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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71

       적색 마탑의 마법사 셀비어는 나름대로 알차게 아카데미 생활을 보내고 있었다. 강의를 따라가지 못하면 어쩌나 했는데, 타고 태어난 재능 덕분에 교수들의 가르침을 스펀지처럼 빨아들일 수 있었다.

       

       『기초 원소 개론』에서는 각 속성에 대한 이해를 심화할 수 있었고, 『근접 전투의 모든 것』에서는 마법사로서 접근전을 풀어나가는 방법에 대해서 배웠다.

       

       쿼터 스태프에 몽둥이찜질을 당해서 군데군데 멍이 들긴 했지만, 뿌듯한 상처였다. 아카데미에서 고생하는 만큼 바깥에서 목숨을 잃을 확률이 쭉 내려갈 테니까.

       

       알렉손 교수로부터 ‘너는 다 좋은데, 가끔 결정적인 부분을 놓치는 구석이 있다. 가능하면 변수가 많은 전장을 피하고, 화력전으로 승부하도록.’이라는 피드백을 듣기도 했다. 

       

       어떤 결정적인 부분을 놓쳤다는 거지, 하고 울컥하기도 했지만. 교수가 언급까지 하면서 주의를 준 데에는 다 이유가 있을 터. 머릿속에 기억해 두었다.

       

       의외로 가장 힘들었던 강의는, 정신 나간 무명 마법사의 『환상 마법 대응』이었다. 답문승계인지 뭔지 하는 환상 미궁을 빠져나오느라 얼마나 힘들었던가.

       

       그 강의를 들었던 학생 중에는 아직도 문을 여는 행위에 대한 두려움을 호소하는 사람이 있다. 화장실 문을 열었다가 거대 개구리가 습격해 오면 어쩌냐면서. 

       

       그래도 확실히 실력은 가파르게 늘었다. 함정이 설치되었을 확률이 유력한 지역을 꼭 지나야 한다면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에 대해서, 다양한 방법을 시도해 보고 익힐 수 있었으니까.

       

       그 모든 강의에서, 룸메이트인 니오레는 두각을 드러냈다.

       

       남들은 볼 수 없는 아주 사소한 부분까지도 읽어내는 눈. 그 천부적인 재능은 다방면에서 빛을 발했다. 근접 전투에서도, 미궁 탈출에서도. 유일한 결점이 있다면 하드웨어가 눈을 따라가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기초 스펙의 부족, 결정적인 공격력의 부재. 

       

       공격의 궤적을 읽어낼 수 있어도 피하거나 막을 힘이 없고. 미궁의 출구를 간파해 내도 함정을 뚫고 진격할 힘이 없는 상황.

       

       그래서 셀비어는 니오레와 팀을 맺었다. 셀비어는 눈썰미가 부족했고, 니오레는 화력이 부족했으니 서로의 결점을 보완할 수 있는 딱 들어맞는 팀이었다.

       

       덕분에 니오레와도 빠르게 친해졌다. 

       

       그녀는 순수하고, 마음씨가 고왔다. 남을 돕고 싶어 하며, 위험으로 몸을 내던지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잔걱정이 많았고, 칭찬을 듣는 걸 좋아했다.

       

       매일같이 단련을 게을리하지 않을 정도로 성실하고, 타인에 대한 배려가 몸에 배어 있었다. 누구나 호감을 품게 될 법한 좋은 사람이었다.

       

       무엇보다도 눈이 예뻤다.

       

       그녀의 눈은, 순수한 선의로 언제나 반짝이고 있었다. 자기 삶의 방식을 뚜렷하게 정하고, 망설임 없이 나아가는 추진력이 느껴지는. 올곧은 눈.

       

       그래서.

       

       “어서 와요, 강의는 어땠⋯⋯ 무슨 일 있나요?”

       

       “⋯⋯⋯⋯.”

       

       셀비어는 니오레의 변모를 알아차릴 수밖에 없었다.

