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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74

    친숙하면서도 생소한 느낌을 주는 공간. 

    그런 기묘한 꿈속의 한가운데 서 있었다.

    마치 오래된 추억의 전경이 펼쳐져 있는 듯한 그리운 느낌을 받는데, 기억 속에 전혀 없는 생소한 꿈.

    내 몇 걸음 앞에는 한 남자의 뚜렷한 뒷모습이 보였다. 

    나와 똑같은 노란 양복을 갖춰 입은 남자.

    얼굴은 가려져 있었지만 묘한 친숙함, 닳고 닳은 기억의 저편을 당기는 듯한 공명이 느껴졌다.

    어깨의 곡선, 걸음걸이의 리듬, 그 외 모든 것들이 조용하고 집요하게 나에게 알아봐 달라고 손짓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나는 왠지 모를 그리움을 느끼고, 그를 쫓아 달리기 시작했다.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기묘한 무게감이 내 발걸음을 붙잡았다.

    나는 모르는 오래된 기억의 파편이 내 발걸음을 무겁게 만들고 있었다.

    한 발짝을 내디디면 전혀 모르는 광경이 펼쳐졌다. 

    “후배, 그렇게 감에만 의지하다간 큰코다칠 거야.”

    모르는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기억에 없군.

    한 발짝을 더 내디디면 또 다른 광경이 펼쳐졌다. 

    “이제부터…. 네가.”

    피투성이의 남자가 나에게 뭔가를 넘겨줬다.

    이것도, 기억에 없군.

    아무리 달리고 달려도, 가벼운 걸음걸이로 천천히 걷는 남자와의 거리가 줄어들지 않았다.

    마지막 순간, 그 남자가 나를 슬쩍 돌아보는 순간. 

    그의 머리가 왓슨처럼 핏빛 연기로 뒤덮이기 시작했다.

    그때 분명.

    무언가를 말하려고 하는 순간.

    잠에서 깨어났다.

    ***

    밤의 도시는 흑요석처럼 짙은 어둠으로 뒤덮였다.

    도시의 소음도 잦아드는 깊은 밤, 한 허름한 건물의 창문에서 붉은 불빛이 새어 나왔다.

    나무 책상 위에 놓인 가스램프의 진홍색 빛이 부드럽게 흔들리며 춤을 춰, 탐정 사무소 내부를 루비색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그런 조용한 밤, 가스램프 ‘왓슨’에서 붉은 불길이 화르륵하고 크게 타올랐다.

    [홈즈는 잠들었나?]

    [응, 잠들었어.]

    [홈즈가 뭔가 이상한 거 같아.]

    [별일 없을 텐데?]

    왓슨에서 새어 나오는 연기가 사무소를 가득 채우고, 그 위로 그림자들이 잔뜩 일렁였다.

    [다음 의뢰는 언제야?]

    [지금 홈즈가 이상한 거 같은데.]

    [무서워!]

    [‘눈’이었던 건 확실한 거야?]

    [그래도 도망갈 필요는 없지 않아?]

    [아직 확실한 게 아니야.]

    [홈즈가 이상해?]

    [후배 3호도 생길 것 같아?]

    왓슨의 집단적 독백의 어수선한 분위기는 어느 순간 갑자기 멈춰버렸다.

    모든 그림자가 한곳을 뚫어져라 쳐다보기 시작한 것이다.

    [홈즈가 이상해!]

    [홈즈가 이상해!]

    [홈즈가 이상해!]

    가스램프에서 뿜어져 나온 연기가 탁자를 타고 내려가, 문틈을 뚫고 흘러 나가기 시작했다.

    연기는 계단과 벽을 타고 계속 위로 올라갔다.

    낡은 건물의 계단을 타고서 계속 올라가던 연기는 목적하던 위치에 도착하자, 어떤 곳을 향해 스며들기 시작했다.

    반쯤 내려진 블라인드 사이로 희미한 별빛이 비치는 방.

    굳게 닫힌 문틈으로 연기가 스멀스멀 퍼져 나오기 시작했다.

