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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7

       *

        

        

        “끄으흑… 흐윽… 끍….”

        “괜찮다. 죽진 않으니.”

        “그냥 죽여….”

        “그런 말 하지 마라.”

        

        

        이반은 다정하게 속삭이며 휴고의 몸 위에 포션을 주르륵 떨어트리고 있었다.

        

        점성있는 차가운 액체가 몸에 닿을 때 마다 휴고의 몸이 움찔 떨리며 작은 비명이 흘러나왔다.

        

        이반은 이 사내의 마음을 정확히 알 수 있었다. 최전방에서 구르던 대부분의 병사들이 가장 싫어하는 것 중 하나가 힐링포션인 탓이다. (짬밥, 선임, 지휘관, 사령관, 적군 다음으로 힐링포션이 꼽힌다는 점에서 그 위상을 알 수 있다.)

        

        실제로 그 또한 팔뚝이 떨어져나갈 뻔 했을 때 힐링 포션을 강제로 투약한 경험이 있었다.

        

        

       -차라리 그냥 팔을 끊어!! 으아아악!!

       -그런 말 하지 마세요, 페트로비치 경. 귀관의 몸은 아국의 보물입니다!

       -보물을 누가 이딴 식으로 다뤄!!!

        

        

        아직 미숙했던 어린 시절의 경험이다. 그 끔찍한 경험 이후로 이반은 최대한 큰 상처를 입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힐링포션은 김선우 시절의 기억까지 뒤적여야 나오는 한 지독한 약물과 정확히 같은 수준의 통증을 유발하는 탓이다. 물론 그 저주받은 자백제의 이름은 알보칠이다.

        

        그 덕에 이반은 절멸부대 복무 시절 이 힐링포션의 새로운 가치를 발견할 수 있었다.

        

        힐링포션은 화상 입은 자리에 소금을 뿌리는 수준의 고통을 준다.

        하지만 상처는 반드시 치료된다.

        그렇다면 심문 도중 발생한 상처를 다시 치료하는 과정에서도 심문을 이어갈 수 있다.

        

        그야말로 지속-가능한 심문이었다. 당시 절멸부대의 동료 요원들은 이반의 발상에 경악했었다. (그러나 이세계엔 슬프게도 제네바 협약이 없으므로 포로에겐 인권이 없었다.)

        

        

        “더, 더 이상은… 아는… 아는 게 없… 없어…! 진짜… 진짜야… 그러니까 그만….”

        “생각 이상으로 쓸모가 없군.”

        “살려… 아니, 죽여….”

        “아니, 넌 살아야 한다.”

       

       

        튜토리얼 보스니까.

       

        

       -쪼르르륵.

        

        

        이반은 포션을 다시 흘려내어 사내의 입을 다물게 하며 일어섰다.

        

        이 녀석에게 열차 테러를 사주한 범죄 집단은 두꺼운 코트를 입고 있었고, 성인 남성이었으며, 얼굴은 인식 저해 주문이 걸려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지금은 1월이다. 당연히 성인 남성들은 두꺼운 코트를 입고 다니는 계절이란 뜻이다.

        

        말투나 억양으로 국적을 파악할 수도 없었다. 이 녀석이 그런걸 구별할 줄도 모르는 촌놈이란 사실을 예상하지 못한 탓이다.

        

        공쳤군. 이반은 혀를 차며 주위를 살폈다. 열차는 아직 조용했다. 그건 나쁘지 않은 일이었다.

        

        

        ‘에시디스 공주가 아직 싸우고 있군.’

        

        

        에시디스 공주가 패배했다면 열차에서 도적들이 우르르 뛰어나왔을 것이다. 금괴를 발견하지 못한 대신 몸값 비싼 귀족을 얻은 셈이니까.

        

        아직까지 아무도 열차에서 나오지 않고 있다는 건, 오히려 에시디스의 안전함을 반증한다.

        

        그렇게 생각하며 이반이 열차로 향하기 위해 몸을 일으킨 순간.

        

        그 찰나, 사선감지가 그의 미간에 격렬한 경고를 보냈다.

        

        미간?

        

        아니, 안면 전체를 향해.

        

        

       -후우우—

        

        

        바람이 찢어지는 소리와 함께.

        

        

       -콰아아아아아앙—!!

        

        

        투포환처럼 날아든 바윗덩이가 방금까지 이반이 서 있던 자리를 훑고 지나갔다.

