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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76

     “맹약의 겁화, 타오르는 염화, 심연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암야의 상사화!”

     아르쉔 길라루스가 오는 바람에 풍석에 대해서 생각이 나기는 했지만, 사실 본래 목적은 여기에 있다.

     “예찬하라, 익스플로ㅡㅡㅡ젼!!”

     콰ㅡㅡ앙!

     지팡이 위로 솟구친 하늘색 불꽃이 협곡 사이로 가로지르며, 허공에서 크게 폭발한다.

     “오.”

     카르멘 왕비가 보낸 사람인 만큼, 미래에 풍석을 개발한 연구원 중 한 명인 만큼 실력은 분명 출중했다.

     “저기, 도련님.”

     “나도 알고 있으니, 그냥 그러려니 해.”

     “제가 무슨 말을 하려는 줄 아시고 그러십니까.”

     “마법사들 영창은 다 저 모양이냐고 물어보려는 거 아니었어?”

     “아닙니다만.”

     로버트가 정색했다.

     “아니, 도련님보다 제가 더 마법사들을 많이 봐왔는데 제가 도련님한테 마법사들의 주문 영창을 묻겠습니까?”

     “그럴 거라고 생각했는데, 내 예상이 틀렸나?”

     “전혀 아닙니다! 저 인간이 주문을 어떻게 읊든 그건 마법사들 개성이잖습니까.”

     익스플로젼 마법은 기본적으로 중급 마법사들에게 발현 방법은 똑같지만, 주문은 저마다 색다르다.

     “제가 묻고 싶은 건 저 인간, 협곡을 망가뜨릴 기세로 지금 쏴대는 것 때문에 그러는 겁니다.”

     “기세만 보면 그렇긴 하지.”

     “목도하라! 찬미하라! 어둠에서 피어난 한 봉오리의 불꽃을!!”

     지팡이를 계속 크게 튕기며, 연이어 계속 익스플로젼 마법을 난사하고 있다.

     “즐기게 놔둬.”

     조만간 죽을 양반인데, 저승에 가서 사신에게 자기가 생전에 무엇을 했는지 정도는 얘기할 업적이 하나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지브롤터 협곡에 파괴마법 마구 날렸다!

     풍석을 개발한 건 아직 완성된 게 아니니 그렇다 치고, 적어도 지브롤터 협곡에서 익스플로젼 마법을 난사한 건 나름 자랑거리 정도는 될 것이다.

     ‘손상은 전혀 없지만.’

     협곡은 그냥 깎아지른 절벽처럼 보이지만, 이건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절벽은 아니다.

     ‘겉으로 보면 그냥 회색 절벽이지만, 실제로는 마법으로 표면이 보호되고 있는 거대한 성벽이란 말이지.’

     누군가, 그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다.

     

     지브롤터 관문이 제국을 상대로 만든 인간의 요새라고 한다면.

     ‘지브롤터 협곡은 거인들이 만든 마법의 보루라고 했던가.’

     제국 방향으로 지어진 300m짜리 거대한 흙벽.

     그사이에 난 협곡은 거인 중 누군가가 흙벽 사이를 검으로 가른 흔적이라고도 하는데, 자세한 건 나도 모른다.

     중요한 건 이 협곡이 가진 ‘방어력’.

     ‘마스터 급이 아니면 제대로 상처조차 낼 수 없는 마법의 강도.’

     자연적인 절벽이라고 한다면 수많은 세월 동안 풍화되고 깎여나가기 마련이지만, 이 협곡은 그렇지 않다.

     

     “익스ㅡㅡㅡㅡ플로젼!!”

     아르쉔 남작이 이제는 자존심까지 박박 긁어모아 폭발마법을 사용하지만, 협곡에는 그을음조차 생기지 않는다.

     협곡에 상처를 제대로 입힐 수 있는 건 오직 마스터뿐.

     소드 마스터나 아크 메이지급으로 마나를 다룰 수 있는 자가 아니라면, 협곡을 향해 삽을 찌르든 주먹을 내지르든 폭발마법을 날리든 전부 통하지 않는다.

     “로버트 경. 이 협곡 말이야, 막 고대 신이 남긴 문명의 흔적이 아닐까?”

     “뭐라고요?”

     “그게 아니고서야 이렇게 수백 년이 지나도록 그대로 형태를 유지할 리가 없지 않은가.”

     “마냥 그렇지는 않죠.”

     로버트는 지브롤터 방향을 가리켰다.

     “저희 쪽에서는 파낼 수 있잖습니까.”

     “그렇지.”