    블라인드의 희미한 빛을 받고 있던 낡은 옷걸이와 거기에 걸린 노란색 트렌치코트도 연기에 뒤덮여 그 자취를 찾을 수 없게 되었다.

    오래된 책상 위에 놓인 서류와 사건 파일들도 연기 속으로 삼켜졌고, 책상 한편에 놓인 문진과 반쯤 남아있는 위스키병도 연기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연기의 바다에서 섬처럼 튀어나와 있는 것은 낡아서 쿠션이 약간 꺼진 가죽 소파였다.

    그 소파 위에 노란 탐정이 양복을 입은 채로 누워서 잠들어 있었다.

    돌아오자마자 피곤해서 잠든 모양새였다.

    그 탐정을 내려다보듯이 연기가 탐정 주변을 에워쌌다.

    [홈즈가 기억해 냈어?]

    [홈즈는 계속 잊고 있어야 하는데?]

    [왜 기억할 수가 있지?]

    가스램프에서 뿜어져 나온 연기는 탐정 주변을 살펴보다가, 간헐적으로 빛을 뿜어내는 한 구체를 발견했다.

    [이런 오브젝트는 못 줍게 해야 하는데!]

    [부숴버려야 해.]

    [이런 오브젝트는 언제 얻은 거지?]

    [우리가 잠들었을 때!]

    보조 테이블 위에 놓여있는 구체는 잠든 탐정의 머리를 향해서 빛을 쏘아 보내고 있었는데, 빛이 내리쬘 때마다 탐정은 괴로운 듯이 일그러졌다.

    핏빛으로 물든 연기가 구체를 손아귀에 넣더니 그대로 으스러트렸다.

    [홈즈. 영원히 함께야!]

    ***

    <황금 사신 간이 실험>

    <황금 사신은 자석 위에 뜬다.>

    <원본과 그 특성을 공유하는 것을 생각해 보면 회색 사신도 자석 위에서 뜰 것으로 예상됨.>

    <귀엽다.>라고 마지막 줄을 썼다가 죽죽 볼펜으로 선을 그어서 지워버렸다.

    보고서에 감상 같은 걸 적으면 안 되지, 안돼.

    적막으로 가득 찬 부소장실의 자석 위에서 둥둥 떠다니며 즐거워하는 황금 사신을 관찰했다.

    손가락으로 황금 사신을 콕콕.

    무슨 짓을 해도 좋다고 웃기만 하는 언제나 행복한 황금 사신이.

    정신 오염의 우려가 있어서, 휴게실에 있던 황금 사신을 몰래 부소장실로 옮겨서 보관하기로 했다.

    다행히 금세 사라지는 특성을 가진 황금 사신이 사라졌다고 해서 수상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다.

    이상하게 생각하는 직원이 있었다면 성가셨겠지만, 다행히도 그런 직원은 보이지 않았다.

    연구원들의 정신 건강을 지키기 위해서, 그리고 황금 사신이를 좀 더 잘 관찰하기 위해서 어쩔 수 없는 판단이었다.

    시계를 보니 어느새 12시. 

    황금 사신이에게 밥을 줄 시간이다.

    “사신아! 밥 먹자.”

    냉장고에서 푸딩을 꺼내자, 나를 향해 점프해서 손바닥 위로 올라서는 황금 사신이.

    옴뇸뇸.

    마치 소동물처럼 작게 끊어서 먹는 사신을 바라보며 문득 생각이 들었다.

    “사신이가 소리도 낼 수 있으면 얼마나 귀여울까?”

    사신이의 울음소리를 듣고 싶다.

    이런 생각이 들었다.

    흠흠, 나는 목을 가다듬고 다시 노트를 펼쳐서 관찰을 시작했다.

    나는 사심이 없으니까, 할 일은 해야지.

    ***

    예린의 품에 안겨서 TV 시청.

    TV 앞 탁자에는 온갖 종류의 푸딩들이 종류별로 늘어서 있었다. 

    “서울에서 구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푸딩이야! 대단하지?”

    뒤에서 껴안은 예린과 볼과 볼을 맞대고 푸딩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주로 어디서 파는 지와 어떤 특징을 가졌는지에 대한 설명이었다.

    옴뇸뇸.

