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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71

       6월 중순. 북적거리는 곳은 시장가뿐만이 아니었다.

         

       황궁에서도 연회가 열렸다. 상류층들만이 모이는 파티, 이곳에선 비 대신 샴페인이 내린다.

         

        연회장의 한가운데에 놓인 소파. 그 소파에서 몸을 파묻은 채 술잔에 포도주를 기울이고 있는 남자가 하나 있었으니.

         

        클리온 필리우트 제2황자였다.

         

        흑사병 사태가 끝나기도 했고, 황자가 한 학기를 마무리했으니 황궁에서 불야성이 열리는 건 당연지사였다. 파티를 주관한 잭 블랜튼 공작이 클리온의 옆으로 다가와 고개를 숙였다.

         

        “잘 즐기시고 계시는지요?”

        “보이는 대로.”

         

        블랜튼 공작이 가까이 올 때마다 클리온은 가슴을 졸여야 했다. 정신을 차리고 난 이후부터는 그가 같은 편처럼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나저나 여기서만 계셔도 되겠습니까? 친우분들과 함께 한 학기를 마무리하시는 것도 나쁘진 않을 텐데요.”

        “잭, 내가 누구인가. 그런 것들하고는 급이 안 맞아.”

        “허허, 그거 참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교양없는 술자리보다는 인맥을 다질 수 있는 장소에서 위스키 한 잔 드는 일이 백 배는 더 의미 있는 법이지요.”

         

        쪼르르, 원뿔을 뒤집어 놓은 듯한 모양의 와인잔에 새 브랜디가 따라졌다. 붉은 계통의 술이었는데, 그 빛깔은 탄산이 빠진 콜라와도 같았다.

         

        “향이 좋군.”

        “네, 블랙 잭이라고 부르는 술을 엘리예프 자작가의 양조장에서 공수하여 변주를 준 신품입니다.” 

         

        클리온은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한 손에는 고급진 술을, 다른 손에는 여자를 낀 채 유흥을 즐기는 척 했다.

         

        블랜튼 공작이 곁에 있기 때문일까? 바로 옆에서 자신의 장단을 맞추고 있는 미녀가 도저히 눈에 들어오질 않았다.

         

        “그런데 말입니다, 황자 전하.”

        “왜, 무슨 일 있나?”

        “요새 제 얼굴을 제대로 보고 대화하지 않으시는 것 같습니다.”

         

        클리온은 그제야 블랜튼 공작의 얼굴을 정면으로 마주했다.

         

        클리온 자신도 알고 있었다. 제 시야가 블랜튼의 얼굴로 향할 때마다 눈동자의 떨림을 멈출 수 없다는 것쯤은.

         

        사시사철 선글라스를 끼고 있는 블랜튼 공작. 트랜디한 조례복을 입고 지팡이를 짚는 모습에선 귀티가 묻어나왔다.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평범하디 평범한 노신사라고 착각할 정도였다.

         

        다만 블랜튼은 노신사라고 하기에는 체격이 지나치게 건장했다. 맵시를 살린 옷단 아래로 무지막지한 근육을 숨기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솔직히 말해서, 클리온이 그와 싸운다면 질 것 같았다.

         

        블랜튼은 목소리를 누그러뜨리며 말을 이었다.

         

        “혹시 황자께서 저에게 걸리는 일이라도 지셨습니까?”

        “뭐, 아니? 내가 뭘?”

         

        클리온은 딸꾹거리며 시치미를 뗐다.

         

        비록 세뇌에서 풀렸을지언정 개망나니를 연기해야 한다. 눈앞의 괴물이 자신을 제거할지도 모르는 일이었으니까.

         

        “제 말은, 잘못한 거 있으시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뭘!”

         

        마음 같아선 여기서 더 나가고 싶었다. 감히 황자를 추문하려는 것이냐! 그런 말과 함께 축객령을 내려버리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클리온은 자신의 처지를 안다. 여기서 블랜튼의 심기를 건드려서 좋을 거 하나 없었다.

         

        자신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자, 블랜튼은 콧수염을 매만지며 말을 이었다.

         

        “아니, 얼마 전 궁의 제1국고에서 금화 5백 장이 갑자기 사라졌습니다. 황자님께서 하신 일이 아닌지요?”

        “아, 그래? 난 잘 모르겠는데.”

        “황자 전하께서 인출하신 게 아니었단 말씀이십니까?”

        “왜. 재무대신이 쪼던가?”

        “네, 전염병 사태로 국고 손실이 막중한 상황에서 이 지출이 어디서 났는지 조사하라 그러셨습니다.”

