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itch Mode

EP.70

        

       길고도 지루했던 수업을 마치고 기숙사로 돌아온 밤.

         

       똑딱거리는 시계가 새벽 1시를 가리키는 때였다.

         

       해는 이미 지평선 너머로 떨어지고.

         

       은은한 달빛과 별빛을 머금은 어둠만이 자작하게 내려앉아 있는 방 내부.

         

       고요함이 맴도는 공간을 매꾸는 소음이 있었다.

         

         

       -사각사각…

         

       내 손에 쥐어진 깃펜이 종이 위에 그어지며 나는 소리였다.

         

       잉크가 끊이지 않도록 마법 처리가 되어있는 그것은, 노트 위로 검은색 글자들을 차근차근 새겨넣고 있었다.

         

       그렇게 한동안 팬을 열심히 움직이고 있으면.

         

       별안간 입 밖으로 옅은 한숨이 새어져 나왔다.

         

         

       “후우…..”

         

         

       피로에 찌든 미약한 날숨이었다.

         

       계속해서 팬을 잡고 있었기 때문일까.

         

       손목이 뻐근했다.

         

       나는 졸린 눈을 부비며 잠시 펜을 손에서 내려놓았다.

         

       사각거리던 마찰음이 멈추자, 방 안으로는 다시금 적적한 고요가 들어찼다.

         

         

       “……힘드네.”

         

         

       무심코 내뱉은 혼잣말이 적막을 가르고 나아간다.

         

       나는 책상 서랍을 뒤적이며 속에 숨겨두었던 사멸초 갑을 집었다.

         

       그리고는 한 개비를 꺼내 입에 물었다.

         

         

       -차칵, 치익…

         

       사멸초에 불을 붙이고 숨을 깊게 빨아들인다.

         

       향긋한 약초의 향기가 코끝으로 맴돌았다.

         

       그렇게 잠시 피어오르는 연기를 보고 있으면, 묘한 현자타임이 나를 찾아왔다.

         

         

       나는 내가 공부를 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전생에서도 안 했던 공부를 판타지 세계에 와서 하고 있다니.

         

       실로 통탄스러운 현실이었다.

         

         

       “망할 기말고사…”

         

         

       나는 손가락에 번진 잉크들을 닦아내며 뻑뻑한 눈을 꾹꾹 눌렀다.

         

       내가 전의를 상실한 채로 의자에 늘어져 있던 그때.

         

       닫혀있던 방 문 너머로 노크소리가 들려왔다.

         

         

       -똑똑…

         

       -도련님, 들어갈게요.

         

         

       해맑은 목소리가 들리고, 뒤이어 닫혀있던 문이 열린다.

         

       벌어진 문틈 사이로 나타나는 것은 갈색 양갈래 머리의 소녀.

         

       그녀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부드러운 미소를 입가에 그려냈다.

         

         

       “힘드시죠? 과일 좀 드시면서 하세요.”

         

         

       레이첼은 그런 말과 함께 들고 있던 접시를 내 앞에 놓아주었다.

         

       그릇 안으로는 피로 회복에 좋은 딸기나 레몬 같은 과일들이 정갈하게 플레이팅 되어 있었다.

         

         

       “레이…”

         

         

       배려의 내음이 물씬 풍겨오는 접시에 나는 감동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역시 날 제일 생각해주는 건 레이첼이 아닐까.

         

         

       “후후! 너무 좋아하시는 거 아니에요?”

         

       “고마워… 잘 먹을게.”

         

         

       레이첼에게 심심한 감사의 인사를 표한 직후.

         

       나는 접시에 놓여있던 레몬 한 조각을 집어 입안에 넣었다.

         

       이빨과 이빨에 닿자 탱글한 과육이 톡 하고 터져나갔다.

         

       동시에 뭉개진 파편들로부터 비롯된 시큼한 과즙이 혀를 강타했다.

         

         

       “으으… 잠이 확 깨네.”

         

       “그렇죠? 역시 졸릴 때는 신게 최고라니까요?”

         

         

       그리 말하며 상큼한 미소를 지어보이는 레이첼.

         

       나는 그 레몬 같은 미소에 잠시 멍해져 있다가, 이내 정신을 차리며 고개를 돌렸다.

