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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73

       “구웨에에에에….”

       

       내 입에서 흘러나오는 괴상한 신음소리. 동시에 무릎이 무너지며 몸이 쓰러진다.

       

       당연한 일이다. 가시나무 왕보다 유일하게 앞서는 민첩을 살리기 위해 한시도 쉬지 않고 뛰어다니며 단검을 휘둘렀다.

       

       거기에 기껏 포션을 마셔 회복한 마력을 죄다 소진하며 마나 탈진까지 일으키지 않았나.

       

       그냥 탈진+마나 탈진=으앙 쥬금.

       

       간단한 공식이 떠올리며 바닥에 머리를 박기 직전.

       

       포옥.

       

       “…수고했어.”

       

       어느새 달려온 엘리가 하나 남은 팔로 나를 끌어안았다.

       

       여체 특유의 부드러움이 여실히 전해지는 살결. 하지만 그 안쪽은 탄력 있는 근육이 오밀조밀 들어차 있어 묘한 안정감을 준다.

       

       한 박자 늦게 몰려오는 엘리의 체향. 살 내음과 귀와 꼬리의 털에서 나오는 꼬순내. 그리고 연초 냄새가 적당히 섞인 익숙한 향기가 느껴지자 그제야 긴장이 풀린다.

       

       동시에 그간 쌓인 피로가 뒤늦게 몰려온다.

       

       “아. 큰일 났어요 엘리.”

       

       “왜 그래? 설마 여기서 뭐가 더 나온다거나 그런 건 아니겠지?”

       

       “그런 건 아닌데…힘이 쪽 빠져서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어요.”

       

       “뭐어. 어쩔 수 없지. 깜짝 놀랄 정도로 강해지긴 했지만 아직 요나에게 이른 상대였으니까.”

       

       “이대로라면 엘리가 저한테 무슨 짓을 해도 아무런 반항조차 할 수 없어요…!”

       

       “뭐?”

       

       “아아~ 큰일이네요. 엘리 같은 늑대에게 무방비한 채로 던져진 신세라니. 이대로라면 잡아먹혀 버릴 게 분명해요!”

       

       “아니, 안 잡아먹을 거거든?”

       

       “늑대님 늑대님. 저를 잡아먹으실 거라면 아프지 않게 단숨에 부탁드릴게요.”

       

       “…….”

       

       말문이 막힌 엘리의 모습에 잘 움직이지 않는 입가를 가까스로 끌어올리며 키득였다.

       

       그제야 엘리가 피식 웃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요나 너 말이야…이런 상황에서까지 그러고 싶어?”

       

       “그치만 엘리가 무서운 표정 짓고 있었는걸요? 마치 엘리 때문에 제가 다친 것처럼 말이에요.”

       

       “그건….”

       

       팔자로 추욱 처지는 엘리의 눈꼬리. 쫑긋 선 귀가 말리고, 꼬리는 힘을 잃어 바닥을 향한다.

       

       “또또. 그러니까 그런 표정 짓지 말라니까요? 어찌됐건 황혼을 삼키는 자의 계획을 막은 것도 모자라 간부까지 하나 잡았고, 저는 계층 수호자를 상대로 일대일로 싸워 승리할 만큼 성장했어요. 기쁜 날이잖아요? 웃어주셔야죠!”

       

       “…그래. 그렇지. 요나 네 말대로 기쁜 날이야.”

       

       희미한 미소를 지은 엘리가 재주 좋게도 한 손으로 나를 번쩍 들어 등에 업었다.

       

       몸에 딱 달라붙는 전신 슈트를 입고 있는 탓인지 엘리의 감촉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무방비한 엘리의 목덜미에 머리를 묻고 몰래 킁킁대고 있자니, 엘리가 나를 고쳐 업으며 말했다.

       

       “이대로 지상으로 갈게. 푹 쉬고 있어.”

       

       “그래도 될까요? 황혼을 삼키는 자를 잡은 거기도 하고, 처음으로 1층의 계층 수호자를 불러낸 거잖아요. 길드에서 이것저것 증언해야 할 게 많을 것 같은데….”

       

       “많겠지. 하지만 길드가 그렇게 부상자를 붙잡고 증언을 강요할 만큼 미친놈들은 아니거든. 뭣보다 내가 뒤에서 두 눈 시퍼렇게 뜨고 버티고 있을 텐데 어떻게 그러겠어.”