     “제국 방향에서는 제대로 삽을 찌르지도 못할 정도로 단단하고.”

     “그렇지.”

     “제국의 마스터 클레이돌 후작이 자기 도끼를 매번 실험하겠다면서 지브롤터 협곡을 상대로 도끼를 휘두른다는 소문도 있습니다.”

     “그건 소문이 아니라 사실이야.”

     마치.

     “이 협곡을 두고 누군가는 ‘드래곤의 둥지’라고 부르기도 하지. 마치 드래곤이 자기 집에 방어마법을 펼쳐둔 것처럼.”

     “집주인은요?”

     “집은 비었어도, 방어마법은 남아있다거나 그런 거 아닐까?”

     누군가가 제국 방향으로만 절대적인 방어마법이라도 설치해 둔 것처럼.

     “아니면 저 먼 고대, 드워프들이 세운 장벽이라거나.”

     “드워프들은 전부 죽어버렸잖습니까.”

     “마찬가지로, 유산인 셈이지.”

     혹은 제국 방향으로는 엄청 단단한 강철의 판자를 세워둔 뒤, 그 뒤에 진흙과 점토를 발라 흙벽을 세운 것처럼.

     ‘협곡이 생기기 이전에도 왕국 쪽과 제국 쪽 사이에 갈등이 있었던 게 아닐까.’

     협곡은 우리 쪽에서는 힘 좀 강하게 주면 삽을 찔러넣어 파낼 수 있으나, 제국과 협곡 사이는 그런 게 불가능했다.

     ‘마법과 신의 기적이 아니고서야, 자연의 이치조차 거스르는 지형 같은 게 존재할 리가 없지.’

     분명 자연적인 현상은 아니다.

     ‘왕국이 괜히 천혜의 요새로 삼은 게 아니라고.’

     가장 확실한 가설로는 이 협곡이 실은 절벽처럼 보이는 마석의 보루로서, 부서지고 무너지지 않는 방어마법이 제국 방향으로 설치되어 있다고 의심하는 게 학계의 정설.

     “어느 쪽이든, 평범한 인간이 협곡을 그냥 쉽게 건드릴 수는 없어. 지브롤터 쪽에서 땅 파는 거라면 모를까.”

     그렇기에-

     “젠장!”

     중급 마법사, 아르쉔 남작의 실력으로는 협곡의 벽을 무너뜨리는 것도 불가능하다.

     ‘괜히 저기 협곡 위를 깎은 게 조상님들이 아니라고.’

     마스터가 아니면 협곡의 지형을 변화시키는 게 불가능하다.

     클레이돌 후작이 아무리 제국 방향 절벽에서 도끼를 휘둘러봐야, 흩날리는 건 그의 머리에서 흐르는 땀뿐이다.

     뭐.

     설령 이런 게 없었다고 하더라도.

     ‘제국이 협곡을 파낼 수는 없었겠지.’

     왕국 쪽에서 협곡을 파내려고 해도, 어지간한 인력으로는 토끼 굴 하나 만드는 것도 쉽지 않다.

     파려고 하면 왕국 쪽에서.

     그게 아니라면, 협곡은 그 어떤 방법으로도 쉽게 건드릴 수 없다.

     그 황제조차 포기했던 게 협곡 자체를 건드리는 일.

     “흐.”

     “어, 또 왜 웃으십니까.”

     “아니, 그냥.”

     새삼스럽지만.

     “이 지브롤터 협곡이 없었다면, 왕국은 어떻게 되었을까 싶어서.”

     * * *

     아르쉔 남작의 실력 테스트는 끝났고, 지브롤터 성의 바깥 거리에는 한창 사람들이 축제 준비를 위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다.

     그리고 여기, 광장.

     “어서 움직여!”

     수습 기사들을 비롯한 보육원 아이들 100명 모두가 나와서 삽을 들고 땅을 파고 있다.

     “저기, 도련님.”

     “뭐지, 엘리?”

     내 뒤에서 따뜻한 솜누스 차가 든 보온병을 든 엘리-아스타시아가 아주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래도 아이들인데, 저렇게 일을 시켜도 되는 건가요…?”

     “엘리.”

     나는 보육원 아이들을 가리킨 뒤.

     “왕국에는 노동법이 없어.”

     “…예?”

     “정확히는 고아들을 위한 노동법 같은 게 없다는 거지.”

     그들과 우리를 번갈아 가리켰다.

     “제국에서는 ‘모두’를 위한 법이 여럿 있지. 왕국 또한 마찬가지야. 법은 존재하지만, 그 법이 보호하는 대상은 오직 귀족이거든.”

