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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75

       괴물이 있었다.

         

       인간을 사랑했던 괴물이.

         

       그리고 괴물을 사랑하지 않았으나, 그가 필요했기에 사랑하는 척했던 인간이 있었다.

         

       파라메르가 건재하기 전의 이야기. 발전은커녕, 작은 마을에 불과했을 때의 이야기.

         

       시계탑 하나가 그들이 가진 것의 전부였을 때의 이야기가 페르 바흐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아리스와는 제 선조입니다. 시계탑의 노예 아리스와는 다른 사람입니다. 수백 년 전의 사람…즉, 바흐의 부인이죠. 파라메르가 아직 마을이었을 시절, 가장 예쁘다고 소문이 났던 사람이었습니다. 흠이 있다면 몸이 무척이나 약하다는 점 하나뿐이었죠."

         

       페르 바흐가 밑을 가리켰다.

         

       "그때의 파라메르에는 전설이 하나 있었습니다. 발전이 덜 된 지하 광도에서 가끔 무서운 소리가 흘러나온다고. 괴물의 울음소리와 같은 기묘한 소리가 난다고."

         

       플로라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파라메르의 원인이 바로 그인가요?"

       "맞습니다. 그리고 아리스는 여리지만 용감한 소녀였습니다. 야망 또한 컸죠. 자신의 아픈 몸을 더욱 자유롭게 내디뎌, 파라메르 전체를 키우고 싶어 했습니다."

       "…설마 그 괴물이랑…"

       "생각하시는 바가 맞습니다. 아리스는 어딜 가나 시종 바흐를 데리고 다녔습니다. 그리고 바흐는 그녀에게 사랑을 품고 있었죠. 아리스 또한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리고 그 둘의 사이에, 괴물 하나가 끼어들었습니다. 지하 광도의 괴물. 시계탑 밑의 아득한 지하 속에서, 언제부터 살아왔는지 모를 괴물."

         

       페르 바흐가 한숨을 내쉬었다.

         

       "아리스는 그 괴물과 마주쳤습니다. 지독히 의도적이었죠. 그녀는 애초부터 그 괴물을 만나고 싶어 했습니다. 자신의 힘이 되어주기를 갈망했죠. 아리스는 무척 영악한 여자였습니다. 괴물에게 먹히지 않으려 사랑을 속삭이고, 외로움을 해결해주기 위해 매일 지하 광도에 들렸습니다. 제 선조인 바흐 또한 그 옆에 항상 붙어 있었죠. 그의 일기장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으엑. 여기엔 질투에 가득 찬 문구밖에 안 보이는데요? 심지어 욕설도 잔뜩…"

       "아까도 말했다시피, 둘은 연인 관계였습니다. 괴물에게만 따로 말하지 않았을 뿐, 자신이 사랑하는 여인이 인간 같지도 않은 자를 유혹하는 것을 보면 화가 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아리스와 바흐는 둘 다 인내했습니다. 괴물에게서 미래를 보았기 때문이었죠."

         

       책장이 넘어갔다. 플로라가 인상을 찌푸렸다.

         

       "…이게 뭐예요?"

       "진실입니다."

       "하지만 이건…"

         

       명부.

         

       적혀 있는 이름에는 죄다 줄이 그어져 있다.

         

       "살인 명부가…진실이라고요?"

       "괴물의 힘이었습니다. 파라메르에 도움이 될만한 일에는 괴물이 모두 엮여있었죠. 한낱 작은 마을이었던 파라메르가 커진 것에는 괴물의 도움이 컸습니다. 경쟁자들을 제거하고, 파라메르를 대도시로 만들었죠. 그 공을 높이 사, 귀족 작위까지 받게 된 아리스는 자신의 야망을 이룬 듯이 보였습니다. 하지만…"

       "…자, 잠시만요."

         

       플로라가 다급히 책장을 도로 넘겼다.

         

       "여, 여기에는 그러니까…이것도 바흐가 쓴 건가요? 이 저주문 같은 게 전부?"