        “그렇군. 5백 정도면 큰 돈도 아니니 그냥 흘려먹은 걸로 치게. 아니면 조폐공사에서 잃어버린 만큼 돈을 더 찍으면 될 일 아닌가?”

        “지당하신 말씀이십니다. 그리 전하지요.”

         

        블랜튼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회답했다. 그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물러나는 걸 본 클리온은 그제서야 쿵쾅거리는 심장을 겨우 진정시킬 수 있었다.

         

        덜컹.

         

        클리온은 블랜튼 공작이 저 멀리 문을 닫고 나가는 걸 보자마자 폐부에서 깊은 한숨을 내빼었다.

         

        자신이 우매한 발언을 했는데도 막기는커녕 동조하고 넘어가다니.

         

        이대로라면 제국이 무너지는 건 한순간이다. 하지만 그에게는 당장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황자님, 잔 채워드릴까요?”

        “부탁하지.”

         

        그래, 아직은 때가 아니다.

         

        호기가 올 때까지만 참고 버티자는 생각으로 술을 들이켰다. 맛은 더럽게 없었다.

         

         

        **

         

         

        클리온에게 인사를 전한 뒤 블랜튼은 동쪽 복도를 지나쳐왔다. 이곳은 물을 관장하는 사대공작인 자신을 위해 황가에서 대대손손 내려주는 별채로 이어지는 통로였다.

         

        그는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아무리 생각해도 웃기는 일이었다.

         

        블랜튼이 향한 곳은 황제께서 자신에게 하사한 으리으리한 개인 집무실이었다. 자그마치 스무 평, 어지간한 가정집만한 크기의 방에서 물의 공작은 모든 업무를 처리한다.

         

        “아빠, 다녀오셨어요?”

         

        자신의 집무실 한 쪽에 놓인 소파에서 가녀린 소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거북이 인형을 가지고 놀던 로즈마리가 블랜튼 공작을 향해 달려오며 인사했다.

         

        “그래. 잘 있었니?”

         

        덜컹,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닫혔다.

         

        넓은 방 안에는 커튼이 쳐져 있었고, 방음이 잘 되는 벽지까지 붙어 있다. 여기서는 웬만큼 큰 소리를 지르기라도 하지 않는 이상 대화가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을 것이다.

         

        로즈마리는 검은 거북 인형을 소파 언저리에 던져놓았다.

         

        소녀가 한 발자국씩 내딛을 때마다 단란했던 분위기에 무채색의 물감이 더해지는 듯했다. 블랜튼의 코앞까지 다가온 로즈마리가 음색을 내리깐 채로 도도하게 물어보았다.

         

        “그래서, 걘 언제까지 연기하고 있겠대?”

         

        로즈마리는 히히덕거리며 다시 한 발자국 물러났다. 무용수가 내딛는 듯한 발걸음이었다.

         

        “적어도 우리가 일을 벌이기 전까지는 가만히 있을 생각인가 봅니다.”

        “그 애비에 그 아들이로군. 하긴, 원래부터 무능했으니까.”

        “제 눈에는 자기 목숨만 부지한다면 무엇이든 상관 없어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만.”

        “그럴 때 훅 들어오는 게 인간들이지.”

         

        조심해서 나쁠 거 없어, 로즈마리는 그 말을 덧붙이며 실실 웃어대기 시작했다. 잇새를 딱딱거리던 블랜튼은 이내 침음성을 냈다.

         

        “제2황자까지 유폐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허수아비는 여럿 세워 둬야 좋은 법인데…. 4석께서는 어찌 하면 좋겠습니까?”

        “그걸 왜 나한테 물어보는데?” 

        “당신이 마왕군 전술고문이니 그렇지요.”

        “싸울 때나 그렇다는 거잖아. 이런 경우에 지략을 짜내는 건 2석 언니들일 텐데 왜 내가 비전투 부분에서까지 머리를 굴러야 하는 걸까나?”

         

        로즈마리는 손가락으로 고리를 만들었다. 엄지와 검지로 닫힌 폐곡선 내부로 블랜튼 공작의 뒤통수가 보였다.

         

        [최상급 고유마도 ─ 스코프(Scope)]

         

        “그래도 어쩔 수 없지. 제2황자는 내가 어떻게든 마킹하고 있을게.”

        “감사합니다. 헌데 제 뒤통수는 왜 갑자기 조준하십니까?”

        “머리털 안 빠졌나 확인하려고.”

        “허. 수백 킬로미터 밖을 내다볼 수 있는 기술로 제 후두부나 관찰하고 계시면 쓰겠습니까?”