       

       밤하늘의 별처럼 반짝이던 눈이, 죽은 생선처럼 새까맣게 변해 있었으니까.

       

       ===============================================================

       

       길어야 고작 세 시간이었다.

       

       세 시간 만에 사람이 완전히 바뀌어버렸다. 확신은 꺼지고, 바람 앞의 촛불처럼 가녀리게 흔들리고 있었다. 입술은 건조하게 말라붙었고, 무언가에 쫒기는 사람처럼 손을 떨었다.

       

       커다란 사고라도 있었던 걸까.

       

       “대체 무슨 일⋯⋯ 아니, 아니지. 일단은. 여기 앉아요.”

       

       셀비어는 심호흡하며 당황을 가라앉혔다. 자신이 당황하고 있어서는 안 될 일이었다. 그녀는 우선, 힘이 빠져 종이 인형 같은 니오레의 손을 붙잡고 데려와 침대에 앉혔다. 

       

       그리고 오랜 추억을 떠올렸다. 추억 속에는 참고할 만한 교본이 있었다.

       

       시골 마을에서 살던 때, 부모님과 다투고 혼자서 울고 있을 때면. 소꿉친구 남자아이는 어디선가 따뜻한 차를 끓여와서는 마시게 했다. 몸과 마음은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따뜻한 것이 속에 들어가면 기분도 한결 나아진다면서.

       

       그리고 상냥하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물어보고, 셀비어의 이야기를 끝까지 경청하면서 들은 뒤에. 스스로 나아갈 방향을 찾을 수 있도록 말로 이끌어주었다. 

       

       그 아이만큼은, 능숙하게 할 수 없겠지만⋯⋯.

       

       누군가가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준다는 것이 얼마나 큰 위안이 되는지 알기에, 셀비어는 니오레를 돕기 위해서 시간을 투자하기로 했다. 오늘치 마력 수련은 조금 미뤄 두어도 될 것이다.

       

       셀비어는 기숙사 주방으로 내려가 따뜻한 코코아 한 잔을 타서 올라왔다. 그리고 니오레에게 머그컵을 쥐여 준 뒤에, 조심스럽게 물어봤다.

       

       “⋯⋯고민이 있다면, 들려주지 않을래요? 저는 니오레의 도움이 되고 싶어요.”

       

       “⋯⋯⋯⋯.”

       

       말을 마치고, 셀비어는 옆에 앉아서 차분하게 기다렸다.

       

       니오레는 머그컵의 온기를 느꼈다. 바로 마셔도 괜찮은, 딱 적당한 온도였다. 혹시라도 그녀가 혀를 데지 않도록 신경 써 준 것이리라. 사소한 디테일이지만, 배려가 듬뿍 묻어났다.

       

       호로록.

       

       니오레는 무언가를 먹고 싶은 기분은 아니었지만, 셀비어의 마음을 생각해서라도 코코아를 한 모금 넘겼다. 생각보다 괜찮았다. 몸 전체에 온기가 도는 것 같았다. 

       

       니오레는 조심스럽게 문장을 적어 내려갔다.

       

       [사람을 돕고 싶었어요.]

       

       “니오레는 항상 그랬죠⋯⋯.”

       

       [그게 옳다고 믿어요.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있다면, 손을 빌려주어야 한다고. 누군가는 바보 같다고 말해도, 남을 돕는 것은 제 기쁨이었고, 그게 세상을 더 낫게 만든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타인을 구하려던 탓에, 아브라함이 죽었다. 그때 손을 뻗지 않았더라면, 차를 타고 아브라함과 함께 저택으로 돌아갔더라면. 별을 헤아리는 노인은 살았을 것이다.

       

       아니면 적어도, 베네트와 타라에게 함께 사람을 구하자며 강요할 게 아니라. 혼자 나섰더라면. 노인은 살았을 것이다. 그 이전에⋯⋯ 자신이 강했더라면. 힘이 있었더라면, 어쩌면.

