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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75

       “아쉽지만 카렌 심문관님은 여기서 잠시 헤어져야겠네요.”

       

       “따로 입장했으니, 퇴장도 다르게 해야 의심을 사지 않겠죠.”

       

       “제가 숨기자고 한 거니까 무슨 일 생기면 저한테 바로 말씀하시구요.”

       

       “요나 님께 폐가 될 만한 일은 없을 겁니다.”

       

       “그렇다고 혼자 손해 보지 말라는 뜻이랍니다. 제가 쥐뿔도 없긴 한데…요즘 비빌 언덕이 생겼거든요.”

       

       이제는 슬슬 지상으로 올라가야 하니 눈물을 머금고 엘리의 등에서 내려온 상황. 옆에서 마력초 담배를 물고 한숨만 쉬어대던 엘리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설마 나 말하는 거야? 내 팔이 멀쩡했어도 신전 전체를 상대하는 건 미친 짓인데….”

       

       “네? 아니 뭐어, 엘리도 엘리지만 저는 다른 사람을 말한 거예요.”

       

       그리 말하고는 슬쩍 위를 가리켰다. 당연한 말이지만 1층에서 하늘을 올려다봐도 보이는 것은 울창한 나뭇가지와, 그 틈새로 보이는 하늘뿐.

       

       다만 내가 지금껏 보여준 행적이 더해지면 그 의미는 명확해진다.

       

       “진짜 요나 네가 성자라고? 난 믿기지가 않는데.”

       

       “당연하죠 실제로 성자는 아니니까요.”

       

       “정말 아닌 거 맞아?”

       

       “으음. 성자의 기준이 신전의 인정을 받은 여신의 대리자를 뜻하는 거라면 저는 정말 아니에요. 다만, 여신께서 제게 관심을 갖고 지켜보는 것은 사실이지만요.”

       

       “…그게 성자 아닌가?”

       

       고개를 갸웃거리는 엘리. 옆에서 그 이야기를 듣고 있던 카렌이 성호를 그으며 경건한 태도로 입을 열었다.

       

       “그건 멸신전쟁 이전의, 동화책에나 나오는 성자의 기준입니다. 현재의 신격은 사랑의 여신 한 분만이 남아계시고, 여신님은 미궁의 조정에 집중하시는 중이지요. 즉, 더는 신화시대처럼 신격이 지상을 활보하는 일은 불가능하다는 소리입니다.”

       

       “오….”

       

       “그리고 요나 님은 지금 시대에도 신성력 없이 작은 성역을 펼치셨지요.”

       

       “오…?”

       

       그건 풀돌 여신상 덕분에 가능한 일이지, 내게 무슨 재주가 있었던 건 아니다.

       

       수상한 장난감으로 오해받을까 일부러 꺼내지 않고 몰래 성역만 펼쳤다 집어넣은 것이 문제였던 걸까.

       

       순전히 내가 힘들어하니까 여신이 성역을 열어준 거라 여기는 카렌이 맹신에 가까운 눈빛으로 말을 이었다.

       

       “아무리 이곳 미궁이 여신님과의 거리가 가깝다지만, 본래 성역이란 수년의 시간을 걸쳐 막대한 준비를 해야만 펼칠 수 있는 것. 아무리 작은 규모라지만 이리 간단히 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 음. 그게 말이죠….”

       

       “요나 님의 생각을 부정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어쩌면 부담스러울 수도 있고, 정말 그렇게 생각하시는 걸 수도 있고, 이유가 있어 아니라고 해야만 하는 상황일 수도 있지요. 다만 저는 그저 알려드리려는 겁니다. 요나 님이 받는 총애는 보통이 아니라는 것을. 그리고 요나 님에게는 충분히 총애받을 자격이 있다는 것을.”

       

       “…….”

       

       그리 말한 카렌이 피로한 얼굴인 채로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이제 할 말도 다 했으니, 먼저 가보겠습니다. 인질이 되신 분에게는….”

       

       “아, 레몬과 애플에게는 제가 잘 말해둘게요.”

