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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75

       <다키스트 아카데미아>

         

        아케인펑크 세계관을 배경으로 하는 VR 판타지 게임.

         

        버멜은, 김성현은 그 게임을 10년 가까이 플레이한 고인물 중의 고인물이었다.

         

        이 게임의 세계관에 빠진 뒤부터 얼마나 많은 시간을 여기에 투자했는지 모른다. 정신을 차리고 지나온 길을 뒤돌아봤을 땐 이미 인생의 일부로 자리매김했을 정도였다.

         

        수많은 시련을 헤쳐나가며 메인 시나리오의 끝에 도달했을 때 얻는 쾌락은 회차마다 달랐다. 모든 과정이 새로웠고, 각 지점에서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따라 등장인물의 가치관이나 생사를 바꿀 수 있다는 점도 매력적이었다.

         

        또한 업데이트도 자주 됐었다. 새 DLC가 추가될 때마다 만족스럽게 플레이했다.

         

        [DLC : 강철의 몸, 인간의 마음]

         

        그 병신같은 DLC가 있기 전까지는 말이다.

         

        ─ 이거 깨라고 만들어 놓은 거냐?

         

        지나간 일을 생각하고 있던 사이 저 멀리서 누군가가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상념의 파도에서 빠져나온 버멜은 퍼뜩 정신을 차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끼이익,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들어온 건 흑발 금안의 소녀였다. 문틈 사이를 비집으며 같이 들어오려던 석양빛은 소녀가 문을 닫자 종적을 감추었다.

         

        완연한 어둠이 내리깔렸다. 버멜은 미리 준비해 두었던 랜턴에 재빨리 기름을 먹이고는 불을 붙였다. 유리등 내부에서 일렁이기 시작한 불꽃이 두 사람의 인영을 걷어냈다.

         

        “…이쪽에 앉아.”

         

        자신에게 가볍게 목례를 한 에테르는 등받이 의자에 몸을 붙였다.

         

        정령에게 선택받은 종족이라고 일컬어지는 엘프족과, 그런 엘프와는 마도학적으로 완전한 대척점에 위치한 금안족.

         

        본래라면 두 종족이 이런 식으로 회동하는 장면은 게임에 없었다.

         

        그러니까, 비로소 알 수 있었다.

         

        이 세상은 게임이 아니고, 자신이 여태 플레이하며 알게 된 공략은 완전히 들어맞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굵직한 스토리라인은 그대로일 것이다. 가령 마왕의 부활은 미래를 알고 대처하더라도 막을 수 없는 기정사실이다.

         

        그런데도 이곳의 인물들은 자신의 예상을 벗어나 변칙적인 반응을 보이기도 한다. 당장 하스펠트 교수가 그랬고, 이 소녀가 그랬다.

         

        에테르는 한동안 입을 닫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녀가 입을 열자마자 랜턴 내 불빛이 한 번 흔들렸다.

         

        “우리 둘밖에 없네?”

        ─ 우리 둘밖에 안 남았네?

         

        버멜은 반사적으로 어깨를 떨었다.

         

        마지막 DLC를 플레이하며 몇 번이고 쌍욕을 내뱉게 만들었던 대사.

         

        에테르의 타락을 막지 못했을 시 최종장에서 그녀가 내뱉는 고정 멘트들 중 하나였다. 버멜은 가슴을 쓸어내리며 가까스로 맥박을 진정시켰다.

         

        우라늄 빛깔을 머금은 눈동자가 사방에서 굴러다녔다. 천장과 벽면을 번갈아 훑어 보며 무언가를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버멜은 그 시간을 여유 삼아 시스템창을 확인했다.

         

        ─ SYSTEM : 현재 세계가 멸망할 확률을 55퍼센트입니다.

        ─ SYSTEM : 현재 당신에게 특정 감정을 느끼고 있는 대상이 없습니다.

         

        다행히도 시스템상 문제는 없다.

         

        “패러데이 케이지….”

         

        주변 탐색을 마친 소녀가 피식 웃었다. 비틀어 맨 입매에선 장난기가 묻어나왔다. 최근 한 달 사이에 그녀가 자신에게 무표정 다음으로 가장 빈번하게 보여주고 있는 표정이었다.

         

        버멜은 이사장에게서 표창을 받고 돌아오던 중 에테르가 했던 행동을 되짚었다.

         

        멀리까지 볼 수 있는 마수가 있냐 없냐는 질문. 그 질문에 자신은 ‘있다’고 대답했다.