       

       그러니, 자신의 죄는.

       

       [제가 한 사람을 구하려고 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구할 수 없었어요. 여전히 사람을 구하는 건 옳다고 믿어요. 하지만, 제 선택이⋯⋯ 후회가 돼요. 능력도 없으면서, 베네트와 타라에게 빌붙어서 도와달라고 한 주제에, 모두를 구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멍청한 제가, 미워요.]

       

       어줍잖은 힘으로 욕심을 부리고, 자신의 신념에 타인을 끌어들인.

       

       [차라리 구하지 말걸. 그냥 무시해 버렸으면 좋았을걸. 몇 번이고 생각해요. 그렇게 생각하다 보면, 밉기까지 해요. 어째서 하필 그날, 그 시간에 납치를 당한 거냐고. 어째서 제 눈에 띄었냐고⋯⋯. 분명 제가 선택한 일인데, 우습죠⋯⋯.]

       

       오만함.

       

       [타라와 베네트에게 미안할 뿐이에요. 제가 도와달라고 부탁하지만 않았어도. 제 후회를 두 분이 나누어 짊어질 일은 없었을 거예요. 제게 베네트처럼, 중요한 게 뭔지를 판단할 수 있는 현명함이 있었더라면. 그랬다면⋯⋯.]

       

       니오레는 후회 속을 여전히 맴돌고 있었다. 트롤리 딜레마를 겪은 소녀는, 열차를 멈춰 세울 힘이 없었던 자신을 원망했다. 

       

       마음을 깎아가면서 마도서를 탐닉한 것은, 스스로에게 내리는 벌이기도 했으며, 다시는 이런 일을 겪고 싶지 않다는 간절함 때문이기도 했다.

       

       셀비어는 주의 깊게 니오레의 말을 읽고, 생각을 정리해, 내뱉었다.

       

       “지금도, 동부전선에서는 사람이 죽고 있어요.”

       

       [⋯⋯⋯⋯?]

       

       “크라운홀의 빈민가에서도, 어느 이름 없는 산골짜기에서도, 으슥한 던전에서도. 사람은 죽고 있어요. 여기에 죄책감을 느껴야 할까요?”

       

       [그건⋯⋯ 아니에요.]

       

       “왜?”

       

       [⋯⋯⋯⋯.]

       

       셀비어는 앞으로 팔을 쭉 뻗었다.

       

       “이유는 간단해요. 여기서 동부전선의 병사를 직접적으로 돕는 건 불가능한 일이니까. 팔이 닿지 않으니까. 사람은 결국, 자신의 손이 닿는 범위 내의 일만 해결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아브라함에게는 제 팔이 닿을 수 있었어요. 타라와 베네트의 팔도요. 그걸 방해한 건, 저예요.]

       

       “자세한 건 몰라도⋯⋯ 이야기를 들어 보면. 그런 상황인 걸 몰랐던 거죠? 제가 아는 니오레라면. 두 명이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 옆에 동료가 있었다면⋯⋯ 일행을 나누자고 했을 거예요. 동시에 구해내려고.”

       

       [아브라함에게 위험이 닥칠 거라는 징조가 있었어요. 제가 조금 더 주의를 기울였더라면, 알 수 있었을 거예요.]

       

       “제가 아는 니오레는 매사에 열정적이고 노력하는 아이에요. 그 순간에, 당신은 분명 최선을 다했을 테죠. 후회가 남는 건 이해해요. 후회를 느끼지 말라는 이야기는 아니에요. 하지만⋯⋯.”

       

       셀비어는 니오레의 양 볼을 잡고 쭈욱 늘렸다.

       

       “세상의 모든 비극이 당신의 탓인 것처럼 생각하는 건 그만두세요, 니오레.”

       

       “⋯⋯⋯⋯.”

