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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72

       엘리도 리디아도 카렌도. 심지어 촉촉해진 레몬과 그런 그녀로부터 살짝 거리를 벌린 애플마저도 눈앞의 광경에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그만큼 요나가 보여주는 싸움은 처절했다.

       

       부릅뜬 눈, 미묘하게 일그러진 입꼬리. 한 번이라도 더 단검을 휘두르기 위해 사선으로 몸을 던졌고, 그럴 때마다 생긴 잔 상처는 금방 회복되긴 하나 그 흔적만큼은 선명히 남긴다.

       

       1층에서 구할 수 있는 최고의 재료인 아이언 울프의 가죽으로 만든 경갑이 너덜너덜해지고, 그 사이로 새빨간 핏물이 배어 나온다.

       

       만약 쉴 새 없이 백광을 토해내며 요나의 몸을 회복해 주는 유니콘 단검이 없었다면, 진작에 과다출혈로 쓰러졌을 정도의 상처.

       

       그 모습을 지켜보던 엘리가 입술을 악물었다. 볼을 타고 흐르는 한줄기 선혈.

       

       당연한 말이지만 엘리가 끼어들고자 한다면 얼마든 그럴 수 있다. 리디아나 카렌 또한 마찬가지.

       

       전신을 가시로 뒤덮은 목인木人은 분명 강했다. 하지만 기껏해야 1층의 계층 수호자.

       

       다들 1층의 수준은 진작에 뛰어넘은 강자이기에 어렵잖게 쓰러뜨릴 수 있으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요나를 지켜보기만 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요나가 그러길 원했으니까.

       

       리디아가 엘리의 꽉 쥔 주먹을 부드럽게 감싸며 말했다.

       

       “괜찮아 엘리 선배?”

       

       “…그래. 괜찮아. 요나가 저렇게 힘내고 있는데 괜찮아야지.”

       

       요나는 가장 어려운 순간을 함께 보냈으나, 지금은 길이 갈라진 친우를 제 손으로 죽였다.

       

       그리고 지금은 요나의 울분을 그대로 먹고 자라난 적과 싸우고 있었다.

       

       슬프고 힘들지만, 그럼에도 미래로 나아가기 위해서. 더 나은 삶을 위해 자신의 발목을 붙잡는 과거와 마주한 것이다.

       

       저 작은 몸으로 기꺼이 무거운 짐을 짊어지려는 요나를 어찌 응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심지어 그 모든 것이 엘리 자신을 위해서라는 것을 알고 있다면 더더욱.

       

       작은 체구…시나가 엘리를 자신의 세상을 무너뜨린 신앙의 적이라 여긴다면, 요나는 엘리를 이단의 수렁에서 꺼내준 은인으로 여기고 있으니까.

       

       핏발 선 눈으로 쓰러질 듯, 쓰러지지 않는 요나의 분투를 지켜보는 엘리. 리디아가 잠시 고민하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엘리 선배. 혹시 요나가 황혼을 삼키는 자에게 잡혀가기 이전의 일을 알고 있어?”

       

       “…어?”

       

       “이건 어디까지나 추측인데…….”

       

       모든 것을 자신의 탓으로 돌리는 엘리가 안타까워, 요나가 먼저 말하지 않는 이상 쭉 비밀로 하기로 했던 이야기를 작게 속삭였다.

       

       물론 엘리에게만 들리도록.

       

       가만히 리디아의 귓속말을 듣던 엘리의 눈이 점점 커졌다.

       

       그리고 지금 같은 시각. 카렌 또한 마찬가지로 놀랄 수밖에 없었다.

       

       ‘설마 요나 님이….’

       

       엘리와 리디아가 자세한 이야기는 해주지 않았으나, 카렌에게도 눈치라는 게 있다.

       

       정확한 사정은 알 수 없으나 요나가 한때 황혼을 삼키는 자의 피해자였다는 것, 그리고 제 손으로 당시의 동료를 죽였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으니까.

       

       순간 카렌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요나와의 첫 만남.

       

       세상 모든 것을 사랑한다는 그 말은 분명 진심이었다. 의심의 여지가 없는 성자의 재목.

