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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72

       파스텔은 뿌뿌~!

         

       완전 뿌뿌 억울했다.

         

       물 주전자가 뿌뿌~! 김 소리를 내며 달그락대는 만큼 억울했다는 얘기다.

         

       가스에 휩싸인 채 한참을 마비된 상태로 지낸 엘리와 더스틴을 구조하고, 크래프트를 보는 시선으로 바라보는 멜리사에게 해명하는 둥 하지도 않은 일을 수습하다 보니 이런 생각이 들고 말았다.

         

       내가 너무 순진했던 게 아닐까?

         

       판타지의 친구 관계란 진심 어린 마음과 솔직한 생각을 표출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던 게 아닐까?

         

       그래서 사교 룰을 따르지 않은 파스텔 러브러브는 이런저런 억울한 오해들을 받고 해명까지 해야 하는 처지가 된 거지!

         

       허억, 맞는 거 같아.

         

       이곳은 창칼이 반짝반짝이는 위험한 세상이잖아!

         

       친구 관계라도 기본적인 경계심이 있을 수밖에 없어!

         

       그런데 난 그것도 모르고 많은 친구들에게 대뜸 포옹부터 시도해 버린 거지.

         

       품속에 단검을 숨기고 있을지도 모르는 애가 달려들어서 포옹을 해대니 경계부터 할 수밖에 없는 거야.

         

       그러다 미심쩍은 정황이 우연히 쌓이고 신문부의 기사까지 보도되니 경계심이 폭발한 거고!

         

       파스텔은 깨달아 버렸다.

         

       내가 처신을 잘못했구나!

         

       생각해 보니 여긴 귀족 사회잖아!

         

       멜리사만큼은 아니라도 어느 정도 품위 있는 친구 사귀기가 필요했을지도 몰라!

         

       교내를 걷다가 마주치는 동급생을 붙잡고, 넌 오늘부터 내 친구야! 라며 친구 선언을 하는 게 아니라 티타임 약속을 잡은 다음 하하호호 떠들며 친구가 돼야 했던 거지!

         

       허억.

         

       상상하고 보니 완전 귀족적.

         

       얇은 잠옷 차림의 파스텔은 한 손으로 입을 가렸다.

         

       그리고 귀족처럼 웃었다.

         

       “하하! 호호!”

         

       악마가 침대 옆 무드등의 마석을 살펴보다가 돌아봤다. 붉은 눈동자로 소녀를 주시하더니 고민하곤 하던 일을 마저 했다.

         

       애가 예민한 상태니 내가 조심해야겠다는 마인드가 느껴진다.

         

       파스텔은 괜히 찔렸다.

         

       “사춘기 아니거든요!”

       『아무 말도 안 했다.』

         

       악마가 무드등의 마석을 꺼내더니 새 마석으로 교체했다. 침침하던 조명이 밝아졌다.

         

       『다만, 스스로의 상태는 자각하는 게 좋을 거다. 전투 때처럼 매번 휩쓸리지 말고. 그러고 보면 마족 비공정에서 했던 크래프트 연기도 호르몬에 휩쓸린 건가.』

         

       악마가 턱을 쓸었다.

         

       『흠, 좋지 않군. 자주 반복되면 성격에 악영향을 줄 거다. 혹시 최근 들어 마음에 변화가 생긴다거나 하는 건 없었나?』

         

       으아아.

         

       완전 사춘기 취급.

         

       파스텔은 양 귀를 막고 못 들은 척했다.

         

       “하하호호!”

         

       귀족 파스텔은 악마의 속삭임에 귀 기울이지 않아!

         

       악마는 괜히 또 참견했다는 걸 깨달았는지 머쓱해했다. 에너지를 다 쓴 마석을 던졌다가 받더니 몸을 돌렸다.

         

       『잘 자라, 어린 크래프트.』

         

       파스텔은 분홍 혓바닥을 빼꼼 내밀었다.

         

       “베에.”

       『어이고.』

         

       악마가 픽 웃고 문가로 향했다.

         

       문을 열고 나가려 할 때쯤 파스텔은 잽싸게 외쳤다.

         

       “악마님도 잘 자요!”

