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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7

       * * *

       

       

       예카테린부르크의 다양한 연령대, 수비병 모두가 황녀인 아나스타샤 여대공을.

       

       나를 바라보고 있다.

       

       나에게 무언가 바라는 듯했다.

       

       난 그 바람에 응답해 줘야 한다.

       

       

       “여기서 우리가 지면, 저 붉은 역병은 온 러시아를 덮을 것이다.”

       

       

       사실 내가 진다고 해도 내전은 한동안 이어지겠지만.

       

       적어도 여기서는 위기감을 고조시켜야 하니까.

       

       여기서 우리가 지면 저 볼셰비키 정권의 노예가 되고 말 거라고.

       

       

       “그저 말뿐인 저들만의 지상 낙원을 이룰 것이고, 거기에는 너희의 자유도 존중도, 무엇도 없다.”

       

       

       서기장이란 존재를 우상화하며, 그 서기장의 영도 아래에 무엇이든 이룰 수 있다고. 그렇게 선동 당하고 세뇌당한다.

       

       물론 그게 옳을지도 모른다.

       

       서기장의 영도 아래에 개혁하고, 노동자를 위한 나라를 만드는 것도 좋겠지.

       

       하지만 말이다.

       

       그건 러시아제국도 가능했다.

       

       스톨리핀만 죽지 않았다면 충분히 가능성이 보였다.

       

       두마(의회)도 있고 앞으로 노동자들도 목소리를 낼 수 있었다.

       

       스탈린이란 인간 백정 새끼는 자기 권력을 위해 정적들을 모조리 숙청하고 군대를 약체화시켰다.

       

       더 이상의 노동자의 나라가 아니라 권위주의만이 존재하는 한 명의 독재자만이 있는 그런 나라가 되어 버린다.

       

       소련이 무너지고 러시아연방으로 재탄생했지만, 소련시절의 특징은 어디 가지 않았다.

       

       당장 내가 살던 세계가 그리 망해 버리기 전, 러시아의 지도자만 해도 홍차로 정적들을 죽이고, 지지율 140%로 독재하다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했다.

       

       적어도 그런 사태만큼은 막아야만 했다.

       

       

       “하여 우리는 싸워야 한다. 저 근본도 없는 야만한 놈들과 싸워 반드시 승리할 것이다. 나는 너희를 버리지 않을 것이다.”

       

       

       병사들 모두가 내 말에 귀를 기울인다.

       

       어차피 우리에게는 최고의 전력인 체코 군단도 있다.

       

       그리 쉽게 쓰러질 운명은 아니다.

       

       

       “내가 너희 앞에 설 것이다. 나라를 말아먹은 내 아버지의 책임을, 죄를 내가 직접 책임지고 총대를 메겠다! 나를 믿고, 너희 자신을 믿어라. 하여 승리하자!”

       

       

       아나스타샤 여대공, 러시아 황녀의 선언에 병사들의 눈에 이채가 감돌았다.

       

       이제 더는 떨림 따위는 없었다.

       

       체코군단마저 나에게 감화된 듯 가만히 바라본다.

       

       내가 한 말이 과연 어디까지 통할지는 알 수 없다.

       

       어쩌면 저 수비병 중에는 지금이라도 황녀를 넘기는 게 좋지 않을까. 그런 생각하는 자도 있지 않을까.

       

       하여 나도 진심을 보여야만 했다.

       

       자기들보다 작은 소녀가 총을 들고 앞으로 나선다.

       

       당당하게 걸어 참호선에서 얼굴을 빼꼼 내밀고 모신나강으로 볼셰비키를 겨냥한다.

       

       

       “저도 싸우겠습니다!”

       “나도! 저도 싸우겠습니다!”

       “저는 제국군 출신이었습니다. 여대공을 따르겠습니다!”

       

       

       이제 이들은 자랑스러운 제국의 군대였다.

       

       하나둘, 서로 눈치를 보던 병사들도 각자 참호선를 채운다.

       

       붉은 역병이 바다처럼 몰려오고 있다.

       

       체코슬로바키아 군단도 참호선에 설치한 기관총을 점검한다.

       

       자, 오라. 빨갱이들아.

       

       오는 대로 모조리 죽여주마.

       

       내 미래를 위해서라도.

       

       

       * * *

       

       

       

       표트르 크라스노프.

