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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76

       지금까지 가진 밀회는 총 세 번. 그 사이에 로테는 집으로 돌아가기 위한 짐을 다 쌌다.

        

       내가 그녀에게 물어보았다.

        

       “국경 근처까지 따라가도 될까?”

        

       살리에르 백작이 관리하는 영지는 서쪽 변경 지대에 위치한다. 수도로부터 5백 킬로미터 이상 떨어진 곳이다.

        

       황성에 진을 치고 있는 로즈마리의 스코프 범위가 4백 킬로미터 남짓이라고 한다. 마수의 눈을 피해 있기에는 최적의 장소였다.

        

       물론 다른 이유도 있었다. 그곳에는 수소탄 개발에 핵심적인 재료가 묻혀 있다. 플레어를 사용해서 핵무기를 개발해도 되지만, 그 재료를 얻는다면 45년도 수준의 기술만 가지고도 마왕군에 치명타를 줄 수 있게 된다.

        

       로즈마리가 성도에서 빠져나올 가능성을 고려하지 않은 건 아니다. 녀석이 감시하는 범위를 잘 몰랐을 때에는 그걸 두고 고민했었다. 그러나 버멜과 얘기를 나눈 이후로는 모든 안개가 걷혔다.

        

       ─ 로즈마리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겨울이 되기 전엔 수도에서 벗어나지 않아.

        

       빙의자 보증이 생겼다. 이젠 안심이었다. 

        

       내 질문에 잠시간 멍하니 있던 로테가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좋아.”

       “백작님께서도 친구 분을 보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로테의 말을 거들어가며 동조의사를 밝힌 건 옆에 있는 메이드였다. 이름이 샬롯이었나? 성도 봉쇄령이 해제된 직후 살리에르 백작가에서 보낸 시종이었다.

       

       나이는 우리와 비슷해 보였다. 말과 행동에 절도가 있는 사람이었는데, 메이드 일을 꽤 오랫동안 해 온 듯했다.

        

       “출발까지 사흘 정도의 여유가 있습니다. 다른 친구 분도 국경까지의 동행을 부탁하셨거든요. 그분께서 준비를 마치실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습니다.”

       “프레이 말인가요?”

       “네, 듣자하니 국경 너머에 볼 일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제국의 서쪽 너머로는 수인족의 땅이 위치한다. 정돈되지 않은 혼란과 약탈의 땅. 제국인들은 그곳에 사는 수인족들을 싸잡아 야만족이라고 불렀다. 

        

       프레이가 거기에 가려는 이유는 모르겠다. 국경 너머에 끝내주는 술이라도 있나?

        

       일단은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나중에 버멜에게 물어보면 되겠지.

        

       나는 동아리 부실로 향했다. 문을 따고 들어갔다. 부실 한쪽에는 토카막이 남아있었는데, 플레어를 실험할 때의 한 번을 제외하고는 쓰지 않은 녀석이었다. 그렇다고 이곳에 마냥 방치해 두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쌀 네 포대 분량의 무게에 달하는 간이 토카막을 들어 올렸다. 꽤 무겁다. 그래도 아예 못 들 정도는 아니었다.

        

       “…그것도 가져갈 생각이야?”

        

       버멜이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물어봤다. 아직도 나와 프레이의 걸작을 이해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버멜에게 처음 토카막을 보여줬을 때만 하더라도 엄청 당황해 했었지. 밀회 시간에 얘기를 나눠 본 결과, 내가 아닌 원래의 에테르도 비슷한 걸 만들었다고 하더라. 얘도 핵분열-핵융합 테크를 탄 모양이다. 

        

       다른 인물이 같은 행동을 하고 있었으니 버멜의 입장에선 간이 떨어질 만도 했겠다. 내가 물리학을 전공했다는 걸 알려주고 나서야 버멜은 겨우 안도하는 듯했다. 

