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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74

       

        

       [Behind Story – 수렵 평가 (2.5)]

       

       ※ 수렵 평가 (2)편 이후, (3)편 이전 시간대입니다.

       

       

       

       

       

       

       

       

       

       

        

       엘트 섬.

        

       수렵 평가 도중, 로제 레드리베라를 쓰러뜨리고 중반부까지 들어선 때였다.

        

       

       어느덧 나는 늪지대에 이르렀다. 묽은 진흙이 넓은 호수를 이루고 있는 장소. 여길 지나는 건 어려워 보였다.

        

       얼음이나 바위 마법으로 다리를 만들어갈 순 있겠지만.

        

       늪 안에는 마물 환상과 적 사역마가 숨어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원소 마법으로 어떻게든 건너갈 수 있겠지만, 그 와중에 놈들이 급습해 오면 무조건 내가 지겠지.

        

        

       ‘돌아서 가는 편이 좋겠다.’

        

        

       나는 옆 방향으로 발을 옮겼다.

        

       그때.

        

        

       푸우우우!

        

        

       “우왓!”

        

        

       느닷없이 늪이 솟구쳤다!

        

       진흙을 튀기며 날아오른 것은 성인 남자 둘은 합쳐 놓은 듯한 크기의 파충류 마수.

        

       몸에 물 마나를 휘감은 늪악어 사역마, 도브였다.

        

        

       [ 도브 ]

        

       Lv : 60

       종족 : 마수

       속성 : 물

       위험도 : 하

       심리 : [ 당신을 쓰러뜨리고 주인에게 칭찬받고 싶어 합니다. ]

        

        

       놈은 입을 하 벌려 위협적이고 날카로운 이빨들을 내보였다.

        

        

       [갸아아아악!]

        

        

       푸른 마법진을 전개하며 내 쪽으로 떨어지려는 악어 마수. 늪에 숨어 있느라 빙설룡-힐드가 기척을 눈치채지 못했나.

        

       나는 황급히 양손가락을 맞대고 얼음 마나를 응축시켰다. [빙결 폭발]의 마법진이 내 양손 앞에 새겨졌다.

        

        

       「낙수 (물 속성, ★3)」

        

        

       악어 마수가 마법진으로 대량의 물을 퍼부으려 하자.

        

       나는 응축시킨 얼음 마나를, 놈을 향해 터뜨렸다.

        

        

       「빙결 폭발 (얼음 속성, ★5)」

        

        

       콰아아아아!!

        

        

       빙결의 폭발. 강한 충격이 악어 마수와 [낙수]를 덮치고.

        

       삽시간에 퍼져나간 빙결이 악어 마수를 집어삼키며 나무 위로 솟구쳤다.

        

        

       쿠우우우!

        

        

       악어 마수를 얼린 길쭉한 빙괴가 늪에 떨어지더니 굵직한 다리가 되었다. 마나로 응축된 단단한 빙괴는 조금도 깨지지 않았다.

       

       1학기 때와 비교될 정도로 길쭉한 빙괴였다. [빙결 폭발]도 꽤 숙련됐구나.

        

       곧바로 건너고 싶은 욕망이 꿈틀댔지만 애써 참아냈다. 전술했듯, 얼음 다리를 건너다가 적들이 급습해 오면 당할 수밖에 없으니까.

        

        

       [주인, 또 마수가 온다.]

       [쿠우우우우.]

        

        

       드르르르륵.

        

        

       몸에 바위를 덧씌운 마수가 웅크린 몸으로 빙그르르 구르며 돌격해 왔다. 몸을 말아 놓은 형태의 체고만 2m는 될 법한 아르마딜로 마수였다.

        

       마법이 시전 되는 소리와 빙괴가 늪지대에 떨어지는 소리를 듣고 온 모양.

        

        

       [ 아리보리 ]

        

       Lv : 56

       종족 : 마수

       속성 : 바위

       위험도 : 하

       심리 : [ 당신을 쓰러뜨리고 주인에게 쓰다듬어지기를 원합니다. ]

        

        

       「얼음 창 (얼음 속성, ★4)」

        

        

       팔을 가볍게 위로 뻗어 머리 위로 [얼음 창]을 구현해낸 뒤.

        

       내게로 굴러오고 있는 아르마딜로 사역마, 아리보리를 겨냥했다.

