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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70

       

       

       

       

       

       

       

       

       아리엘이 끓여낸 국물로 텅빈 속을 달랜 르미앙이 오후의 그늘 아래서 다시금 잠에 들었고, 모닥불 옆에 옹기종기 모여든 우린 작금의 사태에 대한 논의를 펼치고 있었다.

       

       “허어…. 그, 그럼 데론 공자가 대공녀님을 죽이려 했고, 실패한 후에 도망쳤다… 이 말씀이시군요.”

       “…어떻게 그런 파렴치한 짓을 저지를 수가 있지? 나빴어. 정말.”

       

       르미앙에게 들은 것을 토대로 대략적인 흐름을 전해주었고, 마지막으로.

       

       “그리고 아마 데론이 대공녀님을 찾고 있는 것 같아.”

       

       앞으로 벌어질 흐름에 대한 것도 전해주었다.

       

       “뭐…? 설마, 대공녀님을 죽이려고?”

       “그렇겠지.”

       

       아리엘의 경악서린 물음에,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가만히 듣고 있던 레이첼이 잠든 르미앙에게로 시선을 옮기며 말했다.

       

       “돕지 않는다면 굶어 죽든, 죽임을 당하든, 둘 중 하나겠군요.”

       “그런 셈이지.”

       

       만약 대공가에서 별다른 조치를 취하고 있지 않다면, 르미앙의 죽음은 사실상 비공식적인 선고를 받은 것과 다를 바 없었다.

       데론이라면 눈에 불을 켠 채, 찾고 있을 테니까.

       물론 대공가에서 데론을 추격하고 있는지, 어쩌면 이미 붙잡아 대공성의 지하 감옥에 가뒀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랬으면 좋겠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르미앙을 이 죽음의 땅에 내버려두고 가는 것은 인간된 도리에 어긋나는 일임은 분명했다.

       

       “하오나… 어째서 이리도 조용한 걸까요. 대공녀님이 이 지경이 될 정도면 북부령 전체가 떠들썩해야 할진데 말입니다.”

       “…위대하신 로건 대공께서 떠들썩하길 바라지 않는 거겠지.”

       “대체 어째서…?”

       

       렌들러가 그리 물었지만, 답을 해줄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안 찾는 것인지, 못 찾는 것인지는 대공가의 사람만이 알 테니까.

       침묵과 고요를 택한 것에 대한 이유는 로건 대공만이 알 테니까.

       단언할 수 있는 것은, 지금 그녀를 돕지 않는다면 르미앙은 이 버려진 땅에서 쓸쓸히 죽는다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데론이란 칼이 흉흉한 날을 벼리고 있다면, 그녀를 돕는 것이 단원들을 위험에 빠뜨릴지도 모를 일이기에 단원들의 의견이 가장 중요했다.

       

       다소곳이 누운 채, 잠이 든 르미앙을 보았다.

       팔과 다리에 멍과 상처가 가득하다.

       참으로 기구한 생이 아닐 수 없다.

       폭력과 학대의 희생양이 되어 고통을 받다가, 그것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바람마저 짓밟힌 채 이 버려진 땅에서 고독한 죽음을 맞이할 뻔한 인생.

       전생의 나도 ‘기구한 생’으로썬 한가닥한다고 자부하지만, 르미앙의 생에 비하면 새발의 피처럼 느껴졌다.

       세상이 나서서 그녀를 억지로 까내리는 듯한 느낌.

       그리고 그 기구한 생에 나의 기권이 일조한 것 같아 마음이 무거울 수밖에 없었다.

       

       “다들, 어떡하면 좋겠어?”

       

       단원들을 아울러보며 물은 질문에, 레이첼이 주변 일대를 둘러보며 먼저 답했다.

       

       “만약 추격자가 있다면 한 곳에 오래 머무르는 건 피하는 게 좋을 겁니다.”

       

       이어, 렌들러가 답했다.

       

       “사냥꾼에게 들어 보니 멀지 않은 곳에 루겐이란 큰 마을이 있더군요. 그곳에서 수레 한 대를 사서 대공녀님을 모시는 게 좋을 듯 합니다. 외부 시선도 피할 겸 말입니다.”

       

       마지막으로 아리엘이 고개를 주억이며 당차게 답했다.

       

       “큰 마을이라면 효능이 뛰어난 약재를 구할 수 있을 거야. 그걸 달여서 드리면 되겠다!”

       

       르미앙을 돕는 것에 대해 우려를 표명하는 이가 있으면 어쩌나…라는 걱정이 무색한 대답들이었다.

       돕느냐, 돕지 않느냐.

