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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75

       *

         

         왕실근위대는 크라실로프가 보유한 최정예 병과 중 하나였다. 시대별로 그저 명예직 정도로 불린 시절도 있다지만 전쟁 시절엔 아니었다.

         

         마족 전쟁 시절, 크라실로프의 왕은 거의 항상 전선에 직접 나서야 했다. 연이은 패전으로 실추된 왕권을 바로 세우기 위해서라면 야전지휘와 실질적 무력이 필수적이었던 탓이다.

         

         물론 그 시절의 왕은 그런 이유가 아니었어도 전선에 나섰을 인물이지만.

         

         어쨌건, 왕실근위대는 언제나 최전선 투입을 강요 받았던 부대이며, 왕의 신변 보호를 위해서라면 충성심과 애국심, 그리고 실력에서 항상 최고일 필요가 있었다.

         

         그 결과, 국가에서 가장 정예한 이들을 모아서, 가장 끔찍하게 갈아버리는 병종으로 취급 받았다. 왕이 전선에 나가야 했던 때부터, 용사가 마왕을 죽일 때까지 약 5년 간의 기간 동안.

         

         

         “선배님….”

         

         

         이반은 아연한 표정으로 쪽지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쪽지에 아무 의미 없는 숫자를 몇 줄 휘갈겨 쓴 듯한 이 낙서는, 지금은 사용되지 않는 옛 시절 전술 기호들을 의미하고 있었다.

         

         개중에서도 왕실근위대의 지휘통제용 난수 암호 체계다.

         

         이 암호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노바고로드 철수 작전.

        -00호 전사. 아군 손실 총원 23인.

        -01호, 11호 생환.

        -생환 총원 집결지, 프리첸카야, 대학, 00호 동상 앞.

         

         

         노바고로드 철수 작전이란, 선왕이 철수를 거부하고 거점 방어를 선택했던 그 전역을 의미한다.

         

         당시 크라실로프는 첩보 실패로 인해 마족군의 결집을 예측하지 못했다. 동부 전선에 몰려갔어야 했던 칠용장, 그을린 자 투모르가 직접 군세를 이끌고 전선에 참전했다.

         

         당시 연합 왕국의 작전 기조는 이랬다. 칠용장이 뜨면 해당 전선을 포기한다. 지연전을 벌이며 다른 전선의 지엽적 승리를 노리고 적군의 퇴각을 유도하는 것.

         

         칠용장은 인간이 대적할 수 없는 재난이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문제가 있다면 그 때, 사전에 칠용장의 움직임을 감지하지 못한 크라실로프는 해당 전역의 철수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는 점이다.

         

         수많은 민가, 철수 준비가 되어있지 않은 징집병들, 국체의 온존을 위해서라면 이들을 살려야 했다. 병사 하나하나가 드물어지는 시절에라면 더욱이.

         

         왕에겐 장성한 아들과 왕재를 타고난 손자, 손녀가 있다. 즉, 대체 가능한 인력이란 뜻이다. 그러나 병사들이 전멸한다면 이야기가 다르다. 북부 전선이 괴멸하면 그 다음은 프리첸카야가 될 테니.

         

         멸망한 다섯 왕국의 뒤에 크라실로프의 이름이 올라갈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선왕은 선택했다. 가장 합리적인 선택을, 웃으며.

         

         자신이 여기에 있음을 알리고, 칠용장을 도발하고, 마족의 군단장이 ‘가장 먹음직스러운 전술 목표’라고 생각할만한 대상을 스스로 자처하며.

         

         왕의 지연책은 그날 수만 명의 시민과 병사들을 구했다.

         

         왕실근위대는 왕과 함께 산화했다. 이반과 소수의 병력 몇몇을 제외한다면 그날의 생존자는 없다. 없어야 했다.

         

         

        -부스럭.

         

         

         이반은 쪽지를 만지작거리며 생각했다. 근위대의 난수암호에서 00호는 선왕의 코드네임이었다. 01호는….

         

         

         ‘근위대장.’

         

         

         용살자 파벨 세르게예비치 올로브.

         

         

         “저… 아저씨?”