        “농담이고, 항상 뒤를 조심하라는 소리야.”

         

        마법 한 번에 마력초 한 개비. 로즈마리는 자기 몸의 효율이 너무 낮다며 툴툴거렸다.

         

        “일단 나도 여기서 틀어박혀 사느라 지칠 지경이거든. 오죽하면 바이올린 켜고 놀 때가 제일 재미있는 거 있지?”

        “뭔가 알아내신 건 있으십니까?”

        “그래.”

         

        로즈마리가 양쪽 팔을 벌리자 손끝에서 머무르던 정경이 방 전체로 확대되었다. 그녀의 고유마도인 스코프(Scope) 기능은 필요에 따라 3차원상에서 확대할 수도, 또 축소할 수도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마치 비디오 필름을 찍는 것처럼 과거에 관측했던 사실을 부분적으로나마 재현하는 것도 가능했다. 

         

        로즈마리가 블랜튼 공작에게 보여주려는 것은 며칠 전 틸레트 아카데미의 한 복도에서 있었던 일이었다.

         

        건장한 키를 지닌 엘프와 금안족 소녀 하나가 망원에 비춰졌다. 둘 다 틸레트 아카데미를 상징하는 인장이 찍힌 로브를 두르고 있었다.

         

        로즈마리는 그중에서도 금안족 소녀가 들고 있는 종이를 확대했다.

         

        [Q. 수백 킬로미터 떨어진 거리까지 볼 수 있는 괴물이 있을까 없을까?]

         

        “이건….”

        “내 존재를 알고 있단 소리지.”

        “기억을 되찾으신 걸까요?”

        “내가 보기엔 그래 보여.”

         

        [있다/없다]

         

        [있으면 눈 깜빡임 두 번, 없으면 한 번.]

         

        밑에 적힌 글귀에 엘프 남학생은 눈을 두 번 깜빡였다. 로즈마리는 그조차도 놓치지 않고 확인했다.

         

        “…저건 우연의 일치일까요?”

        “이것만 보면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명확한 증거가 두 개나 더 있어. 하나는 저 엘프 놈이 제2황자에게 세뇌 저항 스크롤을 줬다는 것이겠고, 다른 하나는 5석이 있는 자리를 알고 하수도로 내려간 것이겠지. 어느 쪽이든 우리 계획을 모른다면 나올 수 없는 행동이야.”

         

        블랜튼 공작이 눈썹을 꿈틀거렸다. 엘프족이 자신들의 잠입 경로를 모조리 꿰고 있다는 것, 더 나아가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알고 있는 것이라면 큰일이었다. 이대로라면 2학기에 벌일 대습격을 진행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로즈마리는 물색 안광을 꿈뻑거렸다. 그녀는 잠시간 눈을 감은 채로 수심에 잠겼다. 

         

        그녀는 이 황성의 동쪽 별채에서 근방 4백 킬로미터 이내를 관조하고 있었다. 단 하루도 빠짐 없이. 틸레트 아카데미의 요주 인물을 중심으로 대부분의 사생활을 지켜보았다. 당연히 클리온 황자가 엘프와 대화를 나누는 것도 알고 있었고, 플레어가 개발되었다는 소식도 빨리 접했다.

         

        얼마나 흘렀을까. 생각을 마치고 눈을 뜬 소녀의 안광은 더는 아쿠아마린처럼 빛나지 않았다. 레몬을 머금은 연노랑빛 홍채가 블랜튼의 얼굴을 한가득 담았다.

         

        “7석, 내 추리로는 말이야. 에테르 언니가 기억을 되찾은 게 맞거든.”

        “그러면 바로 접선을 해야 할까요?”

        “아니, 기억을 되찾았다고 해서 바로 우리 편인 건 아니지. 애초에 뭐 때문에 기억을 지우고 인간 사회에 섞였다고 생각하는데? 굳이 안 해도 되는 플레어를 개발한 거 보면 우리 싫어하는 건 무조건이라고.”

        “…그러면 어찌 해야 다시 불러들일 수 있겠습니까?”

        “간단하지.”

         

        블랜튼의 질문에 로즈마리는 웃음기를 띠며 입을 달싹였다.

         

        “인간들에게 더한 배신감을 느끼도록 만들면 돼. 그러면 돌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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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Magic Academy’s Physicist

The Magic Academy’s Physicist

마도 아카데미의 물리학자
Score 4.0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In an era when the power of Fire Magic was considered to have reached its limit, one girl began researching nuclear fu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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