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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70

       엘리의 눈이 크게 떠졌다.

       

       “너…대체 어쩌다….”

       

       막대한 신성력을 바탕으로 다양한 권능을 부리던 작은 체구. 녀석의 로브가 벗겨지며 드러난 것은 절대 잊을 수 없는 분홍 머리의 엘프 소년이었다.

       

       모험가로서의 마지막 의뢰. 황혼을 삼키는 자의 지부 토벌 과정에서 만난 실험체였으니까.

       

       사랑의 여신은 사랑을 모르는 아이마저 사랑하는가.

       

       이 의문을 풀기 위해, 종족 상관없이 분홍 머리를 지닌 아이들을 모아 철저하게 감정을 거세시킨다는 미친 실험의 희생자.

       

       ‘아마 요나도 그중 하나였겠지.’

       

       다만, 눈앞의 소년을 똑똑히 기억하는 이유는 그래서가 아니다.

       

       한창 황혼을 삼키는 자가 불러내 폭주시킨 계층 수호자와 싸우던 도중, 그녀의 등 뒤를 찔러 기어이 한쪽 팔을 잃게 만든 장본인이라서다.

       

       소년이 엘리의 등을 찔렀던 야수신의 성물을 흔들며 말했다.

       

       “누나는 우리를 구해줄 수 없어. 만약 그러고 싶다면…내 손에 죽어줘 부탁이야.”

       

       “…….”

       

       엘리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 무력한 실험체 소년이 이렇게 강해지기까지 어떤 일을 겪었는지 상상조차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구해준다 약속해 놓고, 삶의 이유를 앗아간 것은 물론 더한 지옥에 밀어 넣다니.

       

       엘리의 눈앞에 있는 것은 단순한 적이나, 무고한 피해자가 아니다.

       

       과거의 죄악이었지.

       

       죄책감에 몸이 절로 떨리는 엘리였으나, 순순히 죽어줄 수는 없었다.

       

       죽고 싶지 않다는 이유도 있었지만…그보다 먼저 생각나는 것은 요나의 얼굴이었다.

       

       자신을 원수로 여기는 소년과 달리 자신을 은인으로 여기는 요나다.

       

       요나야말로 그녀가 구할 수 있었던 유일한 아이였고, 앞으로 책임질 수 있는 유일한 아이기도 하다.

       

       헌데 엘리가 이렇게 무책임하게 죽어버리면? 남은 요나는 어떻게 되는 것인가.

       

       그리 생각하면 상대가 누구더라도 엘리는 죽어줄 수 없었다.

       

       떨리는 몸으로 마음을 굳히는 순간.

       

       푸욱.

       

       어느새 소년의 등 뒤에 나타난 요나가 단검으로 그의 심장을 찔렀다.

       

       ‘어떻게?! 기척은 거의 느껴지지 않았는데….’

       

       아무리 정신이 흔들리는 와중이었다지만 엘리가 강자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헌데 요나는 어떻게 그녀의 감지 능력을 뚫었는가.

       

       그 하나만으로도 당황스러웠는데 이어진 요나의 말은 더더욱 놀라운 것이었다.

       

       “남의 여자한테 꼬리치면 안 되지.”

       

       딴에는 작게 말한다고 속삭인 것 같지만, 엘리쯤 되면 거리가 떨어져 있어도 다 들리기 마련.

       

       남의 여자를 건드리면 안 된다.

       

       평소에 자주 엘리에게 질척이던 요나지만, 조금 전의 그 한마디에는 지금까지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짙은 감정이 묻어나왔다. 그리고.

       

       “잘 가. 시나.”

       

       “……!”

       

       단검을 옆으로 돌리며 완전히 심장을 으깨버리는 요나. 그 말에 시나라고 불린 소년이 입을 뻐끔거리다 그대로 축 늘어져 눈을 감는다.

       

       다른 사람 눈에는 입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으나,정면에서 대치하고 있던 엘리에게는 똑바로 보였다.

       

       -요, 나.

       

       시나라 불린 소년은 분명 요나의 이름을 불렀다. 그리고 요나 또한 소년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지금껏 긴가민가 추측만 하던 것이 이로서 확실해졌다.