       

       “그럼 요나 님을 믿고 먼저 가보겠습니다. 미리 입을 맞춰둔 대로 증언할 테니 안심하십시오.”

       

       “에이. 그런 걸 못미더워하지는 않아요. 오늘 수고 많았고, 다음에 또 볼일 있으면 봐요. …아니지, 그럼 문제 생기길 바라는 것 같네요. 볼일 없어도 심심하면 요정과 은화에 놀러 오세요!”

       

       “감사합니다. 그럼 이만.”

       

       고개를 꾸벅인 카렌이 먼저 비석에 손을 대고 지상으로 올라갔다.

       

       미궁에 들어올 때는 카렌이 번거롭게 기다렸다가 빙 돌아서 왔으니, 이번에는 우리가 나중에 나가기로 한 것이다.

       

       앞으로 30분 정도는 노가리까야 하는데….

       

       “엘리. 리디아 님. 지상에 올라가면 바로 집으로 돌아가기 전에 잠깐 들를 곳이 있는데 괜찮을까요?”

       

       “괜찮겠어? 아무리 몸은 회복됐어도 정신은 피곤할 텐데.”

       

       “요나. 혹시 에덴에 들르려고?”

       

       “맞아요.”

       

       일전에 레몬과 애플을 한번 구해 에덴까지 함께 갔던 경험이 있는 리디아는 단박에 내 의도를 알아차렸다.

       

       혼자 고개를 갸웃거리던 엘리가 무언가 생각났는지 귀와 꼬리를 쫑긋 세웠다.

       

       “아! 에덴이면 그 싸고 성능 좋지만 묘하게 나사 빠진 마도구만 팔던 곳 맞지? 거기 아직도 안 망했어? 내가 막 2층 넘어갈 때 몇번 들렀다가 식겁했는데.”

       

       “너, 너무하심다! 지금 우리 보스가 언제 망해도 이상하지 않다는 소림까?!”

       “그래도 저번에는 신제품으로 무려 언제 어디서든 설치할 수 있는 간이 안전지대 키트를 만든검다!”

       

       “오. 그건 좀 궁금하네. 안전지대 키트는 마탑이 공방 연합이랑 손잡고 만들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거잖아. 가격도 가격이지만 쓸만한 수준까지 만들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맞슴다. 하지만 보스는 해냈슴다. 가격은 절반 이하! 휴대성과 은밀함. 그리고 내구성까지 크게 밀리지 않슴다!”

       “안에 들어가서 쉬면 전신에 원인 모를 두드러기가 나고, 유지를 위한 마력 소모가 천문학적이라는 사소한 단점 빼고는 완벽함다!”

       

       “…쓰레기잖아.”

       

       “역시 그렇슴까?”

       “제가 그렇게 이건 아니라고 했는데도 강행한 보스가 나쁜 검다.”

       

       일단 울컥해서 반박하긴 했지만, 엘리의 시큰둥한 반응에 빠르게 태세를 전환하는 레몬과 애플.

       

       딱히 엘리의 싸우는 모습을 보고 쫄았다거나 그런 건 아니다. 진짜로 쓰레기가 맞아서 그런 거지….

       

       미궁에서의 활동은 숨 쉬는 것조차 조심해야 한다.

       

       이미 지도가 작성된 상층부라면 괜찮겠지만, 중층부만 가도 지도가 완전하지 않아 직접 몸으로 부딪쳐야 할 때가 많으니까.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독에 중독된다거나, 숨소리를 듣고 달려드는 몬스터라거나, 숨을 쉬려고 하면 반대로 숨이 안 쉬어지는 기이한 공간이라거나.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곳이니 항상 신경을 곤두세워야 하는 것이 미궁이다.

       

       유일하게 마음을 놓을 수 있는 곳은 작은 비석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안전지대뿐.

       

       하지만 그 안전지대가 너무 멀리 있다면? 혹은 운이 없어 안전지대를 오랫동안 찾지 못했다면?

       

       그럼 어쩔 수 없이 노숙을 강행해야 하는데, 이는 더욱 위험하지 않겠는가.

       

       하여, 고안한 것이 간이 안전지대.