        

        이반은 재빨리 몸을 튕겨 연달아 이어지는 사선에서 벗어났다. 쾅, 쾅 쾅! 그를 따라 정확히 바윗덩이가 내려 꽂혔다.

        

        

        “나와라.”

        

        

        던지는 것을 보아 예상 이상의 강자.

        그렇다면 상대방 또한 사선감지를 알고 있으리란 판단.

        

        어차피 백병전으로 끌고 가야 하는 것이 명백한 이상, 상대 또한 몸을 드러내야 하므로.

        

        

       -대장은 진짜 괴물이야!!

        

        

        사선 감지를 쓰지 못하는 잡졸의 말이라고 너무 무시했나. 지금 이 녀석이 대장이 아니었단 말인가. 그럼 아까운 포션만 낭비한 꼴인데.

        

        이반은 멀리서 걸어오는 사내를 싸늘하게 노려보며 생각했다.

        

        

        “제법 한 가닥 하는 놈이로군.”

        

        

        근육이 알알이 박힌 단단한 체구의 중년 사내가 저벅저벅 걸어와 으르렁거렸다.

        

        온몸이 저릿해질 정도로 끔찍한 살기가 휘몰아쳤다.

        

        

        “하지만 감히 내 조카를 건드릴 생각을 하다니. 지닌 실력에 비해 어리석구나.”

        

        

        조카라. 이 녀석의 혈육인가? 귀찮게 됐군.

        

        이반은 혀를 차며 권총을 갈무리하고 양 손에 도끼를 쥐었다.

        

        

        “너는 뭔가 알고 있길 바라지.”

        “개소리를… 오라. 죽여주마.”

        

        

        사내는 이를 뿌드득 갈며 도끼를 마주 들었다.

        

        다음 찰나에, 두 사내가 격돌했다.

        

        

       *

        

        

        

       -후우우웅-! 콰득!!

        

        

        에시디스는 바이올린 지판이 뒤틀리는 소리를 들으며 이를 악물었다.

        

        

        “깡깡아 좀만 버텨!”

        

        

        바이올린은 무언가를 후려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대부분의 악기가 그렇듯이. (일렉 기타는 예외다. 그것은 스테이지를 후려치며 완성된다.)

        

        따라서 이 섬세하고 연약한 목조 현악기는 에시디스가 팔을 한 번 휘두를 때 마다 앞판이 으스러지고 지판이 뒤틀리며 천천히 부서져 갔다.

        

        그러나 깡깡이(바이올린, 2세)는 결코 에시디스와의 추억, 그리고 우정을 헛되이 하지 않았으니.

        

        깡깡이가 휘둘러질 때 마다 부서지는 것들이 더러 생겨났다. 주로 성인 남성의 두개골이었다.

        

        

        “미, 미친년!! 저 년은 뭐야아!!”

        “금괴는 어딨고! 이봐! 화물칸 어떻게 됐어!”

        “아무것도 없습니다!! 속았어요!”

        

        

        도적들은 도망치고 싶었다. 금괴는 없고, 열차를 터트렸으니 군대가 추격해 올 것이 뻔했으며, 눈 앞에 미친 여자는 바이올린으로 사람을 줘패서 터트리고 있었으니까.

        

        에시디스 또한 도망치고 싶었다. 깡깡이의 생명이 사그라드는 것이 매 순간 선명하게 느껴졌고, 싸우는 것은 두렵고, 여긴 어디쯤인지 알 수도 없었으니까.

        

        

       -퍼억!

       -우드득!

        

        

        깡깡이가 또 다른 도적의 치아를 추수하고, 마침내 생명을 다했을 때.

        에시디스는 손에 남은 바이올린 지판 조각을 움켜쥔 채 참담한 심정에 침음했다.

        

        

        “깡깡아… 너는 훌륭한 악기였어….”

        “미친년, 미친년!!”

        “도망쳐야 되는 거 아닙니까? 우리가 싸울 때가 아니에요!”

        “제기랄, 저 년은 그럼 우리 가는 걸 두고 본다더냐?”

        “아오오! 큰형님은 어디서 뭘 하시는 거야!”

        

        

        큰형님은 지금 근육노괴와 특작부대 장교의 싸움 사이에서 새우등이 터지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 채로, 도적들은 웅성거리며 주춤주춤 물러났다.

        

        그건 실수였다.

        

        ‘살육자’ 에이나르의 딸은 많은 부분에서 어머니를 닮았지만 적어도 ‘분노’와 ‘투쟁심’ 그리고 ‘싸움실력’은 아버지를 쏙 빼닮았으니까.