       

       하지만 신전과 엮이고 싶지 않다는 말 또한 진심이었다.

       

       당시에는 여신께서 깊은 뜻이 있으리라 짐작하며 따랐고, 교황이 변절자라는 소리에 납득하기도 했지만….

       

       이렇게 직접 황혼을 삼키는 자와 대적하고, 계층 수호자와 맞서 싸우는 모습을 눈에 담자 보이는 것이 있었다.

       

       자신이 고전했던 작은 체구를 쓰러뜨리고 조심스레 뉘이는 동안 요나에게서 느껴진 분노와 슬픔은 진짜였다.

       

       세상을 사랑하는 것과 버금갈 정도로 세상을 원망하는 마음.

       

       요나의 마음속에는 그러한 애증이, 모순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하지만 지금. 요나의 부정적인 감정을 그대로 투영하기라도 한 듯, 동일한 심상을 내뿜는 저 가시나무 목인과 싸우며 요나는 변화하고 있었다.

       

       깊은 곳에 잠들어 있던 세상을 향한 증오가 천천히 녹아내리고 있었으니까.

       

       단순히 자신의 어둠을 쳐내는 것이 아니다. 그것을 마주하고, 받아들이며, 인정한 끝에 결국에는 사랑으로 승화시키는 것.

       

       “아….”

       

       실제로는 한번 붙어보니 해볼 만하길래 속으로 여신 찬양에 들어갔을 뿐이지만, 그 사정을 모르는 카렌에겐 꽤나 감동적인 순간이었다.

       

       마치 애벌레가 고치를 뚫고 나비가 되듯. 아직 여린 성자가 우화하여 한층 오롯한 존재가 되어가는 과정.

       

       그것이 그녀의 눈앞에서 일어나는 일이었다.

       

       “여신이시여….”

       

       요나로부터 받은 여신상을 품속에서 움켜쥐며 다짐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이 땅에 내려온 여신의 대리자를 따르겠다고.

       

       그렇게 엘리와 리디아. 그리고 카렌이 각자 다른 착각으로 생각이 깊어질 무렵.

       

       레몬과 애플은 아무 생각이 없었다.

       

       “다들 뭐라는지 모르겠슴다.”

       “알려고 하면 다치는 검다. 신경 끄는검다.”

       

       왜냐하면 다들 다른 사람에게 들리지 않도록 마도구와 신성력으로 주변에 소리 제어 결계를 쳤으니까!

       

       레몬과 애플의 눈에는 각자 무어라 입술을 뻐끔거리더니, 이를 악문다거나 눈물을 뚝뚝 흘리는 괴이한 풍경으로 보일 뿐이었다…!

       

       심지어 레몬과 애플은 요나의 전투에 끼어들 능력조차 되지 않는다.

       

       결국 요나의 분투에 연신 감탄만 하던 레몬이 이래도 되나 싶어 조심스레 물었다.

       

       “애플. 우리는 뭘 할 수 있는 검까?”

       “우린 할 수 있는 게 없슴다. 완두콩 튀김이나 가져오는 검다.”

       

       무기는 뺏어도, 간식은 뺏지 않은 멍청한(?) 사이비들 덕분에 무사한 완두콩 튀김.

       

       레몬이 자신의 납작한 가슴팍을 뒤적거린 끝에 잘 묶인 주머니 하나를 꺼냈다.

       

       그리고는 안에서 꺼낸 엘프 전통 과자를 애플과 나눠 먹기 시작했다.

       

       바삭바삭.

       

       “아, 그런데 정말 요나 님이 계층 수호자를 불러내긴 했슴다.”

       “확실히 놀랍긴 함다. 다 생각이 있었던 게 분명함다.”

       

       와구와구.

       

       “…그나저나 저 수호자.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지 않슴까?”

       “저도 그 생각 했슴다. 근데 어디서 봤는지 기억이 잘 안 남다.”

       

       얌냠음냠.

       

       “으음…아! 생각났슴다! 바실리우스에 나오는 가시나무 괴물 아님까!”

       “아니 여기서 갑자기 건국 신화가 왜……에?”