     “어….”

     “아니다. 법의 보호를 받는 건 오직 귀족뿐이고, 법의 심판을 받는 건 평민 이하라고 해야 하나.”

     헌법이라는 것에 따라 군주가 법이라는 체계 속에 존재하는 제국과 달리.

     “왕국은 말이야, 500년 동안 오직 노스트럼과 그 아래 귀족들을 위한 나라였지.”

     왕국은 노스트럼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법인 국가다.

     “제국 입장에서 보면 그런 소리가 절로 나올 거야. 왜 지금까지 안 망하고 버텨온 거지.”

     정확히는, 왜 지금까지 우리한테 멸망당하지 않았던 거지.

     “보육원 아이들을 동원해서 삽을 들게 하고 축제를 위해 중앙 광장에 새로운 무대를 만든다고 해도, 누구 하나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지.”

     “어, 으음….”

     “제국에서 온 사람이 아니라면 말이야.”

     “…….”

     아스타시아는 엘리로서 침묵하기를 선택했다.

     결국 자신이 나서서 ‘이건 옳지 않아요!’라고 떠들어봐야, 결국에는 공허한 울림 뿐이라는 걸 잘 알고 있을 테니까.

     “저기, 저도 같이 가서 거들어도 될까요?”

     그 대신, 이 소녀는 자신이 조금이나마 작게 손을 보태려고 한다.

     “제가 같이 가서 일하면….”

     “안 돼. 엘리는 옆에서 내 보좌를 해야지. 메이드로서.”

     “그건….”

     “네가 저기 가면 애들이 더 불편해할 거야. 특히 저기 뒤에서 아이들을 돕고 있는 다른 화이트들이.”

     땅을 파고 있는 보육원 아이들과 어른들이 다시 교대한다.

     “쟤들이 저렇게 뒤에서 돕고 있는데, 네가 땅을 파면 쟤들도 같이 파야 하지 않겠어?”

     “으읏….”

     “사람마다 다 자기 역할이 있는 법이잖아.” 

     

     어른들은 아이들의 땀이 묻은 삽을 다시 받아 땅을 평평하게 두드리고, 그늘에 앉은 아이들에게 화이트들이 나무잔을 나눠주고 들고 있던 큰 나무병으로 물을 붓는다.

     “그리고 제국도 아동 노동에 관해서 그다지 할 말은 없을 거야.”

     “그건.”

     “신문에 나와 있더라. 10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공장에서 아동들이 노동하는 건 흔한 일이었다며.”

     “……할 말이 없네요.”

     아스타시아는 쓰게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그분은 제게 이런 걸 경험해 보라고 여기에 보내신 거겠죠…?”

     “그런 셈이지.”

     협곡은 너무나도 오랜 기간 두 나라를 갈라놓았기에, 서로 다른 문화에서 태어난 이들은 쉽게 융화될 수 없었다.

     “결국 뭐든지 직접 경험해보지 못하면 자세히 모르는 법이야.”

     왕국이 멸망하고 모르가니아 총독이 노스트럼을 관리하기로 한 직후.

     황제가 가장 먼저 했던 공식 행사가 지브롤터 백작이 된 나와 카르멘 총독, 그리고 일부 왕국 인사를 데리고 떠난 제국 투어였으니까.

     ‘제국의 모습을 직접 보지 못했다면, 평생 노스트럼이 옳다고만 생각하며 살았을 거야.’

     참으로 무서운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왕국에서는 귀족의 특권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그저 하찮게 여겨지고.

     하찮게 여기던 평민들이 마도공학과 법률로 귀족과도 같은 생활을 영위한다는 것.

     ‘그런 충격도 이제는 가속화되겠지.’

     조만간.

     지브롤터 협곡의 문이 수년 일찍 열리는 순간.

     ‘왕국의 부조리함에 목소리를 높일 제국 시민들은 한둘이 아니라서.’

     제국의 수많은 시민이 노스트럼의 실체에 대해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아스타시아처럼 나서려고 하겠지.

     ‘그 선두에, 아버지의 팬들이 있을 거야.’

     아버지의 화보를 보고 온 여러 여인이 왕국 국민의 삶을 보고 경악을 금치 못할 것이다.

     ‘고아들이 강제로 노동하는 모습을 보며, 자기네들이 과거에 겪은 아픔을 떠올리게 되겠지.’

     아동의 권리.

     ‘아동만 그러겠어.’

     그리고-

     “이봐! 이 여편네가 어딜 나와!!”

     막 삽을 들고 나온 남자 하나가 중년의 여인을 향해 소리친다.

