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itch Mode
Home EP.71 EP.71

EP.71

       “…나 빼고 다 뒤졌으면.”

       

       진심이 담긴 한탄.

       

       이에 호응하듯 세계수의 환영이 녹색으로 빛나기 시작했다.

       

       화아악-!

       

       분명 실체가 존재하지 않을, 그저 생전의 바람이 투영됐을 뿐인 세계수에서 뿜어져 나오는 막대한 존재감.

       

       세계수의 신성이 주변 일대를 뒤덮는다. 그리고 주변 환경이 변화하기 시작한다.

       

       평야에서는 이름 모를 풀들이 자라나 작은 꽃을 피웠고, 조금 떨어진 수림에서는 나무가 급성장하며 위협적인 사방으로 가지를 뻗는다.

       

       얼핏 보면 하늘을 향해 가시를 세운 것 같은 모양새.

       

       지금껏 황혼을 삼키는 자나 카렌이 보여준 인간의 신성력으로 행하는 자그마한 권능이 아니다.

       

       진짜 신이 일으키는 세상을 뒤바꾸는 기적. 그 파편이 이 자리에 임한 것이다.

       

       “요나야! 위험해!”

       

       “엘리 선배. 부탁해. 나는 인질 쪽을 보고 올게.”

       

       “이, 이건…이게 바로….”

       

       정신이 번쩍 든 사람처럼 황급히 내게 손을 뻗는 엘리와, 레몬과 애플이 있는 수풀을 향해 달려가는 리디아.

       

       그리고 고장이라도 난 것처럼 멍하니 세계수를 올려다보는 카렌.

       

       하긴. 죽은 신의 힘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강대하긴 하지.

       

       사실 당연한 일이다. 애초에 왜 미궁에서 처음 등장한 계층 수호자는 확정적으로 권능을 드랍하겠는가.

       

       계층 수호자는 해당 층의 신이 남긴 유언이다.

       

       그러니 시공간을 꼬아 리젠 시킨 버전은 몰라도, 최초로 관측된 계층 수호자에겐 신들이 마지막 순간에 남긴 념念이 깃들어 있다.

       

       이 경우에는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엘프의 안위를 걱정하는 마음이었겠지.

       

       혹시라도 억울한 일을 당하거나, 종족의 존망이 흔들리는 사건이 있다면, 죽어서라도 자신의 아이들을 위해 힘을 보태겠다는 세계수의 결의.

        

       그것이 바로 1층의 소환 조건에 숨겨진 설정이다.

       

       “아, 아아….”

       

       내게는 몇 줄 텍스트에 불과했던 세계수의 마음이 현실이 되어 내 몸을, 영혼을 압박하고 있다.

       

       그것이 너무나도 가슴 벅찼다. 진짜 기적은 바로 지금 이 순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물론, 엘리의 눈에는 내가 갑작스런 변화와 압박감에 몸이 굳은 것처럼 보였던 것 같지만 말이다.

       

       “정신 차리고 이리 와!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분명 황혼을 삼키는 자의 마지막 발악이니까 그으, 시체는 포기하고…….”

       

       “아뇨. 아니에요 엘리.”

       

       그녀의 착각을 정정해 주었다.

       

       “이건 황혼을 삼키는 자와 아무런 상관도 없어요.”

       

       “…뭐?”

       

       “엘리. 모르시겠나요? 이건 계층 수호자가 소환되는 전조에요.”

       

       “소, 환?”

       

       “네. 방금 보셨잖아요. 제 기도를.”

       

       아직 여운이 가시지 않아서인지 잘 웃어지지 않는 얼굴을 억지로 일그러뜨리며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도망가란 말은 하지 말아주세요. 대신 지켜봐 주세요. 제가 싸우는 모습을. 제 기도를 세계수가 어떻게 들어주는지를. …물론 위험하면 엘리가 도와줘야겠지만요!”

       

       “…….”

       

       마지막에 그리 덧붙이며 씨익 웃어 보였건만, 어째 엘리의 얼굴은 펴질 줄은 몰랐다.

