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itch Mode

EP.75

    야트막한 까치산에서는 행사 준비가 한창이었다.

    까치산 연구소에서 열리는 ‘오브젝트 연구소 정기회의’.

    검은 요원은 준비 중인 행사장을 돌아다니면서, 여러 가지 점검을 돕고 있었다.

    아침 일찍부터 시작한 작업은 어느새 점심까지 이어졌고 점심시간이 되어서 준비 작업이 소강상태가 되자, 검은 요원은 나지막한 까치산 위에서 밑을 내려다보며 한숨 돌리고 있었다.

    검은 요원은 협회의 해체와 재결성, 그리고 서울에서 일어난 수많은 사건에 상당히 지쳐있었다.

    까치산에서 내려다본 탁 트인 광경은 검은 요원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편안하게 만들었다.

    시야를 막지 않는 작은 건물들이 성냥갑처럼 주르륵 늘어선 풍경.

    리본처럼 어지럽게 얽혀있는 도로에서는 딱정벌레 같은 자동차들이 드문드문 움직이고 있었다.

    이 위에서 듣는 자동차의 경적과 엔진 소리는 적당히 작게 줄어들었고, 그 소음들은 오히려 그에게 편안함을 주는 익숙한 소음이었다.

    “아저씨!”

    계단을 뛰어오르는 작은 발소리와 함께 금발의 소녀가 검은 요원에게 반갑게 말을 걸어왔다.

    꽤 많은 숫자의 계단을 뛰어올라오는 소녀의 양 뺨은 붉게 상기되어 있었고, 손에는 이번 회의 리플렛이 들려있었다.

    “이것 좀 보세요!”

    금발의 소녀는 검은 요원의 눈앞에 리플렛을 들이밀었다.

    리플렛에는 일자마다 1부와 2부로 나뉘어서 진행하는 발표 일정과 그 주제가 쓰여있었다.

    <까치산 오브젝트 콘퍼런스.>

    <장소 : 까치산 오브젝트 연구소.>

    <주최 : 까치산 오브젝트 연구소, 오브젝트 관리 협회.>

    <1부 발표.>

    <연구소 재정 건전성의 증대를 위한 프로세스.>

    <오브젝트 증가 추세와 그에 대한 대응 방법에 대한 연구.>

    <오브젝트가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 소개.>

    <오브젝트 대응 무기 체계 국산화 방안.>

    .

    .

    .

    금발의 소녀는 발표 주제 중 한 곳을 가리키며 잔뜩 흥분해 있었다.

    “오브젝트의 간접적 영향으로 초인이 되는 사례가 발견됐대요. 초인! 아저씨는 본 적 있어요?”

    “저는 아직 본 적이 없군요. 그래도 점점 발현 사례가 늘어나고 있다는 연구 결과도 있고, 정부에서도 열심히 찾고 있으니 조만간 볼 수 있을 겁니다.”

    소녀에게 답변을 해주면서 검은 요원의 뇌리에 한 친구의 모습이 떠올랐다.

    노란 탐정.

    그는 이번 콘퍼런스 발표에서 다룰 것으로 보이는 신체적 능력이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타입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가 보여주는 직감은 거의 예지의 영역에 맞닿아 있어서, 충분히 초인이라고 부를만했다.

    “한국에서 최초로 발견되는 초인은 누구일까요? 설마 제가 된다거나?”

    고개를 숙이고 키득키득 웃는 금발의 소녀. 

    사실 검은 요원은 이미 초인에 관련된 지시를 협회에서 받았었다.

    <초인을 발견할 경우, 즉시 협회 측에 알릴 것.>

    <굳이 구속을 시도하지 말고, 친밀한 관계를 형성할 것.>

    <기회를 봐서 충분한 데이터와 전력을 가지고 무력화와 격리를 시도할 것.>

    검은 요원은 금발 소녀에게 이런 흉흉한 이야기를 굳이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사실 발표에서 다룬 초인처럼 현격히 눈에 띄는 경우보다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을 겁니다. 여기 보면 그 이야기가 나와 있죠.”