       

       요나는 한때 그녀가 구하고자 했던 실험체 중 하나였다.

       

       그리고 방금. 가장 힘든 시기를 함께 보낸 자신의 친구를 죽였다.

       

       엘리를 위해서.

       

       한 번도 본 적 없는 무서운 표정으로 시체를 조심스레 땅바닥에 뉘이는 요나.

       

       붉게 물든 시나의 가슴께에 손을 얹은 요나가 고개를 푹 숙였다. 친구의 죽음을 애도하듯 한참 동안 어깨를 들썩이는 요나.

       

       그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요나…?”

       

       엘리는 말문이 턱 막혔다.

       

       사랑스럽게 빛나던 분홍색 눈동자에는 세상을 불태워 버릴 듯 격렬한 불꽃이 타오르고 있었으니까.

       

       세상 사람들은 그 불꽃에 복수라는 이름을 붙이리라.

       

       ***

       

       주인공을 죽였다.

       

       아니, 정확히는 주인공이 될 녀석을 죽였다.

       

       내가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아끼는 것은 사실이나, 그중에서도 특히 애착이 가는 것은 분명 존재한다.

       

       예를 들자면 엘리. 그녀는 내 소설의 히로인이 될 예정이었고, 그만큼 더 공들여 설정한 것은 물론…내 취향을 꾹꾹 눌러 담아 만든 인물이다.

       

       당연히 더 많은 애정이 가는 수밖에.

       

       주인공 또한 마찬가지다.

       

       사건의 중심이며, 해결의 주체이자, 작가가 생각한 이상적인 초인의 투영.

       

       그만큼 몰입해서 만든 캐릭터고, 이 험난한 세계에서 나 대신 해줘야 할 일이 많은 녀석이었다.

       

       하지만, 지금. 나는 내 손으로 주인공을 제거했다.

       

       엄밀히 말하자면 주인공 본인이 아닌, 주인공이 빙의할 육신을 죽인 것이지만.

       

       현재의 내용물은 별로 궁금하지도 않다. 내가 주인공이라 여기는 것은 언젠가 빙의할 영혼 쪽이니까.

       

       하지만 이렇게 육신이 부서진 이상 내가 아는 주인공을 영영 만나지 못하게 된 것 또한 사실이다.

       

       “아.”

       

       그리 인지하자 절로 새어 나오는 한탄.

       

       천천히 시체를 땅에 눕히고는 생각해 보기 시작했다.

       

       주인공이 없어지면 이 세상은 어떻게 되는 거지?

       .

       .

       .

       .

       .

       곰곰이 생각해 본 결과. 놀랍게도 아무런 문제도 없다!

       

       애초에 나는 이렇다 할 스토리를 쓴 적이 없다. 존재하는 것은 오로지 설정뿐.

       

       주인공이 있어야지만 해결할 수 있는 범세계적 문제, 예를 들면 세상의 멸망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단 말이지.

       

       물론 언제든 문제가 터져 사건이 진행될 수 있도록 온갖 위험 요소를 뿌려둔 것은 사실이지만….

       

       그 부분에 대해서는 이미 고민이 끝난 일 아닌가. 손 닿는 선까지는 어떻게든 해결해 보기로.

       

       이는 현실이 되어버린 이 세상에 대한 작가로서의 책임임과 동시에, 믿을 사람 하나 없는 세상에 떨어진 빙의자로서의 숨김없는 진심.

       

       즉, 내가 해야 할 일은 변하지 않는다…!

       

       아니, 본래 이 육체에 빙의했어야 할 진짜 주인공이 지구에서 평온하게 자신의 삶을 살아갈 수 있을 테니 오히려 좋은 일이라고도 볼 수 있겠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잠깐 우울했던 마음이 싸악 가시며, 오히려 조금 뿌듯한 기분마저 들기 시작했다.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나 평소처럼 히히 웃으며 엘리를 맞이하려던 순간.

       

       “허읍!”

       

       뒤늦게 생각나는 계층 수호자의 소환 조건.

