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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71

       하늘에 석양이 졌다.

         

       매장에 방문했던 귀족들은 전부 물러갔고, 주문 제작을 맡기기 위해 왔던 황후도 돌아갔다.

         

       “후아아…….”

         

       마치 녹은 아이스크림처럼 몸을 늘어트리는 프란체. 고생이 많다.

         

       ‘프리다의 인력이 넘어와야 일이 줄어들 텐데.’

         

       뭐, 이건 시간이 지나면 해결될 문제니 넘어가고. 나는 천천히 프란체에게 다가갔다.

         

       “고생하셨어요.”

         

       내 목소리에 프란체가 화들짝 놀라 이쪽을 바라봤다.

         

       “어? 언제 왔니?”

       “금방 도착했어요.”

       “치료는 잘 받았고?”

       “그럼요.”

         

       나는 자연스레 프란체의 옆자리를 차지했다.

         

       “많이 바쁘네요. 앞으로도 이럴 텐데.”

       “그러게. 쉴 시간은 있었으면 좋겠어.”

         

       하아, 큰 한숨을 쉬며 고개를 휘젓는 프란체. 어깨가 축 늘어져 있다.

         

       “엑시드에서 일을 처리하면 수월해질 거예요. 황족이나 중요한 인물만 공녀님이 상대하실 거고요.”

         

       원래 사업이란 게 처음에만 사장이 움직이지, 나중가면 직원이나 알바, 매니저를 쓰는 법이다.

         

       지금 우리는 첫 시작 단계인지라 어쩔 수 없는 부분이고.

         

       “빨리 좀 해줬으면 좋겠어. 프리다의 인력이 들어오면 사치품 독점도 모자라 지점도 늘릴 수 있을 거 아니니?”

         

       이제 사업 좀 했다고 돈 냄새를 맡기 시작하는군.

         

       “그렇죠. 여기서 마석 사업까지 개발하면 계획은 끝. 그때가 되면 공녀님 하고 싶은 대로 하셔도 좋습니다.”

         

       내 말이 끝난 순간, 갑자기 주변이 서늘해졌다. 마력의 흐름이 느껴지며 프란체 주위에서 검은 안개가 피어올랐다.

         

       ‘또 감정을 자극한 건가.’

         

       감정의 변화가 이런 식으로 나올 줄이야. 프란체는 천장을 바라보며 입맛을 다셨다.

         

       “음, 하고 싶은 거라. 이미 정해뒀네. 데카르트 가문이 후회할 정도로 잘 사는 것.”

         

       프란체는 “그리고.”라고 말하며 나를 응시했다.

         

       “어떻게든 너의 병을 치료해서 나와 계속 함께 있도록 만드는 것. 이 두 개가 내 목표야.”

         

       음, 조금 부담스러운데. 자꾸 도망치기가 꺼려지잖아.

         

       “…그러시군요. 좋은 목표입니다.”

         

       나는 그저 동조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 일이 끝나면 바로 튀어서 치킨집 차릴 거라는 소릴 어떻게 해…….

         

       “그러니 지금은 사업에 집중해야겠지?”

       “그 전에 엑시드가 일을 완수해야 하지만요.”

         

       싱긋 웃더니 눈을 감고 휴식을 취하는 프란체. 슬슬 본격적인 얘기를 꺼내볼까.

         

       “공녀님, 할 얘기가 있습니다만.”

       “뭔데?”

         

       녹초가 되어 흐느적거리던 프란체는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봤다.

         

       “인재를 구하러 갈까 합니다.”

       “인재?”

       “예.”

       “비서 말하는 거야?”

       “아닙니다. 제 보조입니다.”

         

       벌떡. 프란체가 허리까지 일으키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보조가 필요해?”

       “저 말고도 공녀님을 지킬 사람이 필요하잖습니까.”

       “나도 이제 어엿한 마법사인데?”

         

       자기 자신의 몸은 혼자 지킬 수 있게 되었지만, 사실 걔를 데려오려는 목적은 따로 있다.

         

       “공녀님, 저번에 제가 젠부코로스를 괴멸시킨 거, 기억하십니까?”

       “기억하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으니까. 근데 그건 왜?”

       “그런 더러운 일을 맡아줄 사람이 필요한 겁니다.”

         

       그제야 프란체는 “아하.”하면서 고개를 주억였다.

         

       “앞으로 공녀님의 권력이 강해지고, 영향력이 올라가면 이전과도 같은 일이 많이 벌어질 겁니다. 그걸 대비하는 거죠.”

