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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74

    마을 북쪽의 언덕을 오르면, 그녀는 항상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벨! 빨리 와!”

     

    이름을 부르는 방식 하나만으로도 느껴지는 온기. 이 느낌만 평생 간직할 수 있다면, 그 어떤 어려움도 헤쳐나갈 수 있을것만 같았다.

     

     

    “…”

     

    어제도 분명 시엔을 봤을텐데 새삼 오랜만에 보는것처럼 느껴진다.

     

    나는 자연스레 그녀에게 다가가 두 팔을 벌렸다.

     

     

    그 몸짓에, 다가올걸 재촉하던 시엔도 밝은 미소를 지으며 달려온다.

     

    강하게 내 품속으로 들어오며 몸을 비빈다.

     

    이런 존재가 내 곁에 있음을 나는 또 감사하게 된다.

     

     

    아마 나는 나 자신보다 시엔을 더 사랑할 것이었다.

     

    그녀를 위해서라면 나는 모든걸 바칠 수 있었다. 목숨까지도.

     

    시엔이 품속에서 내게 물어왔다.

     

    “벨, 오늘은 다른 여자 안봤지?”

     

    그러면 나는 또 당연하게 답했다.

     

    “안봤어.”

     

     

    시엔은 그 대답에 귀엽게 웃었다.

     

    “나는 너 밖에 없으니까…다른 여자 보면 정말 안돼?”

     

    “걱정하지마.”

     

     

    내 등을 껴안고 있던 시엔의 손이 잠시 풀린다.

     

    미끄러지듯 올라오는 그 팔이 내 목에 감긴다.

     

    나를 가볍게 당겨 시엔이 이마를 맞댔다.

     

     

    아름다운 그녀의 검은 눈동자가 내 눈 앞에 다가온다.

     

    웃음기는 사라지고, 짙게 타오르는 감정이 피어오른다.

     

     

    우리는 그 누구도 먼저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한참을 그렇게 서로만 바라보고 있을 때, 시엔이 속삭이듯 물어온다.

     

     

     

    “…벨, 나 사랑해?”

     

    서로에게 사랑을 고백한 이후, 시엔은 매일 같이 그 사실을 확인했다.

     

    나에게는 이보다 쉬운 질문이 없었다.

     

     

    나는 입을 열었다.

     

    “……………”

     

     

    하지만 목구멍이 막힌 듯 말이 나오지 않는다.

     

    입을 벙긋거려보지만 소리는 내뱉어지지 않았다.

     

    “…벨?”

     

    시엔의 표정에 미약한 슬픔이 깃든다.

     

    사랑한다는 대답이 조금 늦어지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아파하는 그녀였다.

     

    그토록 여리고, 순수했던 그녀였다.

     

    그럴수록 나는 몸에 더 힘을 주었다.

     

    시엔의 저 표정을 보고 싶지 않았다.

     

    그녀가 아파하면 나까지도 아픈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나는 목에 더 힘을 주어봤지만, 가슴에 무언가 얹힌 듯 신음만이 흘러나온다.

     

    “……..아….”

     

    억지로 쥐어짠 소리는 그게 전부였다.

     

    그 짧은 말에 시엔이 말한다.

     

    “…벨. 나는 너 사랑해. 너 없으면 안돼. 너도 날 사랑한다고 해주면 안될까?”

     

    “………”

     

    “….벨… 안들려.”

     

    숨이 점차 막혀온다.

     

    오랜시간 말을 내뱉으려다보니, 숨을 들이쉬는걸 잊었다.

     

    그럼에도 나는 포기하지 않았다. 시엔의 웃는 표정이 보고 싶었다.

     

     

    “……….”

     

    “….벨…”

     

    “……..사…”

     

     

     

     

    “베르그!”

     

    한 목소리와 함께, 나의 눈이 번쩍 떠진다.

     

    참았던 숨이 자유롭게 풀어진다.

     

    나는 숨을 몰아쉬며 상체를 급히 일으켰다.

     

     

    “앗!”

     

    네르가 구르듯 내 허벅지에 쓰러진다.

     

    동시에 나는 목을 부여잡으며 호흡을 다잡았다.

