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itch Mode

EP.73

       내 말을 듣자 케일은 오만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잠깐,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잘 모르겠는데. 너는 노예가 아닌가? 어떻게 사라진다는 거지?”

         

       음, 그런 질문이 올 것 같아 미리 대비해두었지.

         

       “물론, 다 말해줄 거다. 다만 지금은 아니야. 너와 함께 공녀님의 보좌를 하는 친구가 한 명 있거든.”

         

       언제 한 번 카자르와 케일이 대면하는 걸 봐야겠군.

         

       ‘혹시 몰라, 둘이 사이가 좋을지도?’

         

       아직 케일이 정확히 어떤 성품을 가졌는지 파악은 하지 못했다마는. 카자르와 잘 지냈으면 좋겠다.

         

       두 명은 앞으로 프란체의 보조를 맡아야 하니까.

         

       “이번에도 그렇게 넘어가는 건가. 정말 사람 궁금하게 만드는 데 재주가 있군.”

         

       나는 피식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튼. 네가 앞으로 생활할 공간을 소개하지. 따라와라.”

         

       내가 케일을 데리고 간 곳은 프란체 코퍼레이션 의류 작업장.

         

       이 건물이 하도 큰 탓에 자리가 남는다고 들었다. 여기 맨 위층에 살게 하면 되겠지.

         

       ‘나중에 회사 건물도 따로 세워야겠어.’

         

       작업장 말고도 본사는 따로 있어야지, 음. 그렇고말고.

         

       “이 건물의 꼭대기에서 살라는 건가?”

       “그래.”

       “딱 봐도 높아 보이는데?”

       “문제라도 있나?”

       “계단을 올라갈 때 힘들잖나.”

         

       뭐야, 겨우 그거 가지고 엄살은.

         

       “별로 문제없잖아. 단번에 가고 싶으면 오러를 활성화해서 가든지.”

         

       케일은 단순히 오러를 배워서 소드 마스터의 경지에 오른 게 아니다. 명백하게 인간을 초월한 인물.

         

       페델리안 제국에서 나와 초월 마법사를 제외하고, 강자를 뽑아보자면 세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수준.

         

       그런데 고작 계단 하나 가지고 불평불만은.

         

       “3층 정도면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이 큰 건물의 꼭대기일 줄이야.”

         

       케일은 뒷목을 잡으며 눈을 질끈 감았다. 계단 좀 오르는 게 그렇게 싫은가.

         

       “계단 올라가는 게 그리 싫나? 계단만 조금 올라가면 저 넓은 크기를 혼자서 사용할 수 있는데.”

         

       나는 케일의 등을 토닥이며 말을 이었다.

         

       “내가 생활하는 곳 봤지? 나와 같이 그딴 거지 같은 방에서 사는 것보다 계단 좀 올라가서 저 넓은 곳을 혼자 차지하는 게 좋지 않겠어?”

         

       말로 잘 구슬려야지. 카자르의 집으로 보낼 수는 없으니까.

         

       남녀칠세부동석.

         

       우리는 모두 비지니스 관계인데 둘이서 무슨 일이 있을 줄 알고…….

         

       “…알겠다. 좀 불편하긴 해도 넓은 공간을 혼자 사용할 수 있으니 이 정도는 감수하지.”

         

       다행히 잘 구슬린 듯하다.

         

       “아, 그리고 고용비 말인데. 얼마나 줄 거지?”

         

       나는 케일의 귓가에 얼마를 줄 건지 읊조렸다.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귀족 나리들은 다 그렇게 돈이 많은 건가? 말이 안 되는군.”

       “다 돈이 많긴 하지만, 우리가 이번에 돈을 좀 많이 벌었다. 사업을 대성공했거든.”

         

       케일은 상실감 가득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내가 지금까지 번 돈은 코딱지만도 못한 금액이었군…….”

         

       용병왕, 백귀라는 놈이 돈 가지고 이렇게 시무룩해질 줄이야.

         

       “아무튼. 이게 제국 귀족들의 재력이다. 동부 끝자락에서 배운 경제관념은 잊도록.”

         

       제국은 땅이 큰 것도 모자라 자원이 무수히 많다. 거기에 인력까지 넘친다.

         

       그리고 이 세계의 시대 배경은 귀족 사회. 대륙에 떠도는 돈은 다 귀족들이 가지고 있는 셈이다.

