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을 얻은 걸 축하한다.”
“축하해요.”
“감사합니다…한동안 벽에 막혀서 답답했었는데, 이렇게 화두를 던져주시니…”
화두?
이게 화두?
그냥 적당히 말했을 뿐인데, 이런 말 듣고 깨달음을 얻는다고?
주인공이라고 오성이 하늘 끝까지 올라간 건가. 나는 상상을 초월한 주인공의 재능에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이 정도면 적당한 사자성어 막 던지다 보면 경지가 또 오르는 거 아닌가?
“…은공?”
“일단 오늘은 경지에 올랐으니 잘 갈무리해야겠지. 그러니까…비무는 다음에 또 하자고.”
“감사합니다. 은공!”
알았으니까 일단 가라. 나는 몇번이고 감사 인사를 하며 떠나가는 목경이를 배웅해주곤, 그가 사라지자 한숨을 쉬었다.
“무지막지한 재능의 편린을 본 기분인데.”
“아저씨, 무슨 말을 했길래 깨달음을 얻은 거에요?”
“서 있는 곳이 다르면 보이는 풍경도 다르다.”
내 말에 혜령이가 미묘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좋은 말이긴 하지만 깨달음을 얻을 정도인지는 모르겠어요…”
“나도 모르겠다.”
이런 말로 깨달음을 얻었으면 개나 소나 화경 찍고 무림 제국을 세웠겠지. 이 정도면 영약, 처음부터 의미 없는 거 아냐?
보통 내공도 깨달음을 얻으면 큰 폭으로 늘어나는 걸로 아는데. 어쩌면 내공은 이미 나보다 많을지도 모르겠다. 서역은 전반적인 오러의 양이 적은 편에 속하니까.
서양과 동양의 깨달음의 차이인지 오러가 그렇게 많이 불어나지 않기도 하고.
애초에 서역의 아츠야 그 작은 오러를 기반으로 만들어져 있으니 큰 문제는 없지만…그래도 중원사람들처럼 넘쳐나면 좋긴 한데.
이 부분은 영약으로 해결할 수밖에 없겠지.
“나도 빨리 경지에 오르고 싶은데…아저씨! 저랑 비무해요!”
“방금 수련 다녀온 거 아니었냐. 씻은 지 얼마 되지도 않은 것 같은데.”
“씻는 건 다시 씻으면 돼요!”
“지쳤을 텐데 내일 하자.”
“할 수 있는데-”
볼 부풀리고 팔 파닥여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야.
“수련도 적당히 해야 의미가 있는 거다. 과유불급이라는 말도 있잖냐.”
“아저씨는 고사성어를 어떻게 아는 거예요? 그거 논어에 나오는 말이잖아요?”
“…그냥 공부하다 보니까 그렇게 됐다.”
“아저씨 대단해요! 저는 어려운 말은 잘 못 쓰겠던데-”
“평범한 거니까 너무 시무룩해 하지 마라. 나도 각 잡고 공부해서 할 줄 아는 거니.”
정확히는 21세기에서 그랬지.
“헤헤…아저씨, 그럼 저는 먼저 방에 들어갈게요!”
“그래, 그래라. 난 좀 씻고 올 테니.”
나는 종종걸음으로 방에 들어가는 혜령이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갈아입을 옷을 가지러 방으로 향했다.
——————————-
“흠흠. 다 모이셨군. 이제부터 본선 대진표를 정하기 위한 추첨을 하겠소.”
심판의 말에, 나와 혜령이를 포함한 모든 본선 진출자가 심판 옆에 놓인 적당한 크기의 나무 상자를 쳐다보았다.
“저기서 뭘 뽑냐에 따라 올라갈 수 있냐 없냐가 갈리겠네요…”
“너무 걱정하지 마라. 충분히 할 수 있을 테니.”
내 기억이 맞다면 본선부터는 최소 일류고수들. 그중에서도 눈에 띄는 후기지수는 구파일방과 오대세가가 대부분이니, 구파일방의 무인들과 대진이 붙는 게 아니라면 걱정하는 것만큼 어려운 싸움은 되지 않을 터.
“아저씨는 안 떨려요?”
“별로.”
어제같이 육포 씹던 동료가 다음날 머리만 돌아오는 일이 비일비재한 전장에 비하면 여긴 천국이지. 적어도 죽을 걱정은 없잖아.
물론 이제 그렇게 될 예정이긴 하지만…그건 어떻게든 해 봐야지. 저기 저 천산에서 아득바득 기어 오는 천마 녀석 대가리를 깨야 하니까.
“가장 앞에 선 사람부터 하나씩 종이를 뽑으시오!”
아, 이제 시작인가.
우리는 잡담을 멈추고 상자를 향해 다가가는 청년을 쳐다보았다.
창을 든 걸 보니 보기 드문 창잡이인가. 무림에서는 창을 잘 안 쓴다고 들었는데, 꼭 그렇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한번 붙어보고 싶기는 한데, 대진이 어떻게 될지 모르겠네.
“양씨세가의 양서유! 5조!”
“큽…”
“아저씨 왜 그래요?”
“그냥 기침이 나온 것뿐이야.”
이름이 왜 저래?
처음의 기습 이래로, 본선 대진은 순조롭게 정해졌다.
그리고 거의 끝에 접어들어서야 내 이름이 불렸다.
“위리엄! 앞으로 나오시오!”
나는 터벅터벅 걸어 나와 상자에 손을 집어넣었다.
