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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72

       “허, 허억…!”

         

       마차의 의자에서 방금까지 코를 골며 자던 케일의 눈이 번뜩였다. 곧장 허리까지 일으키더니 잔뜩 경계하며 주변을 둘러봤다.

         

       “일어났나?”

         

       나는 고개를 뻣뻣이 세운 채 굽어보며 물었다. 케일은 지금 이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대체, 대체 무슨 일이 있던 거지?”

         

       얼굴에 의문부호가 가득한 케일. 그의 눈동자가 떨리고 있다.

         

       “네가 말했잖아. 용병은 힘으로 증명하는 법이니까 설득해보라고.”

         

       비겁하게 기습하긴 했지만, 케일 정도면 웬만한 기습은 반응할 수 있다. 

       

       나와 초월 마법사를 제외하면 이 제국에서 가장 강한 세 명 중 하나니까. 그러니 나는 전혀 비겁하지 않다.

       

       아마도.

         

       “…우리가 싸웠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너무 세게 때렸나 보다.

         

       ‘오러를 담으면 안 됐나?’

         

       아무튼. 이 정도는 해줘야 케일이 쓰러질 거라 판단했다.

         

       “그래. 네가 한순간에 쓰러져서 재미도 못 봤지만.”

         

       나는 실망했다는 듯 심드렁한 얼굴로 창밖을 바라봤다. 케일 같은 타입을 데려가기 위해선 이런 연출도 필요했다.

         

       저런 성격은 굽실거리며 나가면 안 되는 타입이니까.

         

       “…놀랍군. 이 정도의 차이가 있었을 줄이야.”

         

       케일은 허탈한 얼굴로 마차의 바닥을 바라봤다.

         

       “그런 표정 짓지 말고. 앞으로 네가 할 일을 알려주지.”

         

       그렇게 본격적인 얘기를 시작하려고 했건만, 케일은 눈썹을 일그러트리며 나를 노려봤다.

         

       “미안하지만, 용병왕은 누구의 밑으로 들어가지 않는다. 돈으로 나를 움직일 수 있을 거란 판단은 오만한 생각이군.”

         

       이 새끼가 아까 한 대 맞고 뻗은 놈이 맞나? 나는 눈을 얕게 뜨고 케일을 노려봤다.

         

       “아무래도 덜 맞은 거 같군.”

       “…뭐?”

       “네가 받아들일 때까지 두들겨 패겠다.”

       “…….”

         

       케일의 입이 벌려져서 다물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의 눈빛이 이렇게 말해주는 것 같았다.

         

       대체 이 새끼는 뭐 하는 새끼지?

         

       나는 최대한 권위적인 자세를 위해 고개를 옆으로 꺾으며 말을 이었다. 셀다스에게 배웠다.

         

       “우리와 함께하면 후회는 하지 않을 거다. 지금보다 훨씬 좋은 삶을 살게 될 거고.”

         

       아까 살해 협박과도 같은 말을 해서 그런지 케일은 눈만 끔뻑일 뿐 쉽게 입을 열지 않았다.

         

       “아무튼. 잘 생각해봐라.”

         

       나는 다시 권태로운 얼굴로 창밖을 바라봤다. 와, 여기 풍경이 되게 예쁘네.

         

       “…나를 데려가는 이유는 말해주지 않는 건가?”

         

       이제야 이쪽과 제대로 얘기를 나눌 생각이 들었구나.

         

       “우리와 함께할 생각이 드나?”

       “얘기는 들어봐야겠지.”

       “좋아, 말해주지.”

         

       나는 그동안 내가 세운 계획과 해온 일. 그리고 케일이 해줘야 할 일들을 설명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군. 개인이 양대산맥을 이루는 두 공작가와 황제의 권위를 위협하는 권력자가 되겠다고? 허풍도 그런 허풍이 없지.”

         

       저런 반응이 당연하다. 일반적으로 말이 안 되긴 하지.

         

       “네 눈앞에 있는 사람이 누구지?”

       “괴물, 진 바렌베르크.”