        

       지금에 이르러서는 이 녀석도 나를 편히 대하고 있다. 학기 초 눈만 마주쳐도 당황하던 모습은 더는 찾아보기 어려웠다. 

        

       “당장 그게 급한 게 아닐 텐데.”

       “알아.”

        

       짐을 옮기는 것보다 중요한 것. 헤를라인 선생님이 성도에서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막아야 한다.

        

       둘째 날 밀회에서 버멜이 말했다. 헤를라인이나 하스펠트, 두 교수 중 한 명이라도 죽는다면 세상은 멸망한다고. 

        

       하스펠트 교수는 철의 탑이라는 곳에 갇혀 있을 확률이 높다. 버멜의 말이 맞다면 하스펠트는 그곳에서 1년하고도 반은 살아있을 것이다. 그에 반해 헤를라인은 성도에서 빠져나가는 걸 막지 못하면 무조건 죽는다.

        

       “넌 방학 동안에도 수도에 남아 있을 거지?”

        

       버멜이 고개를 끄덕였다.

       

       헤를라인이 밖에 나가지 못하도록 철저히 봉쇄하는 것. 그게 이 세상의 인과를 꿰뚫고 있는 빙의자의 역할이었다. 버멜이 여기 남아서 잘 해준다면 헤를라인은 살 수 있을 것이다.

        

       처음이 가장 중요하다. 헤를라인이 밖으로 나갈 수 없도록 하는 첫 단계를 완성해야 한다. 게임으로 치면 ‘공략 루트’라고 부르는 것 말이다. 이 표현은 버멜이 알려주었다.

        

       나는 토카막을 기숙사로 옮긴 뒤 새로 사귄 친구와 함께 성채 북문으로 향했다.

        

       은사의 죽음은 거기서 막아낸다.

        

        

       **

        

        

       로즈마리는 하품을 흘렸다.

        

       요 며칠 사이에 에테르와 엘프 하나 사이에서 미묘한 기류가 흘렀다. 그들을 감시하느라 잠까지 줄였다. 덕분에 머리가 지끈거릴 지경이었다. 중앙처리장치에 EMP라도 맞은 듯한 느낌이었다.

        

       한 달 정도 됐으려나? 어느 순간부터 에테르와 버멜의 관계가 급속도로 진전되었다.

        

       에테르는 틈만 나면 버멜에게 말을 걸었고, 버멜은 쉬는 시간마다 그녀 주변에서 맴돌며 관심을 표출했다.

        

       “둘이서 뭐 하는 거지?”

        

       로즈마리에게는 이해하기 어려운 현상이었다.

        

       “조금만 더 지켜보지 뭐.”

        

       그러다가 특별한 점을 발견했다. 학기가 끝난 직후부터 두 사람이 동아리 부실에 상주하게 된 것이다. 

        

       특히 부실 한쪽에 붙어 있는 창고에서 시간 차를 두고 같이 들어가 있다가 나온다. 속에서 뭘 하고 있나 확인하려고 했지만 전파가 차단당했다. 스코프에 잡음이 심해서 안쪽을 조명할 수가 없었다.

        

       왠지 모르게 오한이 느껴졌다.

        

       “왜 그러십니까?”

       “저 엘프, 가만두면 안 되겠어.”

        

       저번에 큰 언니와 서면으로 질의를 주고받은 것도 그렇고, 자신의 마도에 대처하는 방법도 알고 있다.

        

       “역시 날 알고 있구나. 이러면 성가신데.”

        

       일단은 더 지켜보기로 하자. 그녀는 계속해서 두 사람을 모니터링했다. 블랜튼도 곁에서 그 과정을 지켜봤다.

        

       화면 너머로 버멜과 에테르 두 사람이 좁은 창고에서 나오는 장면이 포착되었다. 그 이전의 장면은 물론 확인하지 못한다. 스코프 마법을 차단 당했으니까.

        

       “저기서 뭘 하고 나온 걸까.”