       

       어이없어하다 말고 멈칫한 애플이 찬찬히 요나와 싸우는 계층 수호자를 살펴보았다.

       

       사람의 형태로 자라난 가시나무. 지금은 반쯤 잘렸지만 머리쪽에 자라난 왕관 형태의 가시, 나무를 먹고 새로운 가시를 만들어 내는 능력, 그리고 몸에 난 가시를 자유자재로 다루는 힘까지.

       

       먼 과거. 세계수의 시련을 받고, 최초로 엘프의 왕이 되었던 바실리우스의 이야기.

       

       세계수의 시련을 대행하는 존재가 바로 저 가시나무 괴물, 혹은 가시나무의 왕이라고 불리는 존재다.

       

       그리고 지금. 요나는 그 시련의 괴물과 싸우고 있다.

       

       “…….”

       “…….”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는 레몬과 애플. 둘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줄, 미리 대야 하는 검다.”

       “요나 님의 애첩? 개꿀인 검다.”

       

       이제 완두콩 튀김은 필요 없다.

       

       언제 마지막으로 썼는지 모를 빗을 꺼내, 서로의 머리를 단정히 빗질해 주는 레몬과 애플이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경쟁자는 많아 보이지만 역시 우리 이브 두목이 제일인 검다.”

       “애송이들과는 격이 다른 연륜이 있는 검다.”

       

       아무렇지 않게 양쪽에게 실례되는 소리를 하는 둘.

       

       “역시 최선은 이브 두목에게 묻어가는 것 아니겠슴까?”

       “시중이라는 명목이면 충분할 검다. 무엇보다 옛날이야기지만 이브 두목의 결혼 조건은 그대로 아님까.”

       

       교활한 미소를 주고받는 레몬과 애플. 하지만 두 빡 대가리는 몰랐다. 빡 대가리가 지혜를 쥐어짜 봐야 빡빡 대가리가 될 뿐이라는 사실을.

       

       “인생을 날로 먹고 싶슴다.”

       “날로 먹는다는 말, 왠지 생으로 하는 것 같아서 야하지 않슴까?”

       

       두 평평납작개마고원빈유 엘프가 흔들리지 않는 흉부를 내세우며 우쭐댔다.

       

       “요나 님은 돈을 좋아하는 검다.”

       “분명 돈을 갖다 바치며 한번 해달라고 하면 경멸하며 잘근잘근 밟아주면서도 허락하실 검다.”

       

       실로 쓰레기 같은 발상이었지만, 아쉽게도 이 자리에 둘을 저지할 사람은 없었다.

       

       다들 자기만의 착각에 빠져 허우적대는 중이었기에.

       

       “…근데 얼마가 필요한 건지 모르겠슴다.”

       “돈! 더 큰 돈만이 엘프를 다시 위대하게 만드는 것임다!”

       

       돌고 돌아 결국 다른 엘프들처럼 돈에 집착하기 시작한 레몬과 애플. 철부지 둘이 야망…아니, 욕망을 불태우기 시작했다.

       

       봄이었다.

       

       ***

       

       “크윽!”

       

       아니 이걸 진짜로 안 도와줄 줄은 몰랐네.

       

       팔뚝을 깊숙이 찌른 가시를 뽑아내며 비명을 삼켰다.

       

       물론 정말 위험한 상황이 아니라면 도와주지 말라고 한 건 나니까 할 말이 없지만 말이다.

       

       퉷!

       

       핏물 섞인 침을 내뱉으며 눈앞의 가시나무 왕을 노려보았다.

       

       마력은 거의 바닥난 상태. 안 그래도 빈약했던 체력은 끝없는 전력 질주로 탈진 직전에 이르렀고, 몇번이고 찔렸다 재생한 몸뚱이에는 잔상처럼 고통이 남아있었다.

       

       하지만 혼신의 돌려 깎기의 성과는 확실하다. 

       

       전신에 두른 가시의 대부분이 꺾이고 베여나간 녀석. 물론 나처럼 지치지는 않았다. 다만 무기이자 방어구를 잃은 것은 사실.