         

       “그래도 이 허무함은 잊을 수 없군.”

       “여기서 생활하다 보면 적응될 거다.”

         

       나는 프란체가 나눠준 수표를 케일에게 건넸다. 케일은 그 금액을 보고 쉽게 눈을 떼지 못했다.

         

       “자, 이걸로 은행 가서 돈 뽑고 필요한 물건들을 사라. 할 일이 있을 때는 전서구를 보내지.”

         

       케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허탈한 표정이었다.

         

       “그럼 이만 가보지.”

         

         

       * * *

         

         

       나는 프란체에게 가기 전, 먼저 카자르의 집에 들렀다. 쿵쿵. 문을 두드렸다.

         

       “카자르, 나다.”

         

       덜컥. 두드리자마자 열리는 걸 보니 자고 있진 않았던 모양이다.

         

       안으로 들어서니 카자르는 저번과 같이 현미경 같은 안경을 쓰고 마법서를 해독하는 데 심혈을 기울이고 있었다.

         

       나는 조용히 다가가 그녀의 앞자리에 앉았다.

         

       “해독은 어디까지 됐냐?”

       “절반이요.”

       “우리가 찾던 내용은?”

       “그다지 없었어요.”

         

       탁. 카자르는 고대 마법서를 덮고 안경을 벗은 채 미간을 주물렀다.

         

       “후우. 근데 확실한 건 여기 나오는 마법식과 당신에게 새겨진 마법진이 비슷하다는 거예요.”

         

       오, 그럼 이 마법진을 없앨 가능성도 있는 건가?

         

       “그래서, 가능성이 조금 생겼나?”

       “으음, 더 알아봐야 할 것 같지만…….”

         

       카자르는 팔짱을 낀 채 손가락으로 팔뚝을 두드렸다.

         

       “확실한 건 없네요. 아직 전부 해독한 게 아니라서.”

         

       그런가. 조금 실망했다. 이런 기색이 카자르에게도 보였는지 금방 위로가 돌아왔다.

         

       “걱정 마세요. 이 마법서는 다른 고대 마법서와 차원이 다르니까 방법이 있을 거예요.”

         

       그렇다면야, 뭐.

         

       “사실 그런 이유로 찾아온 건 아니고.”

       “그럼요? 공녀님한테 무슨 일 있어요?”

       “그래. 자세히 말하자면 좀 긴데.”

         

       나는 카자르에게 그간 있었던 일들을 말해주었다. 프란체가 자신의 감정을 제어하지 못 한다는 내용이었다.

         

       “흐음. 무의식적으로 계속 흘러나오고 있나 보네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카자르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공녀님은 감정이 남들보다 강해요. 거기다 짧은 시간에 그런 성취를 이뤘으니 당연한 결과죠.”

         

       하긴, 그렇긴 하다. 아직 1년도 지나지 않았는데 그 정도의 흑마법을 익혔다.

         

       그릇의 크기도 작을뿐더러 견고하지도 않은데 그 안에 내용물을 욱여넣은 거다. 새어 나오지 않는 게 이상하지.

         

       “그럼 지금은 흑마법을 배우는 것보다 감정 조절이 먼저겠네.”

         

       카자르가 “사실은…….” 하면서 뒷머리를 긁적였다.

         

       “제가 알려 줄 수 있는 마법은 이미 다 가르쳐드렸어요. 앞으로 이런 걸 배울 거다, 하고 보여드린 건데 놀랍게도 그 짧은 순간에 이해하시고 흡수하신 거 같더라고요.”

         

       어쩐지 계속 흑마법이 스멀스멀 흘러나오더라.

         

       “그럼 조심해야 하는 점은?”

       “으음…….”

         

       카자르는 천장을 바라보며 테이블을 두드렸다.

         

       “안정을 취해야 한다는 건 저번에 알려드렸고. 감정이 폭발했을 때 흑마법이 발동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하는데… 이건 쉽지 않은 문제네요.”

         

       복잡함과 착잡함에 한숨이 절로 나왔다. 이대로 두면 사고가 일어날 수도 있다. 흑마법이 이렇게 위험할 줄이야.

         

       “후. 최대한 공녀님을 위협하는 요소를 다 제거하는 수밖에 없겠네.”

         

       카자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감정 제어가 익숙해질 때까지만 조심해주세요.”

         

       그럼 라인을 최대한 경계해야겠군. 걔는 지금도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을 테니까.