       "바흐는 아리스와 연인이었습니다. 아까도 말했듯, 배우자를 뺏긴 듯한 느낌이 들었겠죠. 그것이 전부 연극이라 할지라도."

       "하, 하지만 이건…"

         

       마른 침이 목을 넘어갔다.

         

       "사, 사람이 이토록…누군가를 헐뜯고 증오하는 글을…쓸 수 있나요? 그래도 자신을 도와준 괴물인데?"

       "그들에게 있어 괴물은 인간의 마음을 가진 ‘괴물’에 불과했습니다. 하나의 인격체로는 대하지 않았죠. 필요한 일에 나서줄 심부름꾼,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습니다. 만약 괴물의 이용 가치가 끝난다면, 그들은 언제든지 그를 봉인할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하, 하지만 이건 그래도 너무 심한…"

         

       플로라의 어깨 너머로 보았다. 붉은색 글씨. 한 자 한 자 살의를 꾹꾹 눌러 담은 듯한 저주의 말들.

         

       머리가 지끈거렸다. 글자만 보았는데도 적의가 느껴질 정도다.

         

       자신의 야망을 위해서 혐오하는 괴물과 몸을 섞었던 여자와, 그런 그녀를 바라보고만 있어야 했던 남자가 쓴 일기장.

         

       페르 바흐가 담담히 말했다. 눈은 한없이 가라앉아 있었다.

         

       "파라메르는 대도시가 되었습니다. 아리스의 집은 돈과 권력으로 흘러넘치는 상태였죠. 손 하나를 까딱해서 사병을 부릴 수 있으니, 더는 괴물이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이, 이용할 걸 다 이용했으니 도로 봉인했다고요?!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괴물 또한 협조했습니다. 아리스의 적이 늘어나고, 그 뒤에 자신이 있음을 알아차리자 그 당시 제국의 핵심 세력이나 마찬가지였던 교단이 움직였습니다. 괴물과 파라메르가 엮인 게 들통나면 사랑하는 여인마저 휘말릴 것이 분명하니, 괴물은 스스로 잠들기를 원했죠. 한쪽은 거짓이었지만, 누군가에게는 목숨마저 바칠 수 있었던 사랑이었습니다."

       "…너, 너무…잔혹한 이야기잖아요…"

       "괴물이 사라지자, 아리스는 바흐와 결혼했습니다. 한낱 시종이었던 그는 바흐라는 이름을 파라메르의 영주 자리까지 올릴 수 있었죠. 아리스는 행복하게 지냈고, 바흐 또한 늙어 죽을 때까지 잔병치레 하나 하지 않았습니다. 일기장에는 약간의 트러블이 적혀 있긴 했었지만…큰 문제는 아니었습니다. 둘 다 행복한 결말을 맞이했죠."

         

       쓰레기 새끼들치고는 해피엔딩이었지.

         

       "…그리고."

         

       페르 바흐가 한숨을 내쉬었다.

         

       "파라메르가 대도시가 된 지도 몇백 년이 흘렀습니다. 저희는 계속해서 땅을 파고 내려갔습니다. 그곳에는 지하자원이 넘쳐났고, 파라메르가 부를 유지하게 해주는 원동력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파고…또 파고…그렇게 계속 파고 내려가다 보니…"

       "…잠들었던 괴물이 깨어난 건가요?"

       "그렇습니다. 굴착기 소리가 괴물이 홀로 걸어서 내려간, 아득히 깊은 지하 구덩이까지 닿았죠."

         

       그 뒤의 이야기는 뭐, 편지에서도 알아볼 수 있다. 여기저기 쏘다니고, 옛 연인의 흔적을 파헤치고, 그러다 보니 진실을 깨닫게 된 거지.

         

       거짓 사랑으로 점철되었던 사랑. 하지만 그럼에도 잊을 수 없었던 과거의 추억.

         

       결국 결말은 하나다.

         

       묻혀 있던 타임캡슐에서 괴물은 보면 안 될 기록을 봐버렸다.

