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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73

       *

        

        

       -먼저… 먼저 떠난 이들을 애도하지 말거라.

       -폐하.

       -짐 또한, 그리고 언젠가 너 또한… 그들과 같은 대열에 서 있을 테니.

       -폐하, 제발.

       -짐은 일평생 위선자였으니, 너 또한 위선자로 살거라. 거짓도 모이다보면 언젠가 진실에 닿을 수 있지 않겠느냐. 살아라. 살아서 네가 짐의 위선을 잇거라. 약속하겠느냐.

       -예, 폐하. 약조 드리겠습니다. 반드시 그리하겠나이다.

       -그것이면 되었다.

        

        

        이반은 잠시 숨을 정리한 뒤 눈을 떴다. 햇살이 들이치고 있었다. 소파에서 몸을 일으키며 마른세수로 날뛰는 감정을 정리했다.

        

        평소와 같은 악몽이다. 평소와 같은 나날이다. 기대와 달리 여전히 익숙한 천장이란 것 또한 평소와 같다.

        

        이반은 침착하게 주위를 정리하고, 몰골을 정돈하고, 옷가지를 챙겨 입은 뒤에 원장실을 빠져나갔다.

        

        축제 당일 아침이었다.

        

        

       *

        

        

        성 얀스크 대학으로 진입하는 정문은 엄청난 인파로 가득했다. 노점 상인, 구경하는 시민, 외국의 관광객, 들뜬 학생들과 학생의 지인들까지.

        

        전쟁이 끝난 지 고작 4년이 된 시점, 축제랄 것이 없는 이 나라에서 얼마 되지 않는 국제적 규모의 축제다. 시민들이 들뜬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이반은 인파를 가로지르며 주위를 훑었다. 이 빽빽한 사람들 사이에서도 그는 옷깃 하나 스치지 않으며 관통하듯 지나가는 묘기를 보이고 있었다.

        

        특별히 어려울 것 없는 기초적인 운신법이었다. 이반은 어느덧 축제가 한창인 교정에서, 대왕의 동상이 서 있는 광장 앞에 도착했다.

        

        세 사람이 시계를 보거나, 거리를 구경하거나, 멍하니 서 있거나 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약속 시간은 분명 20분 뒤일텐데.

        

        이반은 짧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혹시 모를 위험 요인을 탐지하고자 먼저 나왔건만, 호위대상들이 이렇게 빨리 움직일 줄은 몰랐다.

        

        평소엔 매주 정시에 시작하는 수업조차 지각하기 일쑤인 불량아들이 이렇게 성실하게 움직이다니. 철이 든 건가.

        

        어쨌건 나쁜 일은 아니었다. 벌써부터 호위 임무가 수월해질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어 아저씨! 왔어요?”

        

        

        이자벨이 대뜸 손을 휙휙 휘저으며 달려왔다. 해맑게 웃으며 타다닥 달려와서는 자연스럽게 그의 팔을 휙 잡아 끌었다.

        

        쓸데없이 움직이기 힘들어 보이는 꽉 조이는 복장이다. 기사학부 학생으로서는 합격점을 주기 어려운 복식이었다. 사시사철 온후한 기온의 틸레스에서나, 그것도 아주 특수한 날에나 입을 법한 옷이었다.

        

        

        “아니, 오늘도 작업복을 입고 왔어요? 어휴, 아무리 비밀요원이라지만 이 나라 공무원들은 뭐 휴가도 없대요? 이런 날에도 근무를 시켜요?”

        “휴가?”

        “네! 세상에, 나라가 미쳤나봐. 공무원은 뭐 겨, 겨, 결혼도 못하게 막기라도 해요?”

        “그건 아니다.”

        

        

        크라실로프는 오히려 결혼과 출산을 장려하는 정책을 꾸준히 펼치고 있었다. 지난 전쟁 이후로 국체가 크게 손상된 탓이다.

        

        갑자기 결혼 이야기가 왜 나오는지 이해할 순 없지만, 외국인에게 그런 오해를 심어줄 이유는 없었으므로. 이반은 짧게 고개를 저었다.

        

        

        “아저씨 뭐 하고 싶은 거 없어요? 제가 오면서 잠깐 좀 둘러보고 왔는데 저기 딱 아저씨랑 잘 어울리는….”

