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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7

       아래를 내려다보면.

       

       경사가 높아서, 한 번 삐끗하면 크게 다칠 것 같이 빽빽한 계단.

       

       마구잡이로 낙서가 되어 있는 낡은 벽면.

       

       지저분하게 널브러진 담배꽁초들과 쓰레기.

       

       위를 올려다보면.

       

       방금 전까지 보았던 불편하고 더러운 지상의 모습은 온데간데 없고.

       

       한 데 모여 손에 손 잡고 노래를 부르는 별들과,

       

       어둠 속을 비추는 따스한 달이 매달려 있었다.

       

       나는 달동네에 살았다.

       

       ===============================================================

       

       가난한 사람들은 할 수 있는 놀이가 몇 없다.

       

       주차장에 직직 그어 놓은 선들을 따라 폴짝폴짝 뛰기.

       다 해져서 탄력 없이 물렁거리는 축구공을 차고 놀기.

       

       그마저도 안 될 것 같으면, 하늘을 올려다보기.

       

       내 유년기의 기억이 저 밤하늘로 가득 차 있었던 것은 그런 이유에서였다.

       몸이 약했던 나는 아이들과 어울려 노는 것도 할 수 없었고, 집 안에서 즐길 거리도 딱히 없었기 때문이다. 

       

       사회복지사가 나누어 준 과학 교과서는 이미 페이지가 닳을 정도로 읽었다.

       신문도 읽었다. 어려운 단어가 많아서 반 정도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몇 번이고.

       

       그래서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늘을 바라보면서 꿈을 꾸고 있었다.

       

       검은 밤하늘은 나만을 위한 캔버스였다.

       상상이라면 물감 값을 내지 않아도 마음대로 그려낼 수 있었다.

       

       내가 만약에 부자로 태어났다면 어땠을까.

       내가 같은 반 태민이처럼, 반장 선거 때 초코파이를 뿌릴 수 있었다면.

       내가 우연히 길바닥에 버려진 요술 램프를 줍게 된다면⋯⋯.

       

       유년기의 상상은 모두 불완전하게 끝났다. 

       

       부자가 된 장면. 반장 선거 때 초코파이가 아니라 치킨을 뿌려버린 장면.

       달동네를 걷다가 어느 고양이 밥그릇 위에서 요술 램프를 줍는 장면.

       

       그 뒤에 이어질 장면을 도저히 떠올려낼 수 없었다.

       무지막지한 행운을 거머쥔 상상 속의 나는, 정말 어쩔 줄을 모르다가, 그대로 포기해버렸다. 

       

       모방은 창조의 어머니라고 누가 그랬던가. 공룡을 한 번도 못 본 사람이 공룡을 상상해 낼 수는 없는 것처럼. 한 번도 가져본 적이 없던 나는 행복을 상상해 낼 수가 없었다.

       

       웃는 얼굴을 막연하게나마 그려 낼 뿐이었다.

       

       ===============================================================

       

       사람은 어째서 사람을 미워하는 걸까. 중학생 때 그런 생각에 골몰했던 적이 있었다.

       

       딱히 철학적인 사색을 하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다.

       

       같은 반 ‘친구들’에게 매일같이 두드려 맞고 있으려니 궁금해서였다. 

       

       언제는 돈이 없어서 때리고, 언제는 준비물이 없어서 때리고, 언제는 엄마가 없어서 때리고.

       그들은 주먹을 휘두를 때 마다 어떤 이유를 입에 담지만, 그게 거짓말이라는 것은 그들도 알고 나도 알았다.

       

       그러니 진짜 이유가 궁금해 질 수밖에.

       

       조용한 아이였던 나를 못살게 괴롭히는 이유가 대체 무엇이었던지.

       만약 이유 없는 괴롭힘이었다면, 어째서 사람은 이유가 없어도 남을 미워할 수 있는 건지.

       

       그 즈음부터 내 상상에는 악역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내 신발을 빼앗아가서는 수풀에 버려 놓는 괴물. 수업시간에 몰래 압정으로 내 등을 찔러대는 괴물.

       없는 살림 다 털어서 산 준비물을 기어이 훔쳐 가서 변기통에 던져버리는 괴물.

       

       괴물에 쫒겨 위기에 처한 상상 속의 나는, 부자가 되거나, 치킨을 휘두르거나, 요술 램프를 줍거나 했다.

       

       그러나 여전히 해피 엔딩은 없었다. 괴물을 저 멀리 치워내더라도 언젠가 다시 돌아올 뿐이다.

       현실에서도 지고, 달밤의 꿈 속에서도 지고, 밤낮으로 지는 나날이었다.

       

       어느 날에는 너무 아팠다.

       

       몸이 아픈 걸까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몸에 멍이 꽤 들어 있긴 했지만, 이제는 그 정도 멍은 아프지도 않았다.