       

       그는 돈 카자크의 아타만으로 추대되고 독일의 지원을 받아 세운 돈 공화국의 지도자였다.

       

       일찍이 빌헬름 2세에게도 직접 편지를 보내 돈 카자크 공화국의 지위도 인정받았다.

       

       그런 그에게 한 통의 편지가 도착했다.

       

       

       “아나스타샤 황녀에게서 편지라.”

       

       

       내용은 간단했다.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형제자매가 볼셰비키에게 처참하게 죽고 시신조차 훼손당했다.

       

       도무지 자신은 볼셰비키와 한 하늘 아래에 함께 할 수 없다.

       

       저 새끼들을 쳐 죽일 때까지 싸움을 멈추지 않을 거다.

       

       자기와 합류해서 볼셰비키에 맞서자.

       

       대충 그런 내용이었다.

       

       

       “아나스타샤 황녀가 이렇게나 용감했나? 아니지. 아무리 볼셰비키라 해도 그렇게 재판도 없이 차르일가를 처형했다는 건데.”

       

       

       심지어 시신도 아무렇게나 처리한 것을 보면. 역시 근본 없는 놈들이다.

       

       그런 놈들에게 거짓말로나마 충성맹세를 했다는 사실이 참으로 치욕스럽다.

       

       하지만 합류하라니. 사실상 돈 공화국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말 아닌가.

       

       아닌가?

       

       여기 보니 뭔가 다른 말도 적혀 있다.

       

       

       -황제국인 러시아 제국이든, 민주주의 러시아 공화국이든, 연방이든, 합중국이든 전후에 결정하도록 하자.

       

       

       합중국이라.

       

       그렇다면 러시아라는 테두리 안에 일원으로서 돈 공화국이 유지된다는 뜻인가.

       

       물론 어차피 볼셰비키에 맞서려고 세운 돈 공화국이었다.

       

       나중에 황녀가 이겨 다시 제정 복고가 되든, 협력해도 그만이다.

       

       당장 황녀가 이런 제안을 한 것 자체가 최소한 세력권을 인정한다는 소리 아닌가.

       

       

       “두마에 자신은 볼셰비키만 처리해도 되니 나 말고 다른 이를 차르로 세워 전제군주제이든 입헌 군주제든, 공화국이든 마음대로 하라. 일단 저 빨갱이들만 잡고 보자. 흠.”

       

       

       이건 좀 귀가 솔깃하다.

       

       

       “예카테린부르크에 볼셰비키들 시신이 십자가에 걸린 것을 보면 무슨 이유가 있는 모양입니다.”

       

       

       확실히 지금 볼셰비키에 맞서는 세력은 너무 나뉘어 있었다.

       

       당장. 크라스노프는 남러시아의 안톤데니킨으로부터 휘하의 제대로 편입될 것을 강요받기도 했고, 후일 아타만 선출에서 낙선하여 독일로 망명하게 된다.

       

       

       “흠, 이 편지가 우리에게만 온 것은 아닐 테고.”

       

       

       아마 다른 세력에게도 갔을 테고,

       

       

       “이것을 가져온 이가 누구라고?”

       “체코 슬로바키아군단이라고 합니다.”

       “그놈들이 미쳤다고 볼셰비키와 손을 잡았을 리는 없고. 황녀도 확실하고. 그놈들은 황녀에게 붙었다는 소리로군.”

       

       

       하기야. 황녀라면 정통성도 충분하겠지.

       

       그럼 차라리 그쪽이 낫지 않은가.

       

       황녀 휘하에 체코군단이 있고.

       

       

       

       * * *

       

       

       아나스타샤의 예상대로 유럽에는 차르일가의 처형소식이 알려졌다.

       

       안톤 데니킨과 아나스타샤의 용서를 받은 볼셰비키들이 열심히 활약한 덕이었다.

       

       원 역사보다 훨씬 빠르게, 게다가 훨씬 소련이란 존재가 어떤 근본도 없는 놈들인지를, 실제 역사보다 더 장대하게 대전쟁 중인 열강들에게 알려졌다.

       

       비록 대전쟁 중이라 하나 이번 일은 각국에도 충격적이었다.

       

       

       “차르 일가가 모조리 도륙당했다고? 재판도 없이?”

       “어떻게 그런 끔찍한 일이!”