        “이자벨?”

        

        

        이자벨이 쫑알거릴 때, 동상 앞에서 멍하니 인파를 구경하던 에시디스가 사뿐사뿐 걸어왔다.

        

        

        “삼촌이랑 뭐해?”

        “응?”

        “아, 잠깐 대화 중이었구나. 하긴 삼촌한테 뭐 이것저것 배운다고 했지. 그래, 볼일 끝났으면 잠시 삼촌을 좀 빌려가도 될까?”

        “…응?”

        “응?”

        

        

        두 사람이 멍하니 서로를 바라볼 때, 다시 한번.

        

        그제야 그들을 알아챈 엘프 한 사람이 다가왔다.

        

        

        “페트로비치 경, 일찍 오셨군요? 인간답지 않은 그 신의성실함은 참 만인의 귀감이 되어야 마땅해요. 저도 그리 오래 기다리진 않았으니 너무 걱정하지 마시길.”

        “응?”

        “으응…?”

        

        

        인간 둘 엘프 하나. 셋은 다시금 서로를 바라보며 잠시 침묵했다.

        

        

        “미안한데, 얘들아. 난 오늘 우리 아저씨랑 약속 잡고 나온거거든.”

        “무슨 소리를 하는 지 모르겠네. 삼촌은 오늘 별 약속 없다고 했는데. 아, 이거 뭔지 알아. 틸레스식 화법 맞지? 일단 우기기, 그런거.”

        “인간들은 언제나 놀라워요. 인종차별이 너무 자연스러워서 이젠 미개하단 얘기도 못하겠어요. 이반 씨, 인간 옮아요. 이리로 오세요.”

        “아저씨도 인간이거든?”

        “같은 새라고 닭과 불사조를 헷갈리는 건 인간들이나 하는 짓 아니던가요? 학명이 다르거든요.”

        “학명도 같거든…?”

        

        

        이반은 그 사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쪽에 시선을 두는 사람들은 많았지만 인파의 무장상태는 양호했다.

        

        날이 더워서 옷차림이 가벼워진 탓에 무장을 숨겨봐야 감출 수도 없다. 기껏해야 단검이나 권총 정도인데, 그 정도는 걷는 자세를 살펴보는 것 만으로도 충분히 눈치챌 수 있다.

        

        설령 그보다 더 은밀한 급습이 있다 하더라도, 감추기 쉬운 무기일수록 위력이 약한 법이다. 이반은 이번 임무가 처음 생각보다 퍽 수월할 것으로 보여서 안도했다.

        

        

        ‘이번엔 유능하군.’

        

        

        방첩사령부가 근방에 주둔하며 인원 통제를 하고 있다고 들었다. 다행히도 이번엔 충분히 유능하게 행동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안도하긴 이르다. 아카데미 축제란 곧 살인사건과 테러, 급습과 학살, 마족의 대규모 침략의 효시가 되는 이벤트니까.

        

        따라서 이반은 소매자락에 숨긴 비도와 허리 뒤에 비껴 꽂은 권총을 의식하며 만반의 준비를 다졌다.

        

        상식적으로 행동하면 대부분의 경우엔 탈이 나지 않는다. 이래서 사람에겐 상식이 중요한 것이다.

        

        슬프게도 이반의 생각을 읽지 못한 나머지 세 사람은 이 비상식적인 상황에 절규했다.

        

        

       *

        

        

        “아저씨 진짜 정신 나갔어요? 말해봐요. 대체 무슨 생각으로… 아니, 아니다. 말하지 마요. 나 속이 더 터질 것 같으니까.”

        “음.”

        “으아아아악!!”

        

        

        이자벨은 가슴을 쿵쿵 치며 소리질렀다. 한참 꽥꽥거린 뒤에야 한숨을 푹 내쉬고는 중얼거렸다.

        

        

        “그래, 애초에 기대한 내가 잘못이지. 내 잘못이 커. 응. 내가 아주 몹쓸년이지. 차라리 골렘한테 사랑을 가르치지. 그건 가능성이라도 있잖아.”

        

        

        이자벨은 슬픈 눈으로 이반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고는 시선을 돌렸다.

        

        

        “그래서, 혹시 선입선출법이 뭔지 아는 사람? 원래 이럴 경우엔 그, 선착순 같은 개념이 적용되어야 한다고 보거든 나는.”