     

    “하아…하아…”

     

     

    그리고 그 모든게 꿈이었다는 걸 깨달음과 동시에, 나는 얼굴을 부여잡았다.

     

    또, 시엔의 꿈을 꿔버렸다.

     

    눈 앞에 생생히 존재하던 그녀가 신기루처럼 흩어져 사라진다.

     

     

    “베르그, 괜찮아?”

     

    혼란스러운 감정들을 정리하던 중, 네르가 나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나의 허벅지를 베고 누워 걱정스러운 눈빛을 보내는 그녀를 보니…감정이 보다 빨리 진정되었다.

     

    “…괜찮아.”

     

    네르는 그 말에 눈을 깜빡이다 설명한다.

     

    “…숨을 잘 못쉬길래…”

     

    나는 목을 긁으며 변명을 내뱉었다.

     

    “…고된 훈련을 하는 꿈을 꿔서.”

     

    “…”

     

     

    네르는 나의 어색한 변명을 믿지 않는 눈치였지만, 더 이상 깊게 물어오지는 않았다.

     

    꿈에서 깨어날수록 왜 그런 꿈을 꾸게 되었는지 의아할 뿐이었다.

     

     

    아직도 시엔에게 미련이 남은걸까.

     

    결혼을 결심하며 그런 미련은 다 내려놓자고 다짐했는데 말이다.

     

    “…”

     

    꿈속에서 들려왔던 그녀의 목소리를 떠올린다.

     

    한때 정말로 나에게 해주었던 말이기도 했다.

     

     

    …‘너 없으면 안돼’ 라니. 떠나가 놓고.

     

     

    뭐가 됐든 나는 머리를 저어 생각을 털어냈다.

     

    시엔은 나를 향한 마음을 다 내려놓았을 거다.

     

    나를 떠나 다시는 돌아오지 않겠다고 말한 그녀였다.

     

     

    나만 바보처럼 7년간 같은 자리에서 머물 뿐이다.

     

     

    이제 네르, 그리고 아르윈과 함께 과거에서 벗어나야만 했다.

     

     

    두 귀를 쫑긋거리며 걱정스러워하는 네르가 눈에 담긴다.

     

    “…”

     

    한참동안 네르를 바라보다, 나는 작은 미소를 억지로 지었다.

     

    시엔을 더욱 빨리 지워버리고자 나는 눈 앞에 있는 네르에게 집중했다.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네르는 부끄러운 듯 이내 나의 손을 밀어냈다.

     

     

     

    이어서 나는 침대에서 천천히 벗어났다.

     

    꿈을 꾸었을 뿐임에도, 네르와 아르윈에게 미안했다.

     

     

    물이나 한잔 마시며 정신을 깨워야할 듯 했다.

     

    침대에 네르를 두고 나는 밖으로 향했다.

     

     

     

    “……..어디가?”

     

    순간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네르가 물어왔다.

     

    “…”

     

     

    그 짧은 물음에 나는 묘한 어색함을 느꼈다.

     

    나는 고개를 돌려 네르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노란 안광이 어둠속에서 깜빡거리고 있었다.

     

    “…뭐라고?”

     

    “….어디…가는..거야?”

     

     

    나는 뒤늦게 느꼈던 어색함이 무엇이었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언제나 어딜가더라도 위치를 알려주지 않아도 괜찮다고 한 그녀였다.

     

     

    네르도 내심 그게 마음에 걸리는지 똑바로 나를 바라보지 못했다.

     

    “…”

     

    갑작스러운 심경의 변화가 궁금했다.

     

    오늘 하루 종일 기약없이 나를 기다려서 그런걸까?

     

    혹은 악몽을 꾸던 내가 갑자기 침실을 벗어나니 그러는 걸까?

     

     

    어찌됐든 나는 이게 외려 자연스러운거라 생각했다.

     

    “너도 이 편이 편하지?”

     

    내가 물었다.

     

    “….어?”

     

    “…서로의 위치 쯤은 알아야지.”

     

    “….”

     

    네르는 잠시 침묵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응.”

     

    결국 문화를 섞으며, 더 편한 부분만 택하면 되는 우리다.

     

    이렇게 되면 나도 더 이상은 네르가 어디론가 향할 때 굳이 질문을 삼키지 않아도 될 듯 했다.