       

       여전히 진지한 표정 그대로 고개를 끄덕이는 엘리.

       

       “그래. 약속할게. 언제나 요나, 네 뒤에는 내가 있을 거야. 그러니까 안심하고 하고 싶은 것, 할 수 있는 일을 전부 하고 와.”

       

       “고마워요 엘리. 제가 엘리 많이 좋아하는 거 아시죠?”

       

       하루에 수십 번은 던지는 대수로울 것 없는 말. 하지만 작은 체구의 정체 때문인 걸까. 오늘따라 감상적인 엘리는 잠시 멍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부드러운 미소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 그리고 내가 더 고마워.”

       

       진심으로 안도한 듯한 목소리와 분위기. 평소와는 다른 엘리의 반응에 홀린 듯 멍하니 서 있던 것도 잠시.

       

       어느새 준비가 끝난 건지 과성장한 녹음 속에서 세계수의 신성력이 한 점으로 뭉치기 시작했다.

       

       꾸드득-

       

       무언가 부서지고 짓눌리는 소리와 함께 점점 진해지는 녹색 빛. 알처럼 타원형의 구체가 된 빛 덩어리에 한줄기 금이 갔다.

       

       쩌적.

        

       한번 금이 가자 걷잡을 수 없이 늘어나는 균열. 순식간에 구체의 표면을 가득 채운 금에서 한 조각 빛 덩어리가 떨어진다.

       

       채애앵-!

       

       높게 울리는 파열음. 이를 신호 삼아 녹색 알이 산산조각나며 그 내용물이 세상에 드러난다.

       

       약 2m쯤 되어 보이는 키. 비정상적으로 굵고 긴 팔다리. 그리고 전신에 빼곡히 난 가시들.

       

       가시나무를 인간형으로 깎은 듯한…아니, 인간형으로 자라난 가시나무가 뻥 뚫려있는 눈으로 이쪽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다만 묘하게 초점이 맞지 않는 것이 몸이 완전히 구성된 건 아닌 모양.

       

       선빵필승!

       

       “죽어라…!”

       

       미리 걸어둔 손목 석궁을 발사했다.

       

       쐐애액-!

       

       여전히 한발씩밖에 쏘지 못하지만, 파괴력 하나는 이전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늘어난 석궁. 그 장력을 온전히 받은 화살이 허공을 꿰뚫는다.

       

       그렇게 날카로운 화살촉이 녀석의 눈에 닿는 순간.

       

       화륵!

       

       텅 비어있던 녀석의 눈두덩이에서 녹색 화염이 타올랐다. 화살을 녹여버리기에 충분할 정도로 뜨거운 화염이.

       

       “이건 또 뭔….”

       

       한쪽 눈에서 녹아내린 쇳물을 뚝뚝 흘리는 녀석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아직 불길이 번지지 않은 깃대 부분을 뽑았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이를 살펴보더니, 그대로 주먹을 꾸욱 쥔다. 부서질 줄 알았던 화살이 계층 수호자의 몸에 흡수된다.

       

       그리고 녀석의 몸에서 뾰족한 가시 하나가 새로 돋아난다.

       

       전신이 가시로 뒤덮인 녀석이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역시 머리에 난 가시.

       

       뿔인지 왕관인지 모를 가시를 보며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가시나무의 왕….”

       

       -…….

       

       내 표현이 마음에 들었던 걸까. 녀석의 눈을 대신하던 화염이 한순간 거칠게 타올랐다.

       

       가시나무의 왕이 천천히 검지를 뻗어 나를 가리킨다. 그 불타는 눈에 담긴 것은 끝을 알 수 없는 증오와 분노.

       

       누군가가 그랬었지. 눈동자는 영혼의 창이라고.

       

       아무 말도 나누지 않은 나와 녀석이었으나, 상대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정도는 알 수 있었다.

       

       ‘나를 넘어서 힘을 취하라.’

       

       그런가.

       

       저것은 나의 복수다. 내 분노고, 내 원망이다.

       

       이 자리에 맞지 않는 것을 억지로 떠올리긴 했으나, 당시의 내가 느낀 감정은 거짓이 아니었다.

