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비무 부탁드립니다.”
“저도요.”
‘왜 저렇게 쳐다보지?’
혜령은 자신을, 특히 자신의 흉부를 뚫어져라 쳐다보는 청매향의 모습에 포권을 하면서도 고개를 갸웃거렸다.
생판 처음 보는 여자가 넋 놓은 얼굴로 자신을 쳐다보다 고개를 털더니 검을 뽑아 드는 모습은 아무리 봐도 이상했으니까.
이곳이 비무대가 아니라 다른 곳이었다면 어디 아프냐고 물어봐도 이상하지 않을 행동이었기에, 혜령이의 입술이 달싹거렸다.
“소저?”
“…헛. 죄송합니다. 그만…”
어쨋든 비무는 시작해야 하니, 혜령이는 천천히 자신의 검을 뽑아 들고 기수식을 취했다. 마찬가지로 세간에서는 백매화라 불리며 중원에서 손꼽히는 미녀라는 청매향도 기수식을 취했다.
두 꽃의 비무에 남성 관객들은 기수식이고 뭐고 두 사람을 구경하는 데에만 정신이 팔려 관중석이 조용해졌다. 간간히 들려오는 등짝 후려치는 소리를 빼고.
‘아저씨가 백매화 소저가 저보다 반수 내지 한 수 정도는 위라고 했으니까…’
“가요.”
혜령이 흐르는 물처럼 종 잡을 수 없는 유수보의 경로를 밞으며 청매향의 주의를 어지럽게 움직였다.
오른쪽으로 갔다가도 순식간에 몸을 틀어 반대 방향으로 튀어나오고, 앞으로 갔다가도 뒤로 움직이는, 파도처럼 종잡을 수 없는 것이 유수보의 본질.
청매향은 매화이십사수검법의 기수식만을 취한 채 눈으로 유수보의 움직임을 쫒았다. 싸우기에 앞서 유수보의 움직임을 파악하기 위함이었다.
결국 모든 보법은 정형화된 순서와 형식이 있는 법이므로.
보법을 파악한다면 무공의 절반을 파악했다고 말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혜령이 먼저 보법을 보이며 공격을 시도하는 것은 꽤 큰 손해를 감수하고 하는 행동이었으나-
‘…집중해야 해요.’
…예상치 못한 변수라면, 보법을 펼치며 움직이는 가슴이 계속 시선을 잡아끈다는 점.
아무리 여자라도 저만한 것이 달려있으면 자연스럽게 눈이 쏠리기에, 매향은 매화검으로 현혹시켜야 할 자신이 오히려 혜령의 몸에 현혹당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그렇게 매향이 흐트러진 순간.
“핫!”
혜령의 검이 처음으로 매향을 향해 휘둘러졌다. 위에서 아래로. 대각선으로 베는 평범한 일격. 초식도 뭣도 아닌 검격을 매향은 쉽게 흘려냈다.
혜령은 그녀가 받아낼 거라 예상했다는 듯 검이 흘려진 경로를 따라 회전하며 첫 번째 초식, 일파만파(一波萬波)를 펼쳤다.
파도처럼 쏟아지는 십수 개의 검격.
하나하나에 강맹한 기세가 실린 검격은 매향을 잡아먹을 듯이 뒤덮었지만, 매향도 엄연히 본선 16강에 올라온 강자.
성명절기도 아닌 공격에 당해줄 리가 없었다.
곧바로 매향의 검이 섬전처럼 반짝거리며 햇빛을 머금은 채로 혜령의 검을 쳐냈다.
한 번. 두 번. 세 번. 네 번…
둘의 실력에는 확연한 차이가 있었기에, 혜령은 초식을 거두고 몸을 시계 방향으로 한 바퀴 돌며 검을 역수로 쥐고 왼손으로 옮겼다.
‘검을 쥔 손을 바꿨다?’
오른손으로 사용하는 것이 전제된 보통의 검법과는 다르게, 때로는 오른손, 때로는 왼손을 사용하며 상대를 베는 것이 해남삼십육검의 묘리.
의표를 찔러 상대를 효율적으로 제압한다는, 왜구와 싸우며 만들어진 해남삼십육검의 검.
그 검이 다시 한번 매향의 가슴팍을 노렸다.
예상치 못한 공격에 당황해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었지만, 매향은 몸을 살짝 뒤로 젖혀 피해냈다.
혜령과 다르게 가슴이 봉긋한 정도에 그쳤기에, 혜령의 공격은 무위로 돌아가고 말았다.
매향의 마음은 왠지 모르게 참담했지만.
“쳇.”
혜령은 다시 검을 오른손으로 돌리고 매향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적을 상대하는 데 있어 공격의 기세를 놓지 않을 것.
윌리엄이 대련을 하며 매번 강조하던 것이었기에, 혜령은 최대한 주도권을 놓치지 않으려 했다.
주도권을 놓친다면 명백한 하수인 자신에게 기회가 쉽사리 돌아오지 않음을 알고 있었기에.
“후우…”
숨을 들이쉬고, 크게 내쉰다.
계속되는 전투 속에 혜령의 체력이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그건 매향이 공세로 전환할 수 있는 틈이 생겼다는 뜻.
이윽고 매향의 검에서 서슬 퍼런 매화가 피어나기 시작했다.
“오오, 매화이십사수검법! 듣던 대로 아름답군!”
