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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74

       리지와의 만남, 세라핀과의 대화, 그리고 몬스터 웨이브까지.

         

        하룻밤 사이 정말 여러 사건이 있었던 황궁 가면무도회로부터 약 한나절의 시간이 흘렀다.

         

        일단 황궁은 그날 몬스터 웨이브 사태가 끝나자마자 자체적인 조사를 시작했다.

         

        이번에 베르단 호수에서 발생한 몬스터 웨이브 사건은 여러모로 그 정황이 수상하기 그지없었으니까.

         

         

        원래대로라면 황도에서 몬스터 웨이브가 발생한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는 이야기였다.

         

        애초에 몬스터가 발생하는 환경 자체가 발생하지 않게 하려고 제국 수도 경비대 같은 게 있는 거기도 하고.

         

        게다가 겨우 호수 하나에서 그렇게 많은 몬스터들이 기어 나온다는 것 자체가 누군가가 의도하고 몬스터 웨이브를 일으켰다는 의미였으니.

         

        아마 황궁 또한 며칠 내로 그게 마족의 소행이었다는 것까지 결론을 내리게 될 터였다.

         

         

        ‘어디까지나 원작의 스토리대로 흘러갈 때의 이야기겠지만.’

         

         

        어딘가에서 틀어지기 시작한 이야기가 느닷없이 다른 방향으로 흘러갈 가능성도 아예 없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이번 몬스터 웨이브에 마족이 개입했다는 걸 알아내는 것 정도는 충분히 가능할 터였다.

         

        그렇게 몬스터 웨이브 건을 조사하느라 지금은 황궁도 나름대로 바쁠 테고, 이번 몬스터 웨이브에서 활약한 인물들에 대한 포상은 조금 후에 이루어지겠지.

         

         

        ‘원래 스토리에서는 아그네스에게 가장 큰 포상이 돌아가고, 그다음이 오리온이었나.’

         

         

        굳이 활약도를 따지자면 세라핀과 아그네스가 비슷한 수준이었겠지만, 황족인 세라핀에게는 금전적인 게 아닌 다소 형식적인 보상만 내려졌었으니까.

         

        그다음으로는 오리온이 위기 상황에서 아그네스라는 인재를 뽑아 방어에 힘을 썼다는 점에서 아그네스 다음으로 높은 평가를 받았을 테고.

         

        그리고 남문 근처의 마차 주차장을 지켜냈던 카라함 또한 포상이 내려질 예정이었으나, 아마 원작 스토리에서는 제 누이인 리지 문제로 인해 불참했을 가능성이 컸다.

         

        원작 스토리에서의 카라함은 제 누나인 리지를 마지막까지 그리워한 캐릭터였으니까.

         

         

        ‘그래도 정확히는 모르지. 내가 작품 캐릭터 하나하나의 일거수일투족을 전부 알 수는 없는 거고.’

         

         

        솔직히 말하면 포상의 내용도 잘 모른다. 대충 현금이나 희귀한 소재 같은 거로 받지 않았을까 싶은데.

         

        아무튼, 나와 에단이 개입함으로써 황궁 수비 건에서도 여러모로 포지션 변화가 일어났으니, 보상 절차에서도 여러 가지가 뒤바뀌어 버렸을 테고.

         

        이번 몬스터 웨이브에서 크게 활약은 한 사람은 크게 여섯 명이었으니, 아마 포상 행사에서도 이 여섯 사람이 불릴 가능성이 컸다.

         

         

        달그림자 황녀 세라핀.

         

        신록의 현자 오리온.

         

        불지옥 아그네스.

         

        눈치 없는 카라함.

         

        돼지 공자 에단.

         

        그리고 나, 용감한 전속 메이드 릴리스.

         

         

        …새삼 이렇게 나열하고 보니 카라함과 에단의 칭호가 참 가차 없기는 하네.

         

        물론 두 사람은 원래 스토리에서 악역이었으니 어쩔 수 없겠지만, 막상 이렇게 정리할 기회가 되니 안쓰럽게 느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뭐, 카라함이야 저번에 마주한 모습을 보면 눈치 없는 모습 자체는 그대로인 것 같았으니 적어도 지금의 그에게는 그 칭호가 딱히 어색하지는 않겠지.

