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72

   -[4일간 전국을 강타했던 최악의 폭염이 한풀 꺾이고, 또다시 장마전선이 기승을 부리고 있습니다. 비는 오늘 저녁 일곱 시부터 다시 내리기 시작하여 내일 새벽 사이 집중됩니다.

    오늘 수도권 최고 기온은 영상 34도이며, 최저 온도는 영상 24도로 예상됩니다. 연일 이어지는 장마전선으로 인해 대기 중에 수증기가 가득하다 보니, 낮 동안 기온이 오르면 꿉꿉한 더위가 예상됩니다. 한편….]

   “…아이, 요즘 날씨 진짜 너무 별로야….”

    8월은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언제나 극단적인 이지선다를 강요했다.

    숨이 턱턱 막히고 살이 타들어갈 정도의 뜨거운 햇빛이냐, 아니면 끝도 없이 이어지는 비로 온 몸이 다 젖은 채, 잘 마르지도 않는 물자국과 증발할 기미조차 없는 땀과 습기냐.

    적어도 한국인들에게 있어 한국의 사계절은 결코 좋은 게 아니었다. 뭐든 과하면 좋지 않다는 말처럼, 여름은 극단적으로 덥고 습했고, 겨울은 극단적으로 춥고 건조했다.

    하모니 역시도 이를 피해갈 수는 없었다.

    어젯밤부터 슬그머니 찾아오기 시작했던 장마전선은 그녀가 잠든 사이 어마어마한 물폭탄을 바깥에 뿌려대었고, 잠들기 직전까지만 해도 더울지언정 명확했던 바깥 시야는 우중충하다 못해 박살이 나있었다.

    다행스럽게도 하모니는 현대 사회를 살아가면서 전기세가 수십 만원씩 나와도 입으로 육두문자를 내뱉을지언정 재력에는 타격이 전무한, 얼마 되지 않는 고소득자 중 한 명이었다.

    요컨대 그녀는 여름이 되면 24시간 내내, 그리고 몇 주씩 신경쓰지 않고 에어컨을 틀어놓음을 의미했고, 그렇기에 집 안은 습기 따위 찾아보기 힘든 멀끔함을 자랑했다.

    그러나 그건 그거였고, 곧 저 바깥을 나가야만 한다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았다.

    현재 시각은 오전 9시. 약속 시간까지는 무려 2시간 반이나 남아있었지만, 샤워한 후 이것저것 준비한 뒤, 목적지까지 도착하기까지 필요한 시간이란 가정 하에는 그리 많은 것도 아니었다.

    옷을 벗어 잘 정리해둔 후 천장에서부터 폭포수처럼 떨어지는 물을 맞으며 잡생각 3분. 그 후 바구니에 담긴 샤워용품을 전부 건드리고 나면 30분이 훌쩍 지나간다.

    머리카락을 말리고 클렌징도 하고…몸에 물기가 사라지면 어제부터 생각해뒀던 옷을 먼저 입는다. 언더웨어를 챙겨 입은 후에는 얼마 전에 사놨던 데님 쇼츠 청반바지, 그 위에는 적당히 얇은 줄무늬 티셔츠.

    코디가 끝난 후에는 가볍게 화장. 하지만 바깥의 습도가 당분간 95~100%를 계속 유지할 것을 생각하여, 너무 지나치지는 않게. 이런 날에는 화장도 들뜨거나 뭉치기 일쑤였다.

    그렇게 하다보니 벌써 한 시간 하고도 40분이 훌쩍 지나간다.

    머릿속으로 시간을 대강 정리했다. 내비게이션은 그곳까지 가는 데 30분이면 충분하다고 말하고 있었지만, 안 그래도 교통이 난잡해 뭐가 어떻게 될런지 확신 불가능한 서울에 거주한단 점.

    게다가 바깥은 어제 온 비로 인해 아주 그냥 난리도 아니었다. 밤 사이에 무려 170mm에 달하는 폭우가 서울을 강타했고, 그 여파는 비가 그친 지금에 이르러서도 남아있었다.

    까놓고 말해, 내비게이션 앱의 추산보다도 좀 더 빨리 출발해야 함을 의미했다. 게다가 그녀가 가는 곳은 호텔 산하의 최고가 뷔페였고, 이 말은 일찍 도착해도 시간을 보내거나 쉴 곳은 넘쳐난단 소리였다.