    <올림픽 등의 기록을 겨루는 스포츠에서 기록 향상이 눈에 띄게 증가 중이다.>

    <기술과 훈련 방식의 개선 등으로 설명하기 힘든 수준의 변화를 보인다.>

    <오브젝트 발생량이 늘어날수록 그 기록 개선이 증폭되는 것을 볼 때, 이 또한 오브젝트의 영향으로 보인다.>

    “와, 그러면 인간들 전부가 결국 초인이 되는 건가요?”

    “이런 경향이 계속 이어진다면 결국 그렇게 되겠죠. 하지만 언제까지 이런 일이 일어날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금발 소녀는 리플렛을 이리저리 살펴보다가, 흥미가 떨어졌는지 리플렛을 등 뒤에 시립해 있는 비서에게 넘겨주었다.

    “아, 맞다. 아저씨!”

    “?”

    “그거 아세요? 오늘이 블러드문이래요. 빨간 달이 뜬다고 하더라고요.”

    오늘 밤에 보게 될 달이 기대된다며 이야기한 소녀는 다시 계단을 뚜벅뚜벅 내려갔다.

    ***

    꽤액.

    꽤애액.

    평온한 격리실에서 커다란 새의 울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예린이가 주고 간 폴라로이드 사진이 문제였다.

    사진을 탁자 위에 올려두고, TV를 보던 중이었는데, 검은색 펭귄 대가리가 사진 속에서 천천히 솟아오른 것이다.

    그리곤 머리만 내놓은 채, 두리번 두리번거리면서 격리실 내부를 관찰했다.

    내가 뒤돌아 있어서 보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지 꽤 대놓고 관찰하고 있었는데, 사실 나는 눈으로 보는 게 아니란 말이지….

    그래서 펭귄이 다른 쪽을 볼 때, 달려들어서 목을 꽉 틀어쥔 것이다.

    꽤애액!

    그래서 결국 이 펭귄은 뭘까.

    느낌만으로 보면 인간에게 ‘해로운 새’ 같단 말이지.

    그래서 오른손으로 목을 틀어쥔 채, 머리를 겹치기로 날려버렸다.

    머리가 사라진 펭귄은 퍼덕퍼덕하며 움직이다가 시간이 좀 지나자, 검은색 진흙으로 녹아내렸다.

    냄새도 기분 나쁜 석유 냄새가 나고 찐득거리고 기분 나쁜 감촉.

    나는 유령화로 진흙을 털어버리고, 다시 사진을 관찰했다.

    사진 너머에서 언제나 둠칫둠칫 춤을 추던 펭귄은 사라진 상태였다.

    남은 것은 기분 나쁘고 이색적인 풍경이 찍힌 풍경화.

    이제 별로 가치가 없는 사진이 되어버렸다.

    나는 사진을 대충 던져두고, 격리실 밖으로 나섰다.

    이 서늘한 연구소 복도의 공기.

    격리실의 따뜻하고 아늑한 분위기도 좋지만, 연구소 복도의 밝고 서늘한 분위기도 마음에 들었다.

    뚜방뚜방.

    아무도 없는 연구실 복도를 걷다 보니, 말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서아와 세희가 보인다. 

    서아가 웬일로 밖에 나와 있지?

    ***

    서아와 같이 소장실을 나선 뒤 연구소 복도를 걸어 나간다. 

    서아와는 저번 황금 사신 반출 이후로 통 대화를 나눌 기회가 없었으니, 이번 기회에 대화라도 잔뜩 해봐야지.

    “이번에 휴게실에 배치해 뒀던 황금 사신이 사라졌더라고. 도대체 어디로 간 걸까?”

    “….”

    아이스 브레이킹용 대화인데, 서아가 대꾸를 안 해주네.

    오히려 식은땀을 잔뜩 흘리고 있는데, 어디 아픈 곳이라도 있는 걸까?

