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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74

       지금 상황은 베르그송 자작의 저택에서 겪었던 것과 비슷했다.

       다른 사람의 병을 치료해주고 그 대가로 무언가를 얻어내는 것이었다.

       

       엘라는 그가 무엇을 요구할지 대충 짐작이 갔다.

       

       아마 부전승을 노리는 것일 테지.

       

       상세한 규칙들에는 기권에 관한 규정 역시 있었다.

       규정상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

       

       그녀가 상정했던 최악의 상황보다는 훨씬 나았다.

       누군가 죽거나 다치는 일은 없었으니까.

       

       오히려 잘 된 편이다.

       루엘로가 가진 병은 치료될 테고, 자신들은 손쉽게 첫 번째 별을 손에 넣을 수 있을 테니까.

       양쪽에게 좋은 거래였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이 허전해지는 것을 왜일까.

       

       엘라는 원더스타인이 그녀에게 처음 대본을 보여줬던 날이 떠올랐다.

       인간의 마음도 제대로 모르는 악마 따위가 제대로 된 대본을 짤 수 있겠냐고 무시했던 그녀.

       그가 내민 대본을 읽은 순간 그런 마음은 눈 녹듯이 사라졌다.

       

       그가 쓴 대본은 거장들의 작품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었다.

       아니, 대사나 장면 처리에 있어서 파격성은 세대를 몇 단계나 뛰어넘은 것처럼 훌륭했다.

       대본의 마지막 장을 덮는 순간, 그녀는 자신이 그의 작품에 매료되었다는 것을 부정하기 힘들었다.

       그와 함께라면 서커스 그랑프리 본선을 충분히 노려볼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 마음을 쉽사리 인정할 수 없었다.

       그는 그녀의 이웃과 친구들을 살해한 원수였다.

       그와 함께하고 싶어 하는 자신을 용서할 수 없었다.

       그 때문에 며칠을 끙끙 앓으며 혼자 마음을 삭였다.

       

       그런데 지금은 그런 고민을 했던 자신이 바보 같아 보였다.

       그는 서커스에 대해 악마적인 재능이 있을지는 몰라도, 애정은 없었다.

       그에겐 서커스 역시 목적을 달성하는 수단에 지나지 않았다.

       

       그들이 한 달 동안 힘겹게 연습해온 성과를 시험해볼 생각조차 그에겐 없었다.

       아니, 애초에 한 달 만에 성과를 물어왔을 때부터 그의 속내를 알아차렸어야 했다.

       

       -엘라 양을 믿고 있어서요.

       

       개소리.

       그는 애초에 우리가 얼마나 열심히 하든, 성과를 얼마나 내든 상관이 없었던 거다.

       그는 자신의 힘만으로 충분히 대회를 풀어나갈 수 있었다.

       그녀를 비롯한 단원들은 그저 악마가 세상을 기만하기 위한 허수아비에 불과했다.

       평범하고 착한 청년을 연기하는 것처럼.

       

       지난 한 달간 어떻게든 결과를 내보겠다고 아득바득 밤을 새워가며 노력했던 자신을 보며 그는 속으로 비웃었을까?

       훨씬 간단한 방법이 있는데 하며?

       

       “뭐든지 하겠다고요? 후후, 좋습니다.”

       

       원더스타인은 미노바의 제의를 받아들였다.

       

       엘라는 속으로 이를 악물었다.

       그러나 눈에 눈물이 핑 도는 걸 참기는 힘들었다.

       

       그는 구석 침대에서 웅크리고 자는 병아리 잠옷의 소녀에게 다가갔다.

       

       그의 손이 그녀의 목가에 닿았다.

       그녀의 목 근육이 경련을 일으켰다.

       그녀의 안색이 퍼렇게 질렸다가 신음 비슷한 것과 함께 검게 물들었다.

       

       그렇게 몇 초 정도 흘렀을까.

       원더스타인이 그녀의 목에서 손을 뗐다.

       

       “됐습니다.”

       “아, 안 되는 건가?”

       

       절망적으로 변하는 미노바의 표정.

       설마 그 짧은 시간에 병이 나았을 거라고는 생각 못 한 듯했다.

       원더스타인은 그의 얼굴을 보며 피식 미소를 짓더니 고개를 저었다.

       

       “치료가 완료되었다는 겁니다.”

       “치료……되었다고……?”

       “직접 와서 보시죠.”

       

       미노바는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딸 앞에 다가갔다.

