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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70

     

    “자자, 앉으시오. 내 고트베르크 선생에게는 어떤 말로 감사를 표해야 할지 모르겠소.”

     

    팔켄하인은 반갑게 나를 맞으며 따뜻한 차를 내주었다.

     

    음, 레몬.

     

    원래 별로 안 좋아했는데. 요즘 달달한 것만 먹다 보니 어째 점점 입맛이 바뀌어 가고 있다.

     

    원래 나는 상당한 미식가인데 말이야.

     

    “뭘요. 탈모약은 지난 청문회에서 저를 도와주신 정당한 대가였지요.”

     

    “하하, 천금으로도 못 살 물건을 말 한마디로 살 줄은 몰랐소이다.”

     

    “반가워 해주셔서 기쁘긴 합니다만.”

     

    “음.”

     

    팔켄하인은 무슨 의미인지 안다는 듯 인자한 미소로 고개를 끄덕였다.

     

    “출근한 치유사들이 얼마 없더군요. 실례가 되겠지만 파벌의 상황을 여쭈어봐도 되겠습니까.”

     

    팔켄하인은 씁쓸한 미소를 짓고는 덤덤하게 설명했다.

     

    “선생이 예측하는 그대로요. 전하께서 퇴궁당하신 후 많은 이들이 다른 파벌로 이직했소이다. 2황자파의 최장점은 추가 보수였소. 예산 사용을 승인할 전하께서 안 계시니 기본급만 받고서야 메리트가 적어졌지.”

     

    이러니저러니 해도 게오르크가 돈 모으는 재주가 있었던 건 확실하다.

     

    결투 재판에서도 그만한 재력을 보여줬다.

     

    토진궁에 귀족들도 많이 오간 걸 보면 항상 사업거리를 만들고 있었겠지.

     

    “팔켄하인 경께서는 안 따라가셔도 괜찮았습니까?”

     

    “황족의 퇴궁은 꽤나 엄격한 조치요. 동행할 수 있는 호위기사는 셋, 소지할 수 있는 물건은 금화 열 개가 전부외다.”

     

    “3년간 주치의의 케어도 못 받으며 방랑자 신세군요. 확실히 빡세네요.”

     

    “그 게오르크 전하시니 어디서 병사하실 일은 없겠소만, 이렇게 되었으니 나는 할 일이 없어져 버렸소.”

     

    문득 팔켄하인의 책상 위에 올려진 서류 더미 아래의 봉투 하나가 눈에 띄었다.

     

    “그렇다고 퇴직까지 고려하십니까?”

     

    “하하. 사실 은퇴할 때는 진작 지났소. 내의원의 왕 노릇에 맛들려 조금만 더 해보자 미루다가 여기까지 온 게지.”

     

    팔켄하인이 자신의 사무실을 한 바퀴 쓱 둘러보았다. 가득한 추억을 떠올리는 듯했다.

     

    “권력을 잃고 은퇴한다면 나를 찌를 불한당은 틀림없이 알베리치일 거라 생각했건만.”

     

    “송구합니다. 의도치는 않았습니다.”

     

    내 사과에 팔켄하인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손을 내저었다.

     

    “아니, 선생을 탓한 게 아니오. 오해가 있었던 모양이로군.”

     

    “오해입니까?”

     

    “내의원의 2황자파가 몰락한 건 선생 때문이 아니오. 전하가 안 계셔도 내 조수와 제자들이오. 3년 정도는 보수가 깎여도 충성할 이들은 있었지. 그 핵심축 치유사들을 잘라간 건 다른 이였소.”

     

    내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내 행동의 여파로 벌써 수많은 암투가 발생했었다는 의미였다.

     

    내의원에 그렇게 약삭빠른 치유사가 또 있었나.

     

    “그게 누굽니까?”

     

    “1황자이자 현 황태자인 권터 전하의 주치의, 사이먼 심판관이오.”

     

    사이먼. 청문회에서 본 적 있다.

