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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75

       

       

       

       

       

       

       

       

       

       

       ‘…….’

       

       제 얼굴이 얼마나 후끈거리고 있는지 모를 아리엘이 자신을 감싼 온기가 믿기지 않아 얼떨떨한, 그리고 수줍은 얼굴로 모닥불을 바라보았다.

       방금 전만 해도 살점을 사납게 물어뜯던 추위가 가시고, 물어뜯긴 곳을 따스히 어루만지는 온기가 느껴졌다.

       어느샌가 혹한의 겨울이 가고 이른 봄이 찾아온 것 같은 느낌.

       낯설디 낯선 온기였고, 만년설마저 녹여버릴 듯한 온기였다.

       

       심장이 빠르게 뛴다.

       처음 느껴보는 거센 박동이었다.

       무서울 정도로.

       

       인생 최고의 소설인 [용사 알페리온의 후일담]의 결말을 읽었을 때보다 족히 10배는 빠르게 뛰는 것만 같았다.

       이유 모를 뜀박질이었다.

       소설을 읽을 때와 비슷한 듯하면서도 다른 뜀박질.

       벅차오름? 감동? 흥분? 설레임?

       그 중 하나를 꼽기 힘든 뜀박질이었고, 그래서 아무 말도 아무 반응도 해내지 못 한 채 멍하니 불만 바라보아야 하는 아리엘이었다.

       

       극한의 추위로 인한 떨림이 점차 잦아든다.

       근육이 아릴 정도로 격했던 진동이 서서히 줄어들었고, 그 빈자리를 새로운 떨림이 장악해나간다.

       이제까진 외부의 자극으로 인한 떨림이었다면, 이젠 내부의 자극이 빚어내는 떨림 같았다.

       피부가 얼어붙는 듯 했던 고통스러운 떨림이 아닌, 부드러운 날개깃이 속을 간질어대 떨리는 떨림 같았다.

       

       당황스럽고, 긴장됐다.

       남성의 품이란 게 이런 느낌이었던 걸까.

       아버지의 품과는 결단코 다른 느낌이었다.

       아버지의 품은 그저 든든하고 포근한 느낌이었다면, 엘든의 품은 그것에 더해 구름 위를 떠다니는 듯한 몽글거림과 설레임이 느껴졌다.

       긴장을 푸는 순간, 푼수 같은 웃음이 나올 것 같았고 지금의 느낌을 들킬 것만 같았다.

       

       그 느낌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들키면 안된다는 생각이 드는 게 참으로 이상했고 어쩌면 들키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생전 처음 느껴보는 생경한 감각을 오롯이 느끼고 싶어 홀로 긴장의 끈을 놓지 않는 아리엘이었다.

       

       숨 쉬는 것조차, 눈을 깜빡이는 것조차, 손가락을 꼼지락대는 것조차.

       

       그것이 얼마나 부자연스런 반응인지 알 수 없었고, 그렇기에 참으로 풋풋한 숫처녀스러운 반응인지도 알 수 없었다.

       

       어떠한 말을 건네야 할까.

       고맙다고 하기엔 감춰둔 것이 들킬 것 같아 머뭇거려졌고, 이제와 미안하다고 하기엔 이미 그의 품 속에 깊이 들어와버린 터였다.

       두근거리는 심장.

       점차 후끈거리는 열기.

       이질적이면서도 기분 좋은 고동과 열기를 하나, 하나 느끼던 아리엘이 힘겨이 입을 열었다.

       

       “…넌 안 추워?”

       “오히려 따뜻한데?”

       “저, 정말?”

       “응.”

       

       6개월 간 북부령을 여행하다 한 생존담을 들어본 적 있었다.

       이례적으로 일주일이나 이어졌던 화이트 스톰 속에 고립되었던 한 연인의 생존담을.

       먹을 것도 두껍게 두를 것도 없이 죽음의 추위를 일주일이나 견뎌낸 생존담을 말이다.

       

       그리고 그 연인이 생존할 수 있었던 방법에 대해서도 들었었다.

       입은 것을 모두 벗어 바닥에 깔고, 가진 모든 것으로 몸을 덮어 냉기를 차단한 후, 나체가 된 서로를 부둥켜안았다던 방법을.

       서로의 속살과 은밀한 것까지 맞닿은 채, 체온을 나누었다던 방법이 떠올라버렸고.

       

       후끈!

       

       저도 모르게 그 모습이 상상되어버린 아리엘이 눈을 질끈 감았다.

       망측했다.

       부끄러웠다.

       품에 한번 안긴 것가지고 희한한 망상을 하는 자신이 망측했고, 서로의 살갗이 맞닿는다는 것이 너무도 부끄러워 몸서리가 처질 뻔했다.

       

       “…….”

       “….”

       

       타닥대는 불소리만이 가득한 동굴.

       밤이 깊어진 듯함에도 바깥은 여전히 세찬 바람소리가 울리고 있었고, 온통 새하얗다.

       다행인 건 망상의 늪에 빠져있던 사이, 그 바람소리와 백색의 향연이 정점을 찍은 후 서서히 약해지고 옅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고비를 넘어가고 있는 것.

