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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75

     

    ―화아악!

     

    훈련장을 전부 물들일 정도의 풍성한 황금빛이 가득 찬다.

     

    아셀라가 그려낸 마법진이 하늘을 채우고 격렬하게 회전한다.

     

    어느새 생겨난 회색빛 구름에서 쏴아아아! 눈보라가 몰아치기 시작했다.

     

    시전에 성공한 아셀라는 지팡이를 휘둘러 눈보라를 거두었다.

     

    “후우.”

     

    어려운 마법이었기에 마나를 많이 소모했다. 아셀라가 이마의 땀을 닦으며 숨을 몰아쉬었다.

     

    “블리자드 시전도 이제는 완벽하구먼. 5위계에 도달했다 봐도 무난하겠어.”

     

    시모어가 수염을 튕기며 껄껄 웃었다.

     

    “정말요? 부족한 점은 없었나요?”

     

    “음. 앞으로는 반복해서 연습할 일만 남았다네. 더 가르칠 것이 없구먼.”

     

    “아직 한참 멀었는걸요.”

     

    마법은 아셀라가 유일하게 겸손해지는 분야였다. 그녀의 스승인 시모어만 해도 현자, 7위계에 도달해 인류 역사에 획을 그은 위인이다.

     

    단 하나의 숫자지만 마법의 위계에는 어마어마한 차이가 있다.

     

    5위계에서 6위계의 경지로 넘어가려면 1위계에서 5위계까지 올라온 것보다 배가 넘는 경험과 노력이 필요하다.

     

    6위계에서 7위계도 마찬가지다.

    마법의 경지는 끝이 없다.

     

    “더 가르칠 게 없다는 건 진심이라네.”

     

    “네?”

     

    평소와 조금 다른 시모어의 말투에 아셀라가 위화감을 느꼈다.

     

    “아셀라, 자네의 특기인 시공간과 얼음 마법은 내 특기가 아닐세. 자네도 잘 알겠지만 고위계의 마법사끼리는 혈족이 아닌 이상 같은 계열의 마법을 가르칠 수 없다네.”

     

    “그건… 그렇죠. 타고난 마력회로의 구조가 다르니까요.”

     

    “이 이상 자네에게 마법을 가르쳐도 지금처럼 극적인 도움은 주지 못할 게야. 내가 황실에 머물던 것도 전쟁에서 황제에게 빚을 졌기 때문이었네. 벌써 20년 전이지.”

     

    시모어가 고개를 주억이며 말을 이었다.

     

    “빚을 갚은 지는 오래지만 자네가 재밌어서 너무 오래 엉덩이를 붙이고 있었구먼.”

     

    고트베르크 그 친구에게 주문 가르치는 일도 재미있었지. 시모어가 덧붙였다.

     

    “그 말씀은… 황실을 떠나시게요?”

     

    “나도 내 마법을 개발해야 하지 않겠는가. 마법사의 삶의 목적이란 그런 것이니.”

     

    아셀라도 그의 말은 백분 이해했다.

     

    “마지막으로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가?”

     

    아셀라가 입술을 깨물었다.

     

    앞으로도 그에게 묻고 싶은 건 산더미같이 생길 것이다.

     

    하지만 지금 그녀의 경지로는 무엇을 물어봐야 할지도 알 수 없었다.

     

    “제 마법을 한 번 더 봐주세요.”

     

    “그야 어렵지 않다네.”

     

    아셀라가 호흡을 정돈했다.

     

    마력회로에 마나를 흘리고, 지팡이에 집중시켜 진을 그려낸다.

     

    “천리안.”

     

    ―화악!

     

    아셀라의 시선과 감각이 급변했다.

     

    몇 번째 시전하는 천리안일까.

     

    그녀는 마나의 여유가 있을 때면 항상 천리안을 연습했다.

     

    그간 황실에 대한 단서도 꽤 손에 넣었다. 대부분은 현 상황에서 쓸모없는 정보였기에 타율은 낮은 편이었다.

     

    아셀라는 어떤 미래를 봐도 자신이 늘 황제가 되어있었던 점이 마음에 들었다.

     

    ‘이번엔 어디일까.’

     

    시야갸 급변한다.

     

    다음 순간, 아셀라는 집무실에 있었다.

