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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74

     

    1황자 권터가 지내는 일성궁.

    권터의 성격을 반영이라도 한 듯, 황궁이라는 생각이 안 들 정도로 수수한 건물이다.

     

    ―흐아아아악!!

     

    요즘 저녁만 되면 울려 퍼지는 비명 때문에 일성궁은 유령이 나온다는 오명을 쓰고 있었다.

     

    “오늘도 무사히 악마 토벌을 끝냈습니다. 여신님의 축복이 함께했군요.”

     

    성서를 덮으며 성호를 긋는 사이먼에게 침대에 엎드려있던 권터가 격하게 반항했다.

     

    “축복은 무슨 축복이야! 어깨고 허리고 안 아픈 곳이 없다고!”

     

    “건강에는 대가가 따르는 법입니다. 보십시오, 오늘도 부정한 기운을 이만큼이나 빼내지 않았습니까.”

     

    사이먼이 자신만만하게 권터에게 시커먼 덩어리를 자랑했다.

     

    모두 권터의 몸에서 뽑혀 나온 것들이었다.

     

    실제로 그의 퇴마 마사지를 받고 어느 정도 몸이 가벼워진 건 사실이었기에 권터는 불만을 표할 수가 없었다.

     

    그의 퇴마술은 악마 토벌용 주문이기에 받는 동안 죽을 만큼 아픈 게 문제였다.

     

    물론 주치의야 주군의 명령에 복종하지만 소심한 권터는 항상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곤 했다.

     

    “이제 좀 덜 해도 되지 않아? 너무 자주 받는 것 같은데….”

     

    “무슨 말씀이십니까. 폐하께서 정하신 일자가 코앞입니다. 전하께서 3황녀보다 위대함을 표하기 위해서라도 퇴마 치유를 계속해야 합니다.”

     

    사이먼이 역설하니 권터는 입을 다물었다.

    그가 일어나며 비서장에게 물었다.

     

    “월광궁은 어떻대? 이길 수 있겠어?”

     

    “그게….”

     

    월광궁의 움직임을 관찰해온 비서장이 권터에게 상황을 설명했다.

    사이먼이 그 내용에 의구심을 가졌다.

     

    “겨우 음식으로 마력회로를 정돈한다? 그게 무슨 듣도 보도 못한 방식인가.”

     

    “상당한 효과를 보고 있다고 합니다.”

     

    “효과를 봐봤자 얼마나….”

     

    ―쿠구구궁!!

     

    그때 굉음이 사이먼의 귓가를 덮쳤다.

     

    깜짝 놀라 창을 열어보니 마법 연무장 쪽에서 거대한 얼음의 산이 솟아오르고 있었다.

     

    “저, 저것이 대체.”

     

    “아셀라의 마법이잖아! 전보다 훨씬 강해졌어. 사이먼, 저런 걸 어떻게 이겨!”

     

    권터가 발을 동동 굴렀다.

    마법의 상승을 보면 아셀라의 마력회로가 전보다 훨씬 정돈되었음은 확실했다.

     

    사이먼이 이를 뿌득 갈고는 즉시 걸음을 옮겼다.

     

    “사이먼, 어디 가?”

     

    사이먼은 그 길로 내의원으로 돌아가 고트베르크와 월광궁에 대한 정보를 수집했다.

     

    ‘이대로는 승산이 없다.’

     

    사이먼이 초조함에 손톱을 물어뜯었다.

     

    ‘2황자파를 굴복시키기도 실패했다. 팔켄하인은 내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아.’

     

    이게 다 권터가 나약한 탓이다.

     

    권터는 황태자임에도 황실의 정치에 무지하고 세력도 약하다.

     

    그러다 보니 내의원에서 사이먼의 입지도 자연히 낮아졌다. 사이먼은 팔켄하인을 고트베르크에게 뺏긴 것도 권터의 영향이 있다고 여겼다.

     

    심지어 신체까지 허약한 권터는 자신의 퇴마술을 얼마 버티지도 못하고 계집처럼 비명을 질러댄다.

     

    자신이 게오르크나 헤이케의 주치의였다면 훨씬 좋은 결과를 냈을 것이다.

     

    ‘고트베르크, 악마 같은 놈.’

     

    사이먼은 여태 권터에게서 뽑아낸 검은 병마가 담긴 병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갑자기 좋은 생각이 난 듯, 그가 병을 집어 들고 주문을 시전했다.

     

    쉐도우워크. 암행이다. 이교도를 추적하는 데 썼던 기술이다.

     

    그림자에 숨어든 사이먼이 조용히 발걸음을 옮겼다.

    그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은 채 황실 주방에 잠입한다.

     

    불이 꺼진 주방의 희미한 기름 냄새가 콧가를 간질인다.

     

    사이먼은 재료 창고로 들어가 금방 목표를 찾아내고는 후드를 벗었다.

     

    ‘월광궁 전용. 이거로군.’

     

    상자를 여니 질 좋은 고기부터 온갖 채소 등 내일 쓰일 식재료들이 한가득 들어있다.

     

    사이먼은 가져온 병의 뚜껑을 열었다.