    “와, 땀 좀 봐. 몸이 안 좋으면, 이번에 참가하는 콘퍼런스 불참해 버려. 어차피 불참할 생각이었으니까.”

    “아뇨. 참가하는 게 좋습니다. 협회 측에서도 참가하기를 바라고 있으니까요.”

    서아는 이번에 열리는 ‘까치산 콘퍼런스’에 참가하기로 했다.

    사실은 내가 가야 했지만, 서아가 가기로 한 것이다.

    왜냐면, 그야 이번 콘퍼런스는 별로 가고 싶지 않았는걸.

    재정 건전성이니 뭐니 별로 궁금하지도 않은 이야기만 잔뜩 발표하는 콘퍼런스는 별로 가고 싶지 않다.

    그래서 불참하려고 했더니 차라리 서아가 간다고 해서 그러라고 했다.

    서아는 혼자서 준비하겠다고 했지만, 서아는 출장을 나간 기록이 거의 전무! 

    출장과 현장 답사를 자주 가본 이 내가 친절하게 알려줘야지!

    ***

    이세희 연구소장과 복도를 걸어가고 있었다.

    같이 걸어가던 도중에 갑자기 황금 사신에 관해서 물어볼 때는 심장이 떨어지는 줄 알았다.

    다행히 황금 사신을 빼돌린 사실을 눈치챈 건 아닌 것 같았다.

    그 후로는 출장에서의 주의 사항들을 끊임없이 이야기했다.

    얼핏 들으면 쓸모 있어 보이는 이야기들이었지만, 이세희 연구소장은 까먹은 모양이다.

    지금 하는 이야기의 대부분이 내가 이세희 연구소장에게 해줬던 이야기였다.

    오브젝트 관련 사고가 빈번히 일어나니, 조심하라고 알려준 사항들이었다.

    문제는 이세희 소장은 내가 알려준 것들을 거의 지키지 않았다.

    그리고 매번 납치에 휘말리고, 봉쇄에 휘말리고, 협회에 잡혀들어가고….

    그러면서 그 이야기를 다시 나에게 하는 꼴이라니!

    아, 생각할수록 황당하네.

    “내가 말한 것만 지키면 납치 같은 걸 안 당할 수 있을 거야!”

    당당한 표정으로 말하는 이세희 연구소장.

    어처구니없는 표정으로 빤히 쳐다보자, 뭔가를 깨달은 듯했다.

    어느새 나타난 회색 사신도 나랑 비슷한 표정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나… 날 그런 눈으로 보지 마!”

    “나도 방금 생각났단 말이야. 이거 다 서아가 알려준 정보인 거….”

    “납치도 많이 당해봐서 잘 아는 부분도 있다고!”

    이세희 소장은 시무룩해지더니 조용해졌다. 

    ***

    까치산 콘퍼런스가 열리기 며칠 전, 커다랗고 밝게 빛나는 블러드문이 떴다.

    그리고 그다음 날에도 떴다.

    강서구 지역에서만.

    아가씨는 신기한 현상에 약간 들뜬 것 같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좋은 징조는 아니었다.

    사라지지 않는 커다란 붉은 달에 대한 보고서를 작성했다.

    협회에 보고서를 올렸다.

    답신까지는 꽤 시간이 걸리겠지.

    최대한 빨리 대응해야 하는데, 너무 늦지 않기를.

    “아저씨! 오늘도 붉은 달이네요?”

    “아가씨, 붉은 달이 뜨는 동안만이라도 본가로 돌아가 계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도리도리.

    아가씨는 해맑게 웃는 얼굴로 거절했다.

    다음화 보기


           


Seoul Object Story

Seoul Object Story

서울 오브젝트 이야기
Score 9.4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3 Native Language: Korean
Humans, once the masters of Earth, were losing their place to the inexplicable phenomena known as Objects. And this is a story about becoming an Object and living worry-free in the Seoul of such a world.

Comment

Leave a Reply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 Required fields are marked *

Options

not work with dark mode
Res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