       애당초 후자의 경우를 제외해버린 단원들이었고, 한발 나아가 ‘어떻게’ 돕느냐에 대한 답을 전하는 단원들에,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답해주었다.

       괜한 걱정을 했던 모양이다.

       

       “좋아. 그럼 바로 이동하자.”

       

       로건 대공에게 르미앙을 데리고 갈지 말지는 차후의 문제였다.

       당사자의 의견을 듣지 못 했으니까.

       우선은 혹여 모를 위험에 대비해 그녀를 데리고 장소를 이동하는 것이 중요했다.

       당사자의 의견은 그곳에서 들어도 늦지 않으리라.

       그렇게 논의를 마친 우린, 야영지를 정리한 후 곧장 루겐이란 마을로 향했다.

       

       각자의 짐을 짊어진 채로.

       

       

       

       **

       

       

       

       《죽어.》

       

       죽을 거야….

       

       《어서 죽으라고. 너 같은 건 없어지는 게 도와주는 거야.》

       

       알아….

       안다고….

       그러니까 재촉하지마.

       

       《엄한 사람들한테 민폐만 끼치잖아? 왜, 또 소중한 사람 잃고 싶은 거야?》

       

       …잃고 싶지 않아.

       더 이상, 아무도.

       

       《그래. 그러니까 죽는 거야. 네 수명이 길어질수록 소중한 이의 수명은 줄어드는 거라고. 소중한 이의 수명을 갉아먹으면서까지 살고 싶어?》

       

       그러고 싶지 않아.

       그래서 뛰쳐나온 거잖아.

       그러니까 그만….

       나 좀 그만 괴롭혀…….

       

       《뭘 꾸물거려? 길게 끌 거 없잖아? 그냥 절벽에서 뛰어내려. 아니면 유리조각으로 손목을 그어버리라고.》

       

       ……급할 거 없잖아.

       이제, 혼자인걸.

       아무도 없는걸.

       

       《왜, 남의 목숨 갉아먹어놓고도 살고는 싶은 거야? 웃겨. 정말.》

       

       죽어가고 있잖아….

       이제 얼마 남지도 않았어….

       그만….

       나 좀 쉬게 내버려둬.

       

       《염치라곤 정말 눈곱만큼도 없구나? 네년 저주 때문에 로니카가 죽었고, 네년 저주 때문에 마리엔도 죽었어. 근데도 넌, 살고 싶은 거야?》

       

       내가 저주에… 저주 같은 거에 걸리고 싶어서 걸린 거 아니잖아.

       내 잘못으로 걸린 것도 아니잖아.

       고작 4살이었어.

       내가 누구인지도 모르던 4살이었다고.

       저주란 게 뭔지도 모르던, 괴인족이란 게 무엇인지도 모르던 4살배기 꼬마였다고…!

       

       《그래서? 어쨌든 저주에 걸린 건 너잖아? 네가 로니카와 마리엔을 죽인 거잖아?》

       

       ……하.

       그래.

       맞아. 

       내가 죽인 거야.

       그러니까 이제 나도 죽어가고 있잖아.

       대체, 대체 뭘 더 바라는 거야?

       

       《시간 끌 거 없다는 거지. 쉬고 싶다며? 편히 쉴 수 있는, 우리 모두가 아는 쉬운 방법이 있잖아?》

       

       …그래.

       죽어줄게.

       그러면 되잖아.

       

       《그렇지. 잡아든 유리조각으로 손목을 그어버려. 이제 전부 끝내는 거야. 지긋지긋한 삶, 너도 바라지 않잖아?》

       

       ….

       

       …….

       

       ……….

       

       《뭘 망설여? 너, 정말 웃기구나? 설마, 살고 싶었던 거야?》

       

       흐윽….

       

       《죽기 싫으면서 그동안 죽고 싶다며 그런 가증스런 야단을 부렸던 거야?》

       

       흐으윽…….

       

       무서워….

       

       죽는 거, 너무 무섭다고….

       

       그리고 죽고 싶어 죽는 거랑 흐윽… 살기 힘들어 죽는 건 다르잖아….

       

       죽는 게 기쁜 사람이 어디 있어…….

       

       흐윽….

       

       나도, 나도 남들처럼 살고 싶었단 말이야…….

       

       《꿈도 야무지구나? 넌 절대 행복해질 수 없어. 넌 절대 살아서도 안 돼. 그게 네 운명이야.》

       

       흐으윽….

       

       살고 싶어….

       

       나도 살고 싶었다고….

       

       행복해지는 것까진 바라지도 않아.

       

       그냥….

       

       고통스럽지만 않게 살고 싶어…….

       

       마리엔의 부탁대로, 아프지 않고 싶었다고…….

       

       그러니까, 제발….