       

       “아, 맞아. 이제와서 하는 말인데…엘리는 대체 정체가 뭐예요? 은퇴한 고위 모험가라는 건 알고 있었는데, 그렇다고 하기에는 너무 강하잖아요.”

       

       엘리에 대해서는 중요한 매력 포인트나 성격을 결정짓는 설정만 구상했을 뿐, 구체적으로 얼마나 강하고 소싯적에 얼마나 활약했는지 같은 건 생각해 두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스토리와 직접적으로 연관되지 않은, 그저 설정을 위해서만 존재하는 설정은 연재를 거듭할수록 작가의 목을 졸라오기 때문이다.

       

       설정이 쌓일수록 캐릭터의 깊이가 깊어지는 것은 사실이나, 그 부작용으로 사용할 수 있는 에피소드가 한정된단 말이지.

       

       그런 이유로 최대한 설정은 널널하게 짜는 편이다. 꼭 필요한 것을 제외하면 그냥 비워둔다고 봐도 될 정도.

       

       엘리의 경우에는 현역 시절의 설정이 그러하고, 이브 같은 경우에는 여왕이던 시절의 이야기가 그러하겠지.

       

       어쨌든 중요한 건 엘리가 남자랑 손도 못 잡아본 은퇴 모험가라는 점과, 이브가 역사적인 수준의 처녀라는 점 아니겠는가.

       

       나머지는 전부 곁다리다 곁다리.

       

       …어쩐지 가챠에서 유니콘의 뿔이 뽑힌 게 우연이 아니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설마 이것도 노린 건가?

       

       속으로 사랑의 여신 흑막설을 진지하게 검토해 보던 도중. 머뭇거리던 엘리를 대신해 어느새 옆에 다가온 리디아가 입을 열었다.

       

       “용자勇者 엘리. 5년 전까지만 해도 유명한 이름이었어.”

       

       “용, 자?”

       

       생각보다 거창한 이명에 당황한 내 반응에 리디아가 무표정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사실 고위 모험가쯤 되면 오러나 마법 둘 중 하나는 필수로 익힌다는 거 알지?”

       

       “그렇죠. 둘 다 범용성이 좋으면서 효과적이기까지 하잖아요.”

       

       오러도 마법도 ‘누구나’ 익힐 수 있다. 물론, 재능의 수준에 따라 그 속도와 벽을 마주하는 지점이 다르지만 어쨌든 익힐 수는 있다.

       

       보통은 이 시점에서 선택받은 일부의 권능으로 취급받게 되지만…모험가에게는 그렇지만도 않다.

       

       어떻게든 살아서 돌아올 수만 있으면, 그 업적에 따라 강제로 성장시켜 주고 격을 끌어 올려주는 미궁이 존재하니까.

       

       재능이 부족해서 더는 오러를 쌓지 못한다? 상관없다. 미궁에서 오러를 퍼줄 테니까!

       

       마나 감응력이 부족해 고위 마법을 다룰 수 없어? 이것도 상관없다. 미궁에서 죽어라 마법을 난사하다 보면 언젠가는 보상으로 감응력을 올려줄 테니까!

       

       미궁의 보상은 그 자체로 또 다른 기적이나 다름없다. 당장 나만 해도 근육이 엄청 붙은 것도 아니건만, 예전보다 훨씬 강해졌잖은가.

       

       그러니까 모험가로서 더 높은 곳에 이르고 싶다면 오러와 마법을 익혀야 한다.

       

       남들 다 들고 다니는 무기를 혼자 안 들고 다니는 건 너무 비효율적 아닌가.

       

       “근데 그걸 엘리 선배가 해내.”

       

       “넹?”

       

       “엘리 선배는 뭐랄까…재능이 없는 수준을 떠나 절망적인 수준이었거든.”

       

       “???”

       

       아무리 그래도 말이 되나 싶어 고개를 갸웃거리는 것도 잠시. 이어진 리디아의 말에 납득하고 말았다.

       

       “오러도 마나도 느끼는 건 가능한데 몸에 쌓는 게 불가능하다고 했어.”

       

       “허어.”

       

       “심지어 운도 없어서 미궁의 보상으로 오러나 마나를 받은 적도 없어. 모험가로 활동한 기간이 상당한데도 말이야.”

       

       “…….”

       

       그런가. 그런 건가.

       

       엘리는 재능 가챠와 미궁 보상 가챠에서 전부 폭사한 건가….

