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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743

       [ 거 어디를 그리 바삐 가는지 원 잠시 말을 좀 하압세. ]

         

       [ 거 아가리에 이상한 오리 부리 같은 것을 툭 끼우고 있으니 말을 못하는거이 아닌고 거 물고기가 혀를 베어먹기라도 하였는감 얼굴색이 시퍼런거이 거 물귀신 낯짝같이 생겨먹었으니 어이쿠야 내 손모가지도 푸르딩딩한거이 우리 둘 다 똑같은 퍼런놈들이로다. ]

         

       물귀신의 입에서 나오는 도무지 알 수 없는 말들.

       지리멸렬하기 짝이 없는 그 단어의 조합은 은근히 상황과 맞아떨어지는 듯하면서도 무언가 어긋난 듯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살아생전의 사념의 지배를 받기에, 그리고 그것은 계속 풍화되어가기에 불완전할 수밖에 없는 것. 닳고 닳은 자리에 다른 것을 끼우고, 또 닳아 없어지면 다른 것을 끼우고. 그렇게 얼기설기 기워진 것이 바로 지금 귀신의 입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렇기에 그것은 의미 없는 단어의 나열이나, 학습을 잘못한 AI가 지껄이는 웅얼거림이나 다를 바가 없다.

       언어를 내뱉는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생전의 것에서 기반이 된 것이 아니라, 생전에 보고 들었던 모든 것에서 비롯된 것이니까. 예를 들자면 다른 지방의 사람들이나 TV, 드라마에서 보고 들었던 모든 것들 말이다.

         

       하지만 그러한 웅얼거림조차도 같은 처지의 존재들에게는 통하기 마련이다.

         

       사람에게는 그저 기괴함에 공포만을 불러오는 저 말의 진의를 꿰뚫어 보았으니 말이다.

         

       조롱.

       얼음덩어리를 타고 온 물귀신들은 명백히 벨라돈나의 뿌리에 자리를 잡고 있던 물귀신들을 조롱하고 있었다. 그것도 그들 특유의 사악하기 짝이 없는 감정을 한껏 담아서 말이다.

         

       그것은 아무것도 모르고 물 안에 발을 디뎠다가 붙잡혀서 익사 당하는 사람을 보고 낄낄대는 것과 다르지 않았고, 어린아이가 벌레를 잔인하고 끔찍하게 죽이면서 노는 천진난만함과도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는 것이었다.

         

       [ ———-!!! ]

         

       [ —끼야아아아아악! ]

         

       조롱이 나온다는 것은 전세가 명명백백하게 기울어졌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 증거로 지금 벨라돈나의 뿌리에 살고 있던 물귀신들은 사정없이 물어뜯기고 있었다.

         

       얼음덩어리를 타고 귀신들의 나라라고 불러도 무방한 곳에서 건너온 물귀신들은 하나하나가 일반적인 물귀신들에 비해 매우 강력했으며, 그 숫자마저도 기존의 물귀신들을 압도하는 수준이었다.

       하나에 두셋이 달라붙어서 물어뜯고 토막 내고 찍어누르고 갈기갈기 찢어서 제 몸에 흡수하니, 도저히 그들이 감당할 수가 없는 수준이었다.

         

       심지어 같은 귀신을 잡아먹거나 찢어서 제 몸에 흡수시키는 행동은 너무나 자연스럽게 이어지기까지 했다.

       북한 지역에서 지금까지 다른 귀신들에게 흡수당하지 않은 이유가 있다는 듯, 아직 더 나아갈 곳이 한참 남기는 하였으되 악독함과 상가함을 졸이고 졸이며 시간의 흐름에 따른 풍화를 이겨내며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고 외치기라도 하는 듯 그들의 행동은 하나하나가 치명적이었다.

         

       그렇게 벨라돈나의 뿌리에 있는 물귀신들은 순식간에 전멸당했다.

       사념과 영체를 찢어서 제 몸에 접붙이기한 물귀신들, 같은 물귀신이라도 어쨌든 찢고 부수면서 만족을 하였다는 듯 환히 웃고 있는 물귀신들만을 남긴 채 말이다.