       “불태워서 아무렇게나 시체를 내던졌다던데?”

       “뼈를 곱게 빻아서 볼셰비키들이 차에 타서 마셨데!”

       “하느님 맙소사!”

       

       

       원 역사보다 더 빠르게, 무엇보다 생존한 황녀의 증언으로 차르 일가가 처참하게 죽은 것이 널리 퍼지게 된 덕에 유럽은 전쟁 중에도 혼란에 빠졌다.

       

       특히 왕정 국가인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입헌군주국인 영국은 발칵 뒤집혔다.

       

       과거 프랑스 혁명 때보다 달리 더한 야만적인 행위.

       

       물론 차르 일가가 나라를 망쳐 놓은 건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지만. 그렇다고해도 재판도 없이 총살을 넘어 잔인하게 시체를 유기하기까지.

       

       

       다소 소문이 과장되었다는 추측도 난무했지만.

       

       생존자가 황녀 한 명이고, 그 황녀가 증언했다고 퍼지면서 신빙성을 더했다.

       

       협상국들은 이번 일을 그냥 넘기지 못했다.

       

       특히나 대영제국이 그러했다.

       

       왕 멱을 딴 프랑스나 애초에 왕이 없는 미국과 달리 대영제국은 의회가 존재하긴 해도 왕이 분명히 존재하는 국가니까.

       

       대영제국의 군주가 절대적인 권력은 누르지 못하나 그 상징성은 오대양을 아우르는 식민제국의 군주로서 감히 값을 매길 수 없다.

       

       그런 상황에서 그레이트게임의 라이벌이었던 러시아 제국의 차르 일가가 처참하게 죽었다는 소식은 영국도 호들갑 떨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레닌 그자가 이리도 지독하다니!”

       “역시 볼셰비키란 놈들은 상대할 가치조차 없어요!”

       “가만 있자, 이거 독일을 두들겨 팬 후에는 어떻게 되는 거지?”

       

       

       2차 마른 전투를 치르며 독일을 밀어붙이던 협상국이었다.

       

       슬슬 독일을 밀어붙여서 전쟁의 승기를 잡은 시기에 이런 지독한 일이 터졌다.

       

       러시아 내전.

       

       그래. 내전까지는 좋았다, 그런데 차르일가를 그리 쉽게 잡다니. 이런 것이 한번 허용되면 어떻게 되나.

       

       이 선례를 바탕으로 반전세력이 뭔 짓을 할지 모른다.

       

       저 야만스러운 볼셰비키는 그저 거짓말이라고 앵무새처럼 말을 내뱉기만 하고. 심지어 전쟁에서 이탈한 가증스러운 놈들이었다.

       

       그놈들이 전후에 선동하면?

       

       어떻게든 러시아 내전을 질질 끌거나,마침 황녀가 복수의 칼을 갈고 있다고 하니 황녀를 밀어 주는 게 맞지 않을까.

       

       그 어린 황녀가 어디까지 할지는 모르지만.

       

       

       “그게 중요합니까? 연속 혁명을 하겠다고 하지 않습니까.”

       

       

       연속혁명.

       

       황녀의 측근으로 인물들(갱생한 볼셰비키)이 보내온 정보.

       

       무려 러시아를 시작으로 전쟁이 끝나 약체화된 열강에 혁명을 일으켜 붉은 깃발로 유럽을 물들이겠다는 오만하고 장대한 계획.

       

       

       “황녀를 밀어 줘야 할 거 같습니다만.”

       “이거 우리가 지금 독일을 잡을 때입니까?”

       “설마 독일을 살려주자는 겁니까?”

       “지금 꼴을 보면 그 어린 황녀가 어디까지 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 볼셰비키 놈들의 계획을 보시오. 전후에 주요 열강에 빨갱이들을 밀어넣어서 혁명을 일으키겠다고 하지 않소!”

       “미스터 갈리폴리는 좀 조용히 하시오.”

       “너 나와 새끼야!”

       

       

       모든 것을 끝내는 전쟁. 대전쟁.

       

       미국의 지원 덕에 겨우겨우 승기를 잡았으나, 너무 많은 사상자가 나왔다.

       

       만일 저 탐욕스럽고 야만스러운. 볼셰비키들이 권력을 잡은 러시아가 전쟁이 끝나 기진맥진한 유럽을 노리면 어떻게 될까.