         

       인간성을 포기한 괴물은 스스로 선택하기를 멈췄다. 아리스를 닮은 시계탑의 노예에게 다가가, 예전처럼 자신을 도구로 써달라고 간절히 애원했다.

         

       시계탑의 노예, '아리스'라는 이름을 받게 된 소녀는 그런 그의 부탁을 들어주었다. 남들에게 비밀로 한 친구의 부탁이기도 했으며, 그토록 바라던 ‘자유’가 그의 입에서 나오자 차마 거절할 수 없었던 것.

         

       둘의 이야기는 그렇게 시작되었다가 금방 꺼졌다. 아리스는 원하던 자유를 얻지 못하고 시계탑에 갇혔으며, 괴물은 파라메르의 마지막 전력과 부딪힌 결과, 그녀와 나누어져 시계탑의 정상에 봉인됐다.

         

       하지만…

         

       여기서 타락자라는 녀석이 개입했다. 원래라면 따로따로 최후를 맞이했어야 할 녀석들이 만나버렸다.

         

       나는 일어섰다. 다 알고 있는 이야기라 그런지, 숙제를 검사 받는 기분이 들었다.

         

       "페르 바흐. 이야기는 끝났죠?"

       "…예. 끝났습니다."

       "그럼 떠나셔야죠?"

       "……"

         

       페르 바흐가 흔들리는 파라메르를 올려다보았다. 아까부터 멈추지 않는 흔들림.

         

       "…아리스가 밖으로 나갈 준비를 하고 있군요. 시계탑의 노예들은 자유를 원했습니다. 그녀 또한 아마…자유를 원했겠죠."

       "감상에 젖은 척하지 마시죠. 그럴 자격도 없잖아요."

       "알고 있습니다. 사제님. 하지만…아리스는 진짜 자유를 찾을 때까지, 멈추지 않을 겁니다. 그녀에게 있어 자유란 자신을 억압하는 어른들이 없는 세계. 즉, 대부분의 인간을 몰살하려 하겠죠."

         

       페르 바흐가 속삭였다.

         

       "사제님."

       "……"

       "부디 아리스를 멈춰주지 않겠습니까?"

       "속죄하려고 내뱉는 말이기엔, 너무 뻔뻔하지 않아요? 마지막 책임까지 제게 뒤집어 씌우겠다라."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페르 바흐가 눈을 감았다.

         

       "뒤늦게나마 제대로 보았으니, 책임을 지겠습니다. 파라메르의 도시 밑에 숨겨져 있던, 도시 보안 장치를 제어할 수 있는 법을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보물창고 안에 깊숙이 잠든 그 마도기계장치라면…아리스를 멈출 수 있을 겁니다."

         

       뭐?

         

       그건 또 처음 듣는 이야기인데? 게임 속에서도 몰랐던 설정이잖아?

         

       "…그런 게 있다고요? 그걸 왜 진작 안 쓴 거죠?"

       "사태가 이 정도로 번질 줄은 몰랐습니다. 그리고 그건 공성병기(攻城兵器). 역병과도 같았던 그날 밤에 쓰기에는 모호한 감이 있었습니다. 내부로 발사하면, 파라메르의 시민들도 엮일 게 분명하니, 쓸래야 쓸 수도 없었습니다. 보물창고의 열쇠도 같이 내어드리죠. 필요한 게 있으시면, 그곳에서 곧바로 쓰시면 됩니다."

         

       플로라가 입술을 깨물었다.

         

       "이제 와서 왜 그런…후회할 거라면 차라리 그 시계탑이라는 것을 진작에…!"

       "후회하기엔 사제님의 말씀대로 이미 늦었습니다. 노예들을 한낱 숫자로 생각하던 과거의 제게 뭐라 한들, 현실이 바뀔 리는 없겠죠."

         

       페르 바흐가 고개를 들었다.

         

       "사제님. 절 위해 기도해주시겠습니까?"

       "쯧."

         

       나는 혀를 찼다. 그래도 뭐, 있는 거 없는 거 다 털어서 준다는데 기도 한 번쯤이야.