       

       딸은 몸 안에 자리 잡은 종양의 고통 때문에 잘 때도 항상 미간을 찌푸리며 식은땀을 흘리며 거친 숨을 내뱉었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볼 때마다 그의 가슴이 얼마나 썩어들어갔던가.

       

       그런데 그랬던 그녀가 지금은 너무나 평온한 안색으로 옅은 숨을 내쉬고 있었다.

       

       “정말, 정말……치료된 건가?”

       “네.”

       

       미노바는 울음이 나오는 것을 간신히 삼키며 말을 이었다.

       

       “저, 정말인가? 이렇게 순식간에……. 호, 혹시 어떤 부작용이 있는 건 아닌가?”

       “후후, 수틀리면 욕을 내뱉고 죽이겠다고 덤비는 사람을 어떻게 속이겠습니까?”

       

       그의 농담에 미노바는 조금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그, 그건……크흠, 그, 그렇지……. 어, 어쨌든 고맙네……. 저, 정말 고마워.”

       

       그는 그렇게 말하곤 멍하니 딸의 모습을 다시 바라봤다.

       아직도 믿기지 않았다.

       평온히 잠든 딸의 모습이.

       그 지독한 약으로도 생명을 겨우 연장하는 게 한계라고 했는데.

       

       미노바는 침을 꿀꺽 삼키고는 입을 뗐다.

       

       “야, 약속대로 나는 뭐든지 할 각오가 되어있네.”

       “그렇습니까?”

       

       원더스타인은 미소를 지으며 가만히 그를 바라보다가 말했다.

       

       “3주 뒤에 있을 대결은 우리가 이길 겁니다.”

       “그, 그렇겠지…….”

       

       미노바는 역시나 하는 생각에 한숨을 내쉬었다.

       

       “우, 우리가 기권하지…….”

       

       그보고 모질다고 할 수는 없었다.

       사실 그가 구해준 딸의 목숨을 생각하면 그렇게 대단한 대가를 치르는 것도 아니었다.

       

       탈락한다면 줄의 맨 뒤로 가서 다음 차례를 기다리면 됐다.

       2주 차나 4주 차에 탈락한 팀이나 다른 도시에서 시험을 치르고 온 팀이 다음 대결 상대일 것이다.

       3달 정도 더 시간을 허비할 뿐이었다. 감수할 만했다.

       

       원더스타인은 그의 선언에 만족한 듯 미소를 지었다.

       

       “어라, 기권이요? 포기하는 겁니까?”

       

       그는 전혀 상황을 이해 못 하겠다는 듯 뻔뻔하게 되물었다.

       

       ‘그래. 이건 뒷거래나 협박이 아니라는 걸 확실히 하자는 거군.’

         

       미노바는 굴욕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렇다네…….”

       “그 이유는 뭐라고 발표하실 생각입니까?”

       “건강이 안 좋아서…….”

       

       미노바가 궁색한 변명을 늘어놓자 원더스타인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이걸로 하죠. 우리 부단장이 훨씬 귀여우니까요.”

       

       그의 입에서 나온 엉뚱한 말에 미노바는 입을 떡 벌렸다.

       

       “뭐……라고?”

       

       놀란 건 엘라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찍순이가 깜짝 놀랄 정도로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이 인간이 미쳤나!

       갑자기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미노바도 그가 갑자기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자, 자네 부단장이 더 귀엽다고?”

       

       그의 말에 원더스타인은 싱긋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이잖아요? 솔직히 저런 꼬맹이보다 우리 엘라 양이 천 배 만 배 귀엽습니다.”

       

       미노바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다른 건 참아도 감히 딸을 건드리는 건 못 참겠다.

         

       “이 새끼가! 웃기지 마라! 우리 루엘로가 더 귀엽거든!”

       “그래봤자 어깨에 가만히 앉아 있는 것밖에 더합니까? 우리 부단장은 유능하거든요. 맡은 일도 다 척척해 냅니다.”

       “우리 루엘로도 그 정도는 해!”

       “엘라 양은 심지어 노래도 잘 부르지요.”

       “우리 딸도 노래 잘 불러! 루엘로! 일어나! 어서 저번에 연습한 노래를…….”

       

       그의 성난 고함에 루엘로가 눈을 비비며 잠에서 깼다.

       

       “우웅, 아빠 갑자기 뭐야……. 나……피곤한데…….”

       “지금은 무리 안 하는 게 좋을 겁니다. 치료한 지 얼마 안 되어서 체력이 많이 소모됐을 거든요.”

       

       그의 말에 미노바가 헉 하고 눈을 크게 떴다.