        “틸레스에선 그러니? 으응, 드로안에선 보통 힘으로 해결하는데. 외국 문화란 참 어렵구나. 이 기회에 서로 문화 교류를 좀 해볼래?”

        “힘으로 해결한다면…? 자신은 있고?”

        “어머, 이자벨. 기사학부는 내가 못 들어간 게 아니라 안 들어간거란다. 나는 너와 달리 악기에도 재능이 있거든. 누가 배우라고 했어서.”

        

        

        에시디스는 그렇게 말하곤 따듯한 눈길로 이반을 바라보았다.

        

        이반은 합리적인 사람이므로 대학생들의 시답잖은 분쟁엔 끼어들 생각이 없었다. 그의 임무는 외부의 적으로부터 용사 파티 자제들을 지켜내는 것이었지, 원인 모를 감정 싸움을 중재하는 것이 아니었다.

        

        원래 저 나이 학생들은 서로 싸우면서 친해지고 그러는 법이다.

        

        

        “인간들 다운 언사네요. 아주 귀여워요. 자아, 페트로비치 경. 우린 저쪽을 구경하러 갈까요?”

        “와 나 엘프가 자꾸 엘프하네. 진짜 칼 뽑아? 아빠 죄송해요, 오늘 저는 검에 마족 대신 인간의 피를 묻히게 되었습니다!!”

        “세상에, 축제에 검을 패용하고 온 거야? 이래서 틸레스 사람들이 음흉하다니까.”

        “악기 가방 까봐. 너 그 바이올린으로 우리 애들 머리 깨고 다닌 거 다 들었어!!”

        “으응, 진솔함의 에시디스는 그런 거 몰라. 우리 깡깡이는 무기가 아니야.”

        

        

        다소 혼란스럽군.

        

        이반은 청각을 차단해야 하나 고민했다. 어차피 지금 교정은 축제 인파로 충분히 시끄러웠으므로, 청각이 그다지 도움되는 상황도 아니었다.

        

        

        “얘들아, 차라리 순서를 정하자. 내가 먼저, 오후엔 에시디스. 저녁 전까진 엘프. 그리고 밤엔 나. 어때?”

        “깔끔하게 결투로 정할까?”

        “이쪽은 공무집행인데 혹시 민간인들은 빠져 주실래요?”

        

        

        이건 넘기기 힘들군.

        

        이반은 짧게 고개를 저었다. 왜 굳이 힘써 모아둔 경호 대상들을 다시 흩어놓는단 말인가.

        

        이토록 이 세상 사람들이 비상식적이다.

        

        

        “모두 다 같이 움직인다.”

        “…아저씨 진짜 미쳤어요?”

        “어… 삼촌 저도 그건 좀….”

        

        

        꽥꽥거리는 꼬마들을 정리하는 것은 이미 익숙할대로 익숙했다. 이건 딱 수업 시간의 원생들과 크게 다를 것도 없는 상황이니까.

        

        이반은 단호하고 근엄한 원장선생님의 면모로 단언했다.

        

        

        “다들 줄 서라. 자, 먼저 나온 의견부터 차례로 하나씩 모두 공평하게 처리하면 싸울 일도 없다. 이자벨, 네가 먼저 앞장서라.”

        “이런 건 현실이 아니야….”

        

        

        이자벨은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이반을 바라보다가, 하늘을 올려보고는, 다시 깊게 고개를 숙이고 마른 세수를 했다.

        

        

        “어서.”

        “진짜 돌겠네. 뭐가 저렇게 당당하지? 열댓살 어린 여자애 셋을 동시에 꼬시겠다고? 이런, 이렇게 뻔뻔한….”

        

        

        이자벨은 투덜거리며 앞장서 걸었다.

        

        

       *

        

        

        대학 축제하면 떠오르는 것은 오직 주점 뿐이지만, 그건 21세기 대한민국의 편협한 문화 탓이다.

        

        애초에 대학 축제라는 핑계 삼아 지역 축제로 발전한 이 경우엔 다르다. 아파트 바자회와 지역 소상공인 활성화 축제가 기묘하게 뒤섞인 이 행사에는, ‘축제’라면 있을 법한 온갖 것들이 즐비해 있었다.