         

       "거짓말은 안 할게요. 페르 바흐. 당신은 죽어서도 고통받을 거예요."

       "그것참 끔찍한 소리이군요."

         

       페르 바흐가 웃었다.

         

       "그래도 마지막은 추하지 않아 다행입니다."

         

         

         

         

       . . .

         

         

         

         

       시계탑의 노예 아리스는 눈을 떴다.

         

       「하나로는 안 돼! 엄청 많아야 여기서 나갈 수 있어!」

         

       누가 그렇게 말했더라. 기억을 천천히 더듬어 본다.

         

       …아.

         

       페리스가 그렇게 말했지. 짧은 머리. 활발한 성격. 톱니바퀴 하단을 담당하던 아이.

         

       친구였다. 아리스는 무릎을 끌어안았다.

         

       …친구였을까.

         

       솔직히 잘 모르겠다. 이제는 묻고 싶어도 물을 수 없으니까.

         

       친구였다고…생각해줬으면 좋겠는데…

         

       "……."

         

       괴물, 피에르가 속삭였다. 아리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피에르는 원하는 것을 들어주었다. 도움을 원하면 바른 길로 인도해주었다.

         

       하지만 전과 달리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눌 수는 없었다. 시계탑에 맨 처음 찾아왔을 때는 분명 인간 같았다.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이제는 대화를 나눌 수가 없게 되었다. 자신을 써달라고 말했던 그 순간부터, 괴물은 인간이 아닌 괴물이 되어버렸다. 

       

       

       그저 일방적으로 물으면, 저쪽에서 일방적으로 답할 뿐.

         

       아리스는 썩은 왕좌 속에서 멍하니 앞을 바라보았다.

         

       "…나가고 싶어."

         

       시계탑 안에서 줄곧 꿈꾸었던 자유는 어떠한 형태일까.

         

       아리스는 궁금했다. 시계탑에서 내려다본 파라메르는 무척 예뻤다. 잔잔한 노을 속에 잠겨 들어가던 세상은 눈을 반짝거리게 만들었다.

         

       그 도시가 그랬는데, 바깥은 어떨까.

         

       페리스의 말대로 끝없는 물이 펼쳐져 있을까. 어딘가는 얼음밖에 없다고 들었는데, 그것도 진짜일까.

         

       …궁금하다.

         

       아리스는 일어선 그림자를 쓰다듬었다. 어둠 속의 수많은 눈이 조용히 눈을 감았다.

         

       꿈을 꾸기라도 하듯, 아리스 또한 눈을 감았다.

         

       시계탑 안에서도, 이곳에서도 똑같다.

         

       눈을 감으면 언제나처럼…마차 소리가 들려오는 게.

         

         

         

         

       . . .

         

         

         

       처음 시작은 낯설었다. 마차 소리가 멎고, 눈앞에 펼쳐진 세상은 한 아이가 감당하기엔 무리가 있었다.

         

       "내려."

         

       수많은 아이 속에 소녀 또한 섞여 있었다. 발에 묶인 족쇄 때문에 절뚝거리며 걸어야 했다.

         

       어른들.

         

       그곳에는 수많은 어른이 있었다. 하지만 단 한 명도 눈을 맞춰주지 않았다.

         

       "한둘쯤은 빼돌려도 상관없지 않나?"

       "이런 핏덩어리들을 어디다 써먹으려고?"

       "파라메르에 다시 팔아야지."

       "아서라. 들키면 목 날아간다."

         

       같다.

         

       자신이 물건을 바라보는 눈과 모두 같아.

         

       소녀의 삶은 그곳에서 새로 시작했다. 시계탑의 부품을 손질하고, 시계탑의 지하에서 자고, 시계탑 내부에서 생활하며, 하루 한 번, 시계탑의 정상에서 파라메르를 내려다볼 수 있었다.

         

       하루 10분.

         

       그게 그녀에게 주어진 유일한 자유의 시간이었다.

         

       "보이지?"

         

       시계탑의 관리자는 노을이 저무는 파라메르를 보여주면서 씨익 웃었다.