        

       그렇게 [얼음 창]을 쏘려던 순간이었다.

        

        

       「낙뢰 (번개 속성, ★4)」

        

        

       콰광!!

        

        

       “……!”

        

        

       자색 번개가 나뭇잎 틈새를 꿰뚫고 아리보리에게 내리쳤다.

        

       전신을 마비시키는 강력한 뇌격. 놈의 바위 등갑은 가볍게 박살났다.

          

       아리보리는 비명을 지를 틈도 없이 네 개의 다리를 쭉 뻗은 채 정신을 잃고 말았다. 발만 간헐적으로 움찔댄다.

        

       놈에게선 [낙뢰]의 여파로 자색 전류가 치직, 거리며 흐르기 시작했다.

        

       

       ‘이건 뭔 일이냐, 또…?’   

        

       [주인, 위험한 게 온다!]

        

        

       빙설룡의 다급한 외침에 나는 심장이 내려앉는 기분을 느꼈다.

        

       왜, 왜? 또 뭔데?!

        

        

       [끼아아아아!]

        

        

       돌연 익숙한 맹금류의 포효가 정글을 울리고.

        

        

       “으악!”

        

        

       나무들을 뚫고, 자색 번개를 휘감은 검은 새 한 마리가 박력 넘치게 아르마딜로 사역마, 아리보리 앞에 내려앉았다. 전류와 풍압이 사방으로 퍼져나간다.

        

       와, 개 깜짝 놀랐네….

        

        

       “갈리아…?”

        

        

       내 눈앞에 나타난 새는 평소보다 몸 크기를 줄인 검은 뇌조.

        

       ‘뇌신조-갈리아’였다.

        

        

       [ 뇌신조-갈리아 ]

        

       Lv : (100)

       종족 : 마수

       속성 : 번개

       위험도 : X

       심리 : [ 당신을 반가워하고 있습니다. ]

        

        

       “아이작, 찾았다.”

        

        

       뇌신조-갈리아의 등 위에는 로즈골드색 머리칼의 여학생이 올라타 있었다. 마법학부 1학년 수석, 루체 엘타니아였다.

        

        

       “루체?”

        

        

       뇌신조가 지면에 턱을 맞대고.

        

       루체는 뇌신조의 목덜미를 타고 미끄러지듯 지면으로 내려왔다.

        

       온화한 미소를 흘리는 그녀.

        

       다행이다…. [낙뢰] 내려쳤을 땐 식겁했잖아.

        

       안도감이 몰려왔다. 루체라면 무조건 내 편일 테니까.

        

        

       “이야, 난 어떻게 찾았냐? 굉장…!”

        

        

       나는 웃는 얼굴로 루체에게 인사하며 다가가려 했으나.

        

       어째 그녀의 상태가 이상해서 멈칫하고 말았다.

        

       홍조가 떠오른 두 뺨. 새하얀 숨결이 흘러나올 만큼 뜨겁고 거친 호흡. 색정적인 미소.

        

       마치… 흥분한 듯한 모습.

        

       등줄기가 오싹해졌다. <메르헨의 마법 기사> 엑스트라 배드 엔딩 N.13 「새장」에서의 루체가 겹쳐 보였기에.

        

        

       [ 루체 엘타니아 ]

       

       Lv : 151

       종족 : 인간

       속성 : 물, 번개

       위험도 : ?

       심리 : [ 당신과쭉함께있고싶어합니다당신과쭉함께있고싶어합니다당신과쭉함께있고싶어합니다당신과쭉함께있고싶어합니다당신과쭉함께있고싶어합니다당신과쭉함께있고싶어합니다……………………

        

        

       소름이 돋아서 재빨리 루체의 상태창을 껐다.

        

        

       ‘뭐야? 뭐야…?’

        

        

       이 감정 급발진 뭐야?

        

       아카데미 선착장에서 봤을 때만 해도 평소의 루체랑 다를 게 없었는데…?

        

        

       “계속 찾아다녔어.”

        

        

       루체는 호흡을 가다듬으며 천천히 다가오기 시작했다.

        

        

       “누가 얼음 마법을 쓴 게 보일 때마다, 찾아가서 확인해 봤거든. 드디어 찾았네?”