         

       “이제 용건은 끝인가요?”

       “아, 아니. 아직 남았어.”

         

       카자르는 빨리 마법서를 해독하고 싶은지 나를 재촉해왔다.

         

       “그럼 빨리 말해봐요.”

       “우리에게 새로운 동료가 생겼어.”

       “새로운 동료요?”

       “그래. 안전에 관련해선 걔가 다 할 거야.”

         

       고개를 갸우뚱하는 카자르.

         

       “누군데요? 유명한 사람이에요?”

       “좀 유명해. 백귀, 케일.”

         

       케일의 이름을 듣자 카자르의 눈이 동그래졌다. 얘는 대체 얼마나 유명한 거야?

         

       “그 동부의 수호자 케일이요?”

       “그래. 많이 유명한가 봐?”

       “유명할 수밖에요!”

         

       흥분한 카자르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백귀 케일은 여러 설화가 있어요. 검으로 마법을 베어내고, 대마수를 처치하고, 무력으로 용병계에서 최정상을 차지했고…….”

         

       카자르의 케일 자랑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혹시 팬이었던 건가…?

         

       “관심이 많네…?”

       “그럼요!”

         

       동부 끝자락에서만 활동하는 거로 아는데 프란체도 그렇고, 카자르도 아는 걸 보니 괜히 용병왕이라 불리는 게 아니었나 보다.

         

       “음유시인이 케일에 관한 노래를 부르고 다녀요. 그만큼 유명하고, 대단한 사람이죠.”

         

       눈썹이 꿈틀거렸다 이 정도면 질투까지 나는데. 걔가 나보다 더 대단해 보이는 거 같잖아.

         

       “아무튼. 얘기로만 듣던 사람의 실물을 직접 볼 수 있다는 건 좋네요. 그래서, 언제 만날 수 있는데요?”

       “곧. 중요한 얘기가 있어서 너랑 케일을 불러놓고 말할 거야. 앞으로의 일도 관계있고.”

         

       단순히 사라진다고만 하는 게 아닌, 내가 없어지면 프란체를 잘 부탁한다고 말해야 한다.

         

       그 공녀님은 너무 내게 의존 중이니 너희들이 빈자리를 채워줘야 한다고.

         

       내가 없어도 잘 살아갈 수 있도록 만들어달라고.

         

       “아무튼, 그렇게 알아둬. 나중에 데리고 찾아올 테니까.”

       “알겠어요. 저는 그럼 다시 고대 마법서 해독에나 집중할게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곤 곧장 문을 열고 나왔다. 차가운 바람이 나를 맞이했다.

         

       씁쓸한 미소가 지어졌다. 나도 더 프란체와 같이 있고 싶은데. 떠나고 싶지 않은데.

         

       이 세계에 떨어지고, 항상 프란체와 함께했다. 나의 행동 원리는 프란체였고, 내 목표는 프란체의 행복이었다.

         

       막상 그녀와 멀어져야 한다니 미련이 남았다.

         

       “하아…….”

         

       나는 고개를 휘저었다. 이런 생각을 많이 해봐야 좋을 게 없다. 중요한 순간에 망설임이라는 감정이 내 발목을 잡을 테니까.

         

       이번 일을 마지막으로, 나는 떠나야 한다.

         

       그래야 내가 살 수 있으니까.

         

         

       * * *

         

         

       탁. 프란체는 읽던 마법서를 덮고 기지개를 켰다. 창밖을 바라보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얘는 왜 안 와?”

         

       분명 일이 끝나면 바로 오라고 했는데. 늦지 않게 오라고 했는데. 어딜 가서 뭘 하는지 아직도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다.

         

       “후우.”

         

       한숨을 내리 쉬고 새로운 마법책을 펼치려던 그 순간, 덜컥! 방문이 세게 열렸다.

         

       “프란체!”

         

       라인이었다. 잔뜩 화가 난 얼굴로 들어오는 모습을 보니 과거가 떠올랐다. 그때는 마냥 무섭기만 했는데 지금 보니 너무 초라해 보였다.

         

       ‘내가 이런 사람한테 그렇게 겁을 먹었다니.’

         

       피식 웃음이 나왔다. 과거의 자신이 너무 바보 같아서.

         

       “…뭘 그렇게 웃는 거지?”

       “아니에요. 무슨 일로 찾아오셨는데요?”

