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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76

       그리고, 그다음 날.

         

        황궁에서 몬스터 웨이브를 겪은 날로부터 겨우 이틀밖에 안 지났음에도 나와 에단은 평소의 일상으로 되돌아와 있었다.

         

        매일같이 해럴드에게 검술 훈련을 받는 블랙우드 가문의 귀공자 에단과 그의 전속 메이드인 릴리스의 위치로.

         

         

        내가 에단에게 어딘가의 이름 모를 귀족 사생아를 사칭했던 건 다행히 별 의심 없이 넘어간 듯, 다음날이 되어도 에단은 딱히 그에 대해 다시 추궁하지 않았다.

         

        거기에 더해 비밀까지 지켜주겠다는 확답까지 받았으니 나로서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상황이기도 했고.

         

        오히려 마음 자체는 이전보다 훨씬 더 편해지긴 했다. 카타리나에 이어 에단 한 사람에게 더 내 비밀을 털어놓고 나니 마음 한쪽이 조금 홀가분해진 기분이 들었기에.

         

        물론 내가 성녀라는 사실은 여전히 밝힐 수 없는 금단의 내용이긴 했지만.

         

        이건 가능한 한 무덤까지 갖고 가야 할 비밀이겠지. 『루미노르 아카데미』의 스토리를 생각하면, 이제 와서 교회에 몸을 의탁할 수도 없는 상황이니까.

         

        그렇게 하마터면 하루아침 만에 파란만장해질 뻔한 메이드 릴리스의 일상은 별다른 문제 없이 원래의 궤도로 돌아왔다.

         

         

        ‘설마 정말로 아무 일 없이 넘어갈 수 있을 줄은 몰랐지만.’

         

         

        이틀 전, 황궁 서문에서 마나 블래스트를 썼을 때까지만 하더라도 이런 일상을 다시 보낼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다행히 내가 마법을 쓰는 장면을 정면으로 본 사람이 세라핀 황녀와 에단 두 명뿐이었고, 그 두 사람이 나에게 협조적이었던 것이 천만다행이었지.

         

        뭐, 에단이야 꽤 오랫동안 나와 같은 지내온 정이 있으니 협조해주는 게 그리 이상하지는 않겠지만.

         

        황녀인 세라핀이 굳이 평민인 내 비밀을 지켜준다는 점은 의외로 여러 사람에게 이상하게 느껴질 터였다.

         

         

        ‘세라핀의 성격을 생각해 보면 오히려 당연한 선택이겠지만.’

         

         

        『루미노르 아카데미』에서의 세라핀은 언제나 최대 다수의 생명을 구하기 위한 미래를 생각하며 행동하는 캐릭터였다.

         

        일단 이틀 전에 있었던 그 사건에서 아그네스가 아닌 나를 데리러 온 것부터가 그 증거이기도 했고.

         

        왜 굳이 검증된 마법사이자 엘리자베스 가문의 후계자인 아그네스가 아닌 생판 모르는 평민 메이드 릴리스를 데리러 왔겠는가.

         

        그건 당연히 내가 아그네스보다 조금 더 협조적인 태도를 보일 것을 미래시로 보았기 때문일 터였다.

         

         

        처음부터 아그네스가 황궁 서문을 지켰던 원래 스토리와는 다르게 이 세계에서 황궁 서문을 수비했던 건 에단 리처드 블랙우드였고.

         

        동문에 있는 아그네스에게 해당 전장을 내버려 두고 서문으로 가야 한다는 제안을 했다면 아무래도 긴 설득이 필요할 터였으니까.

         

        그동안 아그네스가 막고 있던 황궁 동문의 다른 병사들이 위험해지는 것은 말할 것도 없었고.

         

         

        ‘그에 반해 나는 반강제로 데려가도 별다른 저항 없이 따라가는 모습을 미래시로 봤을 테니, 세라핀의 성격대로라면 당연히 릴리스를 선택하겠지.’

         

         

        나야 뭐 세라핀의 능력은 물론이고 황궁 서문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도 알고 있었으니 굳이 긴 설명이 불필요했다.

         

        물론 내가 세라핀에 대해 아는 것만큼 세라핀 또한 나에 대한 정보를 하룻밤 사이 많이 알아챘겠지.

         

        내가 세라핀의 능력인 미래시를 알고 있다는 점이라든가, 그 외의 여러 가지 비밀을 알고 있다는 것 정도까지도.

         

        아무튼, 그런 여러 이유 덕분에 세라핀은 그 상황에서 아그네스가 아닌 나를 선택했을 터였다.

         

         

        세라핀의 미래시가 가진 능력의 가장 중요한 점 중 하나.

         

        아무리 말이 안 되는 것처럼 보이는 미래더라도 세라핀의 미래시에 보인 미래는 일어날 가능성을 갖고 있다.

         

        비록 세라핀의 선택에 따라 미래시에 보인 일이 일어나지 않을 수는 있겠지만, 반대로 세라핀이 눈에 보인 그 미래를 선택한다면 높은 확률로 그 미래가 일어나게 된다.

         

        내가 마나 블래스트를 써서 킹 서펜트를 잡는 미래를 그녀가 보아버린 이상 딱히 귀족 마법사와 평민 메이드의 신분 차이는 그녀에게 더는 의미를 지니지 못했고.

         

        그저 두 사람 중 조금이라도 빨리 자신에게 협조적으로 나올 사람이 누군지 만을 선정했을 테지.

         

         

        실제로 내가 이것저것 캐묻지 않고 협조해준 덕에 킹 서펜트에게로 최대한 빠르게 이동할 수 있었고, 보스 몬스터를 처치하는 시간 또한 최대한 단축할 수 있었다.