        

        

       비로소 거리가 가까워졌을 때, 나는 루체의 머리 위로 아지랑이처럼 희미하게 흘러나오고 있는 진녹빛 가루를 확인할 수 있었다.

        

        

       ‘세상에….’

        

        

       저게 뭔지 어떻게 모를 수 있을까.

        

       ‘초로 버섯’ 포자에 당한 이에게서 흘러나오는 물질이었다.

        

       내 기억상, <메르헨의 마법 기사>에서 초로 버섯은 주로 고지대에 많이 서식해 있었다.

        

       초로 버섯은 근처에 생물체가 다가오면 포자를 뿌린다. 그것은 사람이 품고 있는 감정을 극대화해주는 작용을 한다.

        

       예를 들어, 누굴 미워하고 있던 상태면 충동을 못 이기고 그 사람을 해하려 들게 되고.

        

       누군가에게 조그마한 호감이라도 품고 있다면, 그 호감이 열렬한 사랑으로 뒤바뀌게 되는 것이다.

        

       커뮤니티에선 ‘초로인이 되었다’고 표현됐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일정 시간이 지나면 포자에 취한 당사자는 강제로 수면에 빠지게 되는데.

        

       온전히 해독되는 과정이라 죽은 듯이 자게 될 것이다. 그때는 깨울 수조차 없다. 완전 무방비 상태가 되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초로 버섯에 중독됐던 기억을 모두 잃게 된다.

        

       즉, 초로 버섯을 발견하면 최대한 빨리 도망쳐야 했다.

        

        

       ‘포자를 얼마나 퍼마신 거야?’

        

        

       루체는 필시 버섯 포자를 조오오올라 많이 들이마신 게 분명했다.

        

       참고로 저 연기는 신체가 초로 버섯 포자를 해독하는 과정에서 머리 땀샘으로 흘러나오는 것이고, 독성은 없다.

        

       아무튼.

        

       루체가 한 말을 곱씹어 보면, 그녀가 어쩌다 저 지경이 된 건지 유추해볼 수 있었다.

        

       아마도 그녀는 날 찾아내기 위해 고지대로 올라갔던 모양이었다. 그리고 절벽에서 그 좋은 시력으로 내 행방을 살폈던 것이다.

        

       숲이 나무로 가득하다 한들, 루체의 시력은 나뭇잎 틈새를 비집고 내 행방을 추적할 수 있는 괴물 수준이니까.

        

       그러는 동안 고지대에 군집해 있는 초로 버섯이 포자를 내뿜기 시작했을 테고.

        

       루체는 초로 버섯 포자를 실컷 들이마셔 버렸을 터.

        

       그렇게 감정이 점진적으로 부풀어 올라 초로인이 된 것이리라.

        

       루체는 내게 안길 기세로 다가오더니, 나를 쳐다보며 연인 같은 미소를 흘겼다.

        

        

       “보고 싶었어, 아이작.”

       “……!”

        

        

       달빛처럼 그윽한 목소리가 내 고막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끈적이는 숨결까지 더해지니, 내 이성을 마비시킬 기세로 울리는 매혹적인 음색으로 변화했다.

        

       폭력적인 수준의 미성.

        

       그 쾌감에 나는 얼음처럼 정지해 버렸다.

        

        

       “여긴 위험해…. 내가, 아이작이 다치지 않게 지켜 줄게. 쭉 내 곁에 있자, 아이작.”

        

        

       그 어떤 ASMR을 가져와도 루체의 목소리를 이기지 못할 것이다. 마치 옷이 전부 벗겨지고 온갖 깃털이 내 전신을 쓰다듬는 듯한 오싹한 황홀감이 느껴진다.

        

       안 된다. 정신 차려라.

        

       나는 가까스로 이성을 되찾고 사고하기 시작했다.

        

        

       ‘루체가 있다면 천군만마를 얻은 기분이긴 한데.’

        

        

       루체가 내 동료가 된다면 「4막 2장, 먹이사슬」 파트의 난이도는 급격히 하락할 테니, 나로선 더할 나위 없는 이득이었다.

        

       슬슬 나로선 힘이 부치는 놈들이 튀어나올 테니까. 애당초 이쯤에서 동료를 포섭할 계획이기도 했고.

        

       다만, 초로인 루체의 습성이 두려웠다.