         

         

        그러나 지금의 에단에게 ‘돼지 공자’라는 칭호는 아무리 생각해도 전혀 어울리지 않는 느낌이었다.

         

        지금의 에단은 ‘돼지’도 아니고, 딱히 악역이 될 낌새 같은 모습도 보이지 않고 있었으니까.

         

        만약 게임 속에서 에단에게 이 정도의 극적인 스토리 변화가 일어났다면, 틀림없이 그를 향한 칭호 또한 다른 무언가로 바뀌었을 텐데 말이지.

         

        그리고 다른 사람은 잘 모르겠지만, 일단 내 칭호부터가 확실하게 바뀌기도 했고.

         

         

        3년 전. 처음으로 정보창을 확인해보았을 때 떠 있던 내 칭호는 ‘하급 메이드’.

         

        그러나 지금 내 정보창에 떠 있는 칭호는 ‘용감한 전속 메이드’였으니.

         

        이제 와서 에단에게 돼지 공자가 아닌 다른 칭호를 붙인다고 해도 그리 이상하지는 않겠지.

         

        물론 실제로 칭호가 바뀌었다고 해도 내 관점에서 그걸 확인할 방법은 전혀 없었지만.

         

        애초에 칭호라는 건 어디까지나 플레이어의 관점에서 캐릭터의 구분을 편하게 하려고 만들어진 시스템일 뿐.

         

        일단 이 세계에서는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칭호를 확인한 사례부터가 없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돼지 공자는 절대 아닌데.’

         

         

        돼지 공자가 아닌 지금의 에단에게는 무슨 칭호가 어울리려나.

         

        블랙우드 귀공자 에단? 루미노르 아카데미에 귀족이 한두 명도 아니고, 귀공자라는 칭호는 너무 흔하지.

         

        소드 마스터 아들 에단? 이쪽은 사실상 에단이 아니라 해럴드의 칭호나 마찬가지고.

         

        살 빠진 에단, 검은 머리 에단, 검술사 에단, 황궁 서문 수호자 에단, 나 에단 아니다….

         

         

        …새삼 생각해 보니 에단에게는 뭔가 입에 착 감기는 특징 같은 게 하나도 없었다.

         

        더욱이 그에게 붙일 만한 칭호는 이미 다른 캐릭터들도 하나둘씩 가진 요소들뿐이고.

         

        돌이켜보니 정말 과거 게임 속 혐단은 ‘돼지’랑 ‘혐성’ 말고는 캐릭터성이라고 할 만한 요소가 없는 캐릭터였네.

         

        실제로 지금 에단도 그 두 요소가 빠지니까 뭔가 미묘해졌잖아.

         

        다른 캐릭터에게는 없으면서 에단만의 특별한 무언가가…. 음….

         

         

        “…아니, 이걸 내가 대체 왜 고민하는 건데.”

         

         

        생각해 보니까 에단의 칭호 같은 걸 고민하고 있을 이유가 전혀 없었잖아?

         

        애초에 내가 짓는다고 해서 이 세계에 그 칭호가 반영되거나 하는 것도 아니고.

         

        괜히 전생에서 코어 게이머였던 버릇이 또 튀어 나와버렸다. 한창 재밌게 했을 때는 새로운 캐릭터가 튀어나올 때마다 ‘쟤는 칭호가 뭘까’ 같은 생각을 하면서 플레이했던 버릇이 그만.

         

         

        …사실 지금 중요한 건 에단의 바뀐 칭호 따위가 아니었다.

         

        내가 걱정해야 할 건 걔한테 무슨 칭호를 붙이느냐가 아니라 내 일신상의 안위지.

         

        그도 그럴 것이, 나는 이번 몬스터 웨이브에서 그만 거나하게 사고를 치고 말았으니까.

         

        에단의 눈앞에서 마나 블래스트라는 대형 마법으로 킹 서펜트를 처치한다는 정신 나간 짓을.