       

       가시나무의 왕이 주춤거리며 나와의 거리를 벌리기 시작했다. 어떻게든 접근해 찔러 죽이려던 지금까지와는 다른 양상.

       

       처음에 보았던 화살 흡수 능력을 보아, 주변의 나무를 먹고 잃은 가시를 되찾으려는 거겠지.

       

       이건 써먹을 수 있겠군.

       

       “윽.”

       

       지친 척 비틀거리며 빈틈을 보였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반대쪽으로 뛰쳐나가는 녀석.

       

       그 뒷모습을 보는 순간 깨달았다. 바로 지금이 내가 기다려 온 결정적인 순간이라는 걸.

       

       재빨리 아공간 주머니에서 하급 마력 포션을 꺼내 마셨다.

       

       탐식의 위장 덕에 즉시 차오르는 마나. 이를 그대로 투명 망토와 헤이스트 부츠에 밀어 넣으며 소리를 먹는 발걸음을 활성화했다.

       

       이제는 익숙해진 세상에서 격리되는 감각.

       

       세계수의 환영을 둘러싼 평야 지대를 지나 대수림의 나무를 향해 손을 뻗는 가시나무 왕의 무방비한 목덜미에 단검을 휘둘렀다.

       

       서걱!

       

       반쯤 베여 나이테를 드러내는 목. 아직 헤이스트의 효과가 남아있는 지금,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계속해서 단검을 휘둘렀다.

       

       서걱. 서걱. 서걱.

       

       유니콘 단검이 뿜어내는 백광이 공간을 가득 채우며 순식간에 가시나무 왕의 몸이 난도질당한다.

       

       손목, 고관절, 허리, 어깨, 척추….

       

       더는 가시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무력한 몸뚱이가 조각조각 해체당한다.

       

       툭.

       

       마지막으로 떨어진 머리.

       

       아직 꺼지지 않은 눈두덩이의 녹염을 향해 유니콘 단검을 내리찍었다.

       

       푸욱!

       

       “소원권 고맙다.”

       

       그걸로 끝이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서로 찌르기 위해 낑낑대는 두 남자를 관람하는 여자들…

    허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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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72

EP.72





       엘리도 리디아도 카렌도. 심지어 촉촉해진 레몬과 그런 그녀로부터 살짝 거리를 벌린 애플마저도 눈앞의 광경에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그만큼 요나가 보여주는 싸움은 처절했다.


       


       부릅뜬 눈, 미묘하게 일그러진 입꼬리. 한 번이라도 더 단검을 휘두르기 위해 사선으로 몸을 던졌고, 그럴 때마다 생긴 잔 상처는 금방 회복되긴 하나 그 흔적만큼은 선명히 남긴다.


       


       1층에서 구할 수 있는 최고의 재료인 아이언 울프의 가죽으로 만든 경갑이 너덜너덜해지고, 그 사이로 새빨간 핏물이 배어 나온다.


       


       만약 쉴 새 없이 백광을 토해내며 요나의 몸을 회복해 주는 유니콘 단검이 없었다면, 진작에 과다출혈로 쓰러졌을 정도의 상처.


       


       그 모습을 지켜보던 엘리가 입술을 악물었다. 볼을 타고 흐르는 한줄기 선혈.


       


       당연한 말이지만 엘리가 끼어들고자 한다면 얼마든 그럴 수 있다. 리디아나 카렌 또한 마찬가지.


       


       전신을 가시로 뒤덮은 목인木人은 분명 강했다. 하지만 기껏해야 1층의 계층 수호자.


       


       다들 1층의 수준은 진작에 뛰어넘은 강자이기에 어렵잖게 쓰러뜨릴 수 있으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요나를 지켜보기만 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요나가 그러길 원했으니까.


       


       리디아가 엘리의 꽉 쥔 주먹을 부드럽게 감싸며 말했다.


       


       “괜찮아 엘리 선배?”


       


       “…그래. 괜찮아. 요나가 저렇게 힘내고 있는데 괜찮아야지.”


       


       요나는 가장 어려운 순간을 함께 보냈으나, 지금은 길이 갈라진 친우를 제 손으로 죽였다.


       


       그리고 지금은 요나의 울분을 그대로 먹고 자라난 적과 싸우고 있었다.