     

    몇 번 본 적 있는 장소였다. 천황궁, 황제의 자리다.

     

    아셀라는 비서관이 전해준 수정구로 보고를 받고 있었다.

     

    수정구에서 영상이 흘러나온다.

     

    ‘모험가 파티일까?’

     

    아셀라의 눈에 선두에서 검을 휘두르는 여전사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를 휘감은 신성한 오러. 가볍게 흔드는 손목에 들린 것은 틀림없는 성검이었다.

     

    ‘용사구나.’

     

    아셀라는 그녀의 정체를 꿰뚫어 봤다.

     

    ‘용사가 곧 나타나.’

     

    이 정보는 커다란 소득이었다.

     

    천리안으로 보는 미래라도 존재하는 인물이 없어지거나 하진 않는다.

     

    용사 정도의 인물이라면 세상에 나타나는 것이 필연일 터였다.

     

    만일 그녀를 먼저 월광궁의 휘하에 들일 수 있다면 파벌이 성장하는 데 어마어마한 도움이 된다.

     

    용사를 선두로 전사, 마법사, 치유사, 성녀, 네 명의 모험가가 함께 마족을 쓰러트린다.

     

    분명 용사파티다.

     

    ‘어라.’

     

    아셀라는 그들의 최후미에서 마족과 치열한 전투를 벌이는 치유사의 얼굴이 익숙하다고 생각했다.

     

    ‘라스?’

     

    라스 고트베르크가 그곳에 있었다.

     

    심지어 성녀는 그의 여동생인 네리아 고트베르크였다.

     

    어째서인지 지금 모습에서 그다지 달라진 점이 없었다. 오히려 사교 파티에서 봤던 모습보다 더 어려 보였다.

     

    ‘라스는 왜 저기 있을까?’

     

    아셀라의 궁금증은 풀리지 않았다. 다만 네리아가 성녀로 선택받은 점을 보아 현재에서 이어지지 않는 미래임은 분명했다.

     

    ―큭!

     

    라스가 마족의 공격을 받고 바닥을 굴러다닌다.

     

    심장이 철렁했지만 그것도 잠깐이었다.

    베테랑 모험가처럼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치유주문을 시전하는 라스를 보니 안심했다.

     

    ―아오, 드럽게 느리네 진짜!

     

    그러다 제풀에 지쳐 성서를 퍽퍽 때린다.

     

    그 꼴사나운 모습을 보고 아셀라는 속으로 웃음을 터트렸다.

     

    자신이 길러주지 않으면 라스는 온갖 생고생을 할 운명이 아닌가.

     

    스멀스멀 만족감이 차오른다.

     

    ―라스, 이쪽이야!

     

    하지만 다음 장면을 보니 어쩐지 조금 불쾌해졌다.

     

    용사가 멋들어진 검격으로 라스를 둘러싼 마족을 순식간에 토벌한다.

     

    ―라스, 괜찮아?

    ―덕분에 살았어. 항상 든든하네.

     

    용사가 라스를 일으키고는 해맑은 표정으로 격려해줬다.

    절친한 사이인 양 어깨동무를 하고 서로를 부축한다.

     

    목숨이 걸린 긴박한 전장에서 서로를 이름으로 부르고 신뢰하며 등을 맡긴다.

     

    물론 같은 전우이긴 하지만, 그래도.

     

    ‘용사도 여자잖아.’

     

    어쩐지 짜증이 난 아셀라의 집중력이 흐트러졌다.

     

    ‘윽.’

     

    시야가 일그러진다.

     

    마지막 순간, 수정구를 바라보던 자신이 종이에 무언가를 써내린다.

     

    아셀라는 본능적으로 그 내용이 중요하다고 생각해 확인하고 싶었지만 후욱, 금방 눈앞이 캄캄해졌다.

     

     

    장면이 바뀌었다.

     

    “폐하께서 쓰러지셨소!”

    “주치의는 어디 계시나!”

     

    같은 천황궁이다. 배경이 붉은 걸 보니 아직 현 황제의 시대다.

     

    ‘이건… 내가 황제가 되기 전이야. 아바마마가 시해당하는 사건일까.’

     

    아셀라는 이 광경이 지금으로부터 수년 후라고 판단했다.