       

       내 평생의 울분이 온몸에 가시를 두른 채, 내 앞을 막아섰다.

       

       “그래. 일대일로 싸워보고 싶다 이거지? 우연이네. 나도 그런데.”

       

       키득이며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이런 정면에서 치고받는 일대일 전투 같은 것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정 반대되는 스타일인 기습과 은신에 최적화된 스킬을 지녀서인 것도 있고.

       

       하지만 지금만큼은 뒤로 뺄 수 없다.

       

       권능을 얻기 위해서는 계층 수호자에게 일정 이상의 피해를 입혀 공헌도를 확보할 필요가 있다는 이유도 있지만….

       

       그보다는 가시나무의 왕이 내 기도로부터 태어난 존재라는 점이 가장 중요한 이유다.

       

       나의 시련을 위해, 내 감정을 품고 태어난 창조물이다. 그렇다면 적어도 나만큼은 정면에서 녀석을 상대해 줘야 하는 것 아닌가.

       

       …위험하면 다른 사람이 도와줄 거라는 계산도 아주 조금은 있고 말이지.

       

       “한번 해보자고.”

       

       아까보다는 조금 낫지만, 여전히 평소보다 거친 목소리로 그리 말하며 단검을 들었다.

       

       어느새 피를 씻어내고, 순백을 되찾은 검신이 태양 빛을 받아 반짝인다.

       

       살짝 검신을 기울여 녀석을 향해 빛을 반사시켰다.

       

       번쩍!

       

       불타는 눈이지만, 감각 기관은 사람과 다를 게 없다는 걸까. 눈부심에 순간 움찔한 가시나무의 왕.

       

       그 틈을 타 발치의 이름 모를 들꽃 위를 박찼다.

       

       “헤이스트!”

       

       짧은 시간이나마 마도구를 전부 활성화시킨 탓에 얼마 남지 않는 마나. 그 절반 가까이가 부츠에 빨려 들어간다.

       

       그리고 마나의 대가라는 듯 발에서부터 시작해 전신을 가득 채우는 고양감.

       

       세상의 흐름이 느려진다. 아니, 내 몸과 사고가 가속하는 것이다.

       

       파앙!

       

       빠르게 가까워지는 가시나무 왕. 눈부심 때문에 반 박자 늦게 반응한 녀석이 팔을 크게 휘두른다.

       

       순식간에 가시가 자라나며 크게 부풀어 오르는 팔. 멈추기에 늦었고, 이대로는 자세를 꺾거나 옆으로 방향을 꺾어도 직격이다.

       

       그랬다가는 구멍 송송 요나 다짐육이 되어버리겠지.

       

       “어딜!”

       

       하여 허벅지에 무리하게 힘을 실어 높이 도약했다.

       

       파앗!

        

       달려가던 관성 때문인지 빙글빙글 돌아가는 시야. 그 틈을 타 아공간 반지에서 꺼낸 밧줄을 던졌다.

       

       지금껏 아이언 울프를 잡으며 몇번 해본 일답게 정확히 가시나무 왕의 목에 걸리는 밧줄.

       

       인간형이지만 정말 사람은 아니니 이대로 질식시키는 건 무리지만…상하좌우의 개념이 사라진 공중에서 기준을 잡기엔 충분했다.

       

       “하아아압!”

       

       날아가던 몸에 제동이 걸리며 자세를 바로잡는다. 그리도 이번에는 녀석의 뒤통수를 향해 잡아당겨지는 몸뚱이.

       

       가시에 찔리지는 않게, 하지만 내 무기는 닿을 정도의 적당한 거리에서 단검을 휘둘렀다.

       

       서걱!

       

       가장 크고 아름다운 머리의 가시를 절반 가까이 베어냈다.

       

       당황한 녀석이 몸을 기괴한 각도로 꺾는다. 그러자 분명 앞을 향해있던 비대한 팔이 어느새 뒤로 휘둘러지고 있었다.

       

       “큿!”