     

    자연스럽게 우리는 우리만의 방식대로 규칙을 만들어가고 있었다.

     

     

    “물 마시러 가려고.”

     

    이어서 나는 네르의 질문에 답해주었다.

     

     

    잠시 눈을 깜빡이던 네르가 말한다.

     

    “…나도 갈래.”

     

    나는 미소를 지었다.

     

    “그러던지.”

     

     

    ****

     

     

    네르는 아침이 되어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간밤에 자신이 얼마나 부끄러운 짓을 했는지 알게 된다.

     

     

    “일어났어?”

     

    베르그가 말하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밤새 그와 물을 마시러가면서도 생각하긴 했었지만…자신이 너무 과하게 행동했다.

     

     

    베르그의 몸에서 풀풀 풍겨나오는 자신의 페로몬 냄새가 얼마나 짙은지 새삼 깨달았다.

     

    “…………..”

     

    네르는 그 향이 풍겨올때마다 얼굴이 붉어져갔다.

     

    베르그의 몸에서는 온통 제 향기가 났다.

     

    처음이라 그런지 선을 어디쯤에서 그어야하는지 알지 못했다.

     

     

    깊이 사랑을 나누는 늑인족 부부조차 이런 향이 나지 않는다.

     

    카일라에게 너무 화가 났기에, 너무 과하게 행동했다.

     

    베르그가 악몽에 신음하지 않았으면 이보다 더 심했을지도 모른다.

     

     

    자신이 저지른 걸 맨정신으로 보게 되니 부끄러울 수 밖에 없다.

     

    “……..”

     

     

    또 동시에, 형용할 수 없는….어떠한 감정도 느껴진다.

     

    온통 제 냄새가 나는 베르그를 보니 심장이 자꾸 두근댄다.

     

    그에게 자신의 흔적을 깊이 남겨놓았다는게, 그녀도 존재하는지 몰랐던 자신의 어두운 욕망을 긁어주고 있었다.

     

    누구가를 소유해본적이 없어서 그럴까.

     

    자신의 것이 된 듯한 베르그에게서 눈을 떼어낼수가 없다.

     

     

    “…왜 그렇게 바라보고만 있어.”

     

    그 향을 맡지 못할 베르그는 의아하게 그녀를 바라보았다.

     

     

    ‘나의 향을 너에게 묻혀놔서 그렇다’ 라는 말 따위는 당연히 할 수가 없었다.

     

    네르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아니야.”

     

    “밥이나 먹으러 가자.”

     

    베르그가 제안한다.

     

     

    네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끼이익…

     

     

    침실 문이 열리고, 네르의 심장이 가라앉는다.

     

    자신이 저지른 부끄러운 무언가를 모두에게 보이는 순간이었다.

     

    베르그는 알지 못할 읍습한 짓을 말이다.

     

     

    그녀는 고개를 숙이며 밖으로 향했다.

     

    베르그가 뒤따라 나온다.

     

     

    이장 녹스가 그들의 모습에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간밤에 잘 주무셨는지…..”

     

     

    하지만 말을 하던 녹스는 킁킁대다 입을 다물었다.

     

    그의 표정이 어색하게 굳는다.

     

    “…하하…”

     

     

    네르는 얼굴에 열이 확 올랐다.

     

    그가 무엇에 저리 반응하는지는 자명했다.

     

     

    “…왜 그러시죠?”

     

    아무것도 모를 베르그가 묻는다.

     

     

    녹스는 손사래를 치며 둘러댔다.

     

    “아, 아닙니다. 식사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오늘도 여관에서 드시려나요, 아니면 이곳에서…?”

     

    “여관 가서 먹겠습니다.”

     

    “그러시죠.”

     

    “아르윈은 어디있죠?”

     

    베르그가 묻는다.

     

     

    “밖에 앉아계실겁니다.”

     

    녹스가 답했다.

     

     

    그렇게 베르그가 밖으로 발걸음을 옮기던 순간, 네르가 기다리던 상대가 앞에 나타났다.

     

    “아빠, 베르그님 일어나신….”

     

     

    윗층에서 내려오던 카일라가 녹스처럼 입을 다문다.

     

     

    네르는 이번에는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부끄러워도 맞선다.