     

    치유사답지 않게 새까만 후드를 뒤집어쓰고 흉흉한 분위기를 풍겼기에 기억한다.

     

    심판관이라는 호칭은 그가 내의원에 오기 전에 유명한 이단심문관이었기 때문에 붙었다고 한다.

     

    “1황자파가 2황자파를 공격했다는 말씀입니까?”

     

    “내의원 안에서라면, 그렇소. 내 치유사들은 대부분 그에게 뺏겼고, 그나마 남은 이들은 묘한 사건에 휘말려 경직됐지.”

     

    “권터 1황자가 내의원까지 그런 술수를 썼다고는 생각하기 힘들군요.”

     

    “사이먼의 독단 같소. 그는 파벌을 늘리는 데 늘 미온적인 1황자의 태도에 불만이 많았소. 내의원에서 입지를 늘릴 좋은 기회라고 여겼다 생각하오.”

     

    대체 내의원 주치의들은 환자를 치유할 생각은 안 하고 뭘 하고 다니는지 모르겠다.

     

    “이대로 있으면 골수까지 빨아 먹힐 지경이외다. 비참하게 쫓겨나느니 지금이라도 명예를 지키고 퇴직할 생각이오. 진작 손주나 돌보며 지냈어야 했을지도 모르겠소.”

     

    팔켄하인이 씁쓸하게 말했다.

     

    “팔켄하인 경은 그에 만족하십니까?”

     

    “삶은 점점 만족과 타협하는 과정이외다.”

     

    그는 이미 부리가 나간 독수리였다.

     

    실력과 경험은 갖췄지만 패기를 잃고 젊은이들에게 쪼아 먹힐 일만 남은 늙은 독수리 말이다.

     

    팔켄하인의 힘 없는 말을 끝으로 정적이 잠시 맴돌던 때였다.

     

    ―쿵.

     

    예고도 없이 정적을 깨고 사무실 문이 활짝 열렸다.

     

    복도에서 시꺼먼 후드를 뒤집어쓴 치유사가 눈동자만 움직여 나와 팔켄하인을 쳐다보고 있었다.

     

    뚜벅뚜벅, 그가 걸음을 옮기자 높은 구두굽이 짙고 탁한 소리가 났다.

     

    사이먼 심판관이 우리의 앞에 섰다.

     

    “주군을 따라 퇴궁할 준비는 되었는가, 팔켄하인 경.”

     

    얼음 동굴에 지진을 일으키는 듯한 그의 강압적인 목소리를 들은 팔켄하인이 고개를 숙였다.

     

    “시간은 충분히 주었다. 내의원 최장기간 근무 주치의로서 예우를 받고 싶다면 지금 그 의자에서 엉덩이를 떼는 게 좋다.”

     

    “으, 으음.”

     

    주케토를 든 주름진 손이 떨린다.

     

    “이 사무실은 일성궁 소속 치유사들이 대의를 위해 사용하게 될 것이다. 권터 황자 전하를 위하여.”

     

    뭐? 잠깐만.

     

    “지금 그 이야기는 그냥 듣고 지나칠 수 없겠는데.”

     

    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사이먼과 대치했다.

     

    그의 안광 없는 탁한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이 사무실은 월광궁에서 접수할 예정이야. 앰브로시아 자매님의 허가도 받았어.”

     

    “고트베르크. 끼고 빠질 장소를 구분할 줄 알아야 이로울 것이다.”

     

    “조언은 고맙지만 내가 낄 자리가 맞아서. 난 지금 당장 이 사무실이 필요해.”

     

    “어째서인가?”

     

    그야 내일 출근하면서 계단을 올라가지 않기 위해서지.

     

    “황제 폐하께 진상할 약제를 만들기 위해서야. 황명을 거스를 불온한 생각은 않겠지?”

     

    뚜벅.

    사이먼이 내 앞으로 한 걸음 옮겼다.

    그의 눈의 흉터가 위협적으로 다가왔다.

     

    “사무실을 옮기라는 황명은 없었을 터다.”

     

    짜식 예리하네.