        

        무릇 드로안의 전사들에게 전우란 의형제 같은 것. 오랜 전우 깡깡이(2년, 악기임)의 죽음을 헛되게 할 수는 없었다.

        

        그녀는 부드러운 손짓으로 깡깡이의 유해를 쓰다듬고는 천천히 허리를 펴 일어섰다.

        

        

        “깡깡아, 네 희생은 잊지 않을게. 항상 고마웠고, 미안해.”

        “저 미친년은 내가 막겠다. 너희는 도망쳐.”

        “형님!!”

        “어서! 너희라도 살아나가야지!”

        

        

        도적의 일갈에 남은 잔당들이 일제히 등을 돌려 도주하기 시작했다. 녀석들은 눈물을 찔끔 흘리며 큰형님이 있을 본진으로 향했다.

        

        그 모습을 일별하고, 모두가 떠난 사이 도적은 에시디스에게 결연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오해십니다. 아가씨.”

        “…응?”

        “저희는 아가씨께서 이 열차에 타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살려주신다면 법정에 나가 진술할 의향이 있습니다. 크라실로프는 법치주의 국가 아닙니까? 살려주십쇼!”

        

        

        도적은 무기를 버리고 무릎을 꿇으며 소리쳤다. 현명한 처사였다.

        

        도망친 도적들은 지금 이 순간, 분노한 허스칼과 분노한 절멸부대 장교 사이에서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

        

        

        “잡졸을 몇 더 데려온다 해서 뭐가 달라질 것 같으냐!!”

        “…살아남은 녀석들이 많군. 하지만 달라질 건 없다.”

        

        

        서로의 몸에 도끼를 때려 박으며 투쟁하던 두 사내는 열차에서 뛰쳐나오는 도적들을 보며 동시에 외쳤다.

        

        

        “에시디스, 저 열차에 타고 있던 여자는 어떻게 됐지? 금발에 젊은 여자가 있었을 텐데. 무사한가?”

        “내 조카는!! 내 조카는 무사한가?!”

        

        

        사내의 외침에 이반은 잠시 멈칫했다.

        조카는 이 녀석 아니던가?

        

        이반은 전투 중 파편에 맞고 혼절한 사내를 힐끔 바라보다가 신음했다.

        

        

        어쩐지, 너무 어렵다 했다.

        

        초반 튜토리얼이라 하기엔 눈 앞의 사내는 지나치게 설계된 보스다.

        

        소울라이크처럼 환불 방지턱 역할을 하는 녀석인가 싶었는데, 그렇다 치기에도 패턴이 너무 많다. 도저히 초보자가 이길 방법이 없는 녀석이다.

        

        그렇다면….

        

        

        ‘아카데미물의 열차 습격은 결코 주인공을 죽이지 못한다. 조력자가 나타나 도움을 주기 때문에.’

        

        

        이 녀석이 조력자였나.

        

        그리고 아마도 튜토리얼 보스전은 열차에서 탈출한 잡졸 몇몇과 허접한 보스를 잡으며 다대일 전투에 익숙해지게 만들 목적으로 설계되었겠지.

        

        이반은 한숨을 내쉬며 도끼를 갈무리했다. 이가 잔뜩 상해서 이젠 버려야 할 모양이 되었다. 어차피 무기란 대부분 소모품이니 상관없는 노릇이지만, 아쉬운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음, 잠깐. 너희 한 패가 아니었나…?”

        “왜 그런 오해를 했는지 모르겠는데.”

        

        

        사내는 이반을 따라 무기를 집어 넣으며 눈을 가늘게 떴다.

        

        

        “저 자식한테 힐링 포션을 붓고 있었잖아.”

        “음.”

        

        

        그건 절멸부대의 심문방식이라고 설명하는 것은 과하다. 설득할 방법도 없고.

        이반은 어깨를 으쓱였다.

        

        

        “알아낼 것이 있었다.”

        “씁, 그걸 먼저 말했어야지.”

        

        

        그걸 설명할 시간을 주지 않았다.

        

        이반이 떨떠름한 얼굴로 사내를 바라볼 때, 사내는 열차에서 활달하게 뛰어 나오는 여자를 바라보며 함박웃음을 지었다.

        

        

        “조카!! 에시!! 무사했구나아!!”

        “으엑, 삼촌?!”