       

       마음이 아픈 것이었다. 

       

       충치가 그렇듯, 아픔을 느끼기 시작하는 것은 세균이 신경까지 파고들었을 때다.

       마음 속의 중요한 무언가가 깎여나가다가, 깎여나가다가, 마침내 중요한 부분에 닿아버린 것이다.

       

       나는 무섭고 서러워서 울었다.

       

       마음 가운데에 있는 소중한 부분까지 깎여버리고 나면, 나는 내가 아니게 될 것이었다.

       내가 아니게 된 순간, 이를 악 물고 참아내던 분노도 풀려날 것이다. 나는 욕설을 내지를 테고, 뾰족한 물건을 찾아서 못된 ‘친구들’에게 달려들 것이다.

       

       범죄자가 되는 것이 두려운 게 아니었다.

       

       내 인간성을 빼앗기는 것이 두려운 것이었다.

       

       언제나, 처음 한 번이 어렵다. 두 번째는 할 만 해지고, 세 번째에는 익숙해진다.

       분노 앞에서 폭력이 나가는 사람이 되는 순간, 나는 상상 속의 괴물들과 똑같은 꼴이 된다.

       

       아니, 오히려 괴물만도 못 한 존재가 된다.

       

       저들은 학교를 부족함 없이 다닐 정도의 재력과, 부모 양 쪽이 모두 살아있는 환경과, 무리 지어 노는 친구들이 있다. 하지만 나는 셋 모두 없었다.

       

       인간성마저 빼앗기면, 내 손아귀에는 정말로 무엇 하나 남은 것이 없다.

       내 마음을 지켜야 했다. 내 소중한 마음만큼은 지키고 싶었다.

       

       나는 노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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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주 깊이 관찰하면, 많은 것을 알 수 있게 된다.

       

       사람도 그렇다. 어떤 부분은 굉장히 복잡하지만, 또 어떤 부분은 굉장히 단순해서 도식화 할 수 있다.

       인간의 유형을 구분하고, 어떤 유형에게 어떤 행동이 효과적일지를 연구했다.

       

       사람은 의외로 무조건적인 헌신을 그리 고마워하지 않는다.

       잘해주다가도 한 번씩 물러나서 고마움을 상기시켜줘야 한다. 사람은 가지고 있는 것 보다도 빼앗길 것 같은 무언가에 더 애착을 쏟는다.

       

       사람은 사회적인 시선을 무척이나 신경 쓴다. 타인의 시선을 무기로 삼아야 한다.

       아무리 과격한 양아치라도 무수한 군중들의 시선을 받으면 기세가 한 풀 꺾인다.

       

       그러니 나를 미워하는 사람에게는.

       내가 그를 미워하기보다도, 다른 불특정 다수가 그를 미워하게 해야 효과적이다.

       

       마음 가는 대로 살아가는 대신, 머리로 모든 것들을 계산해가며 살았다.

       

       슬퍼도 웃었고, 기뻐도 울었다. 주변인들의 비위를 맞춰가면서도, 주변인들이 나를 위해 행동하도록 만들었다. 마음 속 한 구석의 ‘진짜 나’는 답답했지만, 두드려 맞는 것 보다는 답답한 쪽이 더 나았다.

       

       그렇게 기계적인 대학 생활을 보냈다.

       

       동아리에 들었다. 교우관계를 다지기 좋은 환경이라고 생각해서.

       

       사회적 입지를 다지기 위해서 여자친구도 사귀었다. 그다지 좋아하는 타입은 아니었지만, 그녀의 고백을 거절했다가는 곤란한 일이 벌어질 게 눈에 선했기 때문이다.

       

       표독스러운 눈으로 나에 대한 나쁜 소문들을 지어내서 퍼트렸겠지. 어떻게 감히 내 고백을 거절할 수 있냐, 따위의 생각을 하면서.

       

       그러다, 별 다를 것 없던 어느 날에.

       

       “TRPG라는 거 해 볼래? 유튜브에서 봤는데, 보니까 내가 더 잘 하겠더라.”

       

       하고, 여자친구가 말했다.

       흥미는 없었지만 거절하지는 않았다.

       

       그녀는 나에게 캐릭터를 만들어 오라고 했다.

       

       배경 설정도 알려주지 않고, 그냥 판타지니까 알아서 짜 오라며 툭 떠넘겼길래.

       집에 돌아와서 흰 종이를 하나 펴 두고 한참을 고민했다.

       

       대체 무슨 캐릭터를 만들라는 말이지, 그냥 판타지라도 장르가 많은데, 이거 만들면 내가 연기를 해야 되는 건가, 대체 기회공격이 뭔데. 기타 등등.

       

       골머리를 앓다가 문득, 생각나는 게 있어서 볼펜을 끄적였다.

       흰 종이 위에 네 글자를 적었다. 바바리안.