         

       궁극적인 이유가 아닌 부가적인 이유지만, 틀린 말은 하지 않았다.

         

       “시간은 얼마나 걸릴 거 같니?”

       “길어봐야 일주일입니다. 그 전에는 돌아올 거 같네요.”

       “조금 오래 걸리는구나. 멀리 가는 거니?”

       “아니요, 상대가 상대인지라.”

         

       프란체는 “대체 누구를 데리러 가길래?”하고 중얼거리며 의문을 가졌지만, 허가는 내려줬다.

         

       “그래, 그럼 부탁할게.”

       “예. 그리고 제가 돌아왔을 땐 비서를 뽑아두셨으면 좋겠습니다.”

       “비서? 그래, 알겠어. 점 찍어둔 사람이 있기도 했고.”

         

       점 찍어둔 사람? 괜히 이상한 사람이 붙는 거 아니겠지? 나는 조심스레 물었다.

         

       “…그 대상이 누군지 들어도 괜찮겠습니까?”

       “엘반 자작. 사무 능력이 출중한 사람이야.”

         

       엘반 자작? 일단 들어본 적 없는 걸 보니 엑스트라는 분명하다. 비서로 들이기 전에 자세히 알아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만…….

         

       ‘이건 너무 과보호지.’

         

       내가 없어도 잘 할 수 있어야 하니까. 지금은 그녀를 믿고 맡길 뿐이다.

         

       “그러면 외출을 허가해주신 거로 알겠습니다.”

         

       미소를 보이며 고개를 숙이자 프란체도 별다른 걱정은 하지 않았다.

         

       “그래, 잘 하고 돌아올 거라 믿을게.”

         

       이젠 내가 노예 각인을 풀고 도망칠 거라는 의심은 하지 않고 있다. 그만큼 신뢰를 얻었다는 뜻이겠지.

         

       하지만 언젠가 이 신뢰를 깨부술 예정인지라, 착잡한 심정이 들었다.

         

       “…다녀오겠습니다.”

         

         

       * * *

         

         

       제국 동부에 위치한 술집, 마시어라.

         

       이곳에는 언제나 이야기꾼이 함께한다고 한다.

         

       “오늘의 이야기를 들려드리겠습니다.”

         

       나는 조용히 맥주를 홀짝이며 그의 말소리에 집중했다. 다른 이들도 취기에 빠져 알딸딸한 기분으로 그의 목소리에 경청했다.

         

       “마수들이 득실거리는 이 제국의 동부에는, 한 남자가 있었다.”

         

       일단 도입부부터 대단히 노잼이다.

         

       “그의 이명은 피를 부르는 백귀!”

         

       이명까지 유치하다. 뭐, 원래 알고 있었다마는.

         

       “누군가는 말했다, 유치한 이름이 아니야?”

         

       뭐지. 내 심정을 들은 거 같은데. 괜히 찔린 나는 맥주를 홀짝이며 힐끔 쳐다봤다.

         

       “하지만 그의 모습을 본 사람은 절대 그 이름을 부정하지 않았습니다. 어째서냐고요?”

         

       두둥, 탁! 갑자기 아래에 있는 통을 두드렸다. 저걸 효과라고 넣은 건가?

         

       “그가 지나간 자리에는 피 냄새만이 가득했기 때문이죠! 아, 참고로 백발이라 백귀입니다!”

         

       게임에서 나온 소개글과 같다. 그의 이름은,

         

       “백귀, 케일! 용병왕이라고 불리기도 하죠!”

         

       내가 찾던 뉴비 절단기다.

         

       노잼이어도 대단히 개노잼인 이야기에 흥분한 주점의 사람들이 소리쳤다.

         

       “야이, 씨. 또 그 얘기야?”

       “그걸 누가 몰라!”

       “알고 있는 얘기가 그 얘기뿐이냐?”

       “어디 가서 돈은 받겠냐!”

         

       무수히 쏟아지는 악수가 아닌 질타. 보아하니 저 얘기를 꺼낸 건 처음이 아닌 듯했다.

         

       ‘여기가 확실한 건 맞네.’

         

       드르륵.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곧장 계산을 끝마치고, 허름한 로브를 뒤집어썼다.

         

       “…….”

         

       주변을 둘러봤다. 공작령이나 황도와 비교하면 많이 허름한 지역. 마수들이 득실거리는 동부 끝자락이라서 그런지 관리가 힘든가 보다.