       

       죽으라는 닦달 좀 그만해….

       

       죽고 싶어서 죽는 거… 아니니까……….

       

       이미 외로이….

       

       홀로 메말라 죽어가고 있으니까….

       

       

       *

       

       

       눈을 떴다.

       쇠약해진 영혼이, 피폐해진 정신이 만들어낸 또 다른 자아와 끝이 없는 줄다리기를 하던 그날로부터, 르미앙이 눈을 떴다.

       묘연한 부유감이 들었다.

       뜨인 시야에 보인다.

       울창한 숲 속의 풍경이 파도처럼 일정한 운율에 따라 넘실거리는 것이.

       위로 올랐다가 아래로 꺼지고, 다시 올라갔다가 다시 아래로 꺼지며 천천히 지나간다.

       모처럼 보는 푸른 숲이었고, 숲이란 하늘에서 날고 있는 것만 같았다.

       

       온기가 느껴졌다.

       무언갈 품에 안은 것처럼, 따스한 온기가 느껴졌다.

       그리고 고개를 기대고 있던 따스한 벽에서 작은 진동이 들려왔다.

       

       “저긴가?”

       “호오, 빠르게 이동한 덕에 마을의 초입이 보이는군요. 하마터면 밤길을 걸을 뻔했습니다. 허허.”

       “…렌들러? 자신감 넘치는 모습은 보기 좋지만, 앞으로 선두에 서지 말아주었으면 좋겠군.”

       “허, 허허…. 소, 송구스럽습니다요. 분명 저쪽 길이라 했던 거 같은데…….”

       

       무얼까.

       어째서 하늘을 떠도는 듯한 부유감이 느껴지고, 따스한 온기가 느껴지는 걸까.

       불이 피워진 것도 아닌 듯한데.

       햇볕이 내리쬐는 정오도 아닌 듯한데.

       이 따스한 벽은 대체 뭘까.

       그리고 이 따스한 벽은 어째서 자신을 업고 있는 걸까.

       아래로, 아래로 하염없이 추락하던 자신을 든든히 지탱하고 있는 팔은 누구의 것일까.

       

       “공자님? 힘드시다면 제가 업겠습니다.”

       “…마을의 초입이 보이는 이제 와서? 다 차려진 밥상에 수저 하나를 올리겠다는 속셈이 뻔히 보이는군. 스승이시여.”

       “……아쉽.”

       “그래?! 레이첼! 아쉽다면 나 업어줘어-! 다리 아파.”

       “저는 제 제자만 도와드립니다. 영애님께서도 제 제자가 되어 굴러보실….”

       “다리 멀끔히 낫음!”

       

       소란스레 들려오는 경쾌한 소리들.

       수십 일간 울음소리만 들어야 했던 더러운 귀를 깨끗이 정화시키는 것만 같은 맑은 소리였다.

       그리고 제 둔부를 지탱하고 있는 팔과 제 육신을 업고 있는 등에서 느껴지는 온기들.

       수십 일간 지독한 냉기 속에서 몸서리쳐야 했던 지난 날을 녹이는 것만 같은 포근한 온기였다.

       

       “…….”

       

       울컥.

       눈물이 차올랐다.

       보이는 모든 것들이 아름다워.

       들리는 모든 것들이 정겨워.

       느껴지는 모든 것들이 믿기지 않아.

       그리 눈물이 차올랐다.

       

       도움을 거절했음에도, 전해지는 도움이 감격스러운 자신이 너무도 가증스러워, 너무도 가여워 눈물이 차올랐고.

       그 너른 벽에 얼굴을 파묻은 르미앙은 소리 죽여 울어야 했다.

       

       “…….”

       

       그리고.

       

       일행의 후방에서 따르던 엘든은 르미앙이 편히 울 수 있도록 말없이 걸음을 늦춰 일행들과 거리를 벌린다.

       

       마음껏 울 수 있도록.

       속에 든 설움을 제 등에 쏟아내도록.

       

       그리 거리를 벌린 엘든은 르미앙의 흐느낌에 맞춰 천천히, 루겐 마을의 초입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저벅.

       

       저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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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migrated Into A Tragic Romance Fantasy

Transmigrated Into A Tragic Romance Fantasy

후피집물의 후회캐가 되었습니다
Score 10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4 Native Language: Korean
I was curious about what a female-oriented tragic romantic fantasy was like, so I skimmed through only the free chapters. And then… “…Ha.” I found myself transmigrated into one of the main male characters, destined for tears of regret, exhaustion, and obsession. So, the first thing that had to be done was… “I, Elden Raphelion, hereby declare my withdrawal from the competition for the betrothal of the Third Northern Duchess.” To escape this traged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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