“약관의 나이에 매화를 피워내다니, 미래가 기대되는 인재일세!”
화산파를 대표하는 무공. 화산의 상징인 매화이십사수검법이 모습을 드러내자 관중석의 분위기가 달아올랐다.
당연한 일이었다. 그들은 소문으로만 듣던 구파일방과 오대 세가의 무공을 보기 위해서 먼 길을 걸어온 사람들이었으니.
그리고 그 광경을 지켜보던 윌리엄은 눈을 빛내며 매향의 검을 관찰했다.
‘내공을 매화의 형상으로 만들어 흩뿌리는 건가. 눈을 현혹한다는 점에서는 실전에서 꽤 무섭겠군.’
극한의 집중력을 필요로 하는 전장에서 집중을 흐트러트릴 만한 요소가 있다는 것은 아주 골치 아픈 일. 그렇기에 윌리엄은 매화이십사수검법을 상당히 강력한 검법이라고 평가했다.
“…이대로 가면 밀리겠군.”
“그렇군요.”
둘의 말대로, 혜령은 점점 수세에 몰리기 시작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무림인에게 경지란 곧 실력의 격차가 있음을 나타내는 말이며, 하수가 고수를 상대로 승리를 거머쥔다는 것은 상상을 초월한 재능을 가진 자이거나, 혹은 하늘이 도와준다는 것.
하지만 혜령은 뛰어난 원석일지언정, 아직 완벽하게 다듬어진 원석이 아니었으니 비교적 더 다듬어진 매향에게 밀리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주도권을 빼앗겼군.”
“매화이십사수검법은 초견 필살의 검법이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매화의 그 화려함에 유혹되어 검로가 흐트러지고, 시선이 어지러워지며, 발이 꼬이니 천하에서 손꼽히는 검법이라 부를 만하지요.”
“…오랜만입니다.”
“하하, 오랜만입니다. 위 소협.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아시다시피, 비무대회에 참가해 즐겁게 지내고 있습니다.”
제갈현상은 그와 처음 만났을 때처럼 백우선으로 얼굴을 가린 채로 비무대를 바라보았다.
“비무대회를 잘 즐기는 것 같아 다행입니다.”
‘왜 온 거지.’
그냥 잡담하려고 온 건가? 윌리엄이 의문 섞인 눈으로 쳐다보자, 그는 눈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지나가던 한량이 오랜만에 친구를 만나 말을 걸었을 뿐이니 걱정하시지 마시길. 아, 그리고 비무대회가 끝나고 이틀 뒤에 큰 술자리가 있는데…어떻습니까? 제가 좋은 친구들을 아는데-”
한량?
친구?
“한번 생각해보겠습니다.”
“그럼 다음에 뵙겠습니다.”
제갈현상은 슬슬 시간이 됐다는 듯 등을 돌렸다.
“그럼 좋은 구경 되시길 바랍니다.”
제갈현상은 그렇게 의뭉스러운 태도를 유지한 채 떠나갔다.
“이번 비무의 승자는! 백매화 청매향이오!”
그리고, 승부의 향방이 정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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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잉…아저씨, 저버렸어요.”
“넌 할 만큼 했다.”
근본적인 실력 차이가 꽤 나는데 일류에 갓 오른 상태로는 그 정도로 몰아붙인 것만 해도 잘한 거지.
나는 위로의 의미로 혜령이가 내 손바닥에 얼굴을 비비적거리는 것을 방치하고 방금전 제갈현상이 남기고 간 제안을 생각했다.
도대체 뭐가 목적일까.
그냥 친목?
쓸데없이 수상해 보이는 분위기여서 감을 도통 못 잡겠네.
일단 악의 같은 건 없어 보이는데.
“은공, 그럼 저는 가보겠습니다.”
“아, 잘하고 와라.”
뭐 목경이야 주인공이니 알아서 잘 이기고 오겠지. 나는 목경이를 적당히 배웅해주고 자리에 앉아 혜령이와 수다를 떨었다.
“붙어본 느낌은 어떻든?”
“으음…눈이 엄청 어지러웠어요! 처음에는 뭔가 당황하는 분위기여서 몰아쳤는데…쉽게 쉽게 막히는 느낌? 아저씨랑 할 때랑은 다르게 먹히는 것 같긴 했는데 한 번 수세에 몰리니까 풀어나갈 방법을 잘 모르겠더라고요.”
“눈을 어지럽게 하는 검법은 처음이니 당연한 일이니 너무 신경 쓰지 마라. 더 강해지면 그만 아니냐.”
일류 고수에 갓 오른 애가 일류 고수 중반 정도까지는 오른 녀석 상대로 이 정도 했으면 선전한 거지.
“더 강해질 수 있을까요?”
“물론.”
그 부분만큼은 나는 확언할 수 있었다.
원작에서도 뼈를 깎는 노력으로 젋은 나이에 초절정 고수가 되었으니까. 이 세상에서도 초절정 고수가 될 잠재력이 있다고 봐도 되겠지.
이미 당첨 여부를 알고 있는 복권이랄까.
“경지에 오를 수 있도록 도와줄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
“네에…”
뭐가 그리 좋은 건지. 나는 헤실헤실 웃으며 내게 몸을 기댄 혜령이와 함께 슬슬 시작되려는 송무한과 단목경의 비무를 바라보았다.
송무한이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를 생각하면서.
벌써 토요일?
홀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