    그렇게 하모니는 남은 10분 동안 머리카락에 열심히 볼륨을 넣고, 어쩐지 열기 싫어지는 현관문을 열었다.

   “어윽.”

    날씨 꼬라지.

    숨을 쉬기가 여간 불편한 게 아닌 게, 마치 누가 입가 옆에 가습기를 한 두 대 가량 틀어놓고 있는 듯했다. 

    그래도 다행이라면 다행인 점은, 진짜 몇 분도 걷지 않아 눈 앞에 독립문역으로 향하는 입구가 있다는 것이었다. 바깥에 나갈 일은 생각보다 여러 번 있기에 교통카드의 잔액은 빵빵했다. 구체적으로는 여섯자리 정도.

    지하철이 오기까진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고, 스크린도어와 문이 동시에 개폐되자마자 느껴지는 시원함. 그러나 고작해야 다섯 역만에 내리고는 2호선으로 환승하여 역 하나.

    바깥은 여전히 우중충했고, 옆의 고급 백화점은 쏟아지는 빗방울에 맞아 칙칙했다. 그러나 이런 날인데도 유동인구는 많았으며, 차선은 고지혈증 환자의 혈관마냥 차량으로 가득했다.

    어느덧 약속 시간까지 고작해야 10분 가량을 남겨두고 있는 상태에서, 하모니는 백화점 건물을 끼고 오른쪽으로 돌았다. 정면에는 바움쿠헨을 적당히 잘라 세운 듯한 호텔이 있었다.

    자주 와보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한 번도 와보지 않은 곳은 아니었다. 본디 사람이란 자신이 버는 만큼 소비하는 방법도 익혀봐야 했고, 이곳 역시도 그런 맥락이라고 할 수 있었다.

   -[하모니 : 저 다와가요!! 어디세요,,??]

   -[유진 : 시청역 방향에서 걸어가고있어요(^▽^)/]

   -[하모니 : 앗 반대쪽이네요!!( ･∀･)ﾉｼ]

   -[하모니 : 안에서 기다릴게요!]

   -[하모니 : 그런데 못만나면어쩌징,,,(*´⌒`*)]

   -[유진 : 호텔 안에서 기다리다가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릴 때 근원지로 가시면 십중팔구 절 만나실 수 있을 거예요]

   -[하모니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하모니 : 소란을 몰고다니셔!!ㅎㅎ]

    그리고 이쯤 되자, 정말로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과연 그녀는 정말로 발현자일까. 아니면 어디서 주워온 사진일까. 이성은 그럴 리 없다는 결론을 내놓고 있긴 했으나, 인간은 언제나 최악의 상상을 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동물이었다.

    하지만 하모니는 만약을 생각하지 않기로 했고, 그 부분으로 가려는 망상적 초점을 억지로 떼놓았다.

    어느덧 호텔의 입구였다.

    대리석과 조형물, 깔끔하면서도 고급스러운 인테리어. 건물의 바닥 자체가 경사면을 염두에 두고 지어졌기 때문에 지하로 가더라도 바깥 풍경이 보이긴 했지만, 어쨌든 뷔페는 지하에 있었다.

    기왕이면 입구에 서있는 게 좋겠지.

    현재 시각은 11시 28분이었고, 뷔페의 오픈 시간은 11시 반이었다. 오픈 시간에 맞춰 오면 당연하게도 좋은 점이 많았고, 그 중 하나는 갓 만든 음식이었다.

    아침을 먹고 오지 않았기에 배가 많이 고팠다.

    그와는 별개로, 수많은 궁금증들이 뭉글뭉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과연 아바타랑 정말로 똑같이 생겼을까? 아니면 조금은 다른 점이 있을까?

    까놓고 말해서, 자신은 유진과 실제로 대화해본 적도 없는 사람이었다. 구체적으로는 통화 같이, 상대방의 여러가지를 알 수 있는. 휴대폰을 통한 커뮤니케이션이라고 해서 다 같은 게 아니었다.

    유진은 말 그대로 비밀이 가득 들어있는 마트료시카 박스였다. 근데 열쇠를 본인만이 가지고 있는.