         

        겸사겸사 신뢰도 얻을 겸, 그 대답을 구체화할 시간이었다.

         

        “로즈마리.”

        “응?”

        “마왕군 4군 군단장의 도청을 막는 방법이야. 이런 식으로 사방에 철판을 덧대고 있으면 천리안을 쓰지 못하거든.”

         

        그 말에 에테르는 고개를 내빼며 작은 탄성을 흘렸다. 흥미가 생겼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본격적인 이야기를 진행하기에 앞서 해야 할 일이 남아있었다.

         

        버멜은 노트 한쪽을 뜯어다가 자신의 이름을 적어 그녀에게 전했다. 자신의 본명 석 자가 적힌 종잇장이었다. 조악한 명함을 받은 에테르는 피식 웃으며 반대쪽에 그녀의 본명을 적기 시작했다.

         

        두 손으로 내밀어진 명함. 버멜은 그걸 다시 두 손으로 받아들었다.

         

        에테르의 본명 석 자를 읽어들인 버멜도 마찬가지로 입꼬리를 올렸다.

         

        틀림없다.

         

        이 사람은 자신과 동향이다.

         

        DLC에 박한 리뷰를 남겼다가 여신의 손에 의해 아렌스 대륙으로 떨어진 지 어언 20년.

         

        그동안 많은 일이 있었다.

         

        처음에는 자신이 좋아하는 게임의 무대가 되는 세계에 들어와서 좋았었다. VR 너머로만 보았던 캐릭터들을 마주하고 그들과 더욱 더 생생하게 대화할 수 있다는 점이 실감이 나질 않았다.

         

        급기야 카우렐리아에서는 엘프들과 오랜 시간 유대를 쌓으며 이 세상을 마왕으로부터 반드시 지켜내겠다고 다짐을 하기에 이르렀다. 분명, 그때까지만 해도 미래 지식이 있었으니 할 만 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다른 점에서 한계가 찾아왔다.

         

        자신은 이곳 사람들과 본질적으로 섞일 수 없다는 것.

         

        기본적으로 살아온 문명이 다르고, 세계가 다르고, 사고방식이 달랐기에.

         

        본래의 자신은 인간이었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엘프의 시간관념이나 문화양식을 완전히 받아들이지 못했다.

         

        오죽하면 지금 틸레트에서 생활하는 것이 어느 면에서는 낫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그럼에도 아렌스 대륙의 인간족과, 지구의 호모 사피엔스는 완전히 같은 종족이라고 할 수도 없었고.

         

        결국 지구에서 살던 시절의 향수를 완전히 지워내지 못했다.

         

        혼자서만 미래를 알았기에, 외로웠다.

         

        앞으로 닥쳐올 재앙이 한둘이 아닌데, 털어놓을 사람이 없었으니 속이 답답해 미칠 지경이었다.

         

        에테르는 그러던 와중에 만난 동향인. 비록 그녀는 DLC에서 자신의 VR기기를 여럿 부숴먹은 괴물이었지만, 어디까지나 거죽만 그런 걸 뒤집어쓰고 있을 뿐이다. 본성은 전혀 다른 사람이라는 걸 여기서 완전히 알아냈다.

         

        자신감이 생겼고, 동시에 안도감도 들었다. 버멜은 시스템창을 꺼 두었다.

         

        반투명한 창이 사라지고 남은 자리에는 흑발 금안의 소녀가 자신을 느긋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나부터 얘기해도 돼?”

         

        서로가 알고 있었다.

         

        자신도, 에테르도 서로 할 말이 많다는 것을.

         

        회포를 풀려면 날을 새야 할 것이다.

         

         

        **

         

         

        종강했다고 해서 바로 기숙사에서 퇴거하는 건 아니다.

         

        지방에서 짐을 꾸리고 온 학생들을 배려하기 위해 아카데미 차원에서 일주일이라는 유예기간을 준다. 이때는 본가에서 올라온 귀족 집안의 시종들이 활발하게 활동하기 시작한다.

         

        살리에르 가문도 마찬가지였다. 로테가 가지고 갈 짐을 싸느라 살리에르 가문에서 온 시종 몇 명이 내 방을 점거하고 있었다.

         

        내가 가지고 다니는 것 기껏해야 세면 도구와 책 몇 권. 애초에 수도에 터를 잡았으니 여길 벗어날 일도 없을 것이다.