        

       거사를 도모하는 건가? 에테르를 회유하는 건가? 도대체 무슨 얘기를 하고 있는 거지?

        

       계속되는 의문에 로즈마리가 신음성을 냈다. 블랜튼 공작이 입을 연 것은 그때였다.

        

       “밀회를 하는 것 같습니다.”

       “내가 바보냐? 그걸 모르게?”

       “아뇨, 4석께서 생각하시는 그 건전한 밀회가 아닙니다.”

        

       로즈마리가 입을 떡 벌렸다. 

        

       “거, 건전한 밀회가 아니라니…. 서, 설마 그거…?”

       “네, 그게 맞는 거 같습니다.”

        

       갑작스레 현기증이 느껴졌다.

        

       “제가 보기엔 저 분께서 사랑에 빠지신 건 아닌지.”

       “헛소리 좀 작작 해, 블랜튼!”

        

       로즈마리가 제일 싫어하는 감정이 바로 연심이었다. 그런 선택지는 처음부터 그녀의 머릿속에 들어있지 않았다.

        

       아무 이유 없이 타인을 위하려는 마음. 그런 마음을 품었던 몇몇 동포들이 어떤 최후를 맞이했는가. 

        

       “노예로 수 년을 굴렀던 저 언니에게 연심이라고? 웃기는 소리 하는군. 더구나 금안족과 엘프의 상성은 최악이야! 마력파 위상이 서로 반대라 본능적으로 구역감을 느끼게 되어 있다고!”

        

       로즈마리는 그런 식으로 항변했다. 블랜튼이 보기에는 풋내기 소녀의 변명으로밖에 안 보였다.

        

       블랜튼 공작은 이곳에서 로즈마리보다 오래 머물렀다. 제국을 잠식하기 위한 교두보를 확보하고, 그녀가 성에 진입할 수 있도록 활로를 열어주기까지 수십 년이 걸렸다. 그동안 그는 수많은 인간 데이터를 학습했다.

        

       블랜튼은 알고 있었다. 사랑이라는 감정 하나가 집안 하나쯤은 쉽게 박살낼 수도 있다는 것을.

        

       “적국의 남녀가 서로 사랑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와닿지 않으신다면 마왕님께 충성하지 않는 금안족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도 비슷한 감정으로 정령과 여신을 대하고 있는 겁니다.”

        

       로즈마리는 턱을 괸 채로 침음을 흘렸다. 인정하기 싫을 때 나오는 자세였다. 

        

       “사람이라는 게 별 일 없이 한 눈에 반할 수도 있나?”

       “4석께서는 예전엔 인족이셨으니 잘 아실 것 아닙니까?”

       “몰라. 기억 안 나.”

        

       로즈마리는 생각을 그만두었다. 확실하지 않은 것에 신경 쓰고 싶진 않았다.

        

       이번에는 막대사탕 하나를 입에 물었다. 그냥 사탕은 아니다. 마력이 담긴 기호식품, 마소사탕이다. 핥고 있기만 해도 몸에 마력을 채워주는 간식이다.

        

       로즈마리는 스코프를 재차 펼쳤다. 현재 에테르는 살리에르 백작가의 소녀와 대화를 하고 있었다. 그 대화를 엿듣고 있던 로즈마리가 얼굴을 구겼다.

        

       “서쪽 국경지대로 간다고? 이거 큰일인데.”

        

       이러면 감시 범위를 벗어난다. 자신의 스코프 거리는 서쪽 국경까지 닫지 않는다.

        

       거사를 치르는 건 못해도 11월 말. 그때까지 로즈마리는 여기서 자리를 지키고 있어야 한다. 잠깐 동안 자리를 뜰 수는 있어도 며칠이고 부재중일 수는 없었다. 그러기에는 감시해야 할 사람이 너무 많았다.

        

       하는 수 없지.

        

       “블랜튼.”