       

       대충 요약하자면 장인들이 조립식 집의 도안을 설계하면, 마법사들이 그 재료에 일일이 마법을 걸어 특정 형태로 조립되도록 프로그래밍한 뒤, 공간 마법으로 크기를 왜곡시켜 작게 휴대할 수 있도록 한 것이 바로 간이 안전지대다.

       

       아무것도 없는 땅 위에 순식간에 작지만 튼튼한 집 한 채를 세우고, 주변에는 보이지 않도록 온갖 종류의 은신 마법이 걸려있는 고오급 종합 마도구.

       

       그게 요즘 하나둘 나오기 시작하는 간이 안전지대다.

       

       어찌나 홍보를 해대는지, 소재 팔러 길드에 들를 때마다 직접 시연한다거나 강제로 광고지를 쥐여주는 탓에 기억 못 할 수가 없겠더라고.

       

       그걸 혼자 직접 만든 건 분명 대단한 일이긴 하다. 지구로 비유하자면 동네 철물점 아저씨가 최신 전기차를 뜯어보더니, 그 비슷한 전기차를 만들어 내는 셈이니까.

       

       하지만 순수하게 감탄할 수는 없는 것이…부작용이 너무 치명적이지 않은가.

       

       숨 막히는 미궁에서 한숨 돌리려 설치한 안전지대에서 두드러기 때문에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마나 소모는 엄청나 파티의 마법사가 리타이어 하거나 기껏 캐낸 마석을 전부 소모해야 한다?

       

       이건 그냥 쓰레기다. 내가 아무리 이브를 아껴도 변명의 여지가 없네.

       

       한숨을 푸욱 내쉬며 레몬과 애플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수고 많았네요. 다만 이번 일로 두 분이랑 나눌 이야기도 있고…뭣보다 이브 씨랑은 저번에 진 빚이 있으니까요.”

       

       “아.” 

       “감별기 단검.”

       

       제작비 대신 언젠가 이브를 위해 한 번쯤 세계수의 권능을 써주겠다는 약속을 했었지.

       

       설마 성장에 도움을 주는 그런 권능이 나올 줄은 생각도 못 했지만…어쨌든 식물을 자라게 하는 정도는 지금도 가능하지 않은가.

       

       일단 어떤 능력인지 살짝 밝히고, 필요한 일 있으면 부르라고 해야지.

       

       속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자니 심심한지 발끝으로 땅을 이리저리 놀리던 리디아가 고개를 들었다.

       

       “요나. 혼자 가기 좀 그러면 내가 같이 가줄게.”

       

       “괜찮아요. 이번 일은 혼자 갔다 와야 하는 거라….”

       

       그리 말하며 어깨를 으쓱였더니, 왜인지 불안해 보이는 엘리와 리디아.

       

       단순히 내가 조금 전까지 목숨 걸고 싸웠던 것을 걱정한다기보다는 조금 다른 듯한….

       

       “헉! 엘리, 리디아 님. 걱정 마세요! 일 이야기 하러 가는 거지 절대 바람피우러 가는 게 아니니까요!”

       

       “누, 누가 뭐래?!”

       

       “으응. 그런 걱정은 안 해. …다만 일 이야기라면 더더욱 나나 엘리 선배가 같이 가야 하는 거 아냐?”

       

       제 발이 찔리는지 빼액 외치며 부정하는 엘리. 그리고 그런 엘리의 목소리가 시끄러운지 귀를 틀어막고 말을 잇는 리디아.

       

       둘의 반응에 낄낄 웃으며 대답했다.

       

       “별거 아니니까 같이 갈 필요는 정말 없어요. 그리고 일찍 들어갈 테니까 엘리는 안심하고 제 소원이나 들어줄 준비 하고 계세요.”

       

       “아.”

       

       “…그거 진심이었어?”

       

       “전 언제나 진심이었어요.”

       

       이미 소원까지 정해뒀을 정도로.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흐흐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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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acha Addict in a Matriarchal World

Gacha Addict in a Matriarchal World

남녀역전 세계의 가챠 중독자
Score 8.2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4 Native Language: Kor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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