       

       물론 가능성의 영역이다.

       

       우크라이나와 폴란드, 핀란드, 발트 3국을 비롯해 많은 땅을 잃고 내부를 수습해야 하는 볼셰비키가 그럴 여력이 어디 있냐 하겠지만.

       

       볼셰비키의 무서움은 그게 다가 아니니까.

       

       볼셰비키가 어디 군사력이 강해서 제정을 뒤집었던가? 마지막 차르 니콜라이 2세가 병신이었다고는 하나 그 틈을 비집고 선동해서 가능한 일이었다.

       

       볼셰비키도 정권을 잡을 수 있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군주의 멱을 따서라도 권력을 얻는다!

       

       이미 한 번 뿌려진 불씨가 어디로 튈지는 아무도 모르는 법이었다.

       

       실제로 전쟁이 길어지면서 내부에서 반전주의 사회세력이 점점 늘어나기 시작하던 시기였다.

       

       못 살겠다고 정말 일어나면?

       

       인정하기 싫지만, 대영제국이 흔들릴 수도 있다.

       

       

       “일단 아나스타샤 황녀랑 접촉을 해 보는 건 어떻겠습니까. 콜차크보다는 당장 최전선에 있는 사람은 아나스타샤 황녀가 아닙니까?”

       “그럼 독일은 언제 끝낼 겁니까?”

       “독일도 잡아야 하지만 전후에 독일에서 못 살겠다며, 또 그 붉은 역병이 돌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심지어 지리적으로 우리보다 러시아에 가까운 나라고, 차르를 비롯해 죄 없는 황자와 황녀를 모조리 도륙했다 하지 않았소?”

       

       

       전후 패배한 독일에서 공산주의자들이 날뛰면 카이저 일가가 멀쩡하겠나?

       

       필시 좋은 꼴은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럼 바로 러시아 혁명 시즌 2로 이어질 것이다.

       

       

       “독일도 누르면서 러시아에도 가능한 역량을 투사해야겠죠.”

       “지금 우리가 그럴 사정이 된다 보시오? 미국 덕에 겨우 잡은 승기요.”

       “일본이 지원하게 하는 것은?”

       “안 그래도 국내에 사회주의 세력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일단은 황녀와의 접촉이 최우선이니, 사람을 보내보지요.”

       

       

       협상국은 황녀에게 우선적으로 사람을 보내보기로 했다.

       

       한편 동맹국의 주축. 독일 제국의 카이저 빌헬름 2세 역시 쫄리기는 매한 가지였다.

       

       

       “니키가 그렇게 죽었다는 말인가.”

       

       

       각자 독일 제국과 러시아 제국의 군주지만 동시에 친척으로 묶인 관계.

       

       하여 차르일가의 처형 소식은 빌헬름에게도 등줄기가 싸늘하게 식게 하였다.

       

       들리는 소식에 의하면 니콜라이 2세는 사지가 찢기고 아무것도 못 하는 앞에서 황후는 볼셰비키에게 강간당해 죽고, 알렉세이는 산 채로 화형을, 황녀들 역시 강간당한 데에 이어 총검에 찔려죽고 시간까지 당했다고.

       

       니콜라이 2세도 마지막에 피눈물을 흘리며 죽었다고 한다.

       

       설마 러시아로 보낸 레닌이 그런 일을 벌일 줄이야.

       

       다른 건 몰라도 패색이 짙은 지금 빌헬름은 황가인 호엔촐레른 가문이 그렇게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온몸을 잠식했다.

       

       자신도 전쟁에 패한 책임으로 황후와 그렇게 죽고, 고명딸인. 루이제도 그런 차마 입에 담지 못할 짓을 당한다면?

       

       안 그래도 루이제와 혼인해버린 하노버 왕조의 에른스트 아우구스트 3세도 때려 죽여도 시원찮을 놈인데. 그런 끔찍한 미래는 싫었다.

       

       

       ‘이거 지금 전쟁을 할 때인가?’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미스터 갈리폴리: 윈스턴 처칠이 밀어붙인 오스만 제국 갈리폴리 상륙작전을 거하게 말아먹으면서 붙은 별명.

    선작, 추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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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Became the Last Princess of the Bear Kingdom

I Became the Last Princess of the Bear Kingdom

Status: Ongoing Author:
I became a Russian princess destined to die in a revolu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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