       “내가 있는데 불가능은 없다.”

         

       눈을 얕게 뜨고 사납게 쏘아붙이자 슬금슬금 시선을 피하는 케일. 나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아무튼. 너는 그냥 공녀님을 지키고, 위협이 되는 요소를 제거하는 것. 이 두 개만 이행하면 돼. 물론, 고용비는 제대로 지불할 거다.”

         

       케일은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봤다.

         

       “…혹시나 해서 묻는데, 반역 같은 걸 준비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얘가 뭐라는 거야? 얼어 뒤질 반역 같은 소리 하네.

         

       “그런 귀찮은 일을 왜 하지?”

       “그야, 제국은 너의 국가를 멸망시켰으니까.”

         

       그 말은 하도 들어서 이젠 지겨울 정도다.

         

       “허구한 날 듣는 말이라 그건 더 설명하기 귀찮다. 그냥 반역은 아닌 거로 알아둬.”

         

       나는 그리 말하고 다리를 꼰 채 고개를 젖혔다. 요즘 생각할 일이 많아서 피곤하단 말이지.

         

       “그런데 하나 의문이 있다.”

       “뭐지?”

       “네가 있는데 굳이 내가 필요한가?”

       “나중에 알려주지.”

         

       그냥 궁금증으로 남겨뒀다. 어차피 도착하면 알려줄 예정이었으니.

         

       “사람을 궁금하게 만드는 데에는 재주가 있군. 설득하는 건 영 못하지만 말이야.”

         

       가볍게 무시했다. 내 재주가 어떻건 알 바인가? 그냥 잘 살기만 하면 되는 거지.

         

       ‘슬슬 그 날이 다가오고 있네.’

         

       프란체와 헤어질 날이 머지않았다. 과연 그때가 되면 나는 망설임 없이 나갈 수 있을까? 이미 많은 정이 들어버렸는데.

         

       짧은 시간이지만, 정말 내 가족과도 같은 존재가 되어버렸는데.

         

       “…….”

         

       괜한 생각은 하지 말자. 이런 시답잖은 마음은 사람을 무뎌지게 만드는 법이다.

         

       ‘뭐, 아무튼.’

         

       지금 케일을 데려온 것처럼, 내 빈자리를 차근차근 채워가면 될 거다. 그렇게 다른 이들과 신뢰를 쌓아가면 프란체의 안정이 깨질 일도 없겠지.

         

       그때가 되면 나는 없겠지만.

         

         

       * * *

         

         

       공작저에 도착했다. 나는 케일을 데리고 대문 앞에 섰다.

         

       “멈춰라. 외부인을 같이 들여보낼 순 없다.”

         

       역시나. 정문을 지키는 기사들이 가로막았다.

         

       “공녀님의 명으로 데려온 내 보조다.”

         

       기사는 인상을 찌푸렸다.

         

       “노예에게 보조? 들어본 적도 없는 소리를 하는군.”

         

       이 새끼가? 나는 그를 깊게 쏘아봤다. 살기가 어린 시선.

         

       “…?”

         

       움찔거리며 물러나는 기사. 나는 천천히 다가가며 말했다.

         

       “공녀님의 사정이다. 공작님께 말씀을 드리지, 너한테까지 설명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는데.”

         

       이런 내 태도가 불만인 듯 기사는 나를 향해 윽박질렀다.

         

       “노예 새끼가 정말 지가 위인 줄 아나!”

         

       스릉! 이윽고 허리춤에 있던 검을 뽑아 들었다. 멍청한 판단이군.

         

       “케일, 시험이다. 목숨에 지장 없이 제압해라.”

         

       케일은 “내가 어쩌다 이런 꼴을.” 하고 중얼거리며 앞으로 나아갔다. 두둑, 두둑. 뻐근한 몸을 풀어내며 기사를 쏘아봤다.

         

       “외부인을 끌어들여 우리와 맞설 셈인가?”

       “너네들이 먼저 공녀님의 명을 무시했잖아.”

       “우리 또한 받은 명령을 따를 뿐이다.”