       

       늦지 않게 지면에 땅을 디디고, 뒤로 펄쩍 뛸 수 있었으나…코끝을 가시에 살짝 베이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래도 성공적인 딜교라며 자축하며 자세를 다잡는 것도 잠시.

       

       “어어…?”

       

       순간 휘청거리는 시야.

       

       설마 가시에 독이라도 있었던 건가? 살짝 스쳤을 뿐인데도 이 정도라니. 일단 침착하게 아공간에서 해독 포션을 꺼내 마시려던 순간이었다.

       

       화아악!

       

       유니콘 단검이 발작하듯 백광을 토해내더니, 흔들리던 시야가 순식간에 정상으로 돌아왔다.

       

       피를 흘리던 코끝의 상처가 반쯤 아문 것은 덤이었고.

       

       “오.”

       

       그러고 보니 유니콘 단검에는 치유와 정화의 힘이 있다고 했었지.

       

       이쯤에서 잠깐 머릿속에서 주판을 튕겨보았다.

       

       근력이나 체력이야 당연히 가시나무의 왕에 비해 연약하기 그지없겠지. 하지만 속도는 내가 더 빠르다. 헤이스트를 쓰면 잠깐이나마 압도할 수도 있다.

       

       거기에 근접전을 방해하는 빼곡한 가시에 담긴 독은 유니콘 단검으로 치료할 수 있는 수준.

       

       만약 결정적인 순간에 남은 마력을 쥐어짜 다시 한번 투명 망토를 활성화하면…….

       

       “어라?”

       

       이거, 잘만 하면 혼자서도 해볼 만하겠는데?

       

       사랑의 여신은 다 생각이 있었구나!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요즘 진행중인 애써줘용 공모전에서 두각을 드러내던 남역 소설들이 하나둘 연중하고 사라졌네요…

    대체 왜…잘 쓰고 있었으면서…

    여긴 춥고 외로워요…다른 남역 작가분들이 더 늘었으면 좋겠워요.

    남역 붐은 오는가, 남역의 봄은 어디에 있는가…

    응애.

    다음화 보기


           


EP.71

EP.71





       “…나 빼고 다 뒤졌으면.”


       


       진심이 담긴 한탄.


       


       이에 호응하듯 세계수의 환영이 녹색으로 빛나기 시작했다.


       


       화아악-!


       


       분명 실체가 존재하지 않을, 그저 생전의 바람이 투영됐을 뿐인 세계수에서 뿜어져 나오는 막대한 존재감.


       


       세계수의 신성이 주변 일대를 뒤덮는다. 그리고 주변 환경이 변화하기 시작한다.


       


       평야에서는 이름 모를 풀들이 자라나 작은 꽃을 피웠고, 조금 떨어진 수림에서는 나무가 급성장하며 위협적인 사방으로 가지를 뻗는다.


       


       얼핏 보면 하늘을 향해 가시를 세운 것 같은 모양새.


       


       지금껏 황혼을 삼키는 자나 카렌이 보여준 인간의 신성력으로 행하는 자그마한 권능이 아니다.


       


       진짜 신이 일으키는 세상을 뒤바꾸는 기적. 그 파편이 이 자리에 임한 것이다.


       


       “요나야! 위험해!”


       


       “엘리 선배. 부탁해. 나는 인질 쪽을 보고 올게.”


       


       “이, 이건…이게 바로….”


       


       정신이 번쩍 든 사람처럼 황급히 내게 손을 뻗는 엘리와, 레몬과 애플이 있는 수풀을 향해 달려가는 리디아.


       


       그리고 고장이라도 난 것처럼 멍하니 세계수를 올려다보는 카렌.


       


       하긴. 죽은 신의 힘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강대하긴 하지.


       


       사실 당연한 일이다. 애초에 왜 미궁에서 처음 등장한 계층 수호자는 확정적으로 권능을 드랍하겠는가.


       


       계층 수호자는 해당 층의 신이 남긴 유언이다.


       


       그러니 시공간을 꼬아 리젠 시킨 버전은 몰라도, 최초로 관측된 계층 수호자에겐 신들이 마지막 순간에 남긴 념念이 깃들어 있다.