       

       고개를 숙인 채로 빠르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널브러진 무수한 종류의 몬스터, 그리고 방금 막 생긴 따끈따끈한 엘프 시체.

       

       이제 남은 것은 절절한 복수심과, 세계수를 향한 진심 기도뿐이다.

       

       …소환하기 딱 좋은 조건이잖아?

       

       일어나려다 말고, 그대로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했다.

       

       억울한 생각, 억울한 생각, 억울한 생각….

       

       순간 지난 삶의 기억 중 억울한 에피소드들이 주마등처럼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숙제를 했지만 집에 놓고 왔을 뿐인데, 안 해놓고 거짓말하지 말라며 손바닥을 때리던 학원 교사.

       

       수업 시간에 몰래 소설 좀 썼기로니, 그걸 기어이 반 친구들 앞에서 낭독시킨 중학교 선생님.

       

       자습 시간에 책 읽어도 된다길래 라노벨을 읽었더니 이런 건 책이 아니라며 눈앞에서 찢어버린 고등학교 선생님. 

       

       애가 집에서 야한 만화만 본다고 커서 변태 되는 거 아니냐며 울던 부모님.

       

       알바비가 늦게 들어와 픽업 끝나기 5분 전에 간신히 가챠 달리는데, 한 번에 돈 많이 쓰니 일단 카드를 정지시키고 전화해서 본인 확인하라는 카드사 때문에 놓친 픽업.

       

       알바고 뭐고 때려치우고 시작한 작가 일. 하지만 한 달에 30만원도 채 벌지 못하는 하꼬였기에 매일 너덜너덜해지는 마음….

       

       그래도 계속 봐주는 독자들을 향한 감사를 담아 댓글 달아준 선착순 10명에게 캐시 선물 이벤트를 했더니 6명밖에 댓글을 달지 않았던 일.

        

       월세도 못 내고 저금만 까먹던 나날이었지만, 그래도 꾸준히 쓰다 보니 보답받은 것인지 랭킹 상위권에 올라갔으나…한 달 뒤에 망해버린 소설 사이트.

       

       그 와중에 다른 사람이랑 나를 착각해서 달린 5,500자 악플.

       

       악플에 대신 화내주시는 다른 독자님과 댓글창에서 싸우다, 결국 삭제하고 악플 내용을 그대로 복붙해 쪽지로 보낸 사람.

       

       그럼에도 굴하지 않고 쭉 쓰다 보니 그럭저럭 먹고 살 수 있게 됐을 무렵. 야설 작가라며 개무시하던 같은 하꼬 작가.

       

       우울해서 큰맘 먹고 사기라던 픽업캐 풀돌 찍었더니 1년이 지나지도 않았건만, 메타가 바뀌어 물로켓 취급당하는 내 최애캐.

       

       분명 실시간 저장했고, 클라우드 연동 백업도 해놨는데 어째서인지 남김없이 싹 날아간 원고.

       

       그리고 마지막으로 남녀역전 붐을 일으키겠다는 원대한 포부를 갖고 노트북을 켜자마자 내 목숨을 앗아간 원인 불명의 폭발.

       

       거기까지 떠올리자 피가 거꾸로 솟는 듯한 감각과 함께 뱃속 깊은 곳에서 뜨거운 불길이 타오른다.

       

       뱀처럼 똬리를 튼 그 불길은 천천히 몸을 일으켜 전신을 잠식하더니, 이내 머리끝까지 차오른다.

       

       절로 부릅떠진 눈으로 고개를 들었다. 하늘을 떠받치듯 웅장한 세계수의 자태가 시야를 가득 채운다.

       

       “아….”

       

       내 목에서 나왔다고는 믿기 어려울 만큼 갈라진 목소리.

       

       저 드높은 곳에서 우리를 고고하게 내려다보는 고대의 신비. 세계수를 향해 진심을 담아 한탄했다.

       

       “…나 빼고 다 뒤졌으면.”

       

       그 말에 호응하듯 세계수의 환영이 녹색으로 빛나기 시작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제 이야기 아닙니다~

    …정말 아니에요.

    아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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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acha Addict in a Matriarchal Wor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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