    그렇게 생각하니, 점차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휴대폰을 보고, 다시 집어넣고, 혹여나 문자가 더 왔을까 안절부절. 마치 연예인과의 한 끼 식사에 당첨된 사람마냥.

    얼마나 지났을까.

   “하모니, 맞죠?”

   “아, 네…우와!”

    그 순간, 하모니의 감정적 기복은 마치 널뛰기하듯 난리를 벌이고 있었다.

    예상치도 못한 타이밍에 들려온 목소리 – 그러나 VR에서 너무나도 많이 들었기에, 그녀는 마치 합방마냥 긴장감을 확 풀었다가 순식간에 정신줄을 움켜잡았다.

    목소리가 아바타랑 동일했다.

    고개가 황급히 돌아가며 갈색의 동공이 한 명의 인영을 눈에 담았다.

    물론 입에 담지 말아야 할 말도 같이 담았다.

   “이게 왜 진짜임!”

   “…제가 예상했던 반응 중 그 어떤 것과도 안 맞네요. 대단하셔라.”

    할 말은 많았지만, 뭐라고 말해야만 할까.

    그냥,

    그냥….

    아바타랑 똑같았다.

    하모니는 그 순간 발라당 뒤로 넘어질 뻔했다.

    원래 이성은 본능에게 항상 지는 존재였으며, 인류는 억제보다는 호기심을 충족하기 위한 행동을 위주로 하는 동물이었다.

    그러니까….

   “와, 우와, 진짜 신기하다….”

   “만족스러우신가요?”

   “생각보다 너무 예뻐요!”

    …이렇게 꼬리를 만지는 건 불가항력적인 행동이다.

    하지만, 그치만.

    생각하고 있던 것과는 다르게 너무 예쁘고 신기했다. 촉감도 맨들맨들하고 탄력적이고, 그렇게 집중해서 만지고 있다 보면 어느새 꼬리가 손을 휘감고 있다.

    색깔도 부담스럽거나 하지 않은 연갈색이었고, 단조롭지 않은 얼룩무늬 같은 것도 들어가있었다. 그렇게 파충류를 좋아한다거나 하는 건 아니었지만 이건 신기해도 너무 신기했다.

    스윽스윽.

    진짜 아나콘다였더라면 많이 무서웠겠지만, 사람의 공포란 원래 통제되지 않은 것에서부터 온다고 한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유진 씨는 믿을 만한 사람이었고, 하여간, 어…그냥 마음 놓고 만져도 괜찮을 것 같단 자기합리화였다.

   “그만 만져요. 꼬리 닳겠어요.”

   “앗, 그, 죄송합니다.”

   “어떻게 다들 이렇게 반응이 한결같으실까.”

    이전에도 이런 경험이 몇 번 있었다는 듯 이어지는 말.

    마치 하지 말아야만 했던 행동을 한 것 같아서 아주 조심스럽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심지어는 엘리베이터에 타고 있었음에도 그러했다.

    어느새 위의 스크린은 LL층에 도착했음을 알렸다.

    문이 열리며 대리석과 검게 칠한 나무로 치장된 인테리어가 드러났고, 음식의 향기가 콧속을 파고들었다.

    와인 보틀이 한가득 진열되어있는 곳을 지나가며 대화를 나눴다.

   “뭘 좋아하실지도 잘 모르고, 식사량이 많으시다고 하셔서 일단 여기로 왔는데. 괜찮으세요?”

   “저야 엄청 좋죠. 다른 곳에라도 갔다간 돈이 엄청 깨졌을 거예요.”

   “그으…정도로 많이 드세요?”

   “놀라실걸요.”

   “이미 많이 놀랐는데….”

    저렇게 말할 정도면…모르겠다.

    어느새 다가온 입구 앞, 서버분들이 앞에서 예약을 확인하고 있었다.

   “레치타티보에 온 걸 환영합니다. 예약하셨나요?”

   “하민아 외 한 명으로, 오픈 시간 맞춰서 평일 점심으로 예약했어요.”

   “하민아 외 한 명…네, 확인되셨습니다. 예약된 좌석으로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좌석은 창가 바로 옆.

    비가 내렸으면 운치가 있을 듯했지만, 안타깝게도 바깥 날씨는 그저 꾸무레할 뿐이었다.