       

       짠한 마음에 괜시리 엘리의 목덜미에 얼굴을 부비적대고 있자니, 슬그머니 달아오르는 피부. 아무래도 마음에 든 모양이다.

       

       “하지만 엘리 선배는 오러와 마법이 없어도 대단해. 어떠한 이능도 없이, 오직 용기 하나만을 품고 강적에게 맞섰고 승리했어. 그래서 용자라는 이명이 붙은 거야.”

       

       “어…잠시만요. 어떠한 이능도 없었다니…혹시 권능마저 없었나요?”

       

       “응. 그냥 순수 수인의 육체로 지금에 다다른 거야.”

       

       “…….”

       

       이럴 줄 알았으면 적당히 양념만 치고 엘리 보고 막타 치라고 하는 거였는데. 

       

       그랬으면 적어도 세계수의 권능을 받아 갈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미안한 마음에 엘리의 목덜미를 이빨로 간질이듯 우물대며 그녀가 싸우던 모습을 떠올렸다.

       

       발 구름 한 번에 뒤집어지는 지면. 정권의 여파만으로 나무가 부스러지고, 권능으로 강화된 번개나 수정창조차 맨몸으로 튕겨낸다.

       

       가장 기본적인 보상. 신체 능력의 상승. 오직 그것만을 쌓아 올려 누구보다도 높은 경지에 다다른 것이겠지.

       

       거인의 완력을 품은 근육. 어지간한 금속보다도 단단한 내구성. 거기에 수인족 특유의 예민한 감각까지.

       

       이쯤 되면 엘리의 신체 자체가 하나의 권능이나 다름없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문득 떠오르는 의문. 엘리의 침 범벅 목덜미에서 입을 떼며 물었다.

       

       “어, 잠시만요. 그럼 대체 엘리의 팔은 어떻게 잘린 거예요?”

       

       사람 자체가 강한 엘리다. 대체 어떤 존재가 되어야 엘리의 팔을 날려버릴 수 있는 거지?

       

       새빨갛게 달아오른 엘리가 슈트의 소매 부분으로 어깨에 묻은 침을 벅벅 닦으며 말했다.

       

       “뭐어…아무리 나라도 드래곤 브레스에 맞으면 팔이 날아갈 수밖에 없다는 거야.”

       

       “드래곤 브레스?!”

       

       “6층의 계층 수호자가 미쳐버린 드래곤이거든. 심지어 황혼을 삼키는 자 때문에 폭주한 상태기도 했고.”

       

       “…….”

       

       미쳤는데 폭주까지 한 드래곤인가. 그건 어쩔 수 없지.

       

       드래곤에 관한 설정은 집어넣지 않았지만, 대충 판타지 세계관을 생각했으니 하나쯤은 있어도 이상할 게 없다.

       

       6층이면 야수신이 잠든 계층 아닌가. 어떤 몬스터나 계층 수호자가 나올지는 생각해 두지 않았지만…드래곤을 맹수의 정점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납득가는 라인업이긴 하네.

       

       몬스터화된 시점에서 미친 거야 두말할 것도 없는 당연한 소리고.

       

       속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것도 잠시. 슬슬 몰려오는 피로에 눈이 감겨만 간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카렌이 레몬과 애플과 함께 증거가 될 만한 것들을 수집하는 모습을 보며 잠들려던 순간.

       

       “아.”

       

       그러고 보니 그게 있었지.

       

       아공간 반지에서 여신상을 꺼내 미니 성역을 펼치고는 바로 다시 집어넣었다.

       

       아무리 나라도 말랑쫀득무저항따끈미니사랑의여신을 다른 사람 앞에서 보여주는 것은 조금 부끄러웠기에.

       

       빠르게 차오르는 활력. 아직 지쳐있어서 체감되질 않지만, 신체 능력도 분명 올랐겠지.

       

       분위기에 취하기도 했고, 얻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바로 떠올리지 못한 탓에 정작 가시나무 왕과의 전투 때는 사용하지 못했지만…지금이라도 떠올렸으니 된 거 아닐까?

       

       다시 말똥말똥해진 정신으로 엘리의 목덜미를 우물우물 물고 빨고 있자니, 주변의 시선이 집중됐다.

       

       “용자 옆에 성자…응. 근본 조합.”

       

       리디아가 만족스런 어조로 박수를 쳤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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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73

EP.73





       “구웨에에에에….”


