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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73

     

    시종들이 한 손에 요리가 담긴 접시를 든 채 척척 걸어 들어왔다.

     

    하나, 둘, 열. 그 숫자가 끝도 없다. 요리의 가짓수가 어마어마하게 많다.

     

    ‘대체 뭘 준비한 거야?’

     

    아무리 황족의 저녁 정찬이라도 접시의 개수는 대여섯 개를 넘지 않는 게 보통이다.

     

    심지어 안에 담긴 요리의 계열도 하나하나 다 다른지 다양한 향기가 섞여 콧가를 간질였다.

     

    아셀라의 의문이 깊어질 때 즈음, 아셀라와 앰브로시아를 둘러싼 시종들이 군무처럼 동시에 접시를 테이블에 대령했다.

     

    아셀라의 기대감이 한계에 다다랐을 때, 마침내 은 재질의 뚜껑이 열리고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어?”

     

    하지만 정작 내용물을 본 아셀라는 순식간에 표정이 굳었다.

     

    접시에 자신이 잘 아는 스테이크는 없고 여물로나 쓰일 법한 온갖 채소가 즐비했기 때문이었다.

     

    모양 자체는 예뻤다. 손가락 두 마디 정도씩 담긴 음식들은 정성스레 플레이팅되어 한 폭의 명화와도 같았다.

     

    8할이 풀떼기라는 것이 문제였다.

     

    ‘이건 또 뭐야.’

     

    아셀라가 기대했던 고소한 향기의 정체는 허여멀건한 반액체였다.

    슬라임의 시체처럼 보이는 그 기괴한 비주얼에 그녀의 식욕이 싹 가셨다.

     

    “시녀장, 접시를 잘못 가져온 모양이다.”

     

    아셀라가 즉시 위엄 있는 목소리로 시녀장을 꾸짖었다.

     

    혼자 있는 자리라면 모를까 황제의 최측근인 앰브로시아가 눈앞에 있다.

     

    아니나 다를까 그녀 역시 황족의 식사라고는 상상할 수 없는 물건이 나온 탓에 꽤 놀란 눈치였다.

     

    ‘폐하께 무슨 말이 들어갈지 몰라.’

     

    아셀라가 절도 있게 팔을 뻗었다.

     

    “손님이 계신 자리다. 한 번의 착오는 용서하마. 당장 접시를 물리고 본래 나왔어야 할 식사를 가져와라.”

     

    시녀장이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시종들을 시켜 뚜껑을 닫았다.

    그들이 절도있게 접시를 들고 식당 밖으로 걸음을 옮긴다.

     

    “착오가 있었던 모양이야.”

     

    “흐음, 그런 것 치곤 향기는 좋았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길바닥에 널려있는 풀 아닌가. 폐하의 주치의인 자네가 입에 넣을 것은 아니야.”

     

    앰브로시아가 이 건까지 폐하께 보고하진 않겠지.

     

    살짝 초조해진 아셀라가 손가락으로 팔꿈치를 두드리고 있으니 다시 시종들이 접시를 들고 들어왔다.

     

    “아, 마침내.”

     

    다시 정갈하게 접시가 놓인다.

    시종들이 깔끔하게 뚜껑을 열었다.

     

    요리를 목격한 아셀라는 인내심의 한계가 와 미간을 찌푸리고 말았다.

     

    접시에 방금 보았던 요리가 그대로 들어있는 것이 아닌가.

     

    “시녀장. 주치의를 들라고 해.”

     

    시녀장이 고개를 숙이고 뒷걸음질로 자리를 비운다.

     

    잠시 후, 식당으로 그가 당당하게 걸어들어왔다.

     

    “부르셨습니까, 황녀님.”

     

    “공자, 이 식탁의 의도는 무엇이야?”

     

    라스는 여유로운 몸짓으로 인사하며 가볍게 대답했다.

     

    “물론, 황녀님이 건강해지시길 바라는 마음을 담았습니다.”

     

    “위대한 제국의 황녀이자 월광궁의 주인인 본녀와, 폐하의 건강을 책임지는 어의에게 소여물을 먹일 심산인가?”

     

    “황녀님, 본 주치의 라스 고트베르크는 가문에 걸고 황녀님의 옥체에 위해를 끼칠 의도가 없습니다.”

     

    라스는 확신으로 가득 찬 목소리였다.

     

    그가 입꼬리를 싱긋 올렸다.

     

    “제가 한 번이라도 황녀님을 실망시켜드린 적이 있었던가요?”

     

    없긴 왜 없어. 당장 생각나는 것만 해도 스무 가지가 넘어.

     

    아셀라는 반박을 목 뒤로 삼켰다.

    앰브로시아가 보는 앞에서 라스를 흉봐야 자기 얼굴에 침뱉기였다.

     

    “설명이 부족했을지도 모르겠군요. 시작은 이 음식과 함께 하시죠. 타락죽입니다.”

     

    “이게 뭔데. 슬라임이야?”