         

         

        ‘그때 당시 기준으로는 어쩔 수 없긴 했는데….’

         

         

        만약 내가 거기서 마법 쓰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다고 망설였다면, 나는 물론이고 에단도 세라핀도 전부 목숨이 위험해졌을 터였다.

         

        그러다가 뒤늦게 킹 서펜트를 제압할 수 있는 인원이 모였을 때는 아마 원작에서보다 더 큰 희생이 일어났겠지.

         

        만약 정말로 세라핀과 릴리스가 그 사건에서 죽어버리기라도 하면 그때는 그냥 이 세계 자체에 미래가 없어질 테지.

         

        물론 장기적으로 보아 세계의 미래를 구했다고 해서 내가 마법을 사용했던 것을 없었던 일로 하고 넘길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

         

        에단이 이 건에 대해 아무런 의문도 가지지 않고 넘어가 주기를 바라는 건 사실상 불가능할 터였다.

         

         

        ‘이걸 어떻게 변명해야 하냐….’

         

         

        그렇게, 나는 에단의 아침 기상 시간에 맞춰 조금 불안한 마음을 품고 그의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내가 준비한 사죄 방법이 어떻게든 잘 통하기를 마음속으로 간절히 바라면서.

         

         

         

       ⁎ ⁎ ⁎

         

         

         

        일반적으로 평민이 귀족에게 죄를 저질렀을 때 사죄하는 방법에는 과연 무엇이 있을까.

         

        일단 내 처지에서 금전적인 방식의 회유는 불가능했다. 빚 메이드인 내 신분으로 아무리 많은 돈을 모아 봤자 블랙우드 귀공자의 입을 막을 수는 없을 테니.

         

        게다가 이번에는 억지로 말로 속여 넘기는 것도 불가능했다. 그렇게나 대놓고 눈앞에서 마법을 사용하는 걸 보였는데, 속여넘길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는 게 만무하지.

         

        돈으로도 안 되고, 그렇다고 말로 속이는 것도 안 되고.

         

        그 밖에 신분이나 제약 때문에 다른 방법들도 사용할 수 없는 지금의 내가 에단을 상대로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은 기껏해야 한 가지뿐이었다.

         

         

        …어떻게든, 몸으로 때우는 수밖에.

         

         

        -쿵!

         

        “이번 일은, 정말 무어라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에단 도련님!”

         

        “메, 메이드?!”

         

        “일개 평민인 제가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것으로도 모자라, 그 사실을 지금까지 밝히지 않고 감추었던 것에 진심으로 사죄드립니다, 도련님!”

         

        -쿵! 쿵!

         

        “자, 잠깐, 메이드! 알았으니까 멈춰! 자꾸 바닥에 이마 내려치지 말고!”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는 옛 격언은 알고 있는가?

         

        이건 어디까지나 내 개인적인 의견이기는 하지만, 그 격언은 여러모로 잘못된 격언이다.

         

        대한민국 군대만 들어가도 생긋생긋 웃는 얼굴에 가래침을 토하는 새끼가 한둘이 아니란 걸 알 수 있거든.

         

        오히려 잘못한 새끼가 뭘 쪼개냐면서 더 처맞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그렇다면 반대로 생각해서, 잘못하고 그나마 덜 처맞는 방법에는 뭐가 있을까.

         

        당연히 그건 처맞기 전에 바닥에 엎드려서 빌어대는 것뿐이었다.

         

        마음 약한 선임들은 일단 먼저 엎드려 비는 순간 더 갈굴 생각도 못 하고, 성격 더러운 새끼들도 일단 복종하는 태도를 보이면 지랄하는 빈도가 확 줄어들거든.

         

        딱히 사는 세계가 바뀐다고 해서 보편적인 인간의 반응이 바뀌지는 않을 거라는 계산과 함께, 나는 최대한 반성하는 태도를 보이며 바닥으로 바짝 엎드렸고.

         

        다섯 번 정도 바닥에 이마를 박으며 사죄를 내뱉으니 도리어 에단 쪽에서 내 행동을 말리기 시작했다.