        

        대표적으로, 이자벨이 끌고 온 이곳과 같이.

        

        

       -타앙—!!

        

        

        “아이고, 아깝게 빗나갔네요! 자, 4개 맞추셨으니 여기, 인형 드립니다요!”

        

        

        작은 표적지들을 맞추는 권총 사격 부스다.

        

        놀랍게도 실탄을 사용하지만, 이상할 것은 없다. 애초에 공기총이란 개념이 없는 세상이기도 하고, 총은 초인을 잡을 수 없는 무기인 탓에 경시되는 사회 분위기 탓도 있다.

        

        거기에, 설령 저 총을 들고 민간인을 쏘겠다며 나댄다면 총구를 돌리는 즉시 점주가 저지할 수 있다. 점주 또한 초인이기 때문이다.

        

        점주가 저지할 수 없는 수준의 초인은 애초에 총을 쏘지 않고도 대량학살을 저지를 수 있다. 굳이 총 같은 시끄럽고 시선을 끄는 무기를 들 필요조차 없다.

        

        따라서, 이 부스는 실탄을 사용하는데도 불구하고 그 어떤 노점보다 안전하다 하겠다. 이 세상엔 식품안전관리가 없어 식중독이 만연하지만, 행사장의 총기안전관리를 담당하는 방첩사령부 요원은 있으니까.

        

        

        “저거 해봐요, 우리.”

        

        

        이자벨은 해맑게 웃으며 쪼르르 달려갔다. 이반이 권총을 잘 다루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 기회에 자신 또한 연습한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사격 전문가에게 ‘열심히 노력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 자체가 이미 큰 득점 요인이다. 에시디스나 엘피헤라는 감히 꿈도 못 꿀 일이기도 했다. 저 둘이 권총을 들어본 적이나 있을까.

        

        이렇게 또 앞서 갈 수 있는 기회를 축제 구경을 핑계로 자연스럽게 따낸 정치력. 그것이 틸레스 궁정 짬밥 10년 경력의 무시무시한 정치 괴물이다.

        

        

        “어, 선배님?”

        “음?”

        “왜 선배님이… 어, 이거 하시게요?”

        

        

        그 때 사격 부스의 점주는 당황한 표정으로 이반을 바라보고 있었다.

        

        

        “넌 여기서 뭘 하는 거지?”

        “보다시피… 음. 잠복근무…요?”

        “훌륭하군.”

        

        

        드미트리는 권총을 들고 머뭇거리며 이반에게 건넸다.

        

        과연, 잠복근무라. 실탄을 장전한 권총이 도처에 있으니 비상 상황에 대응하기 쉬우면서도, 권총을 들고 다녀도 주위에선 그저 평범한 축제 노점이라 여길 테니 자연스럽기까지 하다.

        

        유능하군.

        

        이반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면 정말, 축제가 무사히 끝날 수도 있다. 아카데미 축제 치고는 놀랍게도.

        

        하긴, 여긴 학부 간 결투 행사 같은 기괴한 이벤트가 없는 세상이 아닌가. 초등학생에게 용의 알을 훔치는 선착순 레이스를 강요하는 식의 납득하기 어려운 친선 행사가 있는 것도 아니다.

        

        어쩌면 아카데미 ‘상식’ 중 하나인 축제 테러는 그런 위험한 행사들에 대한 경고일지도 모른다. 교육기관에서 학생 목숨 걸고 겜블링을 해선 안 된다는 교훈을 널리 알리기 위함일지도.

        

        그렇다면 좋다. 이런 건전한 축제도 있어 줘야지.

        

        이반은 다소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그래선 안 됐다. 아카데미 행사들은 언제나 대폭발 하는 것이 ‘상식’이기 때문이다.

        

       

       *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이반은 캣파이트가 뭔지 모릅니다.
    고양이들이 싸우는 것보다 중요한 일들이 많은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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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Years Have Passed Since the Prologue

30 Years Have Passed Since the Prologue

프롤로그에서 30년이 흘렀다
Score 7.8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3 Native Language: Korean
I got transmigrated into a game I’ve never seen before. I thought it was a top-notch RPG and spent 30 years on it. I retired as a war hero and planned to spend my remaining time leisurely. But it turns out, it was an academy 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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