         

       [ 히히히히히. ]

         

       [ 으히히히히히히! ]

         

       그것은 박진성에게는 기쁜 오산이기도 한 것이었다.

         

       본래 박진성은 전투의 양상이 비등할 것으로 예상하였는데, 실상은 압도적으로 전멸을 시켜버린 것이 아닌가.

       나중에 벨라돈나의 뿌리에 방문할 때 남은 토착 물귀신들을 토벌하거나 제압할 계획까지 생각했던 것 치고는 허무하리만치 쉽게 끝난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뭐 좋으면 좋았지 나쁘지 않은 일이었다.

       사람이 보이자마자 다짜고짜 달려들어서 제 놈들이랑 똑같은 처지로 만들려 아등바등할 물귀신들보다야, 얼음덩어리와 에너지라는 먹음직스러운 미끼를 사용해 사냥개처럼 사용했던- 그래서 그들을 제압하거나 다룰 때 사용할 최소한의 인과가 충족된 물귀신들이 더 나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으니까.

         

       말하자면 호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 벨라돈나의 뿌리 어디에 뭐가 있을지, 그리고 시설이 있다면 그 시설의 안에 무엇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다짜고짜 들어가는 것은 멍청한 일이나 다름이 없었으니.

         

       [ 바다에서 주운 것으로 몸통을 만들고 해초로 팔과 다리를 엮는다. 그 위에 물컹한 머리를 옮기니 영락없는 사람의 형상인지라 바다에서 나고 자라난 신령한 존재이니 너희 바다에 속한 것들은 마땅히 명을 따라서 나를 가마 태우고 움직이도록 할지어다. ]

         

       그가 해야 할 것은 정찰.

       인형과 시야를 공유한 뒤 물귀신들을 호위 병력으로 사용하는 ‘안전한’ 정찰이었다.

         

         

        * * *

         

         

         

       신앙이라는 것은 공포와 경외 속에서 탄생하는 것이다.

       하지만 재미있게도, 꼭 공포심과 경외심이라는 사람에게 무력감을 안겨주는 것만이 신앙을 탄생시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그 공포심과 경외심을 극복하고자 하는 인간의 본능과 이성이 탄생시키는 경우도 많았다.

       공포는 극복하고, 미지는 정복하여 지식으로 삼고, 경외는 그 자리에서 끌어내려 자신과 같은 곳으로 떨어뜨리고자 하는 그러한 의지. 그리고 그러한 반복된 시도 끝에 추상적이었던 것은 구체적으로 변화해가며, 문화와의 결합을 통해 하나의 이야기가 된다.

         

       사람은 이야기하는 동물.

       그렇기에 그들은 자연스럽게 신앙에 이름을 붙이고, 서사를 붙이고, 그들을 노래한다.

       그들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신앙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하지만 그러한 ‘이야기’ 중에서 후대로 이어지는 것은 드물다.

       전쟁이나 재난 같은 것으로 소실되거나, 이야기를 아는 이들이 전멸하는 등의 사고로 인해 사라지는 경우도 많다. 하지만 재미있게도 그러한 경우뿐만이 아니라, 너무나 자연스럽게 소멸해버리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바로 기록의 부재로 인해서 말이다.

         

       기록되지 않은 것은 사라진다.

       기억하는 이들이 까먹고, 기억하는 이들이 죽고, 기억하는 이들이 외면하고.

       그렇게 세월의 흐름에 따라 그 이야기는 문화의 일부, 풍습의 일부, 혹은 그 흔적만을 남긴 채 그대로 사라져버리는 것이다. 경외와 공포 속에서 탄생한 것과는 다른 너무나도 초라한 최후가 아닐 수가 없다.

         

       그렇다면 그 기록되지 않은 이유란 무엇인가?

         

       문자가 없어서?

         

       그럴 수 있다.

         

       문자를 제대로 사용할 수 있는 이들이 없어서?

         

       그것 역시도 일리가 있다.

       과거에는 문맹이 매우 흔했으며, 글을 아는 것 자체가 권력이기도 했으니까.

       그렇기에 과거의 권력자들은 자신들만이 문자를 활용하며 권력을 유지하기를 바랐고, 의도적으로 일반 백성들이 문자를 익히지 못하게 방해하기도 했다.