        

       내가 고민하느라 아무런 대답도 안 한 탓인지, 루체의 표정이 점점 싸늘하게 굳어갔다.

        

        

       “혹시 싫어? 내 곁에 있는 게… 싫어?”

        

        

       루체는 오른손을 몰래 허리춤 뒤편으로 옮겨 갔다.

        

       뭘 꺼내려는 지는 몰라도, 강한 불안감이 방망이처럼 내 뒤통수를 거세게 후려갈겼다.

          

       황급히 속내에서 명배우 아이작을 불러왔다. 나는 수준급의 연기력으로 자연스러운 미소를 흘리며 루체를 안심시켜 주었다.

        

        

       “너무 좋아서 잠깐 벙쪘다. 네가 싫다니, 말이 되는 소리냐 그게?”

       “…….”

        

        

       루체는 의심을 못 거둔 듯 잠시 생기 없는 눈동자로 무감정하게 나를 쳐다보았으나.

        

        

       “와줘서 고마워, 루체. 넌 의지가 된다.”

        

        

       얼른 훈훈한 멘트를 덧붙여주니, 그제야 루체의 표정이 풀리기 시작했다.

        

        

       스으윽.

        

        

       소리를 최대한 죽인 듯하나, 가까이 있으니 또렷이 들렸다. 루체는 정체불명의 소지품을 다시 치마 허리춤에 집어넣은 듯했다.

        

       초로인 루체는 양날의 검이라는 느낌이 강해 보였다. 루체는 소중한 사람을 제 곁에 두고 지키려는 습성이 강하니까.

        

       천앙의 대마녀와 헨젤 오빠를 지켜내지 못한 회의감이 그녀를 짓누르며 그리 만든 것이다.

        

       하지만 양날의 검도 잘만 다룬다면 뭐든 베어낼 수 있을 무기나 다름없지.

        

        

       “아이작, 어디 가는 중이었어?”

       “중심부. 거기가 포인트 꿀이라니까 나도 한번 가 보려고. 뇌신조 태워줄 수 있냐?”

        

        

       루체는 웃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깜박하고 습관적으로 또다시 루체의 심리를 살폈다가, 소름이 돋아서 얼른 꺼버렸다.

        

        

       ‘뭐, 됐다.’

        

        

       배드 엔딩부터 막는 게 급선무니까.

        

       나는 억지로 미소를 흘리면서 양날의 초로인과 함께 발걸음을 옮기려 했다.

        

       그때였다.

        

        

       “……!”

       

       

       돌연 루체는 내 품에 안겨 들었다.

        

        

       ‘뭐야!’

        

        

       가슴팍에 물컹거리는 감촉과 체온이 느껴지고.

        

       루체에게서 흘러나오는 야릇한 체취와, 초로 버섯 해독 작용으로 흘러나오는 연기의 은은한 풀 냄새가 후각을 자극했다.

        

       나는 깜짝 놀라 루체를 내려다보았다.

        

        

       “하아, 하아….”

        

        

       내 옷깃을 붙잡고 힘겨워하는 루체. 심한 몸살감기를 앓고 있는 사람처럼 그녀는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초로 버섯 포자를 과하게 흡입한 부작용이 들이닥친 듯했다.

        

       처음 봤을 때 신음을 내뱉으면서 얼굴을 붉히고 있던 건, 몸 상태가 엉망이 된 까닭도 있었던 것이었다.

        

        

       “아이작…. 나 조금, 중심을 못 잡겠어…. 미안해. 갈리아 크기도, 못 키우겠어…. 못 태워줘서 미안….”

       “…뭘 자꾸 사과하고 있냐. 너 여기서 좀 쉬어야겠다.”

        

        

       지금 루체에겐 뇌신조의 크기를 키우는 마력 컨트롤은 무리인 듯 보였다. 저 뇌신조 몸에 나와 루체 둘 다 탑승할 순 없을 테고….

        

       어쨌건 이런 애한테 도움을 받으려 했다니. 죄책감이 들이닥친다.

        

       나는 루체의 어깨를 붙잡고 옆에 있는 나무에 기대 앉히려 했다. 어차피 레벨 100짜리로 작아진 뇌신조-갈리아가 루체를 지켜 줄 테니, 그녀를 두고 가도 걱정은 없을 것이었다.

        

       초로 버섯의 부작용도 잠 한 번 푹 자고 나면 사라져 있을 테고.

