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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72

       

       

       

       

       

       

       

       

       

       “하하하하-! 으하하하하하-!!”

       

       혼약대전이 성대한 종장의 막을 올리기 하루 전.

       단 한순간에 로스펠 후작가에서 쫓겨나고, 전재산을 털어 르미앙의 죽음을 의뢰한 암살단도 의뢰비만 꿀꺽하곤 잠적해버려 단 한순간에 무일푼 상거지가 되어버린 블런드가 밤하늘을 향해 호탕하게 웃어젖히고 있었다.

       

       황당했다.

       어처구니가 없었다.

       믿기지 않았다.

       말이 안 됐다.

       

       수확철이 되면 황금빛 물결이 몰아치는 엘름 곡창지대의 지배자, 로스펠 후작가에서 쫓겨났다는 것은 황당하고 어처구니 없으며 믿을 수 없고 말이 안되는 일이었다.

       

       누렸던 권세, 베풀던 자만, 과시하던 재물.

       그 모든 것이 하룻밤의 꿈처럼 사라져버린 것이 당최 와닿지가 않아 웃었다.

       아버지에게 폭행당해 피떡이 된 얼굴이 맹렬히 욱씬거림에도, 고통도 절망도 현실이 아닌 것 같아 한참을 웃어젖히던 블런드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하, 하하하.”

       

       옷에 묻은 먼지를 털며 마저 남은 웃음을 토해낸 블런드가 어디론가 향하기 시작했다.

       인간은 감당하기 힘든 충격을 받게 되면 인지력이 저하되고 분별력이 약해진다.

       이성적인 사고보다 충동적인 본능에 의거해 행동하게 되고, 충격을 극복하지 못 하면 점차 지성이 망가지게 된다.

       그렇게 망가진 자는 결국 정신줄을 놓게 되고, 한 명의 지성체가 아닌 한마리의 짐승이 되고 마는 것이다.

       

       “여봐라.”

       

       블런드가 처음으로 찾은 곳은 은행이었다.

       파문된지 고작 몇 시간이 흘렀다.

       은행가에 로스펠 후작가 차남의 파문 소식이 퍼지기엔 한참 이른 시간이었고, 로스펠 후작의 이름을 걸고 돈을 빌리기엔 충분한 시간이었다.

       

       “급전이 필요해 그러니, 위대한 로스펠 후작가의 이름을 담보로 최대한 대출해주게.”

       

       하지만 그는 몰랐다.

       로스펠 후작의 집사장이 이미 이곳에 다녀갔음을.

       그의 머리 위에 앉은 로스펠 후작이 파문시킨 아들이 가문의 명예를 더럽힐 거라 예상하고선 진작 방지책을 꺼내든 것이었다.

       

       “죄송하지만 대출해 드릴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은행원이 고개를 숙이며 정중히 거절했고, 고성과 난동이 이어지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뭐?! 이 씨발년이 장난해? 로스펠 후작가의 이름을 걸고 네년 패가망신 시켜줘?!”

       “으, 은행장님께서 지시하신 거라 저도 어떻게 해드릴 수가….”

       “닥치고 은행장 나오라 그래-!!”

       

       은행은 백작령 이상의 큰 영지에만 있고, 후작령 이상의 은행에는 대부분 궁정귀족인 백작이 은행장을 맡고 있었다.

       그렇기에 큰소리를 치며 은행장을 호출하는 블런드.

       이미 현실과 망상의 경계로 내몰린 그에게 거칠 것은 없었다.

       

       문제는.

       

       “이 자를 끌어내어라.”

       

       앞으로 펼쳐질 현실이 지독히도 가혹하다는 것.

       과거에 저지른 죄악이 설산을 굴러내려오며 점차 커지는 스노우볼처럼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불어났다는 것이다.

       

       “뭐? 나, 로스펠 후작가의 차남 블런드야! 블런드! 이 새끼가 진짜 죽고 싶나?! 앙?!”

       “뭣들 하느냐. 어서 저 귀족 사칭범을 끌어내지 않고. 말을 듣지 않거든 매질을 해서라도 쫓아내어라.”

       “뭐? 너, 지금 뭐라 그랬냐? 귀족 사칭범?! 진짜 뒤지고 싶냐?!!”

       

       퍼억!

       

       “크헉! 씨, 씨발! 이 버러지 같은 천한 새끼들이 어딜 만져! 이거 놓으란 말이다!”

       

       퍼억!

       

       “크헉!”

       

       결국 우악스런 주먹질과 몽둥이질로 다짐육처럼 고르게 다져진 블런드가 은행 바깥으로 내던져졌다.

       은행은 귀족들의 전유물.

       더 이상 로스펠 후작가의 차남도, 귀족도 아니게 된 블런드에게 은행은 금단의 영역이 된 것이다.

       

       돈이 없으면 몸 하나 뉘일 곳 없는 것이 세상이다.