         

       바이바이.

         

       악마가 돌아보더니 미소 짓고 나갔다. 마검에 봉인된 상태라 파스텔 근처에서 너무 멀리 떨어지진 못하지만 옆의 사용인 대기 방에서 지낼 정도는 됐다.

         

       고요가 찾아왔다.

         

       파스텔은 침실 문을 주시하다가 스리슬쩍 침대를 빠져나왔다. 그리고 환한 얼굴로 만세 했다.

         

       와아!

         

       “보호자에서 해방된 자유!”

         

       새벽까지 놀아야지!

         

       가벼운 스텝을 밟으며 춤을 췄다.

         

       뚜루 뚜뚜~!

         

       “가장 자유로운 시간이 왔어요~!”

         

       벽면 책장으로 다가가 두꺼운 서적을 뽑았다. 서적 뒤편에 숨겨둔 쿠키 보따리가 드러났다.

         

       “따끈따끈 목욕 시간보다 자유로운 지금은 새벽이라 불러요~.”

         

       아직 새벽은 아니지만!

         

       쿠키 보따리를 챙겨 침대에 다이빙했다. 침대가 출렁이고 분홍 머리카락이 이리저리 펼쳐졌다.

         

       파스텔은 흥얼거리며 침대를 뒹굴뒹굴 굴렀다. 끄트머리에 당도하자 상반신만 빼꼼 내밀어 침대 밑을 들여다봤다. 유리병에 담긴 오렌지 주스와 마석 가루가 든 후추통이 보였다.

         

       “뿌뿌뿌!”

         

       악마님의 청소 스케줄, 완전 파악했다!

         

       천재 스파이 파스텔에게 간식을 숨겨놓는 것쯤은 가뿐한 일!

         

       베개를 등받이처럼 정돈하고 침대에 눕다시피 앉았다.

         

       쿠키 보따리를 열고 히히덕대며 후추통을 들었다.

         

       간식 경험 백만 번째, 이젠 잘 먹는 법을 알게 됐다.

         

       바로바로, 먹을 거를 보따리에 넣어둔 다음 마석 가루를 뿌리고 흔들어 먹는 것이다.

         

       이러면 일일이 뿌려 먹을 필요가 없어!

         

       혹시 나, 천재?

         

       스스로에게 감탄하며 마석 가루를 뿌렸다.

         

       후추후추.

         

       검은 가루가 조금 떨어지다가 멈췄다.

         

       오잉.

         

       파스텔은 후추통을 더 흔들다가 그래도 안 나오자 탁탁 쳤다. 가루가 조금 더 나오다가 멈췄다.

         

       분홍 눈동자가 동그랗게 됐다.

         

       설마.

         

       통을 열어보자 마석 가루가 다 떨어져 있었다.

         

       “허어억!”

         

       충격.

         

       파스텔은 손이 떨렸다.

         

       추웅겨억.

         

       마석 없이는 밥도 못 먹는 처량한 신세가 머릿속에 번쩍번쩍.

         

       아무거나 주워 먹다가 피 토한 기억이 반짝반짝.

         

       “그럴 수가……!”

         

       파스텔은 절규했다.

         

       절망!

         

       절마앙!

         

       원하는 간식도 못 먹는 비참한 인생!

         

       굶주림까지 무시당하는 차가운 세상!

         

       절망 속에서 몸을 비비 꼬다가 멈칫했다. 파스텔은 침대 옆 탁자의 무드등을 쳐다봤다.

         

       오이잉.

         

       눈을 굴리다가 슬쩍 무드등을 잡았다.

         

       무드등을 전문가의 얼굴로 살펴봤다. 거의 백만 년 동안 무드등만 연구한 전문가 같은 눈빛이었다.

         

       파스텔은 그러다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헉! 이럴 수가! 잠깐 켜뒀을 뿐인데 마석 에너지가 벌써 다 떨어졌잖아! 마석이 불량품이었구나! 어서 교체해야 해!”

         

       입맛을 다시며 무드등을 조작했다.

         

       끼릭끼릭.