       


       이 경우에는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엘프의 안위를 걱정하는 마음이었겠지.


       


       혹시라도 억울한 일을 당하거나, 종족의 존망이 흔들리는 사건이 있다면, 죽어서라도 자신의 아이들을 위해 힘을 보태겠다는 세계수의 결의.


        


       그것이 바로 1층의 소환 조건에 숨겨진 설정이다.


       


       “아, 아아….”


       


       내게는 몇 줄 텍스트에 불과했던 세계수의 마음이 현실이 되어 내 몸을, 영혼을 압박하고 있다.


       


       그것이 너무나도 가슴 벅찼다. 진짜 기적은 바로 지금 이 순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물론, 엘리의 눈에는 내가 갑작스런 변화와 압박감에 몸이 굳은 것처럼 보였던 것 같지만 말이다.


       


       “정신 차리고 이리 와!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분명 황혼을 삼키는 자의 마지막 발악이니까 그으, 시체는 포기하고…….”


       


       “아뇨. 아니에요 엘리.”


       


       그녀의 착각을 정정해 주었다.


       


       “이건 황혼을 삼키는 자와 아무런 상관도 없어요.”


       


       “…뭐?”


       


       “엘리. 모르시겠나요? 이건 계층 수호자가 소환되는 전조에요.”


       


       “소, 환?”


       


       “네. 방금 보셨잖아요. 제 기도를.”


       


       아직 여운이 가시지 않아서인지 잘 웃어지지 않는 얼굴을 억지로 일그러뜨리며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도망가란 말은 하지 말아주세요. 대신 지켜봐 주세요. 제가 싸우는 모습을. 제 기도를 세계수가 어떻게 들어주는지를. …물론 위험하면 엘리가 도와줘야겠지만요!”


       


       “…….”


       


       마지막에 그리 덧붙이며 씨익 웃어 보였건만, 어째 엘리의 얼굴은 펴질 줄은 몰랐다.


       


       여전히 진지한 표정 그대로 고개를 끄덕이는 엘리.


       


       “그래. 약속할게. 언제나 요나, 네 뒤에는 내가 있을 거야. 그러니까 안심하고 하고 싶은 것, 할 수 있는 일을 전부 하고 와.”


       


       “고마워요 엘리. 제가 엘리 많이 좋아하는 거 아시죠?”


       


       하루에 수십 번은 던지는 대수로울 것 없는 말. 하지만 작은 체구의 정체 때문인 걸까. 오늘따라 감상적인 엘리는 잠시 멍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부드러운 미소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 그리고 내가 더 고마워.”


       


       진심으로 안도한 듯한 목소리와 분위기. 평소와는 다른 엘리의 반응에 홀린 듯 멍하니 서 있던 것도 잠시.


       


       어느새 준비가 끝난 건지 과성장한 녹음 속에서 세계수의 신성력이 한 점으로 뭉치기 시작했다.


       


       꾸드득-


       


       무언가 부서지고 짓눌리는 소리와 함께 점점 진해지는 녹색 빛. 알처럼 타원형의 구체가 된 빛 덩어리에 한줄기 금이 갔다.


       


       쩌적.


        


       한번 금이 가자 걷잡을 수 없이 늘어나는 균열. 순식간에 구체의 표면을 가득 채운 금에서 한 조각 빛 덩어리가 떨어진다.


       


       채애앵-!


       


       높게 울리는 파열음. 이를 신호 삼아 녹색 알이 산산조각나며 그 내용물이 세상에 드러난다.


       


       약 2m쯤 되어 보이는 키. 비정상적으로 굵고 긴 팔다리. 그리고 전신에 빼곡히 난 가시들.


       


       가시나무를 인간형으로 깎은 듯한…아니, 인간형으로 자라난 가시나무가 뻥 뚫려있는 눈으로 이쪽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다만 묘하게 초점이 맞지 않는 것이 몸이 완전히 구성된 건 아닌 모양.


       


       선빵필승!


       


       “죽어라…!”


       


       미리 걸어둔 손목 석궁을 발사했다.