       

       “그리고. 상식적으로 원망해야 하는 대상은, 못된 짓을 한 쪽이지. 구하려고 한쪽이 아니에요. 모두가 그렇게 생각할걸요? 뭐⋯⋯ 이런 말을 한다고 해서, 마음이 갑자기 휙 바뀌지는 않겠지만.”

       

       셀비어는 니오레를 꼭 끌어안았다. 죄책감에 빠진 친구에게 에너지를 전달해 주기 위해서. 사람은, 서로 마음을 나누는 것으로 힘을 북돋워 줄 수 있으니까.

       

       “적어도 저는, 당신에게 잘못이 없다고 생각해요. 분명 많이 힘들었겠죠⋯⋯. 고생했어요 니오레. 괜찮을 거예요. 당신은 이겨낼 수 있어요. 자.”

       

       “⋯⋯⋯⋯우, 으.”

       

       셀비어는, 자신의 어깨가 축축해지는 건 모른 척 넘어가기로 했다.

       

       그녀는 니오레가 후회에 잠겨 죽어가는 대신, 후회를 이겨내고 원동력으로 삼을 수 있기를 바랬다. 여전히, 3시간 만에 대체 어떤 일을 겪었던 건지는 짐작조차 가지 않지만⋯⋯.

       

       그렇게, 한참이나 부둥켜안고 있었다.

       

       ===============================================================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학생들이 어떤 사건을 겪었건 학사일정은 그들을 기다려주지 않는 법이기에, 던전 탐사 일정은 척척 진행되었다.

       

       명단에 적힌 학생을 마차에 태우고, 아카데미 남문의 대로를 빠져나가 던전을 향해 나아갔다. 가는 길, 마차 안에서.

       

       “⋯⋯⋯⋯.”

       

       베네트는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타라는 여전히 히스테릭한 상태였지만, 니오레는 상당히 괜찮아진 것 같아서. 한명이라도 멘탈을 잡았으니 다행인 일이었다.

       

       

       덜컹거리는 마차에 실려 반나절 간을 이동하고 나면, 던전 입구에 도착할 수 있었다. 교수진들은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조를 편성하여 던전에 들어가도록 했다. 던전 심부에 증표를 배치해 두었으니, 가져오면 합격이라면서.

       

       어중이떠중이들 열 명이 뭉쳐서 들어가거나, 반면에 단독으로 들어가는 학생도 있었다. 베네트, 타라, 니오레는 자연스럽게 한 자리에 모였다. 6일이나 함께 생활했으니까.

       

       “⋯⋯이번에도 이 조로 괜찮겠나? 다들.”

       

       [저라도 괜찮다면⋯⋯.]

       

       “뭐, 파티에서 나를 빼려는 거야⋯⋯?!”

       

       “아무도 그렇게 이야기하지 않았다. 타라. 아무도.”

       

       자연스럽게 포지션을 잡았다. 최후방에는 주문이 위력적인 니오레. 중간에는 신성 마법으로 일행을 보조할 수 있는 타라. 최선두에는 베네트⋯⋯.

       

       “⋯⋯밖에서는, 외신의 주문을 못 쓰지 않나?”

       

       [아.]

       

       니오레가 선두로 이동했다. 힘을 빌려 줄 외신이 이 세계에는 없기 때문인지, 바깥에서는 배워 둔 주문을 사용해도 효과가 없었다. 

       

       [이쪽에는 함정이 있네요.]

       

       “확인했다. 타라, 멋대로 앞서가지 마.”

       

       “앞으로 안 나갔거든?!”

       

       세 사람은 능숙하게 던전을 진행해 나갔다. 광신도의 마법을 걱정할 필요가 없었으므로 마음이 편했다. 간단한 화살 함정 정도는 발동시키더라도 베네트 선에서 막아낼 수 있었으며, 애초에 니오레가 있었기 때문에 피해 갈 수 있었으니까.

       

       [앞으로는 어떻게 할까요?]