         

       뭔가 얼굴에 열이 오르는 듯한 느낌이었다.

         

       아무래도 난방을 너무 강하게 틀어놓은 것 같았다.

         

         

       “이런 건 너무 고맙지만… 왜 아직도 깨어있는 거야? 벌써 새벽 1시인데.”

         

       “으음~ 졸리기는 한데 말이죠… 밤늦게까지 공부하시는 도련님을 두고 자는 것도 좀 그렇고…”

         

         

       그런 걸 신경 쓰고 있었나.

         

         

       “난 괜찮아. 먼저 들어가서 자도록 해.”

         

       “……정말요?”

         

       “정말로. 거기다가 너는 아침 일찍 일어나야 되잖아. 피곤할텐데 빨리 자야지.”

         

         

       내가 괜찮다는 의미로 손을 휘휘 저어보이자.

         

       레이첼은 고민에 빠지는 듯 했다.

         

         

       “그럼 도련님은 언제쯤 주무시려고요?”

         

       “나…? 글쎄, 잠이 안 와서 공부라도 하고 있는 거라…”

         

       “……요즘에도 밤에 잠이 안 오세요?”

         

         

       내 말에 표정을 어둡게 물들이는 레이첼.

         

       나는 어색하게 웃어 보이며 소매를 만지작거렸다.

         

         

       “뭐… 불면증은 쉽게 없어지는게 아니라고 하니까…”

         

       “저번에 드렸던 수면제는…?”

         

       “별 효과가 없는 것 같더라고.”

         

         

       수면제의 효과가 돌지 않는 것은 ‘철의 정신’ 때문이지만 말이야.

         

       레이첼은 복잡한 얼굴로 입술을 깨물었다.

         

       내가 잠에 들지 못한다는 사실이 어지간히 마음에 걸리는 모양이었다.

         

         

       “이상하네요… 분명 그날은 곤히 주무셨던 것 같은데.”

         

       “그날이라면…?”

         

       “그날 있잖아요, 도련님이 퇴원하셨던 날.”

         

       “아.”

         

         

       그때를 말하는 건가.

         

       연회장 습격 사건이 있었던 다음날.

         

       내가 레이첼의 품에 안겨서 울다가 잠들었던 날.

         

         

       “그날 얘기는 왜 또 갑자기…”

         

         

       문득 뇌리를 지나가는 수치스러운 기억에 나는 괜히 시선을 돌렸다.

         

       레이첼은 그런 내 반응을 눈치채지 못했는지, 턱을 짚은 채로 깊은 생각에 잠겨있었다.

         

       그렇게 잠시 침묵이 흐르던 와중.

         

       침음을 흘리고 있던 레이첼이 별안간 입을 열었다.

         

         

       “혹시 도련님. 제가 도련님 방에서 같이 잘까요?”

         

       “……?”

         

         

       얘가 지금 뭐라 말한 걸까.

         

       같이 자겠다니. 그것도 나와 같은 방에서.

         

       내가 제대로 들은게 맞는 걸까, 하는 마음으로 미간을 굽히고 있으니.

         

       레이첼이 진지한 눈으로 이쪽을 응시하며 말했다.

         

         

       “제가 그날처럼 도련님을 재워드리면 어떨까 싶어서요.”

         

       “……???”

         

       “침대는 제 방에 있는 걸 옮겨오고, 도련님의 옆에서…”

         

         

       이어서 들려오는 레이첼의 대담한 계획에 나는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을 견디지 못했다.

         

         

       .

       .

       .

         

         

       결국, 동침을 제안하는 레이첼에게.

         

       정말 괜찮다, 수면제도 꼬박꼬박 챙겨 먹겠다, 라는 약속을 하고 나서야 그녀를 물릴 수 있었다.

         

         

       “하아…”

         

         

       진이 쭉 빠져버린 나는 조용히 마른 세수를 했다.

         

       레이첼은 참…

         

       이런 면에서는 뭐랄까… 조금 그렇단 말이야.

         

       알고 그러는 것 같지는 않은데, 그래서 뭔가 더…

         

         

       “……공부나 해야지.”

         

         

       나는 괜한 잡념들을 털어내며 자세를 바로 했다.

         

       다시 책상 앞으로 몸을 붙이고 깃펜을 잡으려던 순간.