     “이딴 데 나오지 말고 집에 가서 애나 봐!”

     “내가 나오고 싶어서 나온 줄 알아요? 당신 두고 온 거 주려고 온 거 아니야!”

     “흐, 흠! 됐으니까 빨리 들어가! 밥이나 해두고!”

     한 장면만 두고, 그 나라의 모든 것을 판단하는 건 분명 편협한 시각이다.

     하지만 저런 장면이 반복되고, 연이어 일어나고, 그것이 한 순간이 아니라 ‘일상과 상식’이라는 걸 깨닫게 되는 순간.

     ‘왕국 여자들이 사는 모습을 보고 바로 코르셋을 찢어버리고 싶어 할 걸.’

     아동의 권리.

     그리고, 여성의 권리.

     왕국에는 존재하지 않는, 제국에는 존재하는 것.

     ‘그러니까 문이 열리면, 많이들 오시라고.’

     제국의 입장에서 보면, 왕국의 여성들은 미개하고 아직 ‘깨어있지 않은’ 이들이다.

     ‘간섭하고 싶어서 참지 못할 테니까. 판은 마음껏 깔아줄 테니까.’

     그러므로, 그녀들은 협곡을 지나 왕국 곳곳으로 퍼져나가며 목소리를 높일 것이다.

     ‘이 꼴을 보면 참견하지 않고는 견디지 못할걸.’

     분명 많은 이들이 감옥에 갇힐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많은 여인이 지브롤터를 거쳐 노스트럼 곳곳으로 퍼져나갈 것이다.

     그들의 품에는 어느 한 남자의 사진첩이, 노스트럼을 향한 환상이 깃들어 있을 테니.

     “엘리. 내가 아는 사람이 한 말이 하나 있어.”

     황제가 그랬다.

     “자신이 겪은 것만 세상 전부라고 생각하고, 자신의 신념이 틀리지 않았다고 생각하며, 그 생각을 타인에게 강요하는 자야말로 가장 위험한 자라고.”

     제국일보의 공식 인터뷰에서 철학적인 모습을 보여주겠다고 쓰인 대본이기는 하지만, 말뜻에 담긴 근본은 똑같다.

     “엘리.”

     “네.”

     “엘리는 그래도 저 사람들이 제국에 있는 사람들처럼 지내기를 바라는 거야?”

     “…….”

     아스타시아가 작게, 남들에게 보이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네…?”

     “엘리가 바란다면, 나도 그렇게 해줘야지.”

     황태자도 속을 것이다.

     “노스트럼에는 귀족 밖에 없어. 평민도, 여성도, 아이도 없지.”

     “…….”

     “그러니 나부터 바꾸기로 했어. 생각을.”

     아스타시아로부터 들은 제국의 이상적인 모습을 흠모하여, 그레이 지브롤터가 왕국을 미개하다고 생각하게 될 거라고.

     “그런데 내가 이런 걸 아무리 노스트럼 사람들에게 이야기해 봐야 무슨 의미가 있겠나 싶더라.”

     자고로 가장 행동력이 넘치는 인간은.

     금전에 의해 일로서 행동하는 자도 아니고.

     협박에 의해 강제로 움직이는 인형도 아닌.

     ‘환상이 깨진 인간이 신념을 강요할 때가 제일 무서운 법이거든.’

     자신의 신념이 옳다고 행동하는 자가 가장 무서운 법이다.

     “그래서, 그런 건 다른 사람들에게 부탁 좀 하려고.”

     오라.

     제국의 깨어있는 여성들이여.

     아버지의 사진을 보고 노스트럼에 대한 환상을 키우고.

     아버지의 화보집을 들고 지브롤터 협곡을 지나 이곳에 오라.

     “제국 사람들, 아마 여기 오면 하고 싶은 말이 정말 많이 생길 거야.”

     그리고 노스트럼의 현실을 직시하고, 이 나라에 독을 뿌려라.

     “그러면 그 사람들 마음껏 말하게 해줘야지.”

     

     ‘계몽’이라는 이름의 역병을.

     

     “네가, 그걸 바란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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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Genius Villain of a Traitorous Family

The Genius Villain of a Traitorous Family

매국명가 간신천재
Score 7
Status: Ongoing Type: Author: , , Released: 2023 Native Language: Korean
The eldest son of a lord notorious for treason returns to the past. ‘A person adept at selling a country once can do it well again.’ However, in this life, ‘I will rise as the king of traitors.’ Beyond a directionless kingdom or a betraying empire, ‘Join me in this revolution.’ All for the sake of my que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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