       


       쐐애액-!


       


       여전히 한발씩밖에 쏘지 못하지만, 파괴력 하나는 이전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늘어난 석궁. 그 장력을 온전히 받은 화살이 허공을 꿰뚫는다.


       


       그렇게 날카로운 화살촉이 녀석의 눈에 닿는 순간.


       


       화륵!


       


       텅 비어있던 녀석의 눈두덩이에서 녹색 화염이 타올랐다. 화살을 녹여버리기에 충분할 정도로 뜨거운 화염이.


       


       “이건 또 뭔….”


       


       한쪽 눈에서 녹아내린 쇳물을 뚝뚝 흘리는 녀석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아직 불길이 번지지 않은 깃대 부분을 뽑았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이를 살펴보더니, 그대로 주먹을 꾸욱 쥔다. 부서질 줄 알았던 화살이 계층 수호자의 몸에 흡수된다.


       


       그리고 녀석의 몸에서 뾰족한 가시 하나가 새로 돋아난다.


       


       전신이 가시로 뒤덮인 녀석이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역시 머리에 난 가시.


       


       뿔인지 왕관인지 모를 가시를 보며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가시나무의 왕….”


       


       -…….


       


       내 표현이 마음에 들었던 걸까. 녀석의 눈을 대신하던 화염이 한순간 거칠게 타올랐다.


       


       가시나무의 왕이 천천히 검지를 뻗어 나를 가리킨다. 그 불타는 눈에 담긴 것은 끝을 알 수 없는 증오와 분노.


       


       누군가가 그랬었지. 눈동자는 영혼의 창이라고.


       


       아무 말도 나누지 않은 나와 녀석이었으나, 상대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정도는 알 수 있었다.


       


       ‘나를 넘어서 힘을 취하라.’


       


       그런가.


       


       저것은 나의 복수다. 내 분노고, 내 원망이다.


       


       이 자리에 맞지 않는 것을 억지로 떠올리긴 했으나, 당시의 내가 느낀 감정은 거짓이 아니었다.


       


       내 평생의 울분이 온몸에 가시를 두른 채, 내 앞을 막아섰다.


       


       “그래. 일대일로 싸워보고 싶다 이거지? 우연이네. 나도 그런데.”


       


       키득이며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이런 정면에서 치고받는 일대일 전투 같은 것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정 반대되는 스타일인 기습과 은신에 최적화된 스킬을 지녀서인 것도 있고.


       


       하지만 지금만큼은 뒤로 뺄 수 없다.


       


       권능을 얻기 위해서는 계층 수호자에게 일정 이상의 피해를 입혀 공헌도를 확보할 필요가 있다는 이유도 있지만….


       


       그보다는 가시나무의 왕이 내 기도로부터 태어난 존재라는 점이 가장 중요한 이유다.


       


       나의 시련을 위해, 내 감정을 품고 태어난 창조물이다. 그렇다면 적어도 나만큼은 정면에서 녀석을 상대해 줘야 하는 것 아닌가.


       


       …위험하면 다른 사람이 도와줄 거라는 계산도 아주 조금은 있고 말이지.


       


       “한번 해보자고.”


       


       아까보다는 조금 낫지만, 여전히 평소보다 거친 목소리로 그리 말하며 단검을 들었다.


       


       어느새 피를 씻어내고, 순백을 되찾은 검신이 태양 빛을 받아 반짝인다.


       


       살짝 검신을 기울여 녀석을 향해 빛을 반사시켰다.


       


       번쩍!


       


       불타는 눈이지만, 감각 기관은 사람과 다를 게 없다는 걸까. 눈부심에 순간 움찔한 가시나무의 왕.


       


       그 틈을 타 발치의 이름 모를 들꽃 위를 박찼다.


       


       “헤이스트!”


       


       짧은 시간이나마 마도구를 전부 활성화시킨 탓에 얼마 남지 않는 마나. 그 절반 가까이가 부츠에 빨려 들어간다.


       


       그리고 마나의 대가라는 듯 발에서부터 시작해 전신을 가득 채우는 고양감.