       이제껏 호화스런 침실의 최고급 침대에서 잠이 들고 온갖 산해진미로 목구멍에 기름칠을 했던 블런드에게 길거리 노숙 생활은 죽는 것 만큼이나 끔찍한 일이었고, 다급해진 그는 평민들의 거리로 나선다.

       해야 할 일을 하수인들을 부려 해내던 귀족가 도련님이 할 줄 아는 것이라곤, 평생을 해냈던 그것뿐이었다.

       

       갈취와 협박.

       

       “로스펠 후작의 차남 블런드다. 가진 걸 전부 내놓는다면 살려는주마.”

       

       평민가의 상점에 쳐들어가서는 대뜸 강도질을 하는 블런드.

       다른 곳이라면 모를까, 혼약대전으로 인해 대공령 내에선 대부분의 평민들이 블런드의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었고, 그 탓에 손쉽게 평민들을 갈취한 블런드가 두둑해진 주머니를 두드린다.

       게다가 잘생긴 얼굴 덕에 혼약대전에서도 많은 추종자들을 거느렸던 그였기에, 몇몇 아녀자들은 자진해서 상납을 하기도 했고 제 몸까지도 바치곤 했었다.

       

       아직까진, 블런드가 아닌 블런드 로스펠이었으니까.

       

       물론 윈터펠 대공령의 백성을 갈취하고 핍박하며 상납을 받는 행위가 로건의 귀에 들어갔다간 뼈도 못 추리겠지만, 의식주를 잃어버린 그에겐 고려대상이 아니었다.

       

       풀썩.

       

       그렇게 방 하나를 빌린 블런드가 쓰러지듯 침대에 눕고선 히죽 웃었다.

       제 꼴이 우스워, 제 꼴이 하찮아, 그리 웃음이 나왔다.

       

       “이깟 거지 같은 침대가 편히 느껴지다니, 병신 다 됐군. 하, 하하하. 하하하하!”

       

       그래.

       까짓 거 이렇게 살아가면 돼.

       평민 나부랭이 새끼들은 원래 귀족들을 위해 존재하는 거잖아?

       

       “큭큭. 내가 쉽게 뒤질 줄 알아? 나! 엘름 곡창지대의 지배자! 블런드 로스펠이라고!”

       

       과거의 영광을 모두 빼앗겼음에도 그것을 인정하지 못 해 과거에 얽매여 있는 그가 그리 외쳤다.

       듣는 이 하나 없는 쓸쓸한 공간에서.

       그렇게 첫날 밤을 보냈고, 며칠간 그리 평민들을 삥(?) 뜯으며 나름대로 유복한 생을 이어가고 있던 그에게 진짜 현실이 당도한다.

       

       “퉤-! 씨발, 더럽게 맛없군. 다시 만들어 와! 뒤지기 싫으면!”

       

       여느 날과 다름없이 한 식당에 들어가 패악질을 부리던 그가 갑작스레 날아든 돌멩이에 뒤통수를 맞아버린 것이다.

       

       팍!

       

       “크헉! 어, 어떤 개새끼냐-!!”

       

       식당에 홀로 앉아 게걸스레 음식을 먹던 블런드가 돌이 날아든 방향으로 소리쳤고, 곧.

       

       “여기 있었군? 귀족도 아니면서 귀족 행세를 한 모자도둑 새끼가?”

       

       우글대는 인파 속에 갇혔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리고 포식자에서 피식자가 되었음을, 사냥당할 시간이 왔음을 뒤늦게 깨달을 수 있었다.

       

       [모자도둑]

       

       그것은 멸문해 이름을 팔아버린 귀족 또는 파문된 귀족을 지칭하는 평민들의 은어였다.

       귀족들은 일부 평민들에게 절대적인 증오의 대상이다.

       그 증오를 피하기 위해 파멸한 귀족이 모자를 쓰고 다니는 것을 비유해 그러한 은어가 생긴 것이다.

       증오의 대상이 신분을 잃어버리고 바닥으로 내려왔다면, 전세가 역전되는 것은 당연한 현상이자 일부 평민들이 그토록 고대하고 기대하던 상황이었다.

       

       퍽! 퍼버벅!

       

       콰직!

       

       쿠당탕!

       

       “이 새끼, 파문되서 이제 아무것도 아니야! 밟아! 귀족도 아닌 주제에 감히 내 딸을 임신시켜?!!”

       “은행에서도 쫓겨났대! 우리한테 돈 뜯는 거 보면 땡전 한푼 없는 거야! 조져!”

       

       은행에서부터 시작된 풍문이 기어코 대공령 전체에 퍼지기 시작했고, 밟힐대로 밟힌 블런드는 그토록 나서기 싫었던 대공령 바깥으로 도망쳐야 했다.

       늘 든든한 호위대와 동행했던 그 길을, 이젠 피떡이 된 채 홀로 걸어야 했던 것이다.

       몬스터의 포효와 들짐승들의 울음에 겁에 질려 밤잠조차 들지 못 하며, 때로는 환각과 환청에 시달리며 그리 도망쳐야 했던 것이다.