         

       음, 그렇게 말하면 할 말이 없긴 한데. 뭐, 공작이라면 이해해주겠지. 심지어 백귀라고 불리는 케일을 전력으로 데려왔다.

         

       환대하지 않으면 이상할 정도.

         

       “케일, 시작해.”

         

       치이익. 케일이 땅에 붙은 발을 끌며 자세를 잡았다. 게임에서도 봤던 그 패턴이다. 순간적으로 튀어나가 반응 못 하게 하는 뉴비 절단기 기술.

         

       ‘구르기로 저걸 피하는 거에 적응하기까지 좀 걸렸지.’

         

       그런데 뭔가 이질감이 든다. 분명 이걸 알고 있는데, 왜 그때의 모습이 기억나지 않지?

         

       “…….”

         

       현대에 살던 나의 모습이 기억나지 않은 걸 보니 조용히 동기화가 심화했나 보다.

         

       “쯧.”

         

       이 이상으로 더 잃기 전에 일을 끝내는 수밖에.

         

       “케일, 빨리 정리해라.”

       “알고 있다.”

         

       후우웅…! 검붉은 오러가 케일의 하반신을 감싼다. 마치 중력장에 걸린 것처럼 기사들이 쉽게 움직이지 못하고 있다.

         

       “무, 무슨…….”

       “뭐냐, 이 압력은…!”

         

       케일의 움직임은 바람과도 같았다. 오직 힘으로만 나아가는 게 아닌, 마치 기류를 타고 움직이는 듯한 느낌.

       

       사삭――!

         

       “커헉!”

       “큭!”

         

       털썩. 털썩. 눈 깜짝할 새에 두 기사가 신음을 내며 바닥에 얼굴을 박았다. 저거 코피가 나진 않으려나?

         

       “이 정도면 됐나?”

       “그래. 볼 때마다 신기한 움직임이군.”

       “…내 움직임을 본 적이 있나?”

       “우리 그때 싸웠잖나.”

       “나는 기억이 나지 않는데.”

         

       사실 실제로 보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한 방에 쓰러졌거든. 이걸 게임에서 봤다고 말할 수도 없고.

         

       “아무튼. 들어가지.”

         

       끼이익. 거대한 철창이 갈라지며 공작저의 모습이 드러났다. 정직하게 가면 일이 시끄러워질 것 같기에 창문으로 뛰어 넘어가기로 했다.

         

       “저 창문이다. 내가 먼저 들어갈 테니 바로 들어오도록.”

         

       케일은 무언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곧장 뛰어올라 창틀에 발을 걸쳤다.

         

       “공녀님?”

       “아, 왔구나.”

       “그때 말한 인재는 데려왔습니다.”

       “나흘이나 걸렸구나.”

         

       탁. 프란체가 읽던 마법서를 덮었다. 마법서의 이름을 확인해 보니 <흑마법의 정수>라고 쓰여 있었다.

         

       “그래서, 데려온 인재는 어디에 있니?”

       “바로 저를 따라올 겁니다.”

         

       내가 창틀에서 내려오자 곧바로 케일이 올라왔다. 괜히 백귀라고 부르는 게 아니었다. 움직이는데 기척도, 소리도 없다. 새하얀 머리까지 있으니 귀신과도 같지.

         

       “이자입니다. 케일, 인사해라.”

         

       케일은 뒷머리를 벅벅 긁으며 입꼬리를 일그러트렸다.

         

       “반갑다. 케일이다.”

         

       빠악! 싸가지 한 번 제대로 없는 인사에 케일의 뒤통수를 갈겼다.

         

       “다시 인사해라.”

         

       뒷머리를 더듬으며 나를 힐끗 바라보더니 이젠 고개를 숙인다.

         

       “…케일입니다. 용병왕이자 백귀라고 불립니다.”

         

       그래, 이제야 좀 예의가 바르구나.

         

       케일의 제대로 된 소개에 프란체는 흥미 가득한 눈빛으로 물었다.