       


       내 입에서 흘러나오는 괴상한 신음소리. 동시에 무릎이 무너지며 몸이 쓰러진다.


       


       당연한 일이다. 가시나무 왕보다 유일하게 앞서는 민첩을 살리기 위해 한시도 쉬지 않고 뛰어다니며 단검을 휘둘렀다.


       


       거기에 기껏 포션을 마셔 회복한 마력을 죄다 소진하며 마나 탈진까지 일으키지 않았나.


       


       그냥 탈진+마나 탈진=으앙 쥬금.


       


       간단한 공식이 떠올리며 바닥에 머리를 박기 직전.


       


       포옥.


       


       “…수고했어.”


       


       어느새 달려온 엘리가 하나 남은 팔로 나를 끌어안았다.


       


       여체 특유의 부드러움이 여실히 전해지는 살결. 하지만 그 안쪽은 탄력 있는 근육이 오밀조밀 들어차 있어 묘한 안정감을 준다.


       


       한 박자 늦게 몰려오는 엘리의 체향. 살 내음과 귀와 꼬리의 털에서 나오는 꼬순내. 그리고 연초 냄새가 적당히 섞인 익숙한 향기가 느껴지자 그제야 긴장이 풀린다.


       


       동시에 그간 쌓인 피로가 뒤늦게 몰려온다.


       


       “아. 큰일 났어요 엘리.”


       


       “왜 그래? 설마 여기서 뭐가 더 나온다거나 그런 건 아니겠지?”


       


       “그런 건 아닌데…힘이 쪽 빠져서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어요.”


       


       “뭐어. 어쩔 수 없지. 깜짝 놀랄 정도로 강해지긴 했지만 아직 요나에게 이른 상대였으니까.”


       


       “이대로라면 엘리가 저한테 무슨 짓을 해도 아무런 반항조차 할 수 없어요…!”


       


       “뭐?”


       


       “아아~ 큰일이네요. 엘리 같은 늑대에게 무방비한 채로 던져진 신세라니. 이대로라면 잡아먹혀 버릴 게 분명해요!”


       


       “아니, 안 잡아먹을 거거든?”


       


       “늑대님 늑대님. 저를 잡아먹으실 거라면 아프지 않게 단숨에 부탁드릴게요.”


       


       “…….”


       


       말문이 막힌 엘리의 모습에 잘 움직이지 않는 입가를 가까스로 끌어올리며 키득였다.


       


       그제야 엘리가 피식 웃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요나 너 말이야…이런 상황에서까지 그러고 싶어?”


       


       “그치만 엘리가 무서운 표정 짓고 있었는걸요? 마치 엘리 때문에 제가 다친 것처럼 말이에요.”


       


       “그건….”


       


       팔자로 추욱 처지는 엘리의 눈꼬리. 쫑긋 선 귀가 말리고, 꼬리는 힘을 잃어 바닥을 향한다.


       


       “또또. 그러니까 그런 표정 짓지 말라니까요? 어찌됐건 황혼을 삼키는 자의 계획을 막은 것도 모자라 간부까지 하나 잡았고, 저는 계층 수호자를 상대로 일대일로 싸워 승리할 만큼 성장했어요. 기쁜 날이잖아요? 웃어주셔야죠!”


       


       “…그래. 그렇지. 요나 네 말대로 기쁜 날이야.”


       


       희미한 미소를 지은 엘리가 재주 좋게도 한 손으로 나를 번쩍 들어 등에 업었다.


       


       몸에 딱 달라붙는 전신 슈트를 입고 있는 탓인지 엘리의 감촉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무방비한 엘리의 목덜미에 머리를 묻고 몰래 킁킁대고 있자니, 엘리가 나를 고쳐 업으며 말했다.


       


       “이대로 지상으로 갈게. 푹 쉬고 있어.”


       


       “그래도 될까요? 황혼을 삼키는 자를 잡은 거기도 하고, 처음으로 1층의 계층 수호자를 불러낸 거잖아요. 길드에서 이것저것 증언해야 할 게 많을 것 같은데….”


       


       “많겠지. 하지만 길드가 그렇게 부상자를 붙잡고 증언을 강요할 만큼 미친놈들은 아니거든. 뭣보다 내가 뒤에서 두 눈 시퍼렇게 뜨고 버티고 있을 텐데 어떻게 그러겠어.”