         

       "파라메르는 아름다운 도시다. 너희가 더 열심히 해야 저 도시가 더 예쁘게 빛난다는 사실을 잊지 마라."

         

       넋을 놓을 정도로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빛나는 지붕. 찬란한 빛에 물든 수많은 사람. 맛있는 냄새. 굴뚝에서 피어오르는 하얀 안개.

         

       누군가 중얼거렸다.

         

       "…나가고 싶다."

         

       대답은 매타작으로 돌아왔다.

         

       "너희는 시계탑을 보수하는 것만 생각해! 헛소리하지 말고!"

         

       소녀는 예쁘다라는 말을 삼켰다. 그 말 또한 내뱉는 순간 맞을 거 같았기에.

         

       쳇바퀴 굴러가듯 삶이 반복됐다. 소녀는 묵묵히 일했다. 자신이 담당하는 부품이 부서지면, 그날 하루는 꼬박 굶어야 했다.

         

       맛없는 빵. 한 잔의 물.

       간신히 몸을 움직일 수 있는 식사마저 사라진다.

         

       "많이 먹지 마라! 먹으면 몸이 자란다! 최대한 적게 먹어야 해! 많이 먹어서 몸이 불면, 너희는 쓸모없어진다는 사실을 명심해라!"

         

       관리자는 늘 채찍을 들고 다녔다. 시계탑에서 문제가 발생하면 그 아이를 불러, 아프게 등을 때렸다.

         

       소녀 또한 몇 번 맞아본 적 있었다. 그건 다시는 겪고 싶지 않은 고통이었다. 안 그래도 먹지 못해 비실한 몸이 감당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실수하지 마라! 실수하면 안 돼!"

         

       실수.

         

       소녀는 그 실수라는 것이 어떤 걸 뜻하는지, 들어온 지 사흘 만에 알았다.

         

       톱니바퀴 속에 아이가 꼈다. 눈이 마주친 소녀가 손을 뻗었다.

         

       하지만 그전에 먼저 피가 튀었다.

         

       몰래 이야기를 나누던 입이 짓이겨졌다. 씻지 않아 더러웠지만, 예뻤던 붉은 머리는 톱니바퀴 속에 깊이 엉켰다.

         

       꽈드득.

         

       소리는 끔찍했다.

         

       "…아."

         

       소녀는 멈춘 시계탑을 보았다. 아이였던 것은 고깃덩어리 것을 천천히 흔들었다.

         

       그건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그저 좌우로 달랑거릴 뿐이었다.

         

       "이 멍청한 새끼들아! 내가 실수하지 말라고 몇 번이나 말했잖아!"

         

       그날 밤에는 모두가 매를 맞았다. 소녀는 시체의 옆자리였다는 이유로, 더럽혀진 부품들을 천천히 청소했다. 살가죽을 떼어내고, 뭉개진 입술을 웅덩이에 담았다.

         

       그때 처음으로 생각했다.

         

       이곳을 빠져나가고 싶다고.

         

       "우리 같이 도망가자."

         

       자기 전에 속닥거렸던 페리스라는 아이의 말에 모두가 귀를 기울였다. 그는 활발했고, 꿈으로 반짝거렸다. 소녀도 자주 힐끗힐끗 쳐다보던 아이였다.

         

       "여기서 도망치려면 한둘로는 안 돼. 수많은 사람이 필요해. 다 나를 도와서, 관리자를 제압하는 거야."

       "우, 우리끼리 될까…?"

       "할 수 있어! 여기만 나가면 자유야. 시계탑은 이제 지긋지긋하잖아? 그렇지?"

         

       페리스가 활짝 웃었다.

         

       "우리를 가둔 어른들을 벗어나서, 우리만의 마을을 만들자! 양껏 먹고, 양껏 자는 거야!"

         

       그가 소녀를 흘깃거렸다. 처음으로 눈이 마주친 순간이었다.

         

       "너도 같이 갈 거지?"

         

       소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손을 맞잡았다.

         

       내일이면 드디어 자유를 얻을 수 있어.