       


       슬프고 힘들지만, 그럼에도 미래로 나아가기 위해서. 더 나은 삶을 위해 자신의 발목을 붙잡는 과거와 마주한 것이다.


       


       저 작은 몸으로 기꺼이 무거운 짐을 짊어지려는 요나를 어찌 응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심지어 그 모든 것이 엘리 자신을 위해서라는 것을 알고 있다면 더더욱.


       


       작은 체구…시나가 엘리를 자신의 세상을 무너뜨린 신앙의 적이라 여긴다면, 요나는 엘리를 이단의 수렁에서 꺼내준 은인으로 여기고 있으니까.


       


       핏발 선 눈으로 쓰러질 듯, 쓰러지지 않는 요나의 분투를 지켜보는 엘리. 리디아가 잠시 고민하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엘리 선배. 혹시 요나가 황혼을 삼키는 자에게 잡혀가기 이전의 일을 알고 있어?”


       


       “…어?”


       


       “이건 어디까지나 추측인데…….”


       


       모든 것을 자신의 탓으로 돌리는 엘리가 안타까워, 요나가 먼저 말하지 않는 이상 쭉 비밀로 하기로 했던 이야기를 작게 속삭였다.


       


       물론 엘리에게만 들리도록.


       


       가만히 리디아의 귓속말을 듣던 엘리의 눈이 점점 커졌다.


       


       그리고 지금 같은 시각. 카렌 또한 마찬가지로 놀랄 수밖에 없었다.


       


       ‘설마 요나 님이….’


       


       엘리와 리디아가 자세한 이야기는 해주지 않았으나, 카렌에게도 눈치라는 게 있다.


       


       정확한 사정은 알 수 없으나 요나가 한때 황혼을 삼키는 자의 피해자였다는 것, 그리고 제 손으로 당시의 동료를 죽였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으니까.


       


       순간 카렌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요나와의 첫 만남.


       


       세상 모든 것을 사랑한다는 그 말은 분명 진심이었다. 의심의 여지가 없는 성자의 재목.


       


       하지만 신전과 엮이고 싶지 않다는 말 또한 진심이었다.


       


       당시에는 여신께서 깊은 뜻이 있으리라 짐작하며 따랐고, 교황이 변절자라는 소리에 납득하기도 했지만….


       


       이렇게 직접 황혼을 삼키는 자와 대적하고, 계층 수호자와 맞서 싸우는 모습을 눈에 담자 보이는 것이 있었다.


       


       자신이 고전했던 작은 체구를 쓰러뜨리고 조심스레 뉘이는 동안 요나에게서 느껴진 분노와 슬픔은 진짜였다.


       


       세상을 사랑하는 것과 버금갈 정도로 세상을 원망하는 마음.


       


       요나의 마음속에는 그러한 애증이, 모순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하지만 지금. 요나의 부정적인 감정을 그대로 투영하기라도 한 듯, 동일한 심상을 내뿜는 저 가시나무 목인과 싸우며 요나는 변화하고 있었다.


       


       깊은 곳에 잠들어 있던 세상을 향한 증오가 천천히 녹아내리고 있었으니까.


       


       단순히 자신의 어둠을 쳐내는 것이 아니다. 그것을 마주하고, 받아들이며, 인정한 끝에 결국에는 사랑으로 승화시키는 것.


       


       “아….”


       


       실제로는 한번 붙어보니 해볼 만하길래 속으로 여신 찬양에 들어갔을 뿐이지만, 그 사정을 모르는 카렌에겐 꽤나 감동적인 순간이었다.


       


       마치 애벌레가 고치를 뚫고 나비가 되듯. 아직 여린 성자가 우화하여 한층 오롯한 존재가 되어가는 과정.


       


       그것이 그녀의 눈앞에서 일어나는 일이었다.


       


       “여신이시여….”


       


       요나로부터 받은 여신상을 품속에서 움켜쥐며 다짐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이 땅에 내려온 여신의 대리자를 따르겠다고.


       


       그렇게 엘리와 리디아. 그리고 카렌이 각자 다른 착각으로 생각이 깊어질 무렵.