       

       “진작 말해야지, 이 바보야! 루엘로! 노래는 부르지 마라! 어서 다시 자라!”

       “아빠, 시끄러워…….”

       

       루엘로가 칭얼거리는 소리를 내더니 다시 잠들었다.

       원더스타인은 그녀를 보며 혀를 쯧쯧 찼다.

       

       “우리 엘라 양은 체력도 좋은데…….”

       “이익! 자꾸 내 성질 건드릴래?”

       “하하, 기권하시겠다면서 도통 승패를 받아들이지 않으시니까 그렇죠. 그럼 우리 내기할까요? 만약 3주 뒤의 시합에서 당신이 이긴다면 제 발언을 철회하지요.”

       “그으으윽! 좋다! 키르쿠스에 맹세코 전심전력으로 너희랑 싸워주지.”

       “좋습니다.”

       

       그렇게 두 단장의 대화는 종료되었다.

       

       

       ***

       

       

       샛별 서커스단이 머무르는 호텔에서 나왔다.

       미노바가 내 엉덩이를 걷어차려는 것을 다른 단원들이 간신히 말린 덕에 잘 피해서 나올 수 있었다.

       

       

       *서브 퀘스트-장미 풍차 카바레의 시험

       : 시험을 통과해서 별을 손에 넣으십시오.

       

       달성조건

       : 첫 번째 시도에서 루즈의 예선전을 통과할 것.

         

       성공 시 보상

       : 서커스단원 전원에게 [마성의 BGM] 특성 부여. 위력은 공연 동안 얻은 명성에 비례합니다.

       

       실패 시 페널티

       : 없음.

       

       

       이 퀘스트는 악스빌에서 달성했던 ‘첫 번째 공연’ 퀘스트와 내용이 유사했다.

       공연 동안 얻은 명성에 비례한 보상을 준다는 점에서 말이다.

       

       공연의 본질을 생각하면 당연하다면 당연하다고 할 수 있는 조건이었다.

       

       그래서 미노바가 기권을 입에 담았을 때는 가슴이 철렁했다.

       그딴 식으로 이기면 퀘스트는 클리어해도 보상은 형편없을 게 뻔했다.

       상대와 엎치락뒤치락 경쟁이 붙고, 화젯거리도 나와야 관심이 집중되고 명성을 올리기 쉬웠다.

       

       무엇보다 단원들에게 있어서 이건 매우 귀중한 경험이었다.

       이제 막 게임을 처음 시작한 초짜가 첫 보스전을 얍삽이로 넘어가봤자 뭐가 남겠는가.

         

       그래서 그를 도발해서 의욕을 끌어냈다.

       덕분에 별 무리 없이 대결은 성사되었다.

       

       키르쿠스에 맹세까지 한 건 예상 밖이었다.

       그냥 적당히 어울리다 부채의식을 느끼고 져주는 거면 됐는데.

       

       고작 딸이 덜 귀엽다고 말한 정도로 흥분해서 덤비다니.

       그의 팔불출 성향은 예상을 넘어섰다.

       

       그렇게 1분 정도 걸었을까.

       저 멀리 호텔 입구에서 커다란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이, 원더스타인 단장!”

       

       고개를 돌아보니 미노바가 숨을 씩씩거리며 달려 나와 있었다.

       

       뭐야, 계속 덤빌 셈인가.

       

       그러나 이어지는 그의 행동에 나는 조금 놀랐다.

       그라는 인물에게서 전혀 기대할 수 없는 행동을 그가 했기 때문이다.

       

       “고맙소!”

       

       그는 그렇게 말하고는 땅에 머리를 찧고 절을 했다.

       그의 뒤로 단원들이 놀란 표정을 짓고 있는 게 보였다.

       나도 지을 수만 있다면 비슷한 표정을 지었을 것이다.

       

       나는 그를 향해 고개를 끄덕여 주고는 돌아서서 호텔을 향해 걸었다.

       

       루엘로를 치료해주겠다고 약속한 것은 퀘스트가 뜨기 전의 일이었다.

       그때는 아직 시험의 내용도 대결 상대도 몰랐었다.

       

       나선 이유는 별거 없었다.

       그냥 작은 선물을 주고 싶었을 뿐이다.

       

       -자식을 위해 뭐든지 할 수 있습니다! 제발! 제 자식의 몸을 고쳐주십시오!

       

       내가 5살 때였나, 6살 때였나.

       하필이면 루엘로와 비슷한 나이였었군.