     

    “황녀님이 좋아하시는 치즈는 아시다시피 우유로 만든 제품입니다. 하지만 황녀님의 몸은 우유를 불편해하시죠. 그래서 먹기 편하게 만든 것이 이 형태입니다.”

     

    “…이게 치즈 같은 거라고?”

     

    아셀라는 여전히 의심이 갔다.

     

    황실에서는 우선 의심부터 해야 살아남을 수 있기에 든 습관이다.

     

    …물론 라스는 여태 말한 걸 전부 지키긴 했지만.

     

    “저 믿고 한 입만 먹어보세요.”

     

    “후우.”

     

    아셀라가 마지못해 스푼을 들었다.

     

    기품있게 타락죽의 윗부분을 사락 떠올리니 모락모락 김이 피어오르며 다시 한 번 고소한 향기가 아셀라를 자극했다.

     

    ‘그래. 한 번만 속아보자.’

     

    치즈케이크가 아니기만 해 봐. 라스, 너는 지하감옥에 구금이야.

     

    아셀라가 은 스푼을 천천히 입가로 가져갔다.

     

    그리고.

     

    “…흐읍.”

     

    아셀라는 자기도 모르게 탄성이 새어 나와서 음식과 함께 삼켜버렸다.

     

    치즈케이크는 아니었다.

     

    아니지만 맛있다.

     

    부드러운 식감이 입안에 절로 퍼지면 몸이 따뜻해진다.

     

    우유의 깊은 고소함과 눅진함이 머리끝까지 차오른다.

     

    “호오, 과연. 신비한 맛이오. 편안하게 속을 풀어주오.”

     

    앰브로시아가 만족하며 벌써 다음 스푼을 퍼고 있었다.

     

    “흐, 흐음. 보기보단 괜찮네.”

     

    아셀라도 자존심을 잠시 내리고 죽을 입으로 가져갔다.

     

    치즈케이크는 강렬한 맛이지만 조금 먹으면 금방 지친다.

     

    하지만 이 죽은 언제까지고 계속 먹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이쪽의 연어깻잎말이도 맛보시죠. 오늘의 메인 디쉬입니다.”

     

    “안에 연어가 들어있었어?”

     

    생선은 그다지 자주 먹지 않는 아셀라였다.

     

    쉽게 부스러지는 연어살이기에 이미 정성스럽게 모양을 잡아 한입에 넣을 사이즈로 컷팅이 되어있다.

     

    포크로 살짝 찍어 옆에 장식된 검은 소스를 묻히는 아셀라.

     

    “으흠.”

     

    입에 넣으니 깻잎의 팍 터지는 향과 함께 부드러운 식감이 혀를 자극해온다.

     

    “고트베르크 군, 이 소스는 무엇이오?”

     

    앰브로시아가 포크로 연어 옆의 검은 덩어리를 뜨며 질문했다.

     

    “동방에서 쓰는 간장을 갈은 무에 절였습니다. 본래 훨씬 짠맛이지만 보통 고기에 소스를 듬뿍 곁들이기에 염도를 적절히 조절했습니다.”

     

    “동방의 소스였군. 맛은 훌륭한데, 건강에도 도움이 되오?”

     

    “제도는 내륙 지형이기에 소금 공급이 적은 편이지요. 물론 소금은 과도하게 먹으면 안 되겠지만, 양이 적절하면 삼투압을 높여 순환으로 노폐물을 많이 빼게 합니다.”

     

    “굳이 채소를 붙인 이유는 무엇이오?”

     

    “깻잎입니다. 비타민이 풍부해 각종 질병 예방에도 좋고 피부에도 좋습니다. 생으로 먹어야 효과가 더 좋기에, 향에 익숙해지시면 무침으로도 제공해드릴 예정입니다.”

     

    “무침이라. 소스에 버무린 이 생채소들을 말하는 것이오?”

     

    “그렇습니다.”

     

    아셀라도 채소에 시선을 돌렸다.

     

    방금까지 여물이라고 폄하하던 그녀였지만 라스의 요리를 맛보니 이것도 혹시? 하는 궁금증이 스멀스멀 피어났다.

     

    “황녀님, 한 번만 도전해보세요.”

     

    “알았어.”

     

    아셀라가 더덕무침을 찍어 킁킁, 향부터 맡아보았다.

    익숙하진 않은 느낌이지만 슬며시 오도독 깨문다.

     

    “흐읍.”

     

    아셀라가 반대편 손으로 입가를 가리고 조막만한 입을 오물오물 움직였다.

     

    점점 눈꺼풀이 위쪽을 향하고 황금색 눈동자가 커다랗게 드러난다.

     

    “어떠세요?”

     

    싱글대는 라스의 얼굴을 보니 솔직하게 대답하기 싫어진 아셀라였지만 이건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아셀라는 눈을 감고는 새침하게 대답했다.

     

    “맛있어.”

     

    “그쵸?”

     

    “처음 먹어보는 맛이오! 어디선가 깊은 맛이 나는군. 대체 무슨 재료지?”

     

    “하하, 그건 가업 비밀입니다.”