이 쪽지로 할까. 나는 손을 빼내고 쪽지를 펼쳐 심판에게 보여주었다.
“위리엄! 5조!”
진짜 붙게 됐네.
이걸 좋아해야 할는지.
내가 자리로 돌아가자, 혜령이가 웃는 얼굴로 다가와 말했다.
“아까 그 창수랑 싸우게 됐네요!”
“창이라.”
생각해 보면 내 기사시절 메인 무장은 랜스였지. 검은 보조 무장이고.
그래서 창잡이 상대법을 잘 안다…고 하기엔 창이 생긴 게 너무 다르네. 애초에 랜스는 기병 돌파용 무기였으니 비교하는 거 자체가 이상하긴 하지만.
그래도 아주 경험이 없는 건 아니니 상대하는 게 그렇게 어렵지는 않을 듯했다.
이슬람에서 고르고 고른 정예병들인 맘루크 중에는 창을 잘 쓰는 자도 여럿 있었으니.
그들에 비하면 재주가 뛰어나진 않으리라.
그쪽은 아예 작정하고 나라에서 키운 괴물들이었으니까.
기사가 아니라면 정면 대결 자체가 성립되지 않을 정도의 괴물들. 그놈들에 비하면 이 녀석들은…애송이에 불과할 뿐이다.
숙련된 도살자들과 평범한 인간의 싸움은 궤가 다를 수밖에 없으니.
“…재밌는 비무가 되겠네.”
“으으, 첫 상대가 화산파라니…”
“청매향이었던가?”
“맞아요. 백매화 청매향 소저예요.”
…누구더라?
기억에 없는 걸 보니 원작 히로인은 아니겠지.
나는 고개를 돌려 화산파의 무인들과 담소를 나누는 청매향을 살폈다.
기도 자체는 혜령이랑 큰 차이가 없는 거 같은데.
혜령이보다 약간 더 윗줄인 것 같기는 하지만, 싸워보지 못할 정도의 차이는 아니었다. 그래도 힘든 싸움이 되기는 하겠지만…혜령이가 알아서 하겠지.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응원뿐이다.
“너무 기죽지 말고, 큰 차이 안 나니까 자신감 있게 싸워라. 기세에서 밀리면 안 돼. 내가 자주 말했지? 싸움은…”
“주도권!”
“그래.”
“은공의 말이 맞습니다.”
“추첨은 잘하고 왔나?”
“그렇습니다. 첫 상대는 패력부 송무한 공자더군요.”
패력부라…쉽지 않은 싸움…이라고 하기에는 이 녀석은 절정고수랑 붙여놔도 중간에 깨달음 얻고 절정고수 될 놈인데.
까놓고 말해서 별걱정이 안 될 수밖에 없었다. 원작 주인공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재능을 가졌는지 잘 알고 있는 사람이 나니까.
“그리 어려운 상대는 아니군. 잘하고 와라.”
“응원 감사합니다. 은공.”
“…”
“흠흠…”
아, 아직 안 끝났지. 나는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끌어모으는 심판에게 시선을 돌렸다. 심판은 본선 진출자들을 쓱 둘러보더니, 내공을 실은 목소리로 외쳤다.
“본선은 이틀 후 미시(未時)에 시작할 예정이니 늦지 말고 오시오! 일 다경이 지나도록 오지 않으면 자동 탈락 처리되니 말이오!”
미시면 대충 1시쯤이니까 밥 먹고 난 이후인가.
“그럼 무림의 미래를 책임질 후기지수들이여! 이틀 후에 보겠소!”
그 말과 함께 심판이 단상에서 사라지자, 본선 진출자들도 흩어지기 시작했다. 나는 잠시 흩어지는 무인들을 바라보다 소매를 잡아끄는 혜령이의 행동에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아저씨, 이제 뭐 할 거예요?”
“밥 먹으러 가야지. 슬슬 밥시간이니.”
“벌써 그렇게 됐어요?”
“아마.”
“저는 그럼 순찰대로 복귀하겠습니다. 은공…”
“너도 따라와라.”
“예?”
“이왕 온 김에 맛있는 거 먹고 가야지.”
친분도 좀 더 쌓고 그래야지.
미래에 마교와 싸울 때 가장 큰 도움이 될 동료신데.
원작에서 순찰대 밥이 부실하다는 언급이 수도 없이 나왔던 걸 기억하고 있기에, 안쓰러워서 그런 것도 있었다. 사람이 먹고살기 고달파도 밥은 맛있게 먹어야지.
“저는 괜찮습니다.”
“부담스러워하지 않아도 된다.”
“허나…”
목경이의 시선이 혜령이 쪽으로 돌아갔다 다시 돌아왔다.
아, 그런 건가.
나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너무 신경 쓰지 마라. 이렇게 된 거 나름대로 관계를 쌓는다고 생각해라. 너도 언제까지 혼자서 다닐 수는 없다고.”
“…알겠습니다.”
혜령아, 뚱한 표정으로 그만 쳐다봐라. 나도 쓸만한 부하가 있어야 마교를 막든지 말든지 한다고.
나는 삐졌는지 볼을 부풀리며 고개를 홱 돌리는 혜령이의 볼을 콕 찌르며 말했다.
“혜령아, 원하는 걸로 시켜줄 테니 기분 풀어라. 어차피…”
“…알았어요.”
혜령이는 내 말에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랜스차징…하고싶다…
츄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