         

       “흐응, 네가 그 동부의 수호자라 불리는 용병이구나?”

         

       동부의 수호자? 그런 이명이 있는 건 처음 알았는데.

         

       “…귀족 나리들은 저를 그리 부르나 봅니다?”

       “그래. 동부의 마수를 혼자서 막아주니까.”

         

       응? 나는 단순히 괴물이라는 이명이랑 촌스러운 대륙제일검인데 얘는 백귀, 용병왕, 동부의 수호자. 이런 멋있는 이명이 가득하다. 왜 진은 이상한 이름밖에 없어?

         

       “그래서, 얘도 이젠 프란체 코퍼레이션의 일원이란 말이지?”

         

       나는 뒷짐을 쥔 채 고개를 끄덕였다. 케일은 의문이 가득한 얼굴로 나와 프란체를 번갈아 봤다.

         

       “프란체 코퍼레이션…? 뭡니까? 그 구린 이름은?”

         

       너도 그런 소리를 하는구나. 아니, 프란체 코퍼레이션이 그렇게 구린가? 나는 이해 가지 않았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단다. 확실히 좋지 않은 이름이지만, 성공적으로 제국에 널리 퍼졌지.”

         

       ……요즘 조용하다 싶었더니 그냥 받아들인 거였구나.

         

       “뭐, 이름이야 됐습니다. 고용비는 제대로 주시는 거 맞습니까?”

       “그래. 그리고 너는 내 직속이 아니라 진의 휘하로 들어갈 거야.”

         

       할 말이 끝난 듯, 프란체는 다시 <흑마법의 정수> 마법서를 펼쳤다. 언제 올려놨는지, 테이블 위에는 케일에게 줄 금액이 적힌 수표가 올려져 있었다.

         

       “그럼 케일이 해야 할 일들을 알려주고 오겠습니다.”

       “그래, 그러렴. 아, 너무 늦지 않게 내 방으로 와야 한단다?”

         

       방으로 가야하는 이유는 모르겠다만, 일단 고개를 끄덕이곤 케일에게 눈짓했다. 야생과도 같은 생활이 길어서 그런지 단번에 내 의도를 알아챘다.

         

       그렇게 다시 창문을 넘어 프란체의 방을 나오고, 나는 케일을 데리고 숙소로 들어왔다.

         

       “…정말 이런 곳에서 사는 건가?”

       “그래. 내 숙소다.”

       “분명 지금보다 좋은 생활을 할 거라고…….”

         

       누더기 창고와도 같은 내 방을 보자 경악으로 물든 케일의 얼굴. 나는 고개를 휘저으며 말을 이었다.

         

       “너는 나랑 다를 거야. 나는 일개 노예니까.”

         

       케일은 영 못마땅한 표정이었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리고 네가 이제 우리와 함께한다는 걸 알았으니 내가 굳이 널 데려온 이유를 말해주지.”

         

       나는 케일과 마주 보고 앉았다. 소파나 의자 같은 사치품은 없었기에 그냥 마룻바닥이었다.

         

       “내가 널 데려온 이유는…….”

       “잠깐, 지금 상황이 너무 초라하지 않나?”

       “…….”

       “아니, 우리 이름값이 있는데 이런 곳에서…….”

         

       왠지 극심한 현자 타임이 온 듯한 케일. 나는 이미 적응이 되었기에 굴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아무튼. 내가 널 데려온 이유는 사실 따로 있다.”

         

       케일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단순히 보조가 필요했던 게 아니었나?”

       “그건 아니다. 지금부터 내 얘기 잘 들어.”

         

       막상 말하려니 가슴이 쓰라리고 착잡해졌다. 하지만 어쩔 수 없지.

         

       “머지않아 네가 내 역할을 대신하게 될 거다. 나는 이곳에서 사라질 예정이니까.”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헉 백귀, 케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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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Raised the Villainess and Fled

I Raised the Villainess and Fled

악역 영애를 키우고 도망쳤다
Score 8.6
Status: Ongoing Author:
I made a villainess destined for death into the most powerful person in the empire and then fl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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