        

        

       턱.

        

        

       그러나 루체는 내 팔을 밀어내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같이 있자, 아이작…. 같이 있고 싶었어. 숨 조금만 고르면, 다시 괜찮아질 거야…. 정 안 괜찮으면, 갈리아 타고 다니면 되니까….”

        

        

       루체는 내 옷소매를 슬며시 쓰다듬었다. 아까 전, 로제의 마법에 맞닿아 검게 물들어 버린 부위였다.

        

        

       “내가, 아이작 지켜 줄게…. 그러니까, 평소에 나 좀 찾아줘. 이렇게 다치지 말고….”

        

        

       루체는 소매를 쓰다듬던 호리호리한 손으로 내 손목을 매만졌다.

        

        

       “너 다치면… 가슴이 너무 아프단 말이야….”

        

        

       자그마한 울먹임이 루체의 목소리에 담겨 있었다.

        

       초로 버섯의 효과는 중독된 사람이 품고 있는 감정을 극대화해주는 것.

        

       가감 없이 자기 속내를 표현하는 루체의 모습에, 나는 묵직한 쇠구슬로 심장이 짓눌리는 감각을 느끼며 그대로 정지해 버렸다.

        

        

       ‘이게 친구냐 연인이냐.’

        

        

       평소 루체의 국어책 말투나 식상한 멘트 속에는, 내 시간을 멈추게 하기 위해 느닷없이 기습해 오는 무언가가 있었다.

        

       나는 한숨을 내쉬고서 루체를 품에서 떨어뜨렸다. 당황하는 그녀.

        

       등을 돌리고 한쪽 무릎을 굽히고 앉았다. 그리고 양팔을 뒤로 뺐다.

        

        

       “업혀.”

        

        

       나는 고개를 뒤로 돌리고서 그리 말했다.

        

       멀뚱히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루체.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같이 간다며. 업어 줄게.”

       

       

       이토록 날 걱정해주는데 마음이 안 녹아내릴 수 있겠나.

       

       오히려 내 쪽에서 루체가 곁에 붙어 있어 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역시 싫어할 수가 없는 아이였다.

        

       게다가 이러면 뇌신조도 편하게 싸울 수도 있을 테고.

        

        

       “헤헤.”

        

        

       루체는 싱긋 웃으면서 망설임 없이 내 등에 달라붙듯 업혔다.

        

       내 어깨에 팔을 휘감는 루체. 나는 그녀의 다리를 붙잡고 몸을 일으켰다.

        

        

       “안 불편하지?”

       “으응, 괜찮아. 아이작, 안 힘들겠어?”

       “나 힘세니까 걱정 마.”

        

        

       루체는 피식 웃었다.

        

        

       “갈리아, 나 지름길로 갈 거니까 지원 부탁한다.”

       [맡겨라.]

       

       

       뇌신조-갈리아의 진중한 남성 목소리가 머릿속을 울렸다.

        

       그렇게 나는 루체를 업은 채 발을 옮겨 갔다. 내가 만들어 놓은 빙괴를 밟아가며 늪지대를 가로지를 셈이었다.

        

       뇌신조-갈리아가 있다면 안심하고 지나갈 수 있을 테니.

        

        

       “아이작.”

       “……!”

        

        

       귓가에 대고 루체의 목소리가 울리자마자 전신에 소름이 우수수 돋아났다. 전술 무기 수준의 달콤한 음색이었다.

        

        

       “왜?”

        

        

       나는 내색하지 않고 대답했다.

        

        

       “손, 야해.”

        

        

       루체는 은은한 미소를 흘리며 말했다. 그녀의 다리를 받치고 있는 내 양손을 말하는 듯했다.

        

       …생각해 보니 그랬다. 너무 오랜만에 사람 업어봐서 잘 몰랐다. 굳이 허벅지 잡을 필요 없었구나.

        

       왠지 감촉이 황홀하다 했네. 낯뜨거워진다.

        

       나는 그녀의 무릎 밑으로 좀 더 팔을 집어넣었다. 루체는 그 모습이 웃긴 지 실실 웃어댔다.

        

        

        

       루체와 뇌신조-갈리아가 합류한 덕분에 나는 손을 쓸 필요가 없게 됐다.