       문자를 ‘신성한 것’으로 말하면서 신관이나 고귀한 핏줄을 가진 존재만이 제대로 사용할 수 있는 것이라 말하기도 하였고, 문자에 마법적인 힘이 담겨있다며 함부로 다루면 안 된다는 공포심을 불러일으켜서 글을 익히는 것을 멀리하게 만들기도 하였으며, 아예 문자를 익히는 난이도 자체를 높여서 먹고살 여유가 없는 이들은 익힐 엄두조차 내지 못하기도 했다.

         

       그렇기에 두 가지 모두 일리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 아는가?

       참으로 재미있게도, 신앙과 미신이 이어지지 않은 것에는 다른 이유도 있다.

       심지어 한 지역에서만 일어난 일도 아니고, 전 세계적으로 찾아볼 수 있는 아주 특별한 이유가 말이다.

         

       그것은 바로 ‘기록에 대한 공포’였다.

         

       신성한 것과 두려운 것에 대한 기록을 남기면 좋지 못한 일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공포.

       신령한 것을 함부로 기록하였다가 천벌을 받아 끔찍한 꼴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공포.

       오직 구전으로만, 입에서 입으로만 전달해야만 한다는 강박에 가까운 그러한 공포.

         

       그 공포가 세계 곳곳에서 발견된 것이다.

         

       참으로 흥미로운 경향이 아닐 수가 없다.

       만난 적도, 교류한 적도 없는 이들 사이에서 보이는 이러한 공통점이라니….

         

       어쩌면 이것은 신앙의 본질이 공포이기에, 그렇기에 그 공포를 회피하기 위한 사람의 행동 역시 비슷한 것이 아닐까? 외부의 위협에 노출되지 않기 위해 숨는 것처럼, 이미 마주하고 있는 포식자가 자신에게서 약점을 발견하지 못하게 하기 위한 인류의 유전자에서부터 비롯된 본능적인 행동 양식이 아닐까?

         

       실제로 구전과 구전을 거듭하면서 소실되고, 변질하고, 나중에는 어린아이에게 경고하기 위한 수준으로 격하되기까지 한다는 것을 생각해본다면…. 인류의 이러한 행동은 올바른 것일지도 모른다.

       이것 역시 공포를 극복하기 위한 한 가지의 방법이었으니까.

         

       이 역시 참으로 흥미진진한 주제가 아닐 수가 없다.

       인류의 행동 양식, 소실되고 변질하는 신앙, 인류의 유전자에 각인된 본능에 관한 연구 등등….

         

       문화인류학, 사회학, 인류학, 생물학 등등.

       수없이 많은 분야에서 흥미를 보내고 연구를 할 만한 주제라고 할 수 있겠지.

         

       “…허허. 벨라돈나의 뿌리에 이러한 것이 있었다니.”

         

       수많은 연구자.

       대학에 속해있는 사람들.

       후원을 받아서 연구하는 사람들.

       자기 재산으로 개인적인 연구를 하는 사람들.

       세계 곳곳을 돌아다니고 발로 뛰면서 연구를 하는 사람들.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연구자.

         

       그 수많은 연구자 중에는 벨라돈나의 뿌리 같은, 물귀신이 들끓는 끔찍한 지역에 연구소를 만드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 뭔가 사회적으로 민감한 것에 관한 연구라서 비밀스럽게 연구를 할 수도 있고, 어떠한 사정이 있어서 세상에 알리지 않을 수도 있다. 그리고 그곳에서 앞서 말했던 ‘흥미로운 주제’에 대한 연구를 하고 있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박진성이 시야를 공유하고 있는 인형이 보고 있는 것은.

       벨라돈나의 뿌리에 숨겨진 연구소에서 행하는 연구는…참으로 특별하면서도 잔혹한 것이라 할 수 있는 것이었다.

         

       “신앙 양식, 인공 신앙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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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Shaman Desires Transcendence

The Shaman Desires Transcendence

주술사는 초월을 원한다
Status: Ongoing Author:
The shaman realized he had gained life once more. This time, he would live a life solely for transcendence, through shamanism alo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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