       엘든의 품 속이라 그런지 몰라도, 동굴 내부도 다소 포근해진 듯했고, 모닥불에 쓸 불쏘시개도 적당히 남은 터라, 더 이상 엘든의 품을 빌리지 않아도 될 듯했다.

       

       물론 이 품이 혹한의 행군 끝에 만난 온천처럼 너무도 따스하고 포근해 벗어나기 싫었지만, 제 욕심으로 엘든을 힘들게 하고 싶지 않은 아리엘이 우물쭈물하던 입술을 움직였다.

       

       “저… 엘든? 이제 그만 안아줘도 될 거 같아.”

       

       아쉽지만, 가만히 앉아 타인을 안고 있는 행위가 힘들 거란 걸 알기에 그리 읊조린 아리엘.

       한데, 들려와야 할 대답 대신 제 어깨에 기대어지는 무언가에 흠칫 놀라야 했다.

       가까이 느껴지던 숨결이 불현듯, 그 연인의 생존담처럼 찰싹 달라붙어 깜짝 놀라야 했다.

       

       뜨겁고 촉촉한 바람이 불어와 목덜미를 핥는다.

       끈적하고 음습한 느낌에 요추가 빳빳히 서고, 온몸이 경직됐다.

       머리가 녹을듯 뜨거워지고 솜털마저 곤두섰다.

       몸 속에서 이상야릇한 느낌도 들었다.

       찌릿하면서도 무언가 철렁 내려앉는 듯한 느낌.

       하마터면 비명이 나올 뻔했고, 진땀이 등어리에 배인다.

       와중에도 엘든의 숨결이 목을 간지럽히듯 불어와 절로 움츠려졌다.

       아리엘이 홍당무처럼 새빨개진 얼굴로, 포식자에게 목을 물어뜯기기 직전인 가련한 사냥감처럼 쩔쩔매며 입을 열었다.

       

       “에, 엘든…. 나 아, 아직 마음의 준비가…… 우, 우리 아직 이러기엔 이, 이르지… 아, 않을까…? 아니. 시, 싫다는 건 아닌데에……. 너, 너무 갑작, 스, 스러워서……. 이, 이런 거 처, 처음이라….”

       

       주절주절.

       말을 더듬으면서도 장황하게 풀어내는 아리엘.

       느닷없이 자신을 안은 품, 느닷없이 자신의 목을 뜨겁게 적시는 숨결.

       달아오르는 동굴 속에 밀착해있는 남녀.

       보는 이 하나 없는, 말릴 이 하나 없는 은밀한 곳에서 서로의 체온을 나누고 있는 남녀.

       야설을 본 적도 남자를 품어본 적도 없지만, 이건 명백한 징조(?)였고 숫처녀의 직감(?)이 강하게 알려오고 있었다.

       

       곧.

       

       뜨거운(?) 무언가가 벌어질 수도 있다는 것을.

       

       “그, 그리고 뭔가 여기는 우리의 처, 처음? 으로 추억되기엔 조, 조금 그… 그렇지 않을까…? 난 조금, 처음에 어울리는 그, 그런 곳, 에서… 시작하고 싶어서어….”

       

       이미 녹아버린 머릿속이 이상함을 감지하지 못 한 채, 생각나는 모든 것을 입술로 보내었고, 이미 꼬여버린 입술은 그 생각들을 걸러내지 않고 내보내버린다.

       이어질 후회의 몫은 제 주인이 책임질 것이라는 듯.

       그렇게 막무가내로 열변(?)을 토하던 아리엘이 숫처녀의 직감이 얼토당토 않는 개꿈이었음을 깨닫는 데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

       “…엘…든?”

       

       당최 들려오지 않는 대답에, 녹슨 경첩처럼 삐걱대며 고개를 돌린 아리엘의 시선에 제 어깨에 기대어 잠든 엘든의 얼굴이 보인 것이다.

       

       그 순간, 철렁 내려앉았던 심장이 스스로 구덩이를 파고선 지하로 다이빙해버리고, 열기에 녹아버렸던 정신이 싸하게 식어버린다.

       그제야 제 역할을 하기 시작한 머리가 상황을 정리하고, 입술은 정리된 것들을 걸러서 내뱉는다.

       

       “………자?”

       

       홀로 해낸 호들갑이 어처구니가 없어.

       홀로 저지른 망상이 황당해.

       홀로 펼친 내숭이 부끄러워,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었지만 움직일 수 없었다.

       잠든 엘든을 깨우고 싶지 않아, 혹여 눈을 뜬 엘든이 제 야단법석에 웃을까 싶어, 아무 일 없었다는 것처럼 꼼짝하지 않는 아리엘.

       

       ‘…미쳤나봐.’

       

       그렇게 그녀는 홀로 벌인 망상극에 속으로 채찍질하고 부끄러워하면서도, 이 아늑한 품 속에 조금 더 갇혀있어도 된다는 것에 기뻐할 뿐이었다.

