing much.

But why is the state of the academy so stran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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