       


       “아, 맞아. 이제와서 하는 말인데…엘리는 대체 정체가 뭐예요? 은퇴한 고위 모험가라는 건 알고 있었는데, 그렇다고 하기에는 너무 강하잖아요.”


       


       엘리에 대해서는 중요한 매력 포인트나 성격을 결정짓는 설정만 구상했을 뿐, 구체적으로 얼마나 강하고 소싯적에 얼마나 활약했는지 같은 건 생각해 두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스토리와 직접적으로 연관되지 않은, 그저 설정을 위해서만 존재하는 설정은 연재를 거듭할수록 작가의 목을 졸라오기 때문이다.


       


       설정이 쌓일수록 캐릭터의 깊이가 깊어지는 것은 사실이나, 그 부작용으로 사용할 수 있는 에피소드가 한정된단 말이지.


       


       그런 이유로 최대한 설정은 널널하게 짜는 편이다. 꼭 필요한 것을 제외하면 그냥 비워둔다고 봐도 될 정도.


       


       엘리의 경우에는 현역 시절의 설정이 그러하고, 이브 같은 경우에는 여왕이던 시절의 이야기가 그러하겠지.


       


       어쨌든 중요한 건 엘리가 남자랑 손도 못 잡아본 은퇴 모험가라는 점과, 이브가 역사적인 수준의 처녀라는 점 아니겠는가.


       


       나머지는 전부 곁다리다 곁다리.


       


       …어쩐지 가챠에서 유니콘의 뿔이 뽑힌 게 우연이 아니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설마 이것도 노린 건가?


       


       속으로 사랑의 여신 흑막설을 진지하게 검토해 보던 도중. 머뭇거리던 엘리를 대신해 어느새 옆에 다가온 리디아가 입을 열었다.


       


       “용자勇者 엘리. 5년 전까지만 해도 유명한 이름이었어.”


       


       “용, 자?”


       


       생각보다 거창한 이명에 당황한 내 반응에 리디아가 무표정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사실 고위 모험가쯤 되면 오러나 마법 둘 중 하나는 필수로 익힌다는 거 알지?”


       


       “그렇죠. 둘 다 범용성이 좋으면서 효과적이기까지 하잖아요.”


       


       오러도 마법도 ‘누구나’ 익힐 수 있다. 물론, 재능의 수준에 따라 그 속도와 벽을 마주하는 지점이 다르지만 어쨌든 익힐 수는 있다.


       


       보통은 이 시점에서 선택받은 일부의 권능으로 취급받게 되지만…모험가에게는 그렇지만도 않다.


       


       어떻게든 살아서 돌아올 수만 있으면, 그 업적에 따라 강제로 성장시켜 주고 격을 끌어 올려주는 미궁이 존재하니까.


       


       재능이 부족해서 더는 오러를 쌓지 못한다? 상관없다. 미궁에서 오러를 퍼줄 테니까!


       


       마나 감응력이 부족해 고위 마법을 다룰 수 없어? 이것도 상관없다. 미궁에서 죽어라 마법을 난사하다 보면 언젠가는 보상으로 감응력을 올려줄 테니까!


       


       미궁의 보상은 그 자체로 또 다른 기적이나 다름없다. 당장 나만 해도 근육이 엄청 붙은 것도 아니건만, 예전보다 훨씬 강해졌잖은가.


       


       그러니까 모험가로서 더 높은 곳에 이르고 싶다면 오러와 마법을 익혀야 한다.


       


       남들 다 들고 다니는 무기를 혼자 안 들고 다니는 건 너무 비효율적 아닌가.


       


       “근데 그걸 엘리 선배가 해내.”


       


       “넹?”


       


       “엘리 선배는 뭐랄까…재능이 없는 수준을 떠나 절망적인 수준이었거든.”


       


       “???”


       


       아무리 그래도 말이 되나 싶어 고개를 갸웃거리는 것도 잠시. 이어진 리디아의 말에 납득하고 말았다.


       


       “오러도 마나도 느끼는 건 가능한데 몸에 쌓는 게 불가능하다고 했어.”


       


       “허어.”


       


       “심지어 운도 없어서 미궁의 보상으로 오러나 마나를 받은 적도 없어. 모험가로 활동한 기간이 상당한데도 말이야.”


       


       “…….”


       


       그런가. 그런 건가.