     

    황제의 침실에서 앰브로시아가 나온다.

     

    “위독하시오. 경지에 오른 치유사가 더 필요하오.”

     

    그녀의 말에 한 젊은 주치의가 제안했다.

     

    “고트베르크 후작은 어떻겠습니까? 제국에서 내의원 외의 치유사라면 그 외에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성녀 후보의 부친이기도 하지요.”

     

    고트베르크 후작을 불러오는 쪽으로 이야기의 가닥이 잡혀간다.

     

    마침 후작가에는 텔레포트 게이트도 설치되어 있다. 고트베르크 후작은 이런 위급 상황에서 단숨에 달려올 수 있었다.

     

    ‘여기서 아바마마가 돌아가시겠지. 누군가 아바마마의 병세를 틈타 시해한 거야. 이래서 고트베르크 후작이 연관됐구나.’

     

    주치의들을 지켜보던 자신의 시선이 어디론가 향한다.

     

    처음 고트베르크의 이름을 꺼낸, 장발을 가진 치유사다.

     

    ‘모르는 얼굴인데. 내의원 주치의에 이런 자가 있었나?’

     

    자신이 지금 주목하고 있다는 점은 그에게 특이점이 있다는 뜻이다.

     

    ‘반역죄로 처형당한 건 주치의들과 고트베르크 후작이었어. 이 남자는 안 보였는데.’

     

    앞으로 있을 황제의 치유 과정에 음모가 있을 것이 틀림없다.

     

    그리고 음모를 품은 뒷배가 있다면 지금 아셀라가 바라보는 장발의 주치의일 확률이 높다고 추측됐다.

     

    ‘잠깐. 여기에 라스는 없어.’

     

    이 역시 현재에서 이어지는 시간이 아니다.

     

    그럼 혹시 자신의 현실에서 같은 상황이 된다면.

     

    이 자리에 고트베르크 후작이 아니라 라스가 불려올 수도 있는 걸까.

     

    그렇게 되면 황제를 시해했다는 반역죄는 라스가 뒤집어쓴다.

     

    ‘흐응.’

     

    아셀라는 라스의 목에 목줄을 채운 기분이었다.

     

    ‘라스는 이 사실은 꿈에도 모르겠지.’

     

    자신이 이 단서를 알려주지 않으면 라스는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다.

     

    설령 살아남아도 평민으로 몰락해 나중에는 전장의 최전선까지 끌려갈 일만 남는다.

     

    역시 자신이 없으면 하나부터 열까지 엉망일 남자다.

     

    가문이 멸문하고 본인은 파멸할 어마어마한 정보다.

     

    이 정보를 대가로 무엇을 받아내 볼까.

     

    용사 때문에 불쾌했던 기분이 조금 풀렸다.

     

     

    아셀라의 시야가 후욱! 현재로 돌아왔다.

     

    “깔끔한 시전이구먼. 무엇이 보였는가?”

     

    시모어가 아셀라의 천리안을 칭찬했다.

    아셀라가 입꼬리를 슬며시 올렸다.

     

    “단서를 찾았어요.”

     

    “허허, 그 시전을 보니 내 생각이 틀리지 않았다고 알겠구먼.”

     

    “하지만 스승님.”

     

    아셀라가 입술을 깨물었다.

     

    “제 천리안은 완전하지 않아요. 원하는 시간대도 정할 수 없고, 황실에 있는 장면밖에 안 보여요.”

     

    “마법의 경지야 앞으로 자네가 점차 올려야 할 것이라네. 그 누구도 도와줄 수 없어.”

     

    시모어가 허리를 숙이고 아셀라와 눈을 마주쳤다.

     

    “천리안은 시전하는 장소에 따라 보이는 것이 바뀌기도 한다니 참고해 보게나. 황궁 밖으로도 나가보는 걸세.”

     

    “황궁 밖으로….”

     

    시모어의 마지막 조언에 아셀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만날 일이 있다면 자네는 분명 대마법사가 되어있을 걸세. 기대하겠네.”

     

    마지막 인사와 함께 시모어가 아셀라에게 작은 함을 하나 넘겨주었다.

     

    “스승님, 이건요?”

     

    “마법의 도움이 필요할 때 열어보게나. 자네의 혼약자와 함께 해야 할 걸세.”