     

    ‘권터 전하가 품고 있던 음의 기운이다. 이게 들어간 음식을 먹으면 3황녀도 용태가 나빠지겠지.’

     

    고트베르크의 방식이 실패하면 자연히 승리를 거머쥘 수 있다.

     

    사이먼이 병을 기울여 식재료를 향해 검고 걸쭉한 내용물을 흘려보내려는 순간이었다.

     

    ―탁!

     

    “으음?!”

     

    사이먼은 자신의 손목을 낚아채는 감각에 움직임을 멈추었다.

     

    고개를 돌리니 자신을 향해 능글거리는 얼굴이 있었다.

     

    “형씨, 아무리 마음이 급해도 이러면 쓰나. 이거 황족 암살죄야?”

     

    라스 고트베르크가 품에서 막대사탕을 꺼내 입에 빼물며 씨익 웃었다.

     

    “고트베르크, 어떻게!”

     

    사이먼의 암행은 대륙 최고라고 해도 무방할 수준이었다.

     

    그 누구에게도 들킬 이유는 없었을 터.

    단독 행동이니 정보가 새어나갈 틈새도 없었다.

     

    “어떻게 알았냐고? 기업비밀이야.”

     

    라스가 상태창을 슥 밀며 대답했다. 물론 사이먼에게는 그 손짓이 무슨 의미인지 알 길이 없었다.

     

    라스는 밀어낸 상태창에 적혀있던 숫자들을 보고 생각했다.

     

    ‘확률이 이렇게 변동해서야 사이먼이 무슨 짓을 저지를 건 확실했지.’

     

     

    ―――――――――――

     

    No. 012 : 제국의 멸망   24% → 36%

    No. 062 : 흑사병          23% → 62%

    No. 101 : 마력폭주       7% → 34%

     

    ―――――――――――

     

     

    ‘흑사병 엔딩은 아셀라가 대륙에 역병을 풀어서 발생하는 거니까. 병마를 음식에 주입한다는 발상에 도달하면 생겨나겠지.’

     

    배드엔딩 내용으로 사이먼의 행동을 유추해서 식당까지 도달한 라스였다.

     

    “고트베르크… 이 악마놈!!”

     

    사이먼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퇴마 주문을 시전했다.

     

    ‘이놈만 쓰러트리면 무마할 수 있다!’

     

    사이먼의 왼손에 흉악한 발톱이 생겨난다.

    라스의 얼굴을 향해 주문을 직접 처박으려 휘두른다.

     

    ―퍼억!!

     

    둔탁한 타격음과 함께 우당탕 나가떨어진다.

     

    사이먼이 식재료 상자에 머리부터 처박히며 나뒹굴었다.

     

    “이단심문관들은 원래 이렇게 과격합니까?”

     

    가볍게 휘두른 검을 앞으로 내밀며 타냐가 라스에게 질문했다.

     

    “그런 편이야.”

     

    “흠. 앞으로는 주의해야겠군요.”

     

    타냐가 엎어진 사이먼을 툭툭 쳐 기절한 걸 확인했다.

     

     

     

    ***

     

     

     

    “사이먼 심판관은 경질, 그간의 공을 참작해 사형까지는 안 가더라도 무기징역이오. 그리하여 승부는 자연히 고트베르크 군의 승리로 끝났소만.”

     

    황제가 지정한 한 달째, 앰브로시아가 나에게 전했다.

     

    “권터 전하와 아셀라 전하의 마력회로 측정이 끝났소. 설령 사이먼이 그런 짓을 안 했더라도 이 승부는 압도적으로 월광궁의 승리요.”

     

    “감사합니다, 자매님.”

     

    “앞으로도 내의원을 잘 부탁드리겠소.”

     

    앰브로시아에게 인사하고 내의원으로 돌아간다.

     

    정문으로 들어서서 우측으로 꺾으면 바로 명패가 보인다.

     

    [고트베르크]

     

    아, 이거지.

     

    “어서 오시오, 고트베르크 선생!”

     

    사무실 앞에서 팔켄하인이 버선발로 나를 맞아주었다.

     

    “역시 선생이오. 사이먼 그 또라이가 제풀에 지쳐 자멸하게 만드시다니! 황녀님의 용태도 무사하셔서 다행이외다.”

     

    “팔켄하인 경도 그간 고생하셨습니다.”

     

    2황자파의 자재는 사이먼뿐만 아니라 내의원 모든 파벌이 노리고 있었을 터다.

     

    온전히 내 파벌로 가져올 수 있었던 건 그가 손써준 덕이었다.

     

    “이, 이사도 마쳐놨어요.”

     

    클로에와 휴고가 보고했다. 사무실이 1층이 되어서 못마땅한 사람은 타냐뿐이었다.

     

    “다들 수고했어. 그럼 새로운 기분으로 업무 들어가자고.”

     

    “선생님, 그 전에 이쪽도 업무지시가 필요하겠습니다.”

     

    휴고의 보고와 함께 사무실 안으로 들어서니 재밌는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대기실에 십수 명의 치유사들이 자리에 앉아있다가 나를 보고는 벌떡 일어나서 인사해왔다.