        

       그 어떤 마물 환상이나 적 사역마가 급습해 와도 얘네가 알아서 처리해주니까.

        

       

       ‘다행이지, 정말.’

       

       

       나 혼자였으면 언제 어떻게 탈락해도 이상하지 않을 구간이었으니.

        

        

       “킁킁. 근데, 오늘따라 아이작 냄새 안 나네…?”

       “냄새 제거제 써서 그래.”

       “아쉽다.”

       

       

       내 냄새를 맡고 덤벼오는 적들이 있을 테니.

       

       무인 상점에서 구매했던 냄새 제거제로 내 체취를 감춘 채였다.

       

       

       “근데 아이작, 나 궁금한 게 있는데….”

       “응.”

       “오늘도, 연애 조언…해 줄 수 있어?”

        

        

       슬슬 졸음이 몰려오는지 루체의 목소리가 점차 작아지기 시작했다.

        

       연애 조언. 이제껏 틀에 박힌 조언밖에 안 해줬지.

        

       처음 루체가 연애하는 법을 가르쳐 달라고 했을 땐 막막했지만, 이제는 별 게 아닌 것처럼 느껴진다. 역시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다.

        

        

       “뭔데? 말해 봐.”

        

        

       나는 별생각 없이 물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나를 업어 주고 있는 상황이라면…, 뭐라 해주면 좋아?”

        

        

       나는 발을 멈췄다. 저절로 멈춰졌다.

        

       머릿속이 복잡하게 돌아가기 시작한 까닭이었다.

        

       지금, 내가 좋다고 돌려서 고백한 건가? 그럴 리 없을 텐데?

        

        

       “너, 그릉 좋아하잖아?”

       “…….”

       “…아.”

        

        

       말실수했음을 깨달았다.

        

       단지 내가 업어 주고 있는 상황이라서 그런 질문이 떠오른 것일 수도 있으니까.

       

       굳이 여기서 ‘너, 그릉 좋아하잖아?’라고 묻는 건 ‘너 지금 나한테 돌려서 고백하는 거야?’라는 의미로 해석될 여지가 충분했다.

        

        

       “그런 얘긴 아니었는데….”

       “오해했다. 미안.”

       

       

       나는 다시 발을 옮겨갔다.

       

       

       “아이작이 사과할 게 뭐 있어…?”

        

        

       루체는 내 어깨에 얼굴을 파묻었다. 옷감을 뚫고 고열이 느껴졌다.

        

       아무리 초로 버섯의 부작용이 잠 좀 자면 낫는다고 해도, 당장에 루체 몸 상태가 안 좋으니 심히 걱정됐다.

        

       나는 루체 몸에 이상이 생기지 않는지 계속 주의를 기울였다.

        

        

       “그럼 아이작. 나, 부탁이 있는데…. 한 마디만 해주면 안 돼…?”

       “뭔데?”

        

        

       콰광!

        

        

       마물 환상이 튀어나오자 뇌신조-갈리아가 뇌격으로 해치우고.

        

       나는 그 길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루체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다가, 가까스로 진정하고 말을 이어갔다.

        

        

       “아이작이 그릉이라고…, 한 마디만 해 줘….”

        

        

       예상했다.

        

       미안하지만 그건 어렵겠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루체를 못 믿는다. 적어도 악신을 쓰러뜨리기 전까지는 최대한 확증을 얻지 못하게 할 셈이었다.

        

       들킨다면 그때부턴 고려해야 할 배드 엔딩 요소가 늘어날 테니까. 머리 아픈 상황은 최대한 피할 수록 좋았다. 안 그래도 마족 처리에 전념하면서 강해지는 일도 힘겨운 상황인데.

        

       그러니 악신을 쓰러뜨린 뒤, 더는 배드 엔딩을 막는 데 목멜 필요가 없게 됐을 때.

        

       그때 모든 걸 밝히리라, 나는 결심했었다.

       

       뭐, 설마 ‘네가 그릉이라고 말해’라고 하면서 고문하진 않겠지.

       

       …어? 아닌가?

        

        

       “끈질기다, 진짜. 당연히 아니잖아. 이 정도면 너 그냥 나 좋아하는 거 아니냐?”

        

        

       일부러 루체의 말문을 막히게 하려고 막말을 내던졌다.