       “네가 한 만행을 알아챘으니까.”

         

       만행? 무슨 만행? 프란체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소리를 하시는지 잘 모르겠네요.”

       “하, 끝까지 잡아뗄 생각이군.”

         

       쿵. 쿵. 라인은 거센 발걸음으로 프란체의 앞에 섰다. 그러고는 벽으로 밀치더니 오만한 얼굴로 프란체를 굽어봤다.

         

       “네 사업, 그거 프리다의 인력을 빼 와서 만든 거라며? 프리다의 마담한테 다 들었어. 이걸 내가 알고도 그냥 넘어갈 줄 알았냐?!”

         

       일순 프란체의 눈이 싸늘해졌다. 그녀의 그림자에서 촉수와도 같은 어둠이 일렁거렸으며 방안에는 서늘함이 가득했다.

         

       “…뭐, 뭐야?”

         

       갑작스레 바뀐 분위기에 위화감을 느끼는 라인. 프란체는 흑마법으로 라인의 목을 움켜쥐었다.

         

       콱!

         

       “커헉… 헉!”

         

       아지랑이처럼 일렁이는 새까만 그림자가 목을 조인다. 라인이 허공에서 발버둥쳤다. 프란체는 피식 웃으며 라인을 굽어봤다.

         

       “알아서 어떻게 하실 건데요?”

         

       살기가 가득한 프란체의 시선과 알 수 없는 흑마법이 라인의 등줄기에 천둥을 내리쳤다.

         

       “무, 무슨…….”

         

       두려움과 혼란이 몰려와 라인을 잡아먹는다. 덜덜 떨리는 손과 버둥거리는 다리를 보며 프란체는 “아핫!”거리며 방긋 웃었다.

         

       “그렇게 강한 척을 하시더니, 별거 아니셨네요?”

         

       우웅…! 마력이 점점 더 강해지며 라인의 목을 더 조였다.

         

       “커, 커헉! 그, 그마아…….”

         

       스르륵. 라인의 목을 움켜쥐던 그림자가 조금 풀려났다.

         

       “자, 말해보세요. 프리다의 인력을 빼 왔으면 어쩔 건데요?”

         

       스으윽. 흑마법으로 만들어진 그림자들이 늘어나 작살의 모형으로 변했다.

         

       “잘 대답해야 할 거야. 안 그러면 여기서 죽일 테니까.”

         

       프란체의 눈동자에 생기가 사라졌다. 어둡다 못해 심연과도 같은 눈빛에 라인은 닭살이 올라왔다.

         

       “그, 그…….”

       “말해보시라니까요?”

       “…….”

         

       스르륵, 털썩. 그림자가 라인의 목을 놓아주었다.

         

       “커헉, 컥!”

         

       라인은 자신의 목을 부여잡고 기침 세례를 내뱉었다.

         

       “앞으로는 그딴 시답잖은 일로 절 찾아오지 마세요. 죽여버리고 싶어지니까.”

         

       프란체는 쭈그려 앉아 손으로 라인의 머리채를 붙잡고 들어 올렸다.

         

       “대답하라고.”

       “아, 알겠어…….”

       “반말?”

       “알겠습니다…….”

         

       그제야 싱긋 웃으며 머리채를 놓는다.

         

       “그래, 앞으로는 조심해. 알겠지? 다시는 나와 상관하지 말고. 만약 내가 너 때문에 움직여야 하는 일이 있다면 편하게는 못 갈 거야.”

         

       프란체의 소름이 돋는 미소에 라인은 연신 고개를 끄덕이는 수밖에 없었다.

         

       “그럼 나가 봐.”

         

       라인이 헐레벌떡 일어나 도망친다.

       

       “감정을 조절하는 것만 빼면 흑마법의 제어도 익숙해졌네. 속이 다 시원하다.”

       

       그렇게 라인을 보며 한껏 비웃어주고, 등을 돌린 그 순간.

       

       “공녀님…?”

       

       창틀에 서 있는 진과 마주쳤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프란체가 이상해져서 그런지 저도 이상한 거 같아요…
    다음화 보기


           


I Raised the Villainess and Fled

I Raised the Villainess and Fled

악역 영애를 키우고 도망쳤다
Score 8.6
Status: Ongoing Author:
I made a villainess destined for death into the most powerful person in the empire and then fled.

Options

not work with dark mode
Res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