         

       기지개와 함께 무심코 뻗은 팔이 한가득 쌓아뒀던 학습지의 탑을 건드렸다.

         

       녀석은 내가 손을 쓸 틈도 주지 않으며 무너져버렸다.

         

       나는 바닥으로 어질러지는 난장판의 향연을 망연히 응시했다.

         

         

       “시발… 왜 이러냐 진짜.”

         

         

       안 그래도 공부하기 싫어죽겠는데.

         

       이제는 학습지까지 말썽이다.

         

       따지고 보면 제때 정리를 해두지 않은 내 잘못도 있겠지만.

         

       그래도 억울한 느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나는 단전에서 끓어오르는 분노를 삭히며 연신 한숨을 내쉬었다.

         

         

       -사그락, 사그락…

         

       비참한 기분으로 바닥을 정리하고 있으면.

         

       별안간 학습지의 무덤 속에 파묻혀 있던 종이 한 장이 나의 시야에 들어왔다.

         

       그것을 발견한 나는 움직이던 손을 멈출 수 밖에 없었다.

         

         

       “이건…”

         

         

       마나 활용의 이론식으로 빼곡히 채워져 있는 여백.

         

       생전에 스승님께서 담당하셨던 ‘전투의 실전’이라는 과목의 학습지였다.

         

       나는 삐걱거리는 몸을 숙여 종이를 집어들었다.

         

         

       이번 기말고사에는 ‘전투의 실전’ 과목이 들어가지 않았다.

         

       강의를 맡으셨던 스승님의 변고로 인해 시험이 취소된 것이었다.

         

       그렇기에 스승님께 받았던 유인물들은 따로 구분하여 서랍에 보관해두었었는데…

         

       아무래도 다른 학습지들과 분류를 하는 과정에서 하나가 섞여 들어간 모양이었다.

         

         

       “……”

         

         

       나는 가만히 선 채로 종이를 만지작거렸다.

         

       방금까지만 해도 생기가 맴돌던 방 안으로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무거운 침묵만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렇게 한동안 굳어있던 나는, 이내 비틀거리며 의자 위로 털썩 주저앉았다.

         

       잔잔했던 내면이 파문으로 물드는 느낌이었다.

         

       나는 스승님의 학습지를 조용히 책상에 올려놓았다.

         

         

       ‘……되도록이면 스승님에 대한 생각은 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최근 들어 환각이나 환청 같은 증상이 잦아지고 있었다.

         

       딱히 이상한 증세는 아니었다.

         

       전생에서도 이렇게 가끔씩 트라우마의 여파가 심해지는 시기가 있었으니까.

         

       거기에 더해 일련의 사건들로 심력을 많이 소모하다 보니, 머리가 오작동을 일으키는 모양이었다.

         

         

       익숙한 일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갑자기 발작이 일어나면 곤란하니, 트리거가 될만한 것들과 거리를 두고 있었다.

         

       스승님에 대한 생각도 그러한 것들 중 하나였고.

         

         

       ‘이렇게 불쑥 튀어나오면 피할 수도 없잖아.’

         

         

       나는 씁쓸한 미소와 함께 중얼거렸다.

         

       스승님의 추도식으로부터 어느새 한 달이 지났다.

         

       수학여행에서 언데드들과 사투를 벌였던게 어제 같은데, 벌써 한 달이라니.

         

       진득한 날숨이 입술 사이로 튀어나왔다.

         

         

       “……시간이 빠르기는 하네.”

         

         

       -띠링!

         

       [좋은 일 아닙니까?]

         

         

       “그런가…?”

         

         

       나는 눈앞으로 나타난 메시지에 시큰둥한 반응을 흘렸다.

         

       그러자 상태창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것처럼 나에게 질문을 던져왔다.

         

         

       -띠링!

         

       [본 시스템과의 계약을 기억하고 계십니까?]

         

         

       “물론 기억하지. 이 세계에서 3년만 제대로 구르면, 네가 내 소망을 이뤄주기로 했었잖아.”

         

         

       -띠링!

         

       [정확히는 이 세상의 ‘진짜 결말’을 보는 것이었죠.]

         

       [그것을 대가로, 저는 당신에게 행복한 삶을 주기로 했고요.]