         

         

         이자벨은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그의 팔을 톡톡 두드렸다. 이반의 시선이 그녀에게 닿자, 그녀는 움찔 떨며 애써 웃었다.

         

         

         “그… 얘 죽어요.”

         “아.”

         

         

         그제야 그는 자신의 손아귀에 컥컥거리고 있는 학생을 바라볼 수 있었다. 아무것도 모르고 쪽지만 전해준 것이 전부인, 축제를 한창 즐기고 있던 학생이다.

         

         이반은 조용히 힘을 풀어 그를 내려놓고는 짧게 고개를 숙였다.

         

         

         “미안하군. 과했다.”

         “아, 아닙니다! 네네, 저, 저는 그럼 이만!”

         “음.”

         

         

         학생은 덜덜 떨며 도망쳤다. 걱정스러운 눈으로 이반을 바라보던 이자벨은 조심스럽게 다가와 물었다.

         

         

         “많이 급한 일이에요?”

         “미안하군.”

         

         

         엄밀히 따지자면 이건 임무의 배임이다. 그에게 내려진 유일한 작전은 용사 파티 자제들의 신변 보호였으니까.

         

         죽었다고 여겨졌던 옛 시절의 생존자가 남긴 수상쩍은 쪽지 따위에 혹하는 것은, 굳이 표현하자면 적의 술수에 놀아나는 일일 수도 있다.

         

         하지만… 하지만.

         

         이반은 용살자 파벨을 기억하고 있다. 근위대장, 가장 충성심 높던 왕실 기사를. 신분과 나이에 대한 편견 없이, 이 시대 인물로서는 놀랍게도 그를 지도하고 이끌었던 사내를.

         

         그는 전쟁 시절을 그리워한 적이 없다. 그리워하기엔 적이 끔찍했던 시절이었으므로.

         

         그러나 그 시절에 함께 달렸던 영웅들은, 등을 맞대고 같은 피를 흘리며 싸웠던 그 사내들은.

         

         가로되, 애도하지 말라…. 그래서 애도하지 않았다. 언제든 그들의 곁으로 떠나게 될 위태로운 시절이니까. 저승에서 있을 재회에 기뻐할 순 있어도, 산 사람들의 땅에서 죽은 사람을 애도하진 않았다.

         

         그것이 못내 가슴 한켠에 걸려 있어서. 작은 가시처럼 쿡, 쿡 마음을 찔러대는 통에.

         

         이반은 입술을 꾹 씹으며 잠시 생각을 가다듬었다.

         

         

         “아저씨, 급한 일이면 가봐요.”

         “하지만….”

         

         

         이반은 그를 바라보는 다른 이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불안한 표정을 짓고 있는 에시디스와 무언가 복잡한 심경으로 그를 보고 있는 엘피헤라가 보였다.

         

         이들을 지키는 것이 그의 의무다.

         

         그리고 죽었다고 여겨졌던 전우를 찾아 가는 것은… 욕망이다.

         

         그는 의무와 욕망 사이에서 고민해본 적이 없다.

         

         

         “뭐야 그 시선, 지금 제가 그쪽 발목이라도 잡고 있는 것처럼.”

         “엘피헤라.”

         “네네, 엘피헤라에요. 엘프고, 마법사고, 강력하죠. 솔직히 말예요. 지켜달라느니, 호위를 요청한다느니 이런 말 진짜로 믿은 건 아니죠?”

         

         

         엘피헤라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 오전 내내 밀려서 이제 오후엔 내 차례였는데.

         

         

         “가요. 그런 얼굴로 같이 다녀봐야 양심만 찔리지. 인간이 감히 엘프를 지킬 수 있을 줄 알았어요? 여기 엘프들이 몇 명인데 그런 걱정을. 세상에나.”

         “맞아요, 삼촌. 저는 괜찮아요! 아, 여러분들도, 이거 잘 먹었습니다! 맛있네요!”

         “한 입도 안 드신 것 같은….”

         “에헤이. 우리 그런 거 신경 안 쓰기로 약속. 알겠죠?”

         

         

         이반은 조잘거리는 에시디스에게 감사를 담아 눈인사를 보내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잘 해결하고 와요. 가능하면 돌아와서 설명도 좀 해주시고.”