     

    카일라를 지긋이 바라보며 그녀의 반응을 관찰했다.

     

    과하긴 했다지만…블랙우드를 얕본 그녀를 위한 경고였다.

     

     

    블랙우드가 피워내는 특유의 향기에는 어떠한 위압감이 자리한다고 네르는 전해들었다.

     

    그녀는 카일라의 반응으로 그게 진실이었음을 깨닫는다.

     

     

    카일라는 전에 없을만큼 고분고분하게 눈을 피했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긴 귀가 머리 뒤로 축 처진다.

     

     

    “…식사하러 가시나요?”

     

    베르그가 안부를 묻듯, 가볍게 카일라에게 묻는다.

     

    고민하던 카일라는 네르를 바라본다.

     

    네르는 날카로운 눈으로 카일라를 응시했다.

     

     

    “…아, 아니요. 저는…먹었어요.”

     

    카일라가 말한다.

     

     

    네르는 속으로 미소를 지었다.

     

    베르그도 그럼 됐다는 듯, 걸음을 옮긴다.

     

    문을 열고 나가는 베르그를 보며 네르는 작은 승리감을 맛봤다.

     

     

    애초에 이게 당연한 것이었지만 말이다.

     

    누가 감히 블랙우드의 짝에게 다가올 생각을 한단 말인가.

     

     

     

    “…드디어 끝났네.”

     

    베르그가 중얼거렸다.

     

    카일라를 두고 하는 말인 듯 했다.

     

    네르는 귀찮은 상대를 떨어트렸다는 한숨을 내쉬는 베르그를 보며 더한 만족감을 느꼈다.

     

     

    아내는 이미 두 명 가진 그였지만, 베르그도 정말 늑인족과 비슷하게 제 상대만을 바라보는 것 같다.

     

    자신과 아르윈을 제외한 그 누구에게도 시선을 주지 않는다.

     

    그게 못내 기쁘게만 느껴지는 네르였다.

     

    그 정도면 사실 괜찮았다.

     

    두 명만 바라보는 거라면 견딜 수 있다.

     

     

    “…?”

     

    네르는 순간 자신이 무슨 생각을 한건지 의아해졌다.

     

    견디기는 무엇을 견딘다는 말이었을까.

     

     

    뭐가 됐든, 네르는 베르그의 곁에 붙는다.

     

    복잡한 생각은 잠시 미뤄둔다.

     

     

    그리고는 몰래 베르그의 체취를 맡았다.

     

    자신이 묻혀놓은 향과 더불어, 그의 향기가 섞인다.

     

    새로운 향기에 네르는 취해갔다.

     

     

    어젯밤 과하게 향을 묻혀놓았지만…어쩌면 그리 나쁘지만은 않았을지도 모른다고 그녀는 생각해버렸다.

     

     

    그녀의 입가에 자연스러운 미소가 걸렸다.

     

    그 미소를 지으며, 베르그에게서 눈을 떼어낼수가 없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Jotaro님! 1코인 후원 감사합니다!

    고스턴님! 30코인 후원 감사합니다!
    ㅋㅋㅋ 감사합니다. 다음편을 기다려주시는것 같아 저도 기쁘네요.

    너클볼러님! 100코인 후원 감사합니다!
    ㅎㅎㅎ이전작품도 다 봐주셨다니 감사해요. 첫 후원도 저라니…더 열심히 하겠습니다. 항상 응원해주실 수 있도록 저도 스토리를 잘 이끌어보겠습니다!

    좌커님! 1000코인 후원 감사합니다!
    헉…엄청 큰 후원을 보내주셨네요. 이렇게 큰 후원은 매번 깜짝깜짝 놀라더라고요. 감사합니다…ㅋㅋㅋ 아직 회차가 많이 쌓이질 않았죠? 노력은 하는데 빨리 쌓이지는 않네요. 그래도 늘어지지 않도록 매일 한 회차 올리는걸 목표로 할게요. 재밌게 봐주시는 것 같아 기쁩니다. 감사합니다. 힘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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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compatible Interspecies Wives

Incompatible Interspecies Wives

IIW 섞일 수 없는 이종족 아내들
Score 4.3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Polygamy is abolished.

We don’t have to force ourselves to live together any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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