     

     

     

    그날의 수업이 끝나고, 시모어는 아무 미련 없이 황실에서 모습을 감추었다.

     

    ‘황궁 밖으로.’

     

    그간 새로이 마련한 업무실에서 아셀라는 서류를 확인했다.

     

    다른 파벌의 동향에 대한 보고서 하나를 집어 들었다.

     

    [1황녀파 야만족 토벌 출정 계획]

     

    “황녀님, 장기 휴가 신청입니다.”

     

    때마침 라스가 들고 온 휴가 신청서를 보자마자 아셀라는 외출 계획을 완성했다.

     

     

     

    ***

     

     

     

    “다녀오셨어요, 오라버니!”

     

    텔레포트 게이트를 나오니 네리아가 활짝 웃으며 나를 맞아줬다.

     

    “오랜만이구나, 라스. 건강해 보여서 안심했다.”

     

    아버지에게도 귀환 보고를 하고 있으니 이어 호위기사들과 함께 귀빈이 도착했다.

     

    두말할 것도 없이 나를 따라온 아셀라다.

     

    “존안을 뵙습니다. 다시금 저희 영지를 찾아주셔서 감사드립니다, 황녀 전하.”

     

    아버지가 아셀라에게 예를 표했다. 나 역시 지금은 고트베르크의 인간으로서 아셀라를 맞는 것이 예도였다.

     

    “환영을 받아들이마. 당분간 그대의 땅을 거닐겠다, 고트베르크 후작.”

     

    아셀라는 작년에 처음 후작령에 왔을 때와는 다르게 당당한 걸음걸이로 등장했다.

     

    내 앞까지 도달한 그녀가 슬쩍 고개를 돌리더니 네리아를 바라보았다.

     

    “여기서도 별로 안 컸네.”

     

    “네?”

     

    아셀라는 고개를 갸웃하는 네리아에게 대답하지 않고 또각또각 발걸음을 옮겼다.

     

    “라스, 황녀님께서 한층 위엄 있는 풍채가 되셨구나.”

     

    “그러게요.”

     

    키가 조금 커진 탓일까, 아셀라는 한결 자신감이 넘쳐 보인다.

     

    아직 괴리감은 있어도 점점 내가 아는 황제 아셀라의 모습과 비슷해지는 느낌이다.

     

    “저택 안내는 따로 필요 없으시죠?”

     

    “글쎄. 한 번 더 둘러보고 싶긴 해.”

     

    아셀라의 시종처럼 붙어서 저택가에 들어서니 시버스가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시버스는 나를 오랜만에 봐서 반가운지 얼굴을 활짝 폈지만 아셀라의 앞이라 크게 표를 낼 수는 없었다.

     

    시녀장 누님이 시버스에게 이야기를 전해 듣고는 아셀라에게 전달했다.

     

    “황녀님, 후작가에서 본관에 머무실 곳을 준비했습니다. 우선 이동하시어 휴식을 취하시지요.”

     

    지난번과 같은 방이라고 생각됐다.

     

    하지만 아셀라는 시녀장의 말에 턱을 치켜들며 거부 의사를 표현했다.

     

    “왜 방을 준비하게 했어?”

     

    “아, 후작가에 계신 동안 머무실 곳이 필요하시므로…”

     

    “나는 공자의 방에서 지내면 돼.”

     

    뭐?

     

    지금 무슨 소리를 한 거야.

     

    아셀라의 폭탄 발언에 다들 각양각색의 반응을 보인다.

     

    시녀장 누님은 난감해하는 눈치였고, 아버지는 놀라서 입을 벌렸으며, 시버스는 뭐가 그리 신났는지 양손을 마주잡고 몸을 배배 꼰다.

     

    네리아가 입가를 양손으로 가리고 말했다.

     

    “오라버니, 대단하시네요….”

     

    무슨 의미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휴가가 내게 있어 절대 편안하지 않으리라고는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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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Doctor Cured The Villainess And Ran Away

The Doctor Cured The Villainess And Ran Away

주치의는 악녀를 고치고 도망쳤다
Score 3.6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Becoming the physician of the villainess who brought about the world’s destruction, I tried to escape to survive, but the reactions were stran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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