         “음.”

         

         

         경호 임무를 배임했으니 경호 대상에게 사유를 변론하는 것은 당연한 프로세스다. 이반은 이자벨의 말에 짧게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집결장소. 프리첸카야, 대학, 00호의 동상 앞.

         

         얀스크 대학에서 선왕의 동상은 정문 안쪽 광장 한 가운데에 있다. 인파가 가장 많이 몰려 있는 자리에.

         

         과연, 나무를 숨기려면 숲 속에, 사람을 숨기려면 그런 곳에서 해야 하는 법이다. 대부분의 정부 요원들은 한적한 곳에서 접선하지 않는다.

         

         이반은 무거운 발걸음으로 광장을 향해 떠났다.

         

         

        *

         

         

         “이거 만드는 법 좀 가르쳐줘요.”

         “음, 이자벨 양? 이게 그렇게… 마음에 드셨어요?”

         “아뇨. 솔직히 쓰레기 같은데 아저씨가 이거 먹고 울었잖아. 제대로 해드리면 좋아할 테니까.”

         “…이거 제대로 만든 건데요….”

         “그런 게 음식일리가…?”

         

         

         김치를 물에 끓이면 김치찌개다. (아니다.)

         

         그 간단한 레시피를 들은 이자벨은 머릿속에서 이 부스의 삼인방에 대한 평가를 소폭 하향조정했다.

         

         

        *

         

         

         동상 앞에 도착한 이반은, 한눈에 파벨을 찾아낼 수 있었다.

         

         두꺼운 로브를 입고 있는 수상한 사내가 석상을 올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애초에 이 광장엔 방첩사령부의 요원들이 빼곡히 깔려 있으므로, 저런 수상쩍은 복장으로 들어올 수 있을리가.

         

         거기에 저 체구와 체형은 이미 알고 있다. 이반은 훈련 받은 요원이므로, 체형과 기세 따위를 보고 인물을 유추해내는 것에 능하다.

         

         잊을 수 없는 등이니까.

         

         

         “선배님.”

         “아, 왔는가.”

         

         

         사내의 몸이 빙글 돌았다. 이반은 그제야 사내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덥수룩한 갈색 머리칼과 그 사이에 형형하게 빛나는 녹색 눈동자.

         

         한쪽 눈을 덮으며 뺨까지 이어진, 오래된 깊은 흉터.

         

         용을 사냥할 때 얻었다는, 아랫턱에서 목덜미까지 이어진 검은 화상자국까지.

         

         

         “전사했다고 들었습니다.”

         “시신은 확인했나?”

         “아뇨. 그땐 누구도… 하지만….”

         “농담이다. 여전히 딱딱하군. 더 심해진 것 같기도 하고.”

         

         

         파벨은 부드럽게 웃으며 다가와 손을 뻗었다. 죽은 자가 내민 손 같아서, 이반은 한참 제스처를 바라본 뒤에야 악수라는 것을 연상할 수 있었다.

         

         맞잡은 손은 단단했다. 여전히 전성기를 구가하는 것처럼.

         

         

         “죽었다고 여겨졌던 것은 나뿐만이 아니지. 우리 쓸모는 전사자 신분일 때에 더욱 빛나지 않나.”

         “왕명이었습니까?”

         “글쎄.”

         

         

         파벨의 웃음을 보며 이반은 인상을 찌푸렸다. 왕녀가 자신을 속인 것인가? 분명 왕실근위대의 생존자는 그 뿐이었다고 들었다만.

         

         이건 속일 이유가 없는 문제였다. 언더커버 요원으로 활용한다 하더라도, 왕녀와 그의 사이라면 이런 정보를 알려주는 것 정도는 할 수 있지 않았나.

         

         그날 이후 자신이 얼마나 고통스러워했는지 옆에서 지켜보고 있었으면서도.

         

         복잡한 심경이 드러난 탓인지, 파벨은 그의 어깨를 툭툭 치며 말했다.

         

         

         “잘 어울리는군. 폐하를 따라 기르기 시작했나?”

         “부끄럽지만… 그렇습니다.”