       

       맞붙어야 하는 상대에게 마음의 빚을 남기기 싫은 심정은 나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좀 나서고 말았다.

       

       아까 마차에 내린 지점에 다 와 가는데 저 멀리 익숙한 형체가 보였다.

       

       “엘라 양이 어째서 여기에?”

       

       나의 질문에 그녀는 얼굴을 조금 붉히며 내 시선을 피했다.

       

       “그냥. 당신이 또 무슨 이상한 짓이라도 할까 봐……. 샛별 서커스단에는 왜 갔는데?”

       “별거 없었습니다. 그냥 선전포고 좀 하고 왔죠.”

       “……그, 그래?”

       

       그녀가 왠지 말을 버벅거렸다.

       

       원더스타인이 무슨 이상한 말이라도 했는지 걱정되는 것일까.

       나는 걱정하지 말라는 의미에서 가볍게 둘러댔다.

       

       “그냥……우리가 가진 게 너희들이 가진 것보다 더 좋다고 했죠.”

       “……그, 그랬구나.”

       

       엘라는 내 시선을 휙 피하더니 앞으로 나서서 걸었다.

       나는 조용히 미소를 짓고는 그녀의 뒤를 따랐다.

       

       그렇게 몇 분을 걸었을까.

       그녀가 말을 걸어왔다.

       

       “이번 시험 말인데 무슨 좋은 수라도 있어?”

       “글쎄요? 제가 늘 쓰던 필승의 비법이 있죠.”

       “뭔데?”

       “부단장에게 믿고 맡긴다.”

       “……미친.”

       

       그녀의 얼굴이 새빨갛게 변하며 앞으로 빠르게 걸었다.

       그리곤 한동안 말이 없었다.

         

       난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던진 말이었지만, 그녀가 듣기에 화가 날만 했다.

       힘든 일 다 맡겨놓고 믿음 운운하면 나라도 열 받을 것이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이 서커스단에서 그녀만 한 사람이 없는데.

       

       그렇게 우리는 걸어서 호텔에 도착했다.

       마야가 그리던 간판이 다 완성되었는지 입구에 걸려있었다.

       그것을 본 우리는 할 말을 잃었다.

       

       <원더스타인의 괴물서커스>

       

       괜찮은 제목이다.

       타이포그래피도 훌륭했다.

       그림 역시 흠잡을 데 없었다.

       

       조금 거슬리는 게 있다면, 간판을 그린 화가의 사심이 지나치게 반영되었다는 것일까?

       

       “마야, 이 계집애가……!”

       

       엘라가 이를 갈았다.

       

       전면에는 내가 지팡이를 휘두르고 있는 모습이 가장 크게 그려져 있었다.

       그 옆에 두 번째로 큰 크기인 마야가 한 손엔 팔레트를 들고, 다른 한 손에는 붓을 들고 휘두르며 허공에 색을 칠하고 있었다.

       

       문제는 단원들이었다.

       분명 괴물서커스인데 단원들은 면적의 반의반도 차지하지 않고 구석에 몰려 서 있었다.

       

       “난 아예 그리지도 않았네!”

       

       엘라가 분한 듯 소리쳤다.

       

       “저기 있는데요.”

       “엥? 어디?”

       

       나는 소리죽여 웃으며 간판 구석을 가리켰다.

       난쟁이 요벨보다 더 작은 모습의 찐빵 같은 얼굴의 SD 캐릭터가 주머니에 쥐를 넣고 어깨에 비둘기를 얹고 팔짱을 낀 채 서 있었다.

       

       영락없는 엘라를 표현한 캐릭터였다.

       언뜻 보면 있는지도 모를 정도로 작았다.

       

       “하하하, 똑같은데요!”

       “저게 어디가? 야! 마야! 어서 나오지 못해!”

       

       씩씩대며 앞서가는 엘라를 따라 나는 호텔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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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Became the Leader of the Monster Circus Troupe

I Became the Leader of the Monster Circus Troupe

괴물서커스단의 단장이 되었다
Score 4.4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The protagonist, a famous YouTuber known for playing the game trilogy “Tril Trilo Trilogy,” finds himself possessing the final boss of the game world. Before the release of the new instalment in the series, he receives an offer from the game’s developer to play a prequel, “Part 0,” which explores events that occurred before the first instalment. Since he is a fan of “Tril Trilo Trilogy,” he eagerly accepts the offer. However, through some twist of fate, he wake ups in the world of “Tril Trilo” in the dreadful body of the final boss of the trilogy, a character named Frank Wonderste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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