       


       세상의 흐름이 느려진다. 아니, 내 몸과 사고가 가속하는 것이다.


       


       파앙!


       


       빠르게 가까워지는 가시나무 왕. 눈부심 때문에 반 박자 늦게 반응한 녀석이 팔을 크게 휘두른다.


       


       순식간에 가시가 자라나며 크게 부풀어 오르는 팔. 멈추기에 늦었고, 이대로는 자세를 꺾거나 옆으로 방향을 꺾어도 직격이다.


       


       그랬다가는 구멍 송송 요나 다짐육이 되어버리겠지.


       


       “어딜!”


       


       하여 허벅지에 무리하게 힘을 실어 높이 도약했다.


       


       파앗!


        


       달려가던 관성 때문인지 빙글빙글 돌아가는 시야. 그 틈을 타 아공간 반지에서 꺼낸 밧줄을 던졌다.


       


       지금껏 아이언 울프를 잡으며 몇번 해본 일답게 정확히 가시나무 왕의 목에 걸리는 밧줄.


       


       인간형이지만 정말 사람은 아니니 이대로 질식시키는 건 무리지만…상하좌우의 개념이 사라진 공중에서 기준을 잡기엔 충분했다.


       


       “하아아압!”


       


       날아가던 몸에 제동이 걸리며 자세를 바로잡는다. 그리도 이번에는 녀석의 뒤통수를 향해 잡아당겨지는 몸뚱이.


       


       가시에 찔리지는 않게, 하지만 내 무기는 닿을 정도의 적당한 거리에서 단검을 휘둘렀다.


       


       서걱!


       


       가장 크고 아름다운 머리의 가시를 절반 가까이 베어냈다.


       


       당황한 녀석이 몸을 기괴한 각도로 꺾는다. 그러자 분명 앞을 향해있던 비대한 팔이 어느새 뒤로 휘둘러지고 있었다.


       


       “큿!”


       


       늦지 않게 지면에 땅을 디디고, 뒤로 펄쩍 뛸 수 있었으나…코끝을 가시에 살짝 베이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래도 성공적인 딜교라며 자축하며 자세를 다잡는 것도 잠시.


       


       “어어…?”


       


       순간 휘청거리는 시야.


       


       설마 가시에 독이라도 있었던 건가? 살짝 스쳤을 뿐인데도 이 정도라니. 일단 침착하게 아공간에서 해독 포션을 꺼내 마시려던 순간이었다.


       


       화아악!


       


       유니콘 단검이 발작하듯 백광을 토해내더니, 흔들리던 시야가 순식간에 정상으로 돌아왔다.


       


       피를 흘리던 코끝의 상처가 반쯤 아문 것은 덤이었고.


       


       “오.”


       


       그러고 보니 유니콘 단검에는 치유와 정화의 힘이 있다고 했었지.


       


       이쯤에서 잠깐 머릿속에서 주판을 튕겨보았다.


       


       근력이나 체력이야 당연히 가시나무의 왕에 비해 연약하기 그지없겠지. 하지만 속도는 내가 더 빠르다. 헤이스트를 쓰면 잠깐이나마 압도할 수도 있다.


       


       거기에 근접전을 방해하는 빼곡한 가시에 담긴 독은 유니콘 단검으로 치료할 수 있는 수준.


       


       만약 결정적인 순간에 남은 마력을 쥐어짜 다시 한번 투명 망토를 활성화하면…….


       


       “어라?”


       


       이거, 잘만 하면 혼자서도 해볼 만하겠는데?


       


       사랑의 여신은 다 생각이 있었구나!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요즘 진행중인 애써줘용 공모전에서 두각을 드러내던 남역 소설들이 하나둘 연중하고 사라졌네요...

    대체 왜...잘 쓰고 있었으면서...

    여긴 춥고 외로워요...다른 남역 작가분들이 더 늘었으면 좋겠워요.

    남역 붐은 오는가, 남역의 봄은 어디에 있는가...

    응애.
    다음화 보기

Comment

Leave a Reply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 Required fields are marked *

Options

not work with dark mode
Res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