         “근사해. 거의 비슷하게 길렀군.”

         “예, 선배님.”

         

         

         이것이 정상인들의 사고방식이다. 이반은 마침내 마주한 이 시대의 정상인과 대화하는 상황에 퍽 큰 감명을 받았다.

         

         

         “편하신 자리로 모시겠습니다. 가시죠.”

         “아, 미안하네. 작전 중이라서.”

         “예…? 아, 활동하고 계셨습니까?”

         “그날 이후로 쭉, 지금까지 계속 그랬지. 자네도 마찬가지 아닌가.”

         

         

         이반은 잠시 머뭇거렸다.

         

         훈련 받은 요원은 짧은 대화 속에서도 많은 것들을 동시에 유추할 수 있는 법이다. 중의적 표현과 미묘한 함의를 파악하는 것은 기본 중 기본이니까.

         

         작전 중이라 자리를 이동할 수 없다?

         

         그런데 내게 암호문까지 보내가며 불러냈다고?

         

         그럼, 이 자리에 불러온 것 자체가 작전의 일환이었다는 의미로… 읽힐 수도 있는 말인데.

         

         

         “선배님.”

         “아, 이런. 내가 자네를 너무 어리게만 봤나. 실수했군.”

         

         

         파벨은 빙긋 웃었다. 훈련 받은 요원은 짧은 대화 속에서도 함의를 파악할 수 있는 법이니까.

         

         파벨 또한, 이반의 어투가 바뀐 것을 깨닫고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긴 시간 동안 꼬마가 사내로 성장했군. 내 사과하지.”

         “선배님.”

         “움직이지 말게. 사람들이 많지 않나.”

         

         

         다수의 인파를 두고 하는 협박이다.

         

         그가 직접 사람들을 도살하겠다는 뜻은 아닐 것이다. 정면에 서 있는 이반은 그걸 충분히 저지할 능력이 있으므로.

         

         그러니, 이건… 대량 살상이 가능한 무기가 있다는 뜻. 그것도, 이 근방 조력자의 손 안에.

         

         이반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반성한다.

         

         의무와 욕망 사이에서 욕망을 선택하는 것은 언제나 이토록 어리석은 일이다.

         

         그리고, 아카데미물에서 ‘상식’을 의심하는 것 또한 이렇게 한심한 일이다.

         

         축제에서 전투 이벤트가 일어나는 것은 상식이 아닌가. 고향의 음식(아니다.)과 옛 전우의 등장이 그를 안일하게 만들었다.

         

         두 번은 없다. 이반은 합리적인 사람이므로, 같은 실수를 두 번 반복하지 않는다.

         

         

         “귀관의 충성은 어디로 향하나.”

         “하하, 작은 이반. 이 상황에서 그걸 묻다니. 여전히 목숨 바쳐 무의미한 왕권에 헌신하고 있나?”

         “여전히?”

         

         

         이반은 파벨의 눈을 바라보며 허리 뒤로 손을 가져갔다.

         

         도끼는 없다. 작은 비수 한 자루와 권총 한 정 뿐.

         

         하지만, 무장의 부족함은 전투를 회피할 이유가 되지 못한다.

         

         

         “영원히. 그렇게 말했어야지. 우린 모두 같은 날 맹세했지 않았던가.”

         “이반. 의미 없는 짓은 그만 두게.”

         “내려와라.”

         

         

         이반은 짧게 감았던 눈을 뜨며 으르렁거렸다.

         

         여전히 선왕의 동상 앞에 서 있는 파벨을 향해서.

         

         

         “감히 네가 있을 수 있는 자리가 아니다.”

         

         

        *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아카데미 교사들은 이벤트 건너뛰고 보스전부터 시작하는게 아카데미물의 ‘상식’…이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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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Years Have Passed Since the Prologue

30 Years Have Passed Since the Prologue

프롤로그에서 30년이 흘렀다
Score 7.8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3 Native Language: Korean
I got transmigrated into a game I’ve never seen before. I thought it was a top-notch RPG and spent 30 years on it. I retired as a war hero and planned to spend my remaining time leisurely. But it turns out, it was an academy 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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