       

       “우선은⋯⋯ 금고를 어떻게든 탈취해야겠지. 그 뒤에는.”

       

       외신을 소환하려는 마법진을 부수어야 한다. 마침 내가 흑마법사라서 아는데, 아카데미에도 비슷한 구조의 마법진이 있다. 아카데미 구석구석에 소형 마법진을 숨겨 놓는 것으로 거대한 마법진을 구축하는 방식이다.

       

       보고서에서도, 도시 곳곳에 숨겨져 있다는 기묘한 낙인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던가. 내 생각에는 그 낙인을 이어보면 거대한 마법진의 형상이 드러날 것 같다. 그러니까 곳곳에 숨겨진 낙인을 지워내거나 변형시켜야 그들의 계획을 늦출 수 있을 것이다.

       

       필사적으로 그들의 소환을 저지해야 하는 이유가 있다. 흑마법사들이 외신을 이 세계로 불러내려고 하는 것 같기 때문이다. 내가 흑마법사라서 잘 알고 있다.

       

       “⋯⋯⋯⋯.”

       

       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그 뒤에는, 은의 황혼 교단 녀석들을 눈에 띄는 대로 죽여 없애면 되는 거 아냐?”

       

       [하지만, 너무 위험한걸요.]

       

       “안전장치도 있잖아. 이렇게 멀쩡히 살아있으니까.”

       

       [그래도 혹시, 정신계 마법을 맞으면 어떻게 될지⋯⋯.]

       

       

       어떻게 전해야 할까. 이 정보를 일행들에게 알리면, 분명 정보를 어디서 입수했는지 물어볼 텐데. 그렇다면 자신이 흑마법사라는 사실을 밝혀야 하는 것인가. 하지만, 그건 리스크가 너무 컸다.

       

       자신이 흑마법사를 배신하고 전향할 생각이 있더라도 문제였다. 과연 그 사실을 믿어줄까? 본인 스스로도 갈팡질팡하고 있는 상황에?

       

       잃을 것이 너무나도 많았다. 아카데미에서의 모든 인연이 송두리째 날아가 버리고, 목숨마저도 위험해진다. 하지만⋯⋯.

       

       하지만 기적적으로, 어쩌면, 이해해 줄 가능성은 없을까. 흑마법사인 자신을 받아들여 주지는 않을까. 그렇게 된다면 더할 나위 없는 상황이다. 그만한 신뢰 관계가 형성된다면, 배신하기도 쉬우니까.

       

       베네트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언젠가는 결단을 내려야 하고, 지금은 꽤 적절한 타이밍이었다.

       

       니오레는 받아들여 줄 것 같았다. 타라는, 잘은 모르겠다. 하지만 어쩌면⋯⋯.

       

       잠깐.

       

       지금, 나는⋯⋯ 흑마법사인 자신을 긍정 받고 싶은 건가. 그녀들에게.

       

       “⋯⋯⋯⋯하.”

       

       베네트는 던전의 벽에 머리를 쿵 하고 박았다. 

       

       “뭐, 뭐야. 갑자기 왜 그래?”

       

       [혹시, 고막 위를 개미가 기어가는 것 같은 착각이라도 들었나요⋯⋯?]

       

       “⋯⋯아니, 아무것도 아니다. 저기, 중요한 할 말이 있다만.”

       

       

       말하자. 말하고, 만약 상정할 수 있는 최악의 사태가 벌어진다면── 여기서 죽이고. 던전 속에서 실종되었다며 위장하면 된다. 그렇게 마음에도 없는 다짐을 거듭하며, 베네트가 입을 열려고 할 때.

       

       [⋯⋯⋯⋯.]

       

       니오레가 화이트보드를 툭 하고 떨어트렸다. 그녀는 있을 수 없는 것을 본 사람처럼, 던전의 벽면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니오레, 너까지 왜? 혹시 마법이라도 당한⋯⋯.”

       

       “아, 우⋯⋯.”