     

    라스가 윙크를 해 보이며 입가에 검지를 가져갔다.

     

    뭔지 안다고 해도 사탕무에서 MSG를 추출하는 건 라스만 할 수 있는 일이었다.

     

    “흐응, 흐음.”

     

    아셀라의 손놀림이 빨라졌다.

     

    어느새 그녀는 자각도 없이 모든 채소 요리를 맛보고 싶어 이리저리 포크를 움직이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불만이 피어올랐다.

     

    ‘양이 적잖아.’

     

    다 맛보기용도 아니고 조금씩만 준비되어 있으니 잔뜩 먹을 수가 없다.

     

    “입맛에 안 맞으실지도 모르겠지만, 황녀님.”

     

    “어, 응?”

     

    라스가 옆에 있었단 것도 잠깐 잊었던 아셀라가 입가에 밥풀을 묻힌 채 대답했다.

     

    “황녀님의 건강을 위한 음식이니 약이라 생각하고 드셔주세요. 전부 다 드시면 디저트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라스가 신호를 보내자 시녀장이 접시를 하나 더 들고 들어왔다.

     

    ‘어라, 커피?’

     

    아셀라는 순간 접시 위에 올려진 잔에 눈을 뺏겼다.

     

    커피인 줄 알았던 음료는 조금 다른 색깔이었다.

     

    무엇보다 아래쪽에 거뭇거뭇한 무언가가 가라앉아있다.

     

    “타피오카가 들어간 우롱 버블티에요.”

     

    라스가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분명 좋아하실걸요.”

     

     

     

    ***

     

     

     

    “공자, 나 버블티 먹고 싶어.”

     

    “어제 드셨잖아요. 안 돼요.”

     

    오전 진료 중에 내가 단호하게 거절하니 아셀라가 입술을 비죽 내밀었다.

     

    우롱차는 커피에 비해 건강에 이롭지만 소량 카페인이 들어있긴 하다. 자주 줄 수는 없다.

     

    “그럼 오늘 저녁은 뭐 해올 거야?”

     

    “시녀장에게 물어보시죠? 오늘은 제 담당이 아니라서요.”

     

    “뭐어?”

     

    아셀라가 입을 떡 벌렸다.

     

    건강 식단을 시작하고 일주일, 아셀라는 식욕이 전보다 왕성해진 긍정적인 효과를 보았다.

     

    그 덕분인지 이마가 반들반들하다.

     

    “왜 네가 안 만들어?”

     

    “그야 저는 주치의이지 요리사가 아니니까요? 이번에 체계를 잡느라 다른 업무가 밀렸어요.”

     

    “그랬다가 맛이 없으면 어떡해. 나 스테이크 먹기 싫어.”

     

    “제가 고안한 메뉴로 나갈 거니 걱정 마세요. 조미료도 충분히 만들어 뒀고요.”

     

    종종 주방은 체크하겠지만 앞으로 요리는 시녀장 누님이 책임지고 지휘해줄 예정이다.

     

    고급 재료는 여전히 황실 주방을 통해야 들여올 수 있기에 주방은 써야 한다.

     

    외부인이 마구 드나드는 바람에 그쪽 주방장이 대놓고 눈치를 주지만 어쩌겠어. 월광궁 분 업무가 분산됐으니 윈윈이다.

     

    “진료 끝났습니다. 혈액검사를 보면 순환계가 눈에 띄게 좋아졌어요. 최근 마법 사용은 어떠세요?”

     

    “음… 마나를 흘리는 속도가 빨라진 느낌은 있었어.”

     

    “좋아요. 이대로만 가도록 하죠. 그럼 저녁 때 뵙겠습니다.”

     

    “잠깐만.”

     

    아셀라가 내 가운 자락을 붙잡았다.

     

    “정말 버블티 안 만들어줄 거야?”

     

    “네.”

     

    “그럼 나 커피 먹는다?”

     

    “어디 드셔보세요. 지난번에 몰래 타피오카 넣어 드시고 낭패 보셨으면서.”

     

    내 타박에 아셀라가 눈을 일자로 떴다.

     

    타피오카 펄은 커피와는 궁합이 안 좋으니까. 자승자박이었다.

     

    “대가를 지불하겠어.”

     

    “한 잔에 금화 1만 개요.”

     

    “짜증나.”

     

    아셀라는 내 배를 퍽 치고는 일과를 시작하려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셀라의 건강 식단은 성공적이다.

     

    이 정도면 미리 사무실을 이사할 준비를 해도 되겠다.

     

    승자의 방식은 황제가 채용하겠다는 말도 있었으니, 이 계기로 황실 주방의 경향도 꽤 바뀔 수도 있고.

     

    사이먼의 퇴마 마사지는 어떻게 되고 있으려나.

     

    별로 궁금하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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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Doctor Cured The Villainess And Ran Away

The Doctor Cured The Villainess And Ran Away

주치의는 악녀를 고치고 도망쳤다
Score 3.6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Becoming the physician of the villainess who brought about the world’s destruction, I tried to escape to survive, but the reactions were stran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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