     

    “고트베르크 선생님, 안녕하십니까!”

    “자기소개를 올리고 싶습니다만!”

     

    아는 얼굴들도 꽤 있었다.

    고개를 돌리니 휴고가 설명해줬다.

     

    “저희 파벌에 지원한 치유사들입니다. 함께 자원봉사에 나가던 1황녀파 소속도 있고, 기존 2황자파 치유사들, 그 외 의학에 관심을 보인 이들입니다.”

     

    “흠.”

     

    나는 손가락을 튕겼다.

     

    “팔켄하인 경, 교육은 맡겨도 되겠지요.”

     

    “물론이오.”

     

    교통정리를 금방 끝낸 후 안쪽 방에 들어선다.

     

    나는 널찍한 의자에 앉아 편한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

     

     

     

    “폐하, 의사 고트베르크가 진상한 약선음식입니다.”

     

    앰브로시아가 황제의 식탁에 다양한 요리 그릇을 가리키며 설명을 이어갔다.

     

    황제는 그것들을 하나하나 찬찬히 살펴보며 향을 맡고는 입꼬리를 올렸다.

     

    “아셀라가 이 음식을 그렇게 좋아한다지.”

     

    “그렇사옵니다. 식단을 바꾸신 한 달 사이에 마나 흐름이 2할 이상 원활해졌습니다.”

     

    “재미있군.”

     

    “폐하를 위해 새로이 조제된 약제도 함께 올라왔습니다만, 어찌하시겠습니까?”

     

    황제가 턱을 쓰다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전부 써보겠다.”

     

     

     

    ***

     

     

     

    내의원에서 내 파벌이 자리 잡아 무럭무럭 성장한 지도 10개월이 지났다.

     

    사이먼과의 승부를 계기로 황제가 의학을 받아들이기 시작한 게 컸다.

     

    나라의 머리가 움직이면 필연적으로 흐름이 따라온다.

     

    덕분에 내의원의 3황녀파는 소속 치유사가 서른 명까지 늘어났고 업무 범위도 지속적으로 확대대고 있었다.

     

    그만큼 내가 해야 할 일도 많아졌고, 슬슬 나는 한 가지 아셀라에게 요청하고 싶은 것이 생겼다.

     

    “장기 휴가 신청입니다.”

     

    내가 내민 서류를 보고 아셀라가 뚱한 표정을 지었다.

     

    “장기라니, 얼마나?”

     

    “한 달 정도요?”

     

    “너무 길어. 안 돼.”

     

    역시 단칼에 거절하시네.

     

    나이도 한 살 더 드셔서 그런지 표독스러움이 더해지신 황녀님이다.

     

    나야 철저한 을이기에 예의 바르게 고개를 숙였다.

     

    “황녀님, 제가 내의원에 온 지 벌써 1년이 넘었습니다. 이 정도는 충분히 요청 가능한 범주라고 생각합니다만.”

     

    “안 되는 건 안 돼.”

     

    “분명 처음에 말씀드렸지요. 저는 가문도 돌볼 의무가 있어요. 그때 알았다고 말씀하신 건 황녀님이시잖습니까.”

     

    “…그래도 안 돼.”

     

    “아니, 이유도 없이 계속 안 된다고 하시면 그게 뭐예요.”

     

    “난 그래도 돼. 황녀잖아.”

     

    “와 나 진짜.”

     

    “진짜 뭐. 계속 말해봐.”

     

    “아니에요.”

     

    더 말싸움 해봤자 감옥에 갇히는 건 나다.

    타협점을 찾아 제시해야 하는 것도 나고.

     

    휴가를 내려는 건 다른 이유는 아니다.

     

    본가에서 아버지와 네리아에게 연락이 왔다. 제약 공장의 기반이 슬슬 형태가 잡혀간다는 내용이었다.

     

    사업 초기니 직접 확인할 필요가 있다.

     

    “어딜 갈 생각인데 그래?”

     

    “고트베르크 후작가요.”

     

    “흐응.”

     

    아셀라는 잠깐 생각에 빠지더니 기묘한 질문을 해왔다.

     

    “노란 장미 피어 있니?”

     

    “계절이 계절이니 지금은 전혀 없겠지요. 다만 황금 장미는 계절 상관없이 기르고 있습니다. 그건 왜요?”

     

    “음….”

     

    아셀라는 공부하던 마법서의 페이지를 만지작거리더니 이내 탁, 책을 덮었다.

     

    “나도 같이 가는 거라면 허락할게.”

     

    그건 제가 싫은데요.

     

    아셀라가 따라오면 그게 업무지 휴가야?

     

    주말에 부장님과 등산 가는 말단 사원이 이런 기분이구나.

     

    “루시, 준비해줘.”

     

    “네, 황녀님.”

     

    이미 내 의지와 상관없이 가기로 결정하셨다.

     

    정말이지 황실 주치의는 극한 직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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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Doctor Cured The Villainess And Ran Away

The Doctor Cured The Villainess And Ran Away

주치의는 악녀를 고치고 도망쳤다
Score 3.6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Becoming the physician of the villainess who brought about the world’s destruction, I tried to escape to survive, but the reactions were stran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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