       


       레몬과 애플은 아무 생각이 없었다.


       


       “다들 뭐라는지 모르겠슴다.”


       “알려고 하면 다치는 검다. 신경 끄는검다.”


       


       왜냐하면 다들 다른 사람에게 들리지 않도록 마도구와 신성력으로 주변에 소리 제어 결계를 쳤으니까!


       


       레몬과 애플의 눈에는 각자 무어라 입술을 뻐끔거리더니, 이를 악문다거나 눈물을 뚝뚝 흘리는 괴이한 풍경으로 보일 뿐이었다…!


       


       심지어 레몬과 애플은 요나의 전투에 끼어들 능력조차 되지 않는다.


       


       결국 요나의 분투에 연신 감탄만 하던 레몬이 이래도 되나 싶어 조심스레 물었다.


       


       “애플. 우리는 뭘 할 수 있는 검까?”


       “우린 할 수 있는 게 없슴다. 완두콩 튀김이나 가져오는 검다.”


       


       무기는 뺏어도, 간식은 뺏지 않은 멍청한(?) 사이비들 덕분에 무사한 완두콩 튀김.


       


       레몬이 자신의 납작한 가슴팍을 뒤적거린 끝에 잘 묶인 주머니 하나를 꺼냈다.


       


       그리고는 안에서 꺼낸 엘프 전통 과자를 애플과 나눠 먹기 시작했다.


       


       바삭바삭.


       


       “아, 그런데 정말 요나 님이 계층 수호자를 불러내긴 했슴다.”


       “확실히 놀랍긴 함다. 다 생각이 있었던 게 분명함다.”


       


       와구와구.


       


       “…그나저나 저 수호자.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지 않슴까?”


       “저도 그 생각 했슴다. 근데 어디서 봤는지 기억이 잘 안 남다.”


       


       얌냠음냠.


       


       “으음…아! 생각났슴다! 바실리우스에 나오는 가시나무 괴물 아님까!”


       “아니 여기서 갑자기 건국 신화가 왜……에?”


       


       어이없어하다 말고 멈칫한 애플이 찬찬히 요나와 싸우는 계층 수호자를 살펴보았다.


       


       사람의 형태로 자라난 가시나무. 지금은 반쯤 잘렸지만 머리쪽에 자라난 왕관 형태의 가시, 나무를 먹고 새로운 가시를 만들어 내는 능력, 그리고 몸에 난 가시를 자유자재로 다루는 힘까지.


       


       먼 과거. 세계수의 시련을 받고, 최초로 엘프의 왕이 되었던 바실리우스의 이야기.


       


       세계수의 시련을 대행하는 존재가 바로 저 가시나무 괴물, 혹은 가시나무의 왕이라고 불리는 존재다.


       


       그리고 지금. 요나는 그 시련의 괴물과 싸우고 있다.


       


       “…….”


       “…….”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는 레몬과 애플. 둘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줄, 미리 대야 하는 검다.”


       “요나 님의 애첩? 개꿀인 검다.”


       


       이제 완두콩 튀김은 필요 없다.


       


       언제 마지막으로 썼는지 모를 빗을 꺼내, 서로의 머리를 단정히 빗질해 주는 레몬과 애플이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경쟁자는 많아 보이지만 역시 우리 이브 두목이 제일인 검다.”


       “애송이들과는 격이 다른 연륜이 있는 검다.”


       


       아무렇지 않게 양쪽에게 실례되는 소리를 하는 둘.


       


       “역시 최선은 이브 두목에게 묻어가는 것 아니겠슴까?”


       “시중이라는 명목이면 충분할 검다. 무엇보다 옛날이야기지만 이브 두목의 결혼 조건은 그대로 아님까.”


       


       교활한 미소를 주고받는 레몬과 애플. 하지만 두 빡 대가리는 몰랐다. 빡 대가리가 지혜를 쥐어짜 봐야 빡빡 대가리가 될 뿐이라는 사실을.


       


       “인생을 날로 먹고 싶슴다.”


       “날로 먹는다는 말, 왠지 생으로 하는 것 같아서 야하지 않슴까?”