         

       뭐, 아무튼.

         

       ‘용병 길드부터 둘러보는 편이 좋겠군.’

         

       곧장 걸음을 옮겨 길드를 찾아 들어갔다.

         

       ―재앙의 파도까지 얼마나 남았지?

       ―얼마 남지 않았다.

       ―지금 임무 있어?

       ―그러지 말고, 오늘 밤에 술 한 잔?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 생생한 날고기 같은 곳이다. 나는 천천히 접수처로 향했다.

         

       저벅. 저벅.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시선이 내 쪽으로 모였다.

         

       ―…처음 보는 놈인데?

       ―신입인가?

       ―뭔가 수상한데.

       ―내가 한 번 떠보지.

         

       꽤 귀찮은 일이 생길 것 같기에 바로 등을 돌려 살기를 내뿜었다.

         

       화아악―!

         

       일순간에 서늘해진 길드.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이 움찔거리며 움직임을 멈췄다.

         

       정적. 표현할 길 없는 침묵이 긴장감으로 바뀌어 다가온다.

         

       “이제야 좀 조용해졌군.”

         

       목소리 깔고 겉멋 좀 잡아봤다. 만화 보면 이런 거 자주 나오잖나?

         

       “크흠.”

         

       할 일은 끝났으니 됐고. 접수처로 걸어갔다.

         

       “이봐.”

       “히, 히끅!”

         

       접수처의 아가씨가 딸꾹질까지 하며 몸을 오들오들 떨었다.

         

       ……너무 심했나?

         

       “접수는… 안 받나?”

         

       왠지 미안해서 조심스레 말했다. 그럼에도 접수원 아가씨는 덜덜 떨었다.

         

       “지, 지금은 일이 없어서요…….”

       “아니, 일을 맡기고 싶어서 왔다.”

       “일을 맡기고 싶으시다고요…?”

       “그래. 사람을 찾고 있다.”

         

       턱. 나는 1만 원을 올려뒀다. 이 정도면 보수로 충분하겠지. 술집 안주 가격이 140원이니까.

         

       “대체 누굴 찾으시길래요…?”

       “백귀라 불리는 자, 케일.”

       “…….”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정적이 흐르다 못해 벌레가 움직이는 소리마저 들려올 지경.

         

       “하면 안 되는 말이라도 했나?”

       “아, 아니요. 그건 아닌데요…….”

       “그럼 뭐가 문제지?”

       “그게…….”

         

       턱. 별안간 내 어깨에 손이 올라왔다. 일반적인 사람의 손이라고는 볼 수 없는 크기. 그래, 딱 곰 발바닥이 생각나는 손이다.

         

       “건방지게 용병왕을 찾아? 이 자식…….”

         

       어깨에 얹어진 손을 잡아 그대로 돌려버렸다. 쾅! 한 세 바퀴 정도 돌더니 길드 바닥에 처박혀버렸다.

         

       “어…?”

         

       나는 이름 모를 덩치를 굽어봤다.

         

       “함부로 어깨에 손 올리지 마라.”

         

       덩치의 눈에 지금 자신이 느끼는 감정이 그대로 드러났다. 의문과 두려움. 나는 접수원에게 다시 물었다.

         

       “케일은 어디에 있지?”

         

         

       * * *

         

         

       스각! 검이 지나가며 마수의 목이 두부처럼 갈라진다. 촤악거리는 소리와 함께 이곳저곳에 피가 튀어나왔다.

         

       “후우.”

         

       케일은 멈추지 않고 검을 휘둘렀다. 후웅! 새하얀 빛이 일어나며 쾌검이 일었다.

         

       “돌아가면 고기에 시원한 맥주로 속 좀 식혀야지.”

         

       곳곳에 붉은 웅덩이가 가득하다. 검 끝으로 붉은 이슬이 뚝뚝 떨어졌고, 마수 특유의 비릿한 피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의뢰도 끝났으니 돌아가야겠군.”

         

       획. 검을 휘둘러 끈적한 피를 쳐냈다. 돌아갈 준비를 마친 케일은 그대로 오러를 활성화해 달릴 생각이었지만…….

         

       “케일인가?”

         

       뒤쪽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

         

       케일은 서둘러 거리를 두고 경계 태세를 잡았다. 전혀 기척을 느끼지 못했다.

         

       “새하얀 머리에 기생오라비 같이 생긴 걸 보니 케일이 맞네.”