     

    이단 심문을 하던 친구라 그런지 화술이 능숙하다.

     

    “고트베르크, 일성궁과 토진궁의 일이다. 네가 끼어들 틈은 없다.”

     

    “진짜 없나? 내가 판단에 확신이 안 서서 그런데.”

     

    나는 즉시 깃펜을 들어 근처의 종이에 글자를 휘갈겼다.

     

    내의원에 분쟁이 있으니 현명한 판결을 부탁드린다는 메시지였다.

     

    그것을 팔켄하인의 방에 있던 전서구 한 마리의 다리에 매달며 내용을 사이먼에게 보이도록 펼쳐줬다.

     

    “직접 물어봐?”

     

    황제에게 직통으로 날아가는 전서구다.

     

    내 미친 행동을 보고 사이먼도 잠시 입을 다물었다.

     

    겨우 내의원의 파벌 다툼 따위로 황제의 심기를 쓰게 해서야 모든 파벌이 점수를 깎아먹을 것은 당연지사다.

     

    사이먼도 나도 각자 주군에게 상당한 벌을 받겠지.

     

    응, 갑질해 봐. 자폭하면 그만이야 작전이다.

     

    “…어차피 팔켄하인 경이 수락하면 종료되는 건이다. 그 전서구를 날린다 한들 어떤 효력도 발생하지 않는다.”

     

    사이먼이 핵심을 짚었다.

     

    내가 자폭한들 황제에게 쿠사리 먹은 권터가 사이먼을 혼낼 뿐이고, 사무실이 그의 것이 됨은 변함이 없다.

     

    하지만 굳이 그 사실을 언급했다는 건 쫄리긴 쫄리는 모양이다.

     

    나는 침묵을 지키던 팔켄하인을 돌아보며 말했다.

     

    “팔켄하인 경, 정말 이대로 퇴직하실 생각이십니까?”

     

    “…으음.”

     

    그의 시선이 사직서로 향한다.

     

    “저 없으면 탈모약은 어쩌시게요.”

     

    “그건… 포기해야 하겠지.”

     

    “팔켄하인 경의 퇴직은 내의원에 있어 큰 손실입니다. 성호만큼이나 경지 높은 치유사가 그만두시면 그만큼 나을 수 있었던 환자가 한참 더 병마에 시달리겠지요.”

     

    내 말에 팔켄하인의 눈에 생기가 스며들었다.

     

    “성호께 지도받을 수 있었던 치유사들의 수준도 함께 떨어지겠지요.”

     

    나는 그에게 비유를 담아 말했다.

     

    “막 자라기 시작한 밭은 물을 주어야 자라지 않겠습니까.”

     

    팔켄하인이 꽉 다문 입술을 끌어당겼다. 오래 잊었던 초심을 떠올린 모양이었다.

     

    그도 젊은 시절 처음 치유사가 되어 환자를 고쳤을 때가 있었겠지.

     

    그리고 그 경험은, 내의원에서의 머리 아픈 파벌 싸움보다 훨씬 의미 있는 일이었을 것이다.

     

    내가 그에게 던진 말은, 월광궁의 시니어 치유사로 와달라는 스카우트 제의였다.

     

    회사로 치면 전무 직으로 헤드헌팅이다.

     

    어차피 내의원의 2황자파가 없어진다면 내가 갖는 편이 당연히 낫고, 팔켄하인 정도의 실력자가 하급 치유사를 끌어주면 순식간에 체계가 잡힌다.

     

     

    그리고 머리털을 의미한 것도 맞았다.

     

    탈모약도 인질로 삼았다.

     

     

    잠시 고민하던 팔켄하인은 마침내 서류철로 사직서를 완전히 덮어버리고는 사이먼에게 자신 있게 대답했다.

     

    “퇴직은 없소.”

     

    “뭣이라.”

     

    “내의원에서 2황자파가 소유한 그 어떤 자원도 1황자파에 내줄 생각은 눈꼽만큼도 없소이다. 썩 꺼지시오!”