       

       

       

       **

       

       

       

       “붉은 만드라고라를 찾다가 그만 길을 잃었어요. 설산꾼이신 거 같은데, 혹여 채집하신 것이 있다면 한뿌리만 파시겠어요? 값은 은화 5개를 드릴게요.”

       “여기 있으니 썩 가시오.”

       

       청명해진 아침의 동굴.

       설산꾼의 앞마당이었는지도 모른 채, 깊은 잠에 들었었고 눈을 뜨자 멀뚱히 우릴 보고 있던 설산꾼과 마주할 수 있었다.

       아리엘이 그에게 붉은 만드라고라 뿌리 하나를 후한 값에 샀고, 약재상의 말대로 꽤나 예민하게(?) 구는 설산꾼에 의해 동굴 바깥으로 쫓겨나듯 나와야 했다.

       

       “확실히 쌀쌀맞긴 하네. 약재상이 조심스러워 한 이유를 알 거 같아.”

       “그래도 붉은 만드라고라 뿌리를 구할 수 있어서 다행이야.”

       

       괜스레 해낸 푸념에, 아리엘은 붉은 만드라고라 뿌리를 모포로 소중히 감싸며 그리 답했고.

       우린 서둘러 하산하기 시작했다.

       화이트 스톰이 상륙했던 것이 무색하게, 세상은 맑고 깨끗하며 고요해져 있었다.

       

       그 길 위를 걷던 내게, 아리엘이 말을 걸어왔다.

       

       “저… 엘든?”

       “응?”

       “어, 어제 말이야….”

       “아. 어젠 미안했어. 나도 모르게 깜빡 잠이 들어서, 불편했지?”

       “아, 아니! 좋았…! 아, 아니! 호, 혹시 잠결에 뭐 들은거나… 기억나는 건 없지…?”

       

       정말 나도 모르게 잠이 들고 말았었다.

       아리엘의 머리카락이 풍기는 향긋한 내음과 인형을 안고 있는 듯한 포근함에 나도 모르게 잠이 들었던 것이다.

       근데, 뭔갈 듣거나 기억나는 건 없는데.

       설마, 무슨 실수라도 한 건가? 싶어 걱정스레 되물어야 했다.

       

       “왜? 뭐… 있었어…?”

       

       순간 흐르는 긴장감.

       잠결에 혹여 원작 망나니 기질이 나온 것은 아닐까.

       아리엘을 불쾌하게 만들 혼잣말을 중얼거리기라도 한 걸까.

       온갖 상상의 나래가 펼쳐졌고, 잠시 내 눈을 쳐다보며 침묵하는 아리엘에 진땀이 삐질 나려던 순간.

       히죽, 웃은 아리엘이 나를 앞질러가며 말했다.

       

       “아냐. 아무것도 없었어.”

       

       ……누가 봐도 무언가 있었던 거 같지만, 그 무언가를 구태여 들추지 않는 편이 좋을 것 같아 묵묵히 아리엘의 뒤를 따랐다.

       그렇게 꼬박 하루 만에 숙소로 복귀할 수 있었고.

       

       “흐윽…! 공자님께 큰일이라도 난 건가 싶어 이 소인, 밤잠을 설쳤사옵니다!”

       

       마치 파병을 나간 가족을 애타게 기다린 듯한 렌들러 영감의 눈물 겨운 상봉식을 매끄럽게 통과한 후.

       마치 사고를 친 가족을 기다린 듯한 레이첼의 날카로운 눈빛이 우릴 맞이했다.

       

       “무사하시리라 생각했습니다.”

       “역시 이 제자에 대한 믿음이 돈독하시군?”

       “별 일들 없으셨는지요?”

       

       아리엘과 나를 번갈아본 레이첼이 그리 물었고, 멀뚱히 서있는 아리엘을 대신해 어깨를 으쓱이며 냉큼 답해주었다.

       내 기억상으로는 별 일 없으니까.

       

       “별 일 없었는데?”

       “…그렇습니까. 그럼 준비하시지요.”

       “응? 뭘?”

       “숙소 뒤편에 공터가 있더군요. 오랜만에 맨손 대련으로 합을 겨뤄 배웠던 것을 복기하는 시간이 가지도록 하겠습니다.”

       

       냉정히 말을 마친 스승님께서 공터로 향한다.

       화이트 스톰 속에서 방금 복귀한 제자에게 맨손 대련을 명한 채로.

       

       으음.

       

       뭔가 화난 거 같은 건 착각이겠지…?

       

       

       

       “그, 그럼 난 붉은 만드라고라 뿌리 달여서 대공녀님께 가져다 드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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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migrated Into A Tragic Romance Fantasy

Transmigrated Into A Tragic Romance Fantasy

후피집물의 후회캐가 되었습니다
Score 10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4 Native Language: Korean
I was curious about what a female-oriented tragic romantic fantasy was like, so I skimmed through only the free chapters. And then… “…Ha.” I found myself transmigrated into one of the main male characters, destined for tears of regret, exhaustion, and obsession. So, the first thing that had to be done was… “I, Elden Raphelion, hereby declare my withdrawal from the competition for the betrothal of the Third Northern Duchess.” To escape this traged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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