         

       부푼 가슴을 간신히 억누르고, 소녀는 다음 날 일어섰다. 그리고 보았다.

         

       페리스라는 아이의 목이 지하에 매달려 있음을.

         

       "너희의 집은 여기다. 이상한 작당 모의하면 이렇게 될 줄 알아라."

         

       혀를 내민 시체. 활짝 웃고 있던 얼굴은 이상하게 경직되어 있었다. 소녀는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관리자가 중얼거렸다.

         

       "노예를 하나 더 사야 하잖아. 하여간 꼭 한 명쯤 있다니까. 이런 멍청한 새끼들이."

         

       소녀는 말하고 싶었다.

         

       그는 전혀 멍청하지 않았다고.

         

       오히려 엄청 멋진 사람이었다고.

         

       "……"

         

       하지만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그처럼 되고 싶지 않았다.

       죽고 싶지 않았다. 소녀는 자유를 얻고 싶었다.

         

       죽음이 아닌 자유를.

         

       시간은 흘렀다. 소녀의 몸은 서서히 커졌지만, 아슬아슬하게 성장이 멈췄다. 먹지 못한 몸은 아이처럼 작았고, 나이를 먹었음에도 키는 제 자리를 유지했다.

         

       소녀는 가장 오랫동안 근무한 시계탑의 노예가 되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자유를 갈망하고 있었다.

         

       하루 10분.

         

       파라메르를 구경하는 그 시간대.

         

       모두가 질려서 오히려 쉬기를 정했던 그날에도 소녀는 밖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와 마주쳤다.

         

       "…아리스?"

         

       '아리스'라는 이름을 처음 얻게 되었던 순간.

         

       그날 소녀의 멈췄던 시간 또한 움직였다.

         

       시계탑의 분침이 울리는 시간 속에서 그녀는 손을 뻗었다.

         

       "…응."

         

       오랜만에 담아본 목소리는 낯설었다.

         

       하지만 싫지 않았다.

         

         

         

         

       . . .

         

         

         

         

       아리스는 눈을 떴다. 주변은 조용했다. 썩은 살점들은 소리 없이 꿈틀거리며, 끝없는 군대를 만들고 있었다.

         

       이렇게 해야 '자유'를 얻을 수 있다고 피에르가 말했다. 아리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군대를 만들고, 준비를 마친 다음에 파라메르 밖으로 나가자.

         

       자신을 방해하는 어른들을 전부 죽이고, 보고 싶었던 것을 보러가는 거야.

         

       그것이 진짜 자유.

        

       

       "…아리스는."

         

       자신에게 주어진 이름을 중얼거리며 소녀는 무릎을 끌어안았다.

         

       "아리스는…자유로워질 거야."

         

       그렇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어야만 한다.

         

       줄곧 꿈꾸었던 것이니까.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파라메르 수색전 파트의 끝이 보이네요…

    제일 끌고 오기 힘들었던 파트인 거 같아요 ㅜ 쓸데없이 진지해져서 원래의 개그 목적도 많이 잃어버리고…쓰기가 무척 힘들었습니다.

    이렇게 길게 써본 건 처음이라 아무래도 이것저것 엉망이 되어서 그런 거 같네요 하지만….

    중요한 건…꺾이지 않는 마음…이랄까…?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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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Paladin Monopolizes the Sacred Relics

The Paladin Monopolizes the Sacred Relics

성기사가 성물을 독차지함
Score 4.0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In a world where magic reigns supreme and the influence of gods wanes, a young boy finds himself unexpectedly thrust into the role of an acolyte in the declining Sun God’s Temple. Blessed with the divine stigma of the Sun God, he must navigate the temple’s internal politics, the hostility of his fellow acolytes, and the challenges that come with his newfound powers.

As he delves deeper into the mysteries of the temple, he discovers hidden secrets and powerful artifacts that could change the course of his destiny. With the guidance of an enigmatic senior acolyte and the unwavering faith in his own abilities, he sets out to prove his worth and carve his own path in a world that has all but forgotten the true power of the div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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