         

       걸음걸이에는 소리와 기척이 없었고, 허름한 로브가 얼굴을 가려 누구인지 확인할 수 없다. 수상한 냄새가 진동한다.

         

       “내가 눈치채지 못할 정도면 보통 놈은 아니란 소린데.”

         

       치이익. 땅에 붙은 발을 끌며 당장이라도 튀어갈 준비를 마친다. 칼자루를 세게 쥐고 눈을 부릅뜬다.

         

       “어디서 온 놈이지? 내게 찾아온 이유는?”

         

       저벅. 저벅. 그 남자는 천천히 다가왔다. 점점 가까워지는 거리. 이 이상으로 접근을 허용하면 안 된다.

         

       “셋을 셀 동안 대답하지 않겠다면 치겠다.”

         

       셋, 둘, 하나…….

         

       사악! 그 사내는 보이지 않는 속도로 눈앞에 등장했다. 케일은 반사적으로 검을 휘둘렀다.

         

       “흐읍!”

         

       후웅! 거대한 풍압이 발생하며 나뭇가지가 흔들리고, 이파리들이 날아갔다.

         

       “무작정 검을 휘두르면 어떡해.”

         

       케일은 전신의 신경을 끌어올려 다시 검을 휘둘렀다. 정제된 오러가 최대로 담긴 사선 베기. 그러나…….

         

       “뭣?!”

       

       쨍강! 검이 부러져버렸다. 그것도 아주 간단하게.

         

       “대체 무슨…!”

         

       깊은 오러가 담긴 검을 손날로 부러트리다니? 말이 안 된다. 케일은 깊은 혼란이 왔다.

         

       ‘대체 누구지?’

         

       황실 기사단장? 프라이덴 후작? 모습을 보면 이 둘은 아니다. 가늠이 잡히지 않아 케일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너를 데리러 왔다, 케일.”

       “…뭐? 아니, 그것보다 너는 누구지?”

       “진 바렌베르크다.”

         

       케일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 소문이 자자한 괴물이 왜 여기에? 많은 의문이 생겨났지만, 지금은 이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나를 데려가서 뭘 하려고?”

       “네가 섬길 사람이 있다.”

         

       대뜸 찾아와서 한다는 소리가 그건가? 케일은 어처구니가 없어서 피식 웃음이 나왔다.

         

       “내가 모실 사람이라니, 웃기는군. 용병왕은 누구의 밑으로 들어가지 않는다.”

         

       진이 눈썹을 일그러트린 채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 너 돈만 주면 다 하잖아.”

         

       케일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지금 나를 창녀로 보는 건가?”

       “응? 그게 아닌데?”

       “허, 웃기는군. 나를 창녀로 보다니.”

       “어, 돈만 주면 뭐든 하는 거 아니었냐…?”

         

       타앗! 한순간에 거리를 벌렸다. 화악―! 검붉은 오러가 일렁이며 케일의 몸을 감쌌다.

         

       “나를 모욕하다니, 이건 그냥 넘어갈 수 없겠군. 진 바렌베르크. 소문은 익히 들었다. 네가 얼마나 강한지 궁금했지.”

         

       케일은 피식 웃더니 손을 까딱였다. 먼저 들어오라는 도발.

         

       “나는 동부의 끝자락에서 태어나 검으로 사는 자, 케일. 백귀(白鬼)라는 이명을 가지고 있다.”

       

       진 바렌베르크란 이름을 듣고 잠시 움츠러 들었지만, 케일은 모욕을 참을 수 없었다. 그가 아무리 강하다 하더라도, 명예는 챙겨야 하지 않겠는가.

       

       “용병은 힘으로 증명하는 법. 나를 설득해봐라. 그럼 너의 말을 들어주지.”

         

       하아, 진은 얼굴을 잔뜩 찡그리며 크게 한숨을 내뱉었다. 진심으로 귀찮아 보이는 표정.

         

       “아오, 분명 게임 설정에선 돈만 주면 다 한다고 했는데. 귀찮게 되어버렸네.”

         

       진의 말이 끝난 그 순간.

       

       “…!”

         

       케일의 시야가 암전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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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러분들, 후원에 감사드립니다!

    과연 주인공이 잘 도망칠 수 있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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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Raised the Villainess and Fled

I Raised the Villainess and Fled

악역 영애를 키우고 도망쳤다
Score 8.6
Status: Ongoing Author:
I made a villainess destined for death into the most powerful person in the empire and then fl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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