         

         

        “저를 신뢰하시고 계신 도련님에게 이런 중요한 사실을 숨기고 있었으니, 이 목숨을 다해 죄를 고백해도 모자랄….”

         

        “아, 알았으니까 이제 그만해! 딱히 메이드에게 이번 일로 화나거나 하지도 않았으니까!”

         

        “…그렇습니까?”

         

        “이. 일단은 차분하게 앉아서 이야기하자. 응? 부탁할게.”

         

         

        역시 대화에서 우위를 가져오는 가장 좋은 방법은 상대방을 미안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미안함이라는 감정을 품은 상태로는 아무래도 제대로 대화의 우위를 가져오기 힘들 테니까.

         

        …사실 지금 에단이 나한테 잘못하거나 한 점은 딱히 없지만 말이지.

         

        말대로 바닥에 머리 박기를 그만둔 나는 에단의 말대로 테이블로 자리를 옮겨 대화를 시작했고.

         

        에단은 나와 눈을 마주치며 어젯밤 황궁에서 있었던 일을 상기하는 것으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어제 있었던 일은, 조금 놀라기는 했어.”

         

        “…그렇습니까.”

         

        “설마 메이드가 그런 마법을 쓸 수 있으리라고는 상상하지도 못했으니까. 그것도 그렇게나 큰 규모의 마법을.”

         

        “…지금까지 숨기고 있었던 것에 대해서는, 다시 한번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괜찮아. 아까도 말했지만, 딱히 그걸로 화나지는 않았으니까. 오히려 고맙기만 할 뿐이지.”

         

        “…….”

         

        “원래대로라면 메이드도 계속 숨길 생각이었지? 하지만 그때는 메이드가 아니었더라면 더 큰 희생으로 이어졌을 거야. 나도 메이드랑 세라핀 황녀님 덕분에 목숨을 구하기도 했고.”

         

        “제 마법이 도련님에게 도움이 되었다니 다행이군요.”

         

        “응. 고마워, 메이드. 원래대로라면 숨기고 싶었을 텐데, 큰 결심을 해줘서.”

         

         

        이거, 왠지 낯간지러운데.

         

        어쨌든, 에단의 이 반응을 보면 정말로 내가 마법을 사용할 수 있다는 걸 숨긴 것에 대해서는 딱히 아무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게다가 내가 마법을 사용해서 킹 서펜트를 처치한 것에 대해서도 정말로 고마움을 느끼고 있는 것 같기도 했고.

         

        일단 내가 걱정했던 몇 가지 최악의 사태가 벌어지는 것보다는 훨씬 나은 상황이었다.

         

        …처음에 대가리를 괜히 박은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지만.

         

         

        “그래서, 메이드.”

         

        “…네, 도련님.”

         

        “혹시 이런 걸 물으면 메이드가 싫어할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이 질문만큼은 꼭 하고 넘어가야 할 것 같아서.”

         

        “…무엇인가요, 도련님?”

         

        “메이드는, 혹시 어딘가에서 귀족 혈통을 타고 난 아가씨인 거야?”

         

        “…….”

         

         

        결국, 이 질문이 들어오긴 하는구나.

         

        조심스레 물어오는 에단의 질문 앞에서 나는 다시금 내적 갈등에 휩싸였다.

         

        그냥 고개를 저으며 지금까지처럼 조용히 사실을 묻어두는 방향을 선택해야 할지.

         

        …혹은, 에단이 비밀을 지켜주리라 믿고 릴리스가 가진 이 핵폭탄급 비밀을 밝혀야 할지.

         

         

        일생일대 선택의 갈림길에 마주하게 되었다는 걸 확신하게 된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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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Became the Maid of the Lout Prince

I Became the Maid of the Lout Prince

망나니 공자의 메이드가 되었다
Score 7.6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3 Native Language: Korean
I transmigrated into a character from my favorite game in my previous life. Moreover, as the character I despise second most in the game. (Not a wasteman) The cover was designed by Deep Dark Wolf, and the typography was done by 유일유화 (Yu Ilyuhw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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