     

    팔켄하인의 대답을 들은 사이먼의 표정이 순식간에 악귀처럼 변했다.

     

    그러기도 잠시, 다시 무표정으로 돌아온 그는 준비 동작도 없이 고음을 내질렀다.

     

    “악마 놈들!!”

     

    “아이씨 깜짝이야.”

     

    왜 갑자기 소리를 질러 지르기는.

     

    덕분에 손에 들고 있던 걸 놓쳐버렸다.

     

    ―푸드득

     

    어, 전서구.

     

    나는 창밖으로 날아가는 비둘기를 확인하고 사이먼을 돌아보았다.

     

    “형씨, 저거 형씨 때문에 간 거야?”

     

    “뭣, 안 돼!!”

     

    사이먼이 허겁지겁 창문으로 뛰어갔지만 이미 전서구는 황제의 천황궁을 향해 쏜살같이 날아간 후였다.

     

    “악마 놈! 저걸 진짜로 폐하께 보낼 심산으로 장치해 놓다니 제정신이냐!”

     

    “누가 누구더러 악마래. 지금 목 꺾은 형씨 꼴이 훨씬 악마 같아.”

     

    “용서치 않는다! 악마는 토벌하겠다!!”

     

    사이먼은 잔뜩 화를 내고는 발을 쿵쿵대며 돌아갔다.

     

     

    나는 팔켄하인을 돌아보며 악수를 청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팔켄하인 경.”

     

    “저 또라이에게 내 사무실을 내줄 순 없지. 끝까지 항쟁하겠소, 고트베르크 선생.”

     

    나는 그와 손을 맞잡았다.

     

     

     

    그리고 다음 날.

     

    “즉, 짐이 너희 두 주치의 중 누가 더 우수한지 판결해달라 이 말인가.”

     

    나는 사이먼과 함께 황제의 앞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사이먼은 고개를 숙인 채로 악마 놈이라고 반복해서 중얼거리고 있었는데, 나를 향한 악의를 쏟아붓는 듯하다.

     

    “내의원에서 일어난 사소한 사고이옵니다. 폐하, 무시하고 넘어가셔도 괜찮으신 건으로 아뢰며…”

     

    “간단하지 않은가.”

     

    황제가 앰브로시아의 말을 끊고는 나와 사이먼을 향해 명령했다.

     

    “주치의는 주군의 건강을 지키는 자다. 각자 특기 이외의 새로운 방법으로 주군을 현재보다 건강한 용태로 만들어 보아라.”

     

    “폐하, 새로운 방법이라 하시면.”

     

    앰브로시아의 질문에 황제가 희미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사이먼은 치유술, 고트베르크는 의학 이외의 방식을 개발하라는 뜻이다.”

     

    “새로운 방식이라….”

     

    사이먼이 곤혹스러워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야 사람이 건강해지는 가장 직관적인 방법은 치유주문이니 당연하다.

     

    “한 가지 더, 승자의 방식은 짐도 채용해 쓰도록 하겠다.”

     

    황제는 즐거운 쇼라도 관람하듯 손쉽게 말했다.

     

    그의 폭탄 발언에 가신, 주치의들이 술렁였다.

     

    은근히 충동적인 면이 있는 황제였다.

     

    ‘재미있겠는데.’

     

    나는 일이 커진 덕에 오히려 기회가 찾아왔다고 느껴졌다.

     

    “황명을 받들겠습니다.”

    “받들겠습니다.”

     

    나와 사이먼이 대답했다.

     

    지금까지 내의원에서 보여준 의학― 약제를 통한 치료 이외의 방법으로 아셀라의 건강 상태를 보다 양호하게 한다.

     

    아이디어는 바로 생각났다.

     

    ‘요리할 시간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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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Doctor Cured The Villainess And Ran Away

The Doctor Cured The Villainess And Ran Away

주치의는 악녀를 고치고 도망쳤다
Score 3.6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Becoming the physician of the villainess who brought about the world’s destruction, I tried to escape to survive, but the reactions were stran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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