        

        

        이반은 뛰어나가는 사내를 무시한 채, 폭탄이라도 터진 듯 파괴된 주변 현장에 겁을 먹은 도적들을 힐끗 바라보고는 혀를 찼다.

        

        타겟은 무사하고, 조력자는 타겟이 얀스크 대학에 도착할 때 까지 지켜낼 충분한 능력이 있다.

        

        그리고 그 자신은 타겟의 눈에 띄면 안 될 인물이다. 정체가 밝혀지면 곤란한 위치에 있는데, 에시디스는 면식이 있었다.

        

        7년이 지난 먼 옛날이고, 그 시절 에시디스는 이제 갓 열댓살 먹은 꼬맹이에 불과했었지만. 어쨌건 그녀가 이반을 기억하고 있을 지도 모를 일이니까.

        

        여기서 얻을 수 있는 정보는 모두 확보했다. 이반은 뒤를 돌아 철수했다.

        

        

       *

        

        

        광전사 에이나르의 장녀, 에시디스.

        크라실로프 도착.

        

        드로안 파견 요원으로 허스칼(추정) 1인 파견.

        

        타겟 안전 확보 성공.

        

        암호화된 짧은 전보 하나를 동궁정에 급보로 보내며, 이반은 수도행 열차에 몸을 맡겼다.

        

        소득에 비해 피곤한 하루였다.

        

        

       

       *

        

        

        “에시, 혹시 이반이란 녀석 기억하니?”

        “이반 아저씨요?! 네! 당연하죠!”

        

        

        반가운 이름에 확 밝아졌던 에시디스는 곧 침울하게 고개를 떨어트렸다.

        

        

        “참 좋은 분이셨죠… 친절하고, 멋지고….”

        “그건 잘 모르겠지만, 어쨌건.”

        

        

        사내는 인상을 찌푸리며 걸음을 옮겼다.

        열차 차문을 뜯어 만든 급조한 가마 아래엔 대여섯 명의 도적들이 겁에 질린 채 가마를 이고 있었다.

        

        사내는 가마 위의 에시디스에게 들리지 않도록 주의하며 작게 중얼거렸다.

        

        

        “분명 2년 전에 죽었다고 들었는데.”

        

        

        전투 방식이 낯이 익다 싶더니 크라실로프 특작부대들과 빼다 박았고.

        

        도끼를 쓰는 것이 이상하게 익숙하다 했더니, 에이나르 형님의 도끼질과 유사했다.

        

        에이나르에게 도끼질을 배운 크라실로프 소속 녀석이라 한다면 딱 들어 맞는 녀석이 한 놈 뿐인데.

        

        

       -예비대 이반 페트로비치.

        

        

        더 정확히 말하자면 ‘용사 예비대’ 이반 페트로비치. 용사파티에서 결원이 발생했을 때 투입해도 된다 여겨졌던 녀석들 중 하나.

        

        그 녀석은 분명, 마왕 사후 벌어졌던 섬멸전 도중 칠용장 하나와 동귀어진했다고 알려져 있었는데.

        

        덥수룩한 수염과 그늘진 숲, 그리고 분노에 눈이 뒤집혔던 탓에 상대의 외모를 정확히 뜯어볼 겨를이 없었던 것이 한이다.

        

        뭐 척 보니 왕실 정보조직 쪽 녀석인 듯 했으니, 수도에서 활동하다 보면 한 번은 만나겠지.

        

        그때 면도라도 시켜볼 일이다. 사내는 어깨를 으쓱이고는 걸음을 옮겼다.

        

        수도까지 도보로 일주일 거리.

        

        얀스크 대학의 두 ‘신입생’, 열차-가마로 횡단 시작!

        

        

       

       *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이 글을 왜 이렇게 많은 분들이 보시는 거죠…? 어… 상상도 못했습니당…

    그래서 7시까지 두 편 못 올릴 것 같아서 일단 한 편 써놓은 거 먼저 던져용..

    다음편 가능하면 저녁 안에 올릴게요!!

    (이반은 퇴역하고 로-씨야식 수염을 기르고 있었습니다!)

    우으으… 좆소부이.. 연휴 끝나는게 너무 시러…

    다음화 보기


           


30 Years Have Passed Since the Prologue

30 Years Have Passed Since the Prologue

프롤로그에서 30년이 흘렀다
Score 7.8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3 Native Language: Korean
I got transmigrated into a game I’ve never seen before. I thought it was a top-notch RPG and spent 30 years on it. I retired as a war hero and planned to spend my remaining time leisurely. But it turns out, it was an academy 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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