         

       등이 돌아가며 기둥에서 천천히 빠졌다. 소형 마법진 구조라 그런지 내부에 뭔지 모를 톱니바퀴들도 있어서 생각보다 빡빡했다.

         

       철컥철컥.

         

       감질난 파스텔은 힘을 살짝 더 줬다.

         

       철컥철, 콰직-!

         

       엣.

         

       파스텔은 괴력에 부러진 기둥과 뽑힌 등을 바라봤다.

         

       오이잉.

         

       이게 원래 이렇던가아.

         

       마석이 등에서 떨어졌다. 둔탁한 소리가 울렸다.

         

       아무리 봐도 정상적인 해체가 아님.

         

       파스텔은 식은땀이 나는 거 같았다. 조용한 침실 문을 돌아봤다. 그리고 무드등 잔해를 다시 바라봤다.

         

       마른침을 꼴깍.

         

       부러진 나무 기둥과 뽑힌 등을 조심스럽게 잡았다. 둘을 원래 형태로 만들고 서로 문질렀다.

         

       비비적비비적.

         

       붙인 다음 손을 뗐다.

         

       무드등이 본래 형태를 유지한 채 곧게 섰다.

         

       파스텔은 얼굴이 환해졌다.

         

       “멀쩡-!”

         

       순간 등 부분이 나무 기둥에서 떨어졌다. 등이 탁자를 구르다 멈췄다.

         

       파스텔은 밝게 외치던 표정 그대로 굳었다. 그 상태로 고개만 돌려 침실 문을 돌아봤다.

         

       그리고 무드등(아님) 잔해를 내려봤다.

         

       소녀의 손이 떨렸다. 천천히 이불을 잡았다. 이불이 끌어당겨지고 탁자 전체를 덮었다. 잔해가 완전히 가려졌다.

         

       파스텔은 한결 나아진 표정이 됐다.

         

       몸을 돌렸다. 침대의 쿠키 보따리와 오렌지 주스가 눈에 들어왔다.

         

       소녀는 천천히 경악했다.

         

       “누가 신성한 침실에 간식거리를?!”

         

       삿대질하며 벌떡 일어났다.

         

       “나쁜 행동! 완전 나쁜 행동! 착한 파스텔은 절대 하지 않을 행동!”

         

       진짜진짜!

         

       잠시 그러다가 간식거리를 후다닥 숨겼다. 책 뒤에 넣고 침대 밑에 두고.

         

       어느새 침실이 깔끔해졌다.

         

       “후우!”

         

       파스텔은 청소를 마친 악마의 표정으로 이마를 닦았다.

         

       “그러고 보니 악마님이 자라고 했어. 어서 자야겠다.”

         

       이불과 탁자엔 시선을 주지 않은 채 침대에 누웠다.

         

       “잘 자요, 악마님.”

         

       응응.

         

       여분 베개를 꼭 끌어안았다.

         

       쿨쿨.

         

       Zzz.

         

       꿈나라로 떠나는 여정은 아름답고요…….

         

       소녀는 잠에 들었다.

         

       다음날이 됐다.

         

       『이건 뭐지?』

         

       악마가 침실에 찾아왔고, 후작 각하의 기숙사라고 배치된 완전 비싼 무드등을 부순 소녀는 야단맞았다.

         

       “우아앙!”

         

       파스텔은 펑펑 울었다.

         

       손가락으로 무드등 잔해를 가리켰다.

         

       “쟤 혼자, 쟤 혼자 부러진 거예요……!”

         

       정말이에요!

         

       “우아앙!”

         

         

         

       #

         

         

         

       벨라몬트 공작가 장남과 교단의 사주를 받고 테러를 계획한 마족 용병대장, 트마우트는 현재 위기에 빠져 있었다.

         

       아니, 위기라는 단어만으론 현재 상황을 설명하기엔 부족할 것이다.

         

       트마우트는 목숨이 경각에 달려 있었다.

         

       “저주한다, 크래프트! 저승에 떨어져서도 저주할 테다!”

         

       트마우트의 몸은 거대 철제함과 함께 쇠사슬로 꽁꽁 묶였다. 그것만 해도 죽을 위기였지만 철제함은 지금 하늘섬 끄트머리에 위치한 낭떠러지에 살포시 얹어진 상태였다.