       

       내 첫 TRPG, 내 첫 캐릭터인 바바리안은 내 소망을 담은 캐릭터였다.

       

       내가 만약⋯⋯ 몸이 약하지 않았고, 용기로 가득했다면?

       마주한 모든 무례한 사람들의 머리를 반으로 쪼개는 상남자였다면?

       

       재미있는 상상이 아닌가.

       

       그 당시의 나는, 내 불행했던 유년기를 다시 쓰고 싶었는지도 몰랐다.

       지금 평가하자면 좋지 못한 태도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캐릭터와 플레이어는 구분되어야 했다.

       

       엉터리 GM과 엉터리 플레이어가 만났으니 세션의 미래는 불 보듯 뻔했다.

       

       내 캐릭터 바바리안은 적이 나타나면 일단 머리를 쪼개고 봤다.

       npc들이 이야기를 요청해도, 뭔가 가엾은 사연을 떠들려고 하는 것 같아도, 그냥 주사위를 굴렸다.

       

       GM은 수상할 정도로 강력한 npc들을 너무 많이 등장시켰다.

       산골마을 광산을 조사하는데 왜 제국의 황자니 북부대공이니 이런 놈들이 등장한다는 말인가.

       

       내 캐릭터가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 잘생긴 놈들이 대륙의 위협을 다 쓸어버리고 남은 찌꺼기나 정리하는 신세다.

       

       그리고 터졌다.

       

       당연한 일이었다.

       

       

       내 첫 TRPG는 이렇듯 엉터리 TRPG였지만, 뭐랄까. 묘한 기분이 들었다.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움직이는 게 마음에 들었을지도.

       

       아니면⋯⋯.

       

       달동네의 밤하늘 위에는 도저히 그려낼 수 없었던 이야기를,

       이 TRPG라는 놀이를 통해서라면 완성시킬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지도.

       

       그래서.

       

       그래서 나는 TRPG를 좋아하게 되었다.

       

       종이 위에서 펼쳐지는 이 자그마한 연극 속에서, 이야기를 찾고 싶었다.

       

       내 삶의 불행했던 부분을 전부 되갚을 수 있는, 아주 짜릿하고 멋진 이야기 말이다.

       

       ===============================================================

       

       “⋯⋯그 이야기는, 어떤 이야기일 것 같은데?”

       

       “우선은 로맨스가 들어가야죠. 세션에 사랑을 넣으면 재밌거든요.”

       

       “그리고?”

       

       “역경과 고난은 언제나 필요해요. 주인공은 고난을 이겨내고 성장해야 하니까.”

       

       “또?”

       

       “유머가 있어야 돼요. 유머는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을 수 있거든요. 그 자체로 재미있는데다가, 옆에 비극이 붙으면 풍미를 살려주니까.”

       

       “내가 이해한 게 맞다면, GM은 게임의 운영자 역할. 플레이어는 게임을 즐기는 역할, 이지⋯⋯ 너는 둘 중에서 어느 쪽을 하고 싶은데?”

       

       “GM이요. 왜냐하면, 목마른 자가 우물을 파야 하니까.”

       

       “그래서 세상을 만들었구나.”

       

       “네.”

       

       “좋아, 도와줄게. 나도⋯⋯ 마침 찾고 있는 이야기가 있거든. 나중에 나를 위한 세상도 만들어 줄 거지? 지원금, 그만큼이나 독식했으니까 양심이 있으면⋯⋯.”

       

       “알았다니까요.”

       

       휘영청 뜬 달이 자알 보이는 달동네의 난간 위에서,

       

       나와 마탑주는 새끼 손가락을 걸었다.

       

       ===============================================================

       

       남에게 자기 가정사 털어놓기의 치명적인 단점 : 정신 차리고 보면 쪽팔림.

       

       한 3일 정도 마탑주랑 눈을 못 마주쳤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좀 이따가 한 놈 더 올라갑니다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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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therworld TRPG Game Master

Otherworld TRPG Game Master

Another World TRPG Game Master, 이세계 TRPG 게임마스터
Score 8.6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3 Native Language: Korean
I became a wizard of the Illusion Magic School and decided to create a virtual reality with illusion magic to play a tabletop role-playing game (TRPG). It was great to create a virtual reality, but I was in trouble because there were no suitable players. During that time, I received an offer to be the professor from the Royal Academy. The offer was to use illusion magic to fill the students’ lack of practical experience safely. And so, I became a professor at the academy. “Send me back, send me back to that world right now-!” “Outer god, someday an outer god will be our doom, we’ll all die!!” “I am not the bastard of the Redburn Ducal Family. I am the foremost disciple of the Great Namgung Clan, Namgung Qinghui!” But it seems there is a bit of a misunderstanding. This isn’t a spell for dimensional travel, kids. It’s fic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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