         

        이러는 동안에도 동아리 부실은 열어두고 있다. 정확히 말하자면 잠겨 있지만, 원할 때마다 따고 들어갈 수 있었다. 이용 빈도가 가장 많은 나를 위해 로르웰 선배가 여벌 열쇠를 빌려주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이 용도를 빙의자와의 밀회 장소로 쓰기 시작했다. 방학이라 누가 올 일도 없었고, 작당모의를 하기엔 여러모로 좋은 장소였다.

         

        기숙사 방을 점거하고 있는 메이드들을 피해 동아리 부실로 들어가니 버멜과 프레이가 기다리고 있었다.

         

        “야!”

         

        얘는 왜 여기 있는 거냐.

         

        “너 짐 안 싸?”

        “이미 다 쌌는데!”

        “그래도 왜 여기 있는 건데?”

        “심심하니까 그렇지!”

         

        그러면 왜 안 가는 건데. 내가 뚱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자, 꼬맹이는 고개를 쳐들며 물어보지도 않은 사실에 대답했다.

         

        “로테가 준비를 마칠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거든!”

        “둘이 같은 지역에 산다고 했거든. 아마 그래서 기다리는 걸 거야.”

         

        의문에 보충설명을 해준 건 버멜이었다. 

         

        “어? 내가 너한테 그런 말을 했던가…?”

        “저번에 술 마시면서 했었어.”

        “아하!”

         

        아마 아닐 거다. 그냥 버멜이 프레이에 대한 정보를 꿰고 있으니까 알고 있는 거겠지.

         

        이런 식으로 버멜은 나에게 도움을 주기 시작했다. 비록 로즈마리인가 뭔가 하는 녀석 때문에 밀회실 바깥에서는 그 범위가 제한적이었지만.

         

        “그러고 보니 로테가 너 부르던데?”

        “또 짬처리 시키려는 건 아니겠지?”

        “집 가는 길에 얻어탈 생각이면 가서 좀 도와줘라.”

        “으아.”

         

        자기 키보다 높은 의자에서 폴짝 뛰어내린 프레이는 궁시렁거리며 부실을 나갔다.

         

        문이 덜컹, 하고 닫히는 소리가 났다. 우리는 어느 때처럼 부실 한쪽에 마련해 놓은 밀회실로 들어갔다.

         

        “어제 하던 이야기 마저 하자.”

         

        의자에 나앉은 버멜이 짐짓 한숨을 쉬며 두꺼운 공책을 꺼내들었다.

         

        랜턴 하나에 노트 하나. 이러고 보니 취조실 분위기가 물씬 난다.

         

        깃펜을 끄적거리며 잉크 상태를 점검한 그가 입을 열었다.

         

        “클라이스 하스펠트 교수에게 노예로 부려지기 전에 여기로 왔다는 거지?”

        “그래, 대학원 두 번 다니느라 죽을 맛이었다.”

        “…같이 생활하는 동안 뭐 이상한 건 없었고? 지나치게 플레어에 집착한다던지, 그런 거 말이야.”

        “저번에도 얘기했던 거 같은데. 플레어에 미친 년… 사람이었지. 아마.”

        “그거 너 때문이야.”

        “억울하네.”

         

        오랜만에 그 사람 얘기를 꺼내자니 자동으로 혈압이 오른다. 

         

        나는 이사장에게 불려가 귀족들이 있는 지하실에서 반역에 동참해 달라는 제안을 받았다는 것과, 그 사람들에게서 하스펠트 교수가 실종 상태에 있다는 사실을 전했다. 현재 버멜은 그 사태를 말끔히 정리할 방법을 찾아보고 있는 중이었다.

         

        “하스펠트가 납치되었다는 소리는 아마 맞을 거야. 그 사람이 죽으면 죽었다는 걸 알 수 있는 방법이 따로 있어.”

        “그래서 헤를라인 선생님이 북방 전선에 나간다고 하더라고. 지금이라도 말리는 게 좋을까?”

        “어. 기말 때까진 무조건 말려야 해. 별 일 없으면 클라이스는 마수에게 잡혔더라도 내년까지 살아 있겠지만….”

         

        잠시 숨을 고르는 버멜. 그는 한껏 진지해진 눈빛으로 말을 이었다.

         

        “메리가는 지금 북방으로 가면 죽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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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Magic Academy’s Physicist

The Magic Academy’s Physicist

마도 아카데미의 물리학자
Score 4.0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In an era when the power of Fire Magic was considered to have reached its limit, one girl began researching nuclear fu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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