         

       [그러니 시간이 빠르게 느껴지면 오히려 좋은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목표를 향해 순조롭게 다가가고 있다는 뜻이니.]

         

         

       “그래… 맞는 말이야.”

         

         

       나는 상태창의 지적에 순순히 긍정을 표했다.

         

       하지만 속에서는 여전히 찝찝한 감상이 맴도는 중이었다.

         

         

       진짜 결말, 그리고 행복한 삶이라.

         

       어쩌면 나는 중요한 사실 한 가지를 잊고 지내왔던 걸지도 모르겠다.

         

       이 세계는 나에게 경유지에 불과했다.

         

       모든 계약 조건을 완수하면, 떠나게 될 수도 있는 장소였다.

         

         

       ‘나는… 이곳에 불필요한 정을 붙이고 있는게 아닐까.’

         

         

       나는 복잡한 고민을 곱씹었다.

         

       그렇지 않아도 술렁였던 마음이 더 심란해지는 듯 했다.

         

       애써 혼란스러운 기색을 지워낸 나는 조용히 상태창에게 물었다.

         

         

       “계약이 끝나면… 나는 어떻게 되는 거야?”

         

         

       -띠링!

         

       [질문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모든게 끝나면 나는 이 세계를 떠나게 되는 거야…?”

         

         

       -띠링!

         

       [정확한 답을 드리기는 어렵습니다.]

         

       [당신에게 행복한 삶을 약속 드리기는 했지만, 그것이 어떤 형태를 하고 있을지는 본 시스템 또한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 세계에 계속 머무를 수도 있고, 다른 세계로 떠나게 될 수도 있겠죠.]

         

         

       “그러니까, 너도 잘 모른다는 소리지?”

         

         

       -띠링!

         

       [그렇습니다.]

         

         

       “이거 사짜 냄새가 나는데… 너 나한테 사기치는거 아니야?”

         

         

       -띠링!

         

       [못 믿으시겠다면 지금 당장 계약을 파기 시키셔도 됩니다.]

         

       [저는 단 한 번도 당신에게 계약을 강요한 적이 없습니다.]

         

         

       “이제 와서 그러겠냐.”

         

         

       나는 피식 웃음을 흘리며 의자에 등을 기대었다.

         

       잠연히 미간을 짚은 채로 어수선한 머릿속을 정리하고 있으니.

         

       허공에서 알짱거리던 상태창이 몇 마디를 더 얹어왔다.

         

         

       -띠링!

         

       [농담이 아닙니다.]

         

       [만약 계약을 이행하는 과정이 너무 힘들다면, 언제든지 계약을 파기시키셔도 됩니다.]

         

       [계약을 파기하면 당신의 영혼은 다시 사계로 돌아가겠지만… 아무런 고통도 없을 겁니다.]

         

       [편하게 눈을 감으실 수 있도록 돕겠습니다.]

         

         

       “하하… 도망치고 싶으면 언제든지 도망치라는 말이네?”

         

         

       -띠링!

         

       [그렇습니다.]

         

         

       “그래… 뭐, 정말 힘든 순간이 오면 생각해볼게.”

         

         

       나는 상태창에게 그리 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한쪽이 일방적으로 계약을 파기하고 도망칠 수 있다니, 괜찮은 조건이었다.

         

       물론 도망칠 정도로 내가 내몰리는 상황은 오지 않는게 좋겠지만…

         

         

       “……어렵네.”

         

         

       생각할 것이 많은 밤이었다.

         

       세계의 결말 이후, 내가 맞이하게 될 운명.

         

       그리고 상태창이 내 손에 쥐어준 도망친다는 선택지.

         

       결국 나는 아침이 밝아올 때까지 혼자 뜬눈으로 밤을 지새워야만 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2024.2.16
    리메이크 완료
    다음화 보기


           


A Depressed Kendo Player Possesses a Bastard Aristocrat

A Depressed Kendo Player Possesses a Bastard Aristocrat

A Depressed Kendo Player Possessed by a Bastard Aristocrat DKPBA 망나니 귀족에 빙의한 우울증 검도 선수
Score 4.0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Don’t worry, Mom.

This time I will be truly happy.

Comment

Leave a Reply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 Required fields are marked *

Options

not work with dark mode
Res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