       


       두 평평납작개마고원빈유 엘프가 흔들리지 않는 흉부를 내세우며 우쭐댔다.


       


       “요나 님은 돈을 좋아하는 검다.”


       “분명 돈을 갖다 바치며 한번 해달라고 하면 경멸하며 잘근잘근 밟아주면서도 허락하실 검다.”


       


       실로 쓰레기 같은 발상이었지만, 아쉽게도 이 자리에 둘을 저지할 사람은 없었다.


       


       다들 자기만의 착각에 빠져 허우적대는 중이었기에.


       


       “…근데 얼마가 필요한 건지 모르겠슴다.”


       “돈! 더 큰 돈만이 엘프를 다시 위대하게 만드는 것임다!”


       


       돌고 돌아 결국 다른 엘프들처럼 돈에 집착하기 시작한 레몬과 애플. 철부지 둘이 야망…아니, 욕망을 불태우기 시작했다.


       


       봄이었다.


       


       ***


       


       “크윽!”


       


       아니 이걸 진짜로 안 도와줄 줄은 몰랐네.


       


       팔뚝을 깊숙이 찌른 가시를 뽑아내며 비명을 삼켰다.


       


       물론 정말 위험한 상황이 아니라면 도와주지 말라고 한 건 나니까 할 말이 없지만 말이다.


       


       퉷!


       


       핏물 섞인 침을 내뱉으며 눈앞의 가시나무 왕을 노려보았다.


       


       마력은 거의 바닥난 상태. 안 그래도 빈약했던 체력은 끝없는 전력 질주로 탈진 직전에 이르렀고, 몇번이고 찔렸다 재생한 몸뚱이에는 잔상처럼 고통이 남아있었다.


       


       하지만 혼신의 돌려 깎기의 성과는 확실하다. 


       


       전신에 두른 가시의 대부분이 꺾이고 베여나간 녀석. 물론 나처럼 지치지는 않았다. 다만 무기이자 방어구를 잃은 것은 사실.


       


       가시나무의 왕이 주춤거리며 나와의 거리를 벌리기 시작했다. 어떻게든 접근해 찔러 죽이려던 지금까지와는 다른 양상.


       


       처음에 보았던 화살 흡수 능력을 보아, 주변의 나무를 먹고 잃은 가시를 되찾으려는 거겠지.


       


       이건 써먹을 수 있겠군.


       


       “윽.”


       


       지친 척 비틀거리며 빈틈을 보였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반대쪽으로 뛰쳐나가는 녀석.


       


       그 뒷모습을 보는 순간 깨달았다. 바로 지금이 내가 기다려 온 결정적인 순간이라는 걸.


       


       재빨리 아공간 주머니에서 하급 마력 포션을 꺼내 마셨다.


       


       탐식의 위장 덕에 즉시 차오르는 마나. 이를 그대로 투명 망토와 헤이스트 부츠에 밀어 넣으며 소리를 먹는 발걸음을 활성화했다.


       


       이제는 익숙해진 세상에서 격리되는 감각.


       


       세계수의 환영을 둘러싼 평야 지대를 지나 대수림의 나무를 향해 손을 뻗는 가시나무 왕의 무방비한 목덜미에 단검을 휘둘렀다.


       


       서걱!


       


       반쯤 베여 나이테를 드러내는 목. 아직 헤이스트의 효과가 남아있는 지금,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계속해서 단검을 휘둘렀다.


       


       서걱. 서걱. 서걱.


       


       유니콘 단검이 뿜어내는 백광이 공간을 가득 채우며 순식간에 가시나무 왕의 몸이 난도질당한다.


       


       손목, 고관절, 허리, 어깨, 척추….


       


       더는 가시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무력한 몸뚱이가 조각조각 해체당한다.


       


       툭.


       


       마지막으로 떨어진 머리.


       


       아직 꺼지지 않은 눈두덩이의 녹염을 향해 유니콘 단검을 내리찍었다.


       


       푸욱!


       


       “소원권 고맙다.”


       


       그걸로 끝이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서로 찌르기 위해 낑낑대는 두 남자를 관람하는 여자들...

    허억!
    다음화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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