    나는 푸딩을 하나씩 하나씩, 차근차근 맛을 보았다.

    여전히 푸딩은 맛있다.

    하지만, 캠프에서 먹었던 그 맛이 아니야!

    나는 슬픈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앗! 이번에도 안 되는 거야? 그럼 이제 지방 쪽에서만 파는 것들을 구해와야 하나?”

    예린이는 날 꽉 껴안으면서 ‘요즘 너무 깐깐해졌어’라며 투덜거렸다.

    푸딩을 구해오는 예린이에게는 미안하지만, 나는 닌자가 가져왔던 푸딩의 정체를 꼭 알고 싶었다.

    “깐깐한 돼지 사신이!” 

    예린이가 내 볼을 꾹꾹 찌르면서 하소연했다.

    “아, 맞다. 짜잔! 이거 구했어. 생각보다 구하기 어렵진 않더라고.”

    예린은 품 안에서 사진 한 장을 꺼내서 나에게 보여줬다.

    사진 속에는 검은 진흙을 배경으로 이국적인 풍경이 찍혀있었다.

    그리고 그 사진 가운데에는 새까만 펭귄이 덩실덩실 춤을 추고 있었다.

    둠칫둠칫. 

    흥겨운 춤사위는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는데, 절로 리듬과 박자를 느끼게 했다.

    펭귄이 짧은 팔다리로 춤을 추니 더 재미있었다.

    “아, 근데 이거 ‘데일리 오브젝트’에서 팔더라고. 요즘 장사가 안돼서 힘든지, 이런 사진까지 팔아가며 돈을 벌던데…. 연구소도 아니면서 오브젝트로 장사해도 괜찮으려나?”

    이런 오브젝트를 함부로 취급하면 큰일 날 텐데? 라고 덧붙이는 예린이.

    하지만 가장 함부로 취급하는 예린이가 그 말을 하니 별로 설득력이 없었다. 

    ***

    아침의 탐정 사무소.

    탐정 사무소에는 평소처럼 은은한 커피 냄새와 시끄러운 TV 소리가 어울려 있었다.

    정체불명의 야생 동물에 의한 것으로 보이는 사망 사건.

    요즘 서울에서 돌아다니는 신종 마약에 오브젝트가 엮여있다는 의혹.

    오늘 아침에도 사건이 많은 서울이었다.

    선배는 그런 TV 소리를 배경음악으로 들으며 진하게 탄 커피를 마시면서 한숨을 흘리고 있었다.

    선배의 눈이 퀭한걸? 엄청 피곤해 보였다.

    “선배 왜 이렇게 힘들어 보여요?”

    “모르겠다. 이상하게 피곤하네. 아마 이것 때문이 아닐까, 싶긴 한데….”

    선배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에는 두 쪽으로 쪼개진 오브젝트가 있었다.

    “자고 일어나니까, 박살 나 있더라고. 아마 사용 횟수나 시간제한이 있던 오브젝트가 아닐까, 싶더라. 치유 능력이면 그런 제한이 붙을 만도 하고 말이야.”

    “뭐, 없어진 건 어쩔 수 없죠. 그래서 선배! 다음 의뢰는 어떻게 할 거예요?”

    “글쎄다. 요즘 너무 일을 열심히 한 것 같기도 하고….”

    선배는 의자 등받이를 뒤로 쭉 누르면서 천장을 바라보며 말했다.

    “간단한 의뢰로 돈이나 좀 벌다가, 충분히 쉰 것 같으면 다시 오브젝트 건 받아야지.”

    “불륜 증거 찾기? 탐정이 이런 거 해도 돼요?”

    “탐정은 원래 그런 일 하는 거야. 왓슨 때문에 나에게 너무 많은 걸 바라는 것 같은데. 난 셜록이 아니라고.”

    선배의 말에 가스램프가 반대한다는 듯이 마구 깜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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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oul Object Story

Seoul Object Story

서울 오브젝트 이야기
Score 9.4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3 Native Language: Korean
Humans, once the masters of Earth, were losing their place to the inexplicable phenomena known as Objects. And this is a story about becoming an Object and living worry-free in the Seoul of such a wor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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