    서버분들이 발현자인 유진 씨가 평범한 의자에 앉지 못하는 점을 확인하고 헐레벌떡 의자를 먼저 치우러 가는 사이, 시선은 어느덧 동행인의 머리부터 발끝까지를 훑고 있었다.

    주먹만하다고 해도 믿을 만한 작은 머리와 볼륨이 자연스레 살아있는 긴 생머리랑, 여름용 니트 아래 적당히 통이 있는 검은 슬랙스. 운동에 조예가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운 부드러운 신체곡선까지.

    그리고 왼쪽 손목에 찬 저건…시계인가? 한 번도 보지 못한 종류였다.

    유진 씨는 약간의 불편을 감수하고 등받침대가 없는 의자에 앉았다.

    자연스럽게 정면으로 마주보게 되자, 그제야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뭐라고 해야 하나, 섣불리 넘겨짚긴 그랬지만, 무표정한 것처럼 보이는 얼굴 속에…퇴폐미? 살짝 느슨한 눈매임에도 날카롭다는 인상이 지워지지 않는다.

    적막이 흐르기 전, 자연스럽게 입을 열었다.

   “좋아하는 음식은 어떤 게 있으세요? 여기는 해산물도 잘 나오고, 랍스터도 있어서 마음껏 가져다 드셔도 될 거예요.”

   “자주 와보셨나요?”

   “아…가끔?”

   “그러면 잘 아는 사람의 말을 따라야겠죠.”

   “아, 같이 가요.”

    사아악.

    오면서 딱히 먹은 건 없었지만, 그래도 빈 속을 먼저 적신다. 원형의 글라스 안에서 톡톡 터져나가는 탄산수를 입 안에 머금어 입을 청소하고, 조심스럽게 의자를 뒤로 하고 일어선다.

   “저는 먼저 일식 섹션 가려고 하는데, 같이 가실래요?”

   “네. 추천하시는 게 있나요?”

   “어, 저는 여기 올 때마다 항상 참치가 맛있더라구요.”

   “아하하, 기대하면 된다는 소리실까요?”

   “아아니, 그런 게 아니라아. 맛없으면 제 탓 아니에요, 진짜.”

   “그럼요.”

    뭐라고 해야 할까.

    엄근진해보이는 겉과는 다르게, 가끔가다 스스럼없이 던지는 농담이 이상하게 그리 싫지 않았다 – 사실 언제나 그랬지. 사심이 섞여있었다면 부담스러웠겠지만, 이 사람은 옛날도 지금도 그랬다.

    만약 평범하게 탐욕이 있거나 하여 계속 달라붙고, 방송 출연을 요구하거나 그랬더라면 내가 밀어냈겠지만, 그러지 않았다.

    어떻게 보면 일반적인 인플루언서 못지 않게 조심해야할 스트리머라는 직업을 가진 나조차 괜찮다고 생각할 정도였으니까.

    아무튼, 일식 섹션.

    참돔, 참치, 연어, 새우. 회 쪽은 문어, 연어. 참치 속살 등.

    언제나 그렇지만 전부 다 먹지 못하는 걸 알면서도, 뷔페에 오면 이상하리만치 욕심이 생긴다. 당장 유진 씨 역시도 어느새 접시 위가 한가득이다.

    그러던 와중 보이는…이제 막 리필된 랍스터랑 가리비 섹션.

   “아, 막 나왔네. 저거도 먹어야 하는데…하필 손에 자리가 없네요. 유진 씨도 그렇고….”

   “여기에 담아보실래요?”

   “…네?”

    그러더니 유진 씨는…꼬리를 동그랗게 말아, 플라스틱 그릇을 올려놓을만한 공간을 확보했다.

    그걸 기묘한 표정으로 바라보며 꼬리 위에 접시를 올리는 사이, 어느덧 늘어나기 시작한 손님들과 근무 중인 셰프, 서버분들까지 전부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허허, 평생 일하면서 저런 광경은 또 처음 보네. 좀 담아드릴까요?”

   “…아, 네. 감사합니다.”

    리필을 끝나고 돌아가려다 꼬리에 음식을 담게 된 직원 분의 표정은 불과 십수 분 전의 나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아무튼, 자리로 돌아가서 먹은 음식은 맛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