         

       균형이 조금만 흐트러지면 철제함이 기울여지고 저 아래로 추락할 것이다.

         

       그래서 외치는 와중에도 트마우트는 온정신을 무게 균형 잡기에 집중해야 했다.

         

       핏발 선 얼굴을 한 채 상반신을 들어 올려 몸을 감싼 쇠사슬을 당겼다. 철제함이 추락하지 않게 최대한 균형을 잡았다.

         

       “크래프트……!”

         

       조금 떨어진 위치에서 하늘섬 기사단원들이 트마우트와 거대 철제함을 구경했다.

         

       “독한 놈. 끝내 뭐가 들었는지 안 알려주다니.”

       “그래도 다른 놈들을 통해 교단의 사주가 있었다는 건 알아냈으니까요. 교단에 무차별 테러가 계획이면 독가스 종류 아닐까요?”

       “뭐 그런가. 자존심 상하긴 하지만 포기해야겠지. 크래프트 각하께서 바로 버리라 했는데 굳이 토너먼트 당일인 오늘까지 심문했으니.”

         

       상관이 손짓했다.

         

       기사단원이 철제함으로 다가갔다.

         

       트마우트는 눈을 부릅떴다.

         

       “저주할 테다! 저승에 떨어져서도! 모든 것을 걸고 저주할 테다!”

       “저승은 무슨 저승이야. 신께서 사후세계는 없다 하셨는데. 열등한 이교도 같으니.”

         

       기사단원이 발을 들어 올렸다.

         

       “이제 그만 가라!”

         

       발길질이 철제함을 걷어찼다. 둔탁한 굉음이 울렸다. 낭떠러지가 일부 무너지고 철제함이 추락했다.

         

       트마우트는 비명을 질렀다.

         

         

       “크래프트……!”

       시야에서 하늘섬이 빠르게 멀어졌다. 광활한 푸른 하늘이 펼쳐졌다.

         

       트마우트는 정신 없이 주변을 살폈다.

         

       언제 구해주는 거냐!

         

       설마 날 버린 건 아니겠지?!

         

       철제함이 돌아가고 쇠사슬에 묶인 트마우트도 덩달아 회전했다. 저 아래 대기 중이던 비공정이 보였다.

         

       갑판 위에서 건장한 체격의 카를로 교수가 추락하는 철제함을 올려봤다. 철제함이 충돌하려 했다.

         

       카를로 교수가 떨어지는 철제함에 손을 댔다. 문득 자연의 이치가 순응하고 세상이 동조했다.

         

       충격량이 상쇄되며 폭풍이 몰아쳤다. 비공정 갑판에 균열이 갔다.

         

       교수는 미간을 찌푸리다가 철제함을 갑판에 놓았다. 굉음이 일었다.

         

       그 과정에 쇠사슬이 조이자 트마우트는 피를 토했다.

         

       “살살 놔!”

       “고문이 심했나. 오늘 테러는 불가능해 보이는데.”

         

       손길이 쇠사슬을 풀었다.

         

       트마우트는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머리를 휘저었다.

         

       “할 수 있어! 내 평생을 걸고 염원하던 일이다! 교단 놈들의 약이나 줘! 부작용은 상관없으니 성능 좋은 거로!”

         

       카를로 교수가 눈썹을 올렸다. 그러더니 주머니에 손을 넣어 마석 각성제를 꺼냈다.

         

       “신약이라더군. 먹으면 오늘 내에 죽을 거야.”

         

       각성제가 던져졌다.

         

       트마우트는 잡아채 웃었다.

         

       “좋군! 좋아! 오만한 크래프트에게 복수할 수 있겠어!”

       “크래프트인가.”

         

       카를로 교수가 묘한 표정으로 하늘을 올려봤다. 거대한 하늘섬이 부유하고 있었다.

         

       “죄 많은 혈통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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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 It’s Mental Immunity

No, It’s Mental Immunity

Status: Ongoing Author:
The guardian demonic sword is troubled and in distress, believing it has been ruined because of me. Does striving for advancement through consuming demonic energy seem too evi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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