       “예, 말씀하십시오.”

       “별동대를 줄 테니 2개월간 출장 좀 다녀와. 가서 에테르 언니가 뭘 하는지 보고, 회유할 수 있으면 접근해서 데려와. 겸사겸사 피치블렌드 광산에 들러서 그 용가리한테 일 좀 하라고 전해.”

       “알겠습니다.”

        

       고개를 숙인 블랜튼이 그대로 자리에서 물러났다. 로즈마리는 계속해서 에테르와 버멜을 모니터링했다.

        

       두 사람은 잡담을 나누면서 북쪽 성채로 걸어갔다. 들어보니 일상적인 얘기뿐이었다. 쓸만한 정보는 없었다.

        

       특이점이 하나 있다면, 에테르의 표정일까. 엘프와 대화하면서 그녀는 계속 웃었다.

        

       이상하다. 저 언니는 항상 무표정하게 돌아다니는데.

        

       “설마. 에이, 아니겠지.”

        

       쓸데없는 망상이다. 그보다는 저들이 어디를 향하는지 아는 게 중요했다.

        

       화면을 옮겨서 그들이 향하는 방향을 먼저 확인했다. 성채 내부에서 마도사들이 군마와 골렘을 정비하고 있다.

        

       성채를 훑어보던 로즈마리의 눈동자가 휘둥그레졌다. 자신이 감시 대상으로 지목한 또 다른 인물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헤를라인 교수잖아?”

        

       메리가 헤를라인. 플레어가 없던 시절, 클라이스 하스펠트와 함께 1차 저지선을 돌파했던 괴물.

        

       그녀가 나갈 채비를 하는 중이었다. 별일이었다. 로즈마리는 잠깐 생각하다가 그녀가 향하는 방향이 자신들의 본진이 있는 곳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러고 보니 작은 언니가 하스펠트를 잡아다가 마탑에 처넣었었지. 얘가 구출하러 가는 건가?”

        

       이제 알겠다. 이사장과 헤를라인, 에테르가 지하실에 모여서 어떤 얘기를 했는지.

        

       “쓰읍…. 저걸 보내, 말아?”

        

       로즈마리는 잠시 머뭇거렸다.

        

       인류는 이미 플레어라는 고급 기술을 손에 넣었다. 플레어의 개발로 인해 재앙급은 이제 쉽게 썰려 나간다. 여기에 골렘 운영에 천부적인 재능을 가진 헤를라인이 가세한다?

        

       3차 저지선이 한 번 더 뚫린다. 겨우 복구해 놓은 군단의 병력이 다시 증발해버린다. 

        

       하지만 보내는 것도 나쁜 선택은 아니다. 정령의 눈을 피할 수 있는 북극에서 그녀를 제거하는 것도 나름대로 이득이었다. 무엇보다도 마탑에는 2석과 3석이 남아있으니 마왕군 본진이 함락당할 가능성은 없었고.

        

       “역시 보내주는 게 맞겠지?”

        

       그래, 헤를라인은 보내주고 저 엘프놈은 못 가게 막아야겠다. 그게 전략적으로 옳은 선택이다.

        

       예상대로 버멜과 에테르는 헤를라인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무언가 할 얘기가 있다는 뜻이었다.

        

       “자, 어떻게 나오는지 봐 볼까?”

        

       어차피 자기 손바닥 안이다. 엘프놈이 어떤 식으로 설득하더라도 자신이 헤를라인을 북방으로 보내버릴 것이다.

        

       로즈마리는 실실 웃으며 양손으로 화면을 맞잡았다. 

        

       어디 한 번 말려 보라고!

        

       [선생님, 안녕히 다녀오세요!]

        

       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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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Magic Academy’s Physicist

The Magic Academy’s Physicist

마도 아카데미의 물리학자
Score 4.0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In an era when the power of Fire Magic was considered to have reached its limit, one girl began researching nuclear fu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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