       

       그 끝에 한 마을에 도착한 블런드가 재차 소리친다.

       

       “위대한 로스펠 후작가의 차남이다! 혼쭐이 나기 싫으면 어서 먹을 것을 내어와라!”

       

       십수 일간의 노숙으로 인해 꼴이 엉망이 됐음에도, 누가 보아도 귀족가 자제보다 노상거지가 어울리는 꼴임에도 아직 과거의 녹으로부터 벗어나지 못 한 블런드가 식당가를 기웃거리며 동냥을 명했지만, 돌아오는 건 당연한 조롱과 멸시 뿐이었다.

       루겐 마을에 도착한 그는 거지들도 피할 정도로 폐인이 되어있었으니까.

       

       “썩 꺼져! 재수가 없을려니, 왠 미친 새끼가 아침부터 꼬이고 지랄이야!”

       

       퍼억!

       

       “크헉!”

       

       평민 시종들에게 서슴없이 발길질을 해대던 그가 이젠 반대의 입장이 되어 가차없는 발길질을 당한다.

       신음을 내질러본 적 없던 주둥이는 비명 섞인 신음을 토해낸다.

       환각과 환청도 날이 갈수록 심해져간다.

       그러다 결국 지성을 새까맣게 잊어먹게 되었고, 그것이 끝이었다.

       화려하고 빛났던 삶이 그렇게 허무히 끝난 것이다.

       그리고 루겐이란 마을의 명물로써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블런드였다.

       

       “어! 빨간머리 거지다! 거지야! 빵 줄까?”

       “헤헤. 빵 좋다. 빵 먹고싶다. 헤헤.”

       “푸하하! 진짜 바보 같아! 자, 이거 한 조각이나 먹어라!”

       

       땅에 떨어진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주워 먹는, 빵만 주면 엉덩이도 까서 보여주는 빨간머리 거지로써, 비참한 생을 살아가게 된 블런드였다.

       

       “옴뇸뇸! 빵이 최고다! 으헤헿!”

       

       

       

       **

       

       

       

       “…….”

       

       다시금 일어나 도망치는 블런드의 뒷모습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탈주닌자가 되어 자살했다던 카일.

       살해미수자가 되어 행방이 묘연한 데론.

       정황상 가문에서 버림 받고 정신줄을 놓아버린 듯한 블런드까지.

       그야말로 처참한 말로를 맞이한 후회캐 3인방이었고, 충격적일 정도로 망가진 또는 망가지고 있는 3인방에 말문이 턱 막힐 지경이었다.

       

       물론 당연한 결말이었고, 응당 그래야 할 일이었지만  6개월 만에 재회한 이가 미쳐버려 있는 것을 보는 건 다소 얼떨떨한 일이긴 했다.

       

       또한.

       

       한때나마 동료였던, 한때나마 경쟁 후보였던 원작 엘든의 기억에 도의적인 도움을 주어야 할 것 같았다.

       선량한 시민들에게 민폐를 끼치다니, 못 본 척 지나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하여튼 처음부터 끝까지 민폐인 놈이 아닐 수 없다.

       

       “남은 빵 전부 주게.”

       “저, 전부 말씀이십니까?”

       “빵값은 여기 은화 한닢으로 내지.”

       “예? 거, 거슬러 드리기에 너무 큰 돈입니다요.”

       “거스름돈은 필요 없네.”

       

       블런드가 훔쳐먹은 빵집 주인장에게 은화 한닢을 주었다.

       남은 빵 3개를 전부 구매하며.

       도의적인 도움을 주인장에게 전한 것이다.

       듣자 하니 이 빵집에서만 도둑질을 하는 듯 했으니까.

       블런드의 처지가 딱하다 한들, 놈을 도울 이유도 책임도 없었다.

       오히려 놈에게 도움을 주는 건 르미앙에게 못 할 짓을 저지르는 것과 같기에, 주인장에게 넉넉한 빵값을 지불하고선 빵을 들고 나섰다.

       

       “가, 감사합니다! 살펴가십시오!”

       

       딱히 배가 고프진 않았지만, 한입 뜯어 먹어보았다.

       눈을 휘둥그레 뜨며, 블런드가 뛰어간 방향을 쳐다보았다.

       평범히 생겨놓고서는 평범치 않은 맛을 담아내는 빵을 씹으며.

       

       ……블런드.

        와중에도 이 집만 고집하는 이유가 있었구나?

       

       “뭐야? 이거 왜 이렇게 맛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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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migrated Into A Tragic Romance Fantasy

Transmigrated Into A Tragic Romance Fantasy

후피집물의 후회캐가 되었습니다
Score 10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4 Native Language: Korean
I was curious about what a female-oriented tragic romantic fantasy was like, so I skimmed through only the free chapters. And then… “…Ha.” I found myself transmigrated into one of the main male characters, destined for tears of regret, exhaustion, and obsession. So, the first thing that had to be done was… “I, Elden Raphelion, hereby declare my withdrawal from the competition for the betrothal of the Third Northern Duchess.” To escape this traged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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