       

       니오레는 손가락으로 벽면을 가리켰다. 누르면 바닥이 꺼지는 클래식한 함정의 옆에, 누군가가 친절하게도 ‘함정’이라고 화살표를 그려놓았다. 벽면을 긁어서.

       

       단순히, 던전을 이용한 누군가의 친절일 수도 있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니오레는 다급하게 화이트보드를 집어 들어 적었다. 

       

       [필체가.]

       

       “⋯⋯필체?”

       

       [아브라함과 같아요.]

       

       “⋯⋯⋯⋯그게 무슨 소리야, 니오레. 그게. 대체.”

       

       베네트와 타라도 홀린 듯이 벽면의 긁힘을 바라보았다. 그들에게는 필적을 분간할 만큼의 눈썰미는 없었다. 아무리 노려봐도, 확신을 가질 수는 없었다. 

       

       그러나 니오레의 반응이, 어쩌면── 이 세 글자를 뇌리에 박아 넣고 있었다.

       

       니오레가 흔적을 쫒아 달려나갔다. 벽면의 낮은 곳에 드문드문 ‘함정’ 표시가 되어있었다. 근처에는 부러진 태엽이나, 쇳조각 등이 뿌려져 있기도 했다. 그녀는 확신할 수 있었다. 아브라함의 필적이었다.

       

       일행이 달려 나간 끝에 도착한 곳은, 던전을 관리하는 청소 골렘이 수납되는 곳이었다. 문을 벌컥 열고 들어가자, 그곳에는.

       

       반쯤 부서져 내부 기판이 훤히 드러난 청소 골렘 하나가, 쇳조각으로 벽면을 긁어내어 유려한 글씨를 적어놓고 있었다.

       

       일행이 기대하던 것은 이런 장면이 아니었다.

       

       낯익은 노인의 모습이 보이기를 기대했다. 그가 주름진 얼굴로 미소를 지으며, 오랜만에 본다면서. 세상일은 참 알 수가 없군, 하고 당황을 표현하는. 그런 기적적인 해후를 기대했다.

       

       악신에게 집어삼켜진 가엾은 노인의 영혼이, 망가진 청소 골렘에 처박힌 모습이 아니라.

       

       타라는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브라함?”

       

       그러자 청소 골렘이 팔을 움직였다. 조금씩 벽을 긁어, 문자를 새겼다. 마침내 모습을 드러낸 문장은, 남아있던 기대마저도 산산이 부수어버렸다.

       

       [자네는 누구인가?]

       

       재회조차도 아니었던 것이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오늘은 연재를 하고도 스테미나가 남는군요, 마이 프렌즈.
    어제 비가 내리고 오늘은 개춥다는 환상적인 연계로, 저 바닥들이 죄다 빙판길이 되지만 않았더라면⋯⋯ 산책을 갔을 텐데요!
    이자가 쌓이고 있는 연참은, 조금만 기다려주십시오⋯⋯. 아직 집에 비축분이 없어서, 금방 갚을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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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therworld TRPG Game Master

Otherworld TRPG Game Master

Another World TRPG Game Master, 이세계 TRPG 게임마스터
Score 8.6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3 Native Language: Korean
I became a wizard of the Illusion Magic School and decided to create a virtual reality with illusion magic to play a tabletop role-playing game (TRPG). It was great to create a virtual reality, but I was in trouble because there were no suitable players. During that time, I received an offer to be the professor from the Royal Academy. The offer was to use illusion magic to fill the students’ lack of practical experience safely. And so, I became a professor at the academy. “Send me back, send me back to that world right now-!” “Outer god, someday an outer god will be our doom, we’ll all die!!” “I am not the bastard of the Redburn Ducal Family. I am the foremost disciple of the Great Namgung Clan, Namgung Qinghui!” But it seems there is a bit of a misunderstanding. This isn’t a spell for dimensional travel, kids. It’s fic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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