        

       루체로선 내가 그릉이라는 확실한 증거를 찾지 못한다면 온전한 확신을 갖기 힘들 터였다.

        

       딱 이 정도 심리적 거리감이 적당했다.

        

       루체가 자기 마음을 마음껏 쏟아붓기 곤란한 지금의 상황이.

        

       그러나, 다음 루체의 대답은 너무도 뜻밖이어서.

        

       오히려 내 쪽이 말문이 막혀 버리고 말았다.

        

        

       “그럴지도 모르겠다….”

        

        

       희미한 미소를 흘리는 루체.

        

       그 나지막한 속삭임이 내 머릿속에서 메아리처럼 울려댔다.

       

        

       “루체…?”

       “…….”

        

        

       이후, 루체는 아무런 말도 내뱉지 않았다. 연이어 그녀의 이름을 불러 보았으나 마찬가지였다.

        

       루체의 몸이 축 늘어졌다. 잇달아 잔잔한 숨소리가 내 귓가에 스며들었다.

       

       

       “자냐?”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끝내 초로 버섯 포자의 해독 작용을 위해 루체의 신체가 강제로 수면 상태에 빠진 듯했다.

        

        

       삐이익.

        

        

       루체의 팔찌에서 탈락 신호가 울렸다.

        

       시험용 팔찌는 착용자의 몸 상태를 지속적으로 점검하고, 전투 불능 상태가 됐을 때 탈락 신호를 울린다. 루체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루체를 옆에 있는 나무에 기대 앉혔다. 지원사격하던 뇌신조-갈리아는 내 옆에 내려앉았다.

        

       곤히 잠들어 있는 루체. 그녀의 고개가 옆으로 기울자, 비단결 같은 로즈골드색 머리칼이 우수수 흘러내렸다.

       

       이제 루체는 정신을 차리면 기억을 잃은 상태가 돼 있으리라.

        

        

       “갈리아, 고생했어. 곧 있으면 시험 감독관 와서 얘 데려가 줄 거야. 너도 주인 따라 탈락이니까 알아서 따라가면 된다.”

       [넌 어쩔 셈이냐?]

       “가던 곳 가야지. 고마웠다.”

        

        

       나는 루체를 업고 다니느라 뻐근해진 어깨를 풀었다.

        

        

       “난 간다.”

       [아이야, 할 말이 있다만.]

        

        

       뇌신조는 전류가 흐르는 눈동자로 나를 쳐다보며 물었다.

        

        

       [언제쯤 이 아이에게, 네 비밀을 밝힐 셈이냐?]

        

        

       뇌신조는 루체를 딸아이 같은 심정으로 바라보고 있을 테니, 당연한 의문이었다.

        

        

       “…그러고 보니 비밀 지켜줘서 고맙다. 나중에 때 되면 밝힐 거야.”

       [부디 늦지 말아줬으면 좋겠구나. 이 아이는 너를, 많이 좋아하고 있으니.]

       “…….”

       [나도 어서 손자 구경을 하고 싶고….]

       “급하니까 간다. 다음에 보자.”

        

        

       뇌신조의 필터링 없는 말을 끊고 도망치듯 발걸음을 재촉했다.

        

       조심히 가라는 듯, 뇌신조는 날개 하나를 펼쳐 내게 흔들었다. 나도 팔을 흔들며 맞인사했다.

        

        

       ‘기합.’

        

        

       깊이 심호흡하며 정신을 가다듬었다. 이제부터 내게는 벅찬 구간이다. 중심부에 도달하기 위해 최대한 전투를 피해가야 한다.

        

       해보자. 여느 때처럼 배드 엔딩을 막기 위해.

       

       나는 중심부를 향해 풀숲을 헤치며 나아갔다.

        

        

        

        

       

       

       

       

       

       

       

        

        

        

       – [Behind Story – 수렵 평가 (2.5)] 끝.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본편이 아니어서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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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Academy’s Weakest Became A Demon-Limited Hunter

The Academy’s Weakest Became A Demon-Limited Hunter

AWBDLH, 아카데미 최약체는 마족 한정 먼치킨이 되었다
Score 8.8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2 Native Language: Korean
I possessed the weakest character in my favorite game’s Hell Mode. I want to survive, but the way the main character is being controlled is atrocious. It can’t be helped. I have to stop the bad ending mysel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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