       


       엘리는 재능 가챠와 미궁 보상 가챠에서 전부 폭사한 건가….


       


       짠한 마음에 괜시리 엘리의 목덜미에 얼굴을 부비적대고 있자니, 슬그머니 달아오르는 피부. 아무래도 마음에 든 모양이다.


       


       “하지만 엘리 선배는 오러와 마법이 없어도 대단해. 어떠한 이능도 없이, 오직 용기 하나만을 품고 강적에게 맞섰고 승리했어. 그래서 용자라는 이명이 붙은 거야.”


       


       “어…잠시만요. 어떠한 이능도 없었다니…혹시 권능마저 없었나요?”


       


       “응. 그냥 순수 수인의 육체로 지금에 다다른 거야.”


       


       “…….”


       


       이럴 줄 알았으면 적당히 양념만 치고 엘리 보고 막타 치라고 하는 거였는데. 


       


       그랬으면 적어도 세계수의 권능을 받아 갈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미안한 마음에 엘리의 목덜미를 이빨로 간질이듯 우물대며 그녀가 싸우던 모습을 떠올렸다.


       


       발 구름 한 번에 뒤집어지는 지면. 정권의 여파만으로 나무가 부스러지고, 권능으로 강화된 번개나 수정창조차 맨몸으로 튕겨낸다.


       


       가장 기본적인 보상. 신체 능력의 상승. 오직 그것만을 쌓아 올려 누구보다도 높은 경지에 다다른 것이겠지.


       


       거인의 완력을 품은 근육. 어지간한 금속보다도 단단한 내구성. 거기에 수인족 특유의 예민한 감각까지.


       


       이쯤 되면 엘리의 신체 자체가 하나의 권능이나 다름없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문득 떠오르는 의문. 엘리의 침 범벅 목덜미에서 입을 떼며 물었다.


       


       “어, 잠시만요. 그럼 대체 엘리의 팔은 어떻게 잘린 거예요?”


       


       사람 자체가 강한 엘리다. 대체 어떤 존재가 되어야 엘리의 팔을 날려버릴 수 있는 거지?


       


       새빨갛게 달아오른 엘리가 슈트의 소매 부분으로 어깨에 묻은 침을 벅벅 닦으며 말했다.


       


       “뭐어…아무리 나라도 드래곤 브레스에 맞으면 팔이 날아갈 수밖에 없다는 거야.”


       


       “드래곤 브레스?!”


       


       “6층의 계층 수호자가 미쳐버린 드래곤이거든. 심지어 황혼을 삼키는 자 때문에 폭주한 상태기도 했고.”


       


       “…….”


       


       미쳤는데 폭주까지 한 드래곤인가. 그건 어쩔 수 없지.


       


       드래곤에 관한 설정은 집어넣지 않았지만, 대충 판타지 세계관을 생각했으니 하나쯤은 있어도 이상할 게 없다.


       


       6층이면 야수신이 잠든 계층 아닌가. 어떤 몬스터나 계층 수호자가 나올지는 생각해 두지 않았지만…드래곤을 맹수의 정점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납득가는 라인업이긴 하네.


       


       몬스터화된 시점에서 미친 거야 두말할 것도 없는 당연한 소리고.


       


       속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것도 잠시. 슬슬 몰려오는 피로에 눈이 감겨만 간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카렌이 레몬과 애플과 함께 증거가 될 만한 것들을 수집하는 모습을 보며 잠들려던 순간.


       


       “아.”


       


       그러고 보니 그게 있었지.


       


       아공간 반지에서 여신상을 꺼내 미니 성역을 펼치고는 바로 다시 집어넣었다.


       


       아무리 나라도 말랑쫀득무저항따끈미니사랑의여신을 다른 사람 앞에서 보여주는 것은 조금 부끄러웠기에.


       


       빠르게 차오르는 활력. 아직 지쳐있어서 체감되질 않지만, 신체 능력도 분명 올랐겠지.


       


       분위기에 취하기도 했고, 얻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바로 떠올리지 못한 탓에 정작 가시나무 왕과의 전투 때는 사용하지 못했지만…지금이라도 떠올렸으니 된 거 아닐까?


       


       다시 말똥말똥해진 정신으로 엘리의 목덜미를 우물우물 물고 빨고 있자니, 주변의 시선이 집중됐다.


       


       “용자 옆에 성자…응. 근본 조합.”


       


       리디아가 만족스런 어조로 박수를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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