         

        특히 킹 서펜트에게 통째로 잡아먹혔다가 구출된 두 명의 병사 중 한 명은 정말로 숨이 끊어지기 직전이었으니, 내 적극적인 협조가 틀림없는 도움이 되었겠지.

         

        만약 내가 아니라 아그네스를 동문에서 서문까지 데려갔더라면 여러 의미로 더 많은 희생이 발생했을지도 몰랐다.

         

        킹 서펜트에게 잡아먹혔던 병사들을 제때 구출하지 못했음은 물론이고, 어쩌면….

         

         

        “…….”

         

         

        마지막의 마지막 순간까지 킹 서펜트를 상대로 시간을 버티다가 쓰러진 에단의 그 모습이 순간적으로 눈앞에 아른거렸다.

         

        어쩌면 그 녀석이 이틀 전 전투에서 목숨을 잃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니 묘한 공포심까지도 드는 느낌이었기에.

         

        예전이었으면 딱히 어디서 죽든 말든 신경도 안 쓰거나 오히려 좋아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겠지만.

         

        왠지 지금은 그 녀석이 죽을 뻔했다는 사실에 미묘하게 가슴이 아려왔다.

         

         

        ‘딱히 에단 걔가 내가 모르는 데서 다치거나 죽어있는 꼴은, 별로 보고 싶지 않네.’

         

         

        뭐, 함께 지내온 세월이 있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감상이었다.

         

        내가 아닌 누구라도 한 사람과 하루에 4번 5번씩 얼굴을 마주하면 1년도 채 지나지 않아 정이 쌓일 수밖에 없을 테고, 심지어 나는 에단의 전속 메이드 노릇을 하면서 그걸 거의 3년이나 해왔으니까.

         

        릴리스로 빙의하고 첫 몇 달 동안 에단에게 가진 좋지 못한 감정은 이미 진즉에 다 씻어버린 후였다.

         

        그리고 어제 에단이 내게 보인 태도를 보면 아마 에단도 나에게 가진 좋지 못한 감정을 씻어낸 것 같고.

         

        아는 사람이 어디 가서 다치거나 죽는 꼴을 보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는 게, 그리 이상한 건 아니잖아?

         

         

        그 외에 다른 이유는…그냥 어느 날 갑자기 에단이 내 앞에서 사라져버렸을 때 그 찜찜함을 못 버틸 것 같아서이기도 했고.

         

        공식 스토리를 기준으로 에단이 사망하는 시점은 2부 중반. 아카데미의 학년으로 친다면 1학년에서 2학년으로 넘어가는 겨울방학 시기였다.

         

        아직 2년도 더 남은 때이니만큼 에단의 목숨 또한 최소한 2년은 더 붙어 있어야 정상이라는 뜻.

         

        그런 에단이 아카데미의 첫 번째 겨울방학이 오기도 전에 갑자기 죽어버린다?

         

        만약에라도 그런 미래가 생겨난다면 나 또한 묘한 죄책감을 떨쳐낼 수 없을 것만 같았다.

         

        내가 ‘미련한 메이드 릴리스’로 빙의한 이후 저지른 일들이 결과적으로 에단에게 이른 죽음을 맞이하게 했다는 뜻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심지어 에단은 2부 중간 보스임에도 불구하고 반드시 죽는 루트만 있는 캐릭터도 아니었다.

         

        에단과의 전투 이후 릴리스를 구출하지 않는다는 선택지를 고른다면, 중간보스인 에단의 목숨 또한 굳이 거둘 필요가 없었으니까.

         

         물론 대부분은 후반부 스토리 때문에 에단을 죽이고 릴리스를 데려가는 선택지를 고르겠지만.

         

        그래도 간혹 귀찮다는 이유로 죽이지 않고 플레이하는 사람도 그 비율이 낮지는 않았다.

         

        딱히 마족으로 타락한 것도 아닌 인간을 죽인다는 것에 거부감을 느끼는 사람도 있을 테고, 무엇보다 에단을 안 죽이면 2부의 진 보스인 해럴드와의 전투도 생략할 수 있거든.

         

         

        에단이야 『루미노르 아카데미』를 기준으로 혐성 악역이니 죽이는 것에 망설일 이유가 없더라도, 그 뒤에 이어지는 해럴드와의 전투는 여러모로 찝찝하기 그지없는 연출이었다.

         

        학대받는 메이드인 릴리스를 구출하기 위해 시작한 일이라고는 하지만, 결국 그로 인해 제국의 소드 마스터인 해럴드의 목까지 치는 결말이 되어버리는 게 릴리스의 구원 스토리 일부였으니.

         

        그 결과, 에필로그에서 블랙우드 가문이 몰락한 모습을 보게 되는 연출은 여러모로 영 씁쓸하기 그지없었다.

         

        게다가 죽이든 죽이지 않든 에단은 3부 스토리부터 퇴장하기 때문에, 릴리스가 없다는 것을 제외하면 게임 플레이에는 별 지장이 없기도 하고.

         

        한 번 죽을 뻔한 위기를 겪은 원작 게임에서의 에단은 3부 스토리가 시작하기 전 아카데미 자퇴를 선택한다.

         

         

        물론 릴리스를 데려가기 위해서는 에단과의 결전에서 그를 죽여야만 했고, 전생에서 릴리스 공략에만 500시간을 쏟은 나는 당연히 에단과의 결전 이후 거의 전부….

         

         

        ‘…괜히 찝찝해하지 말자. 어차피 게임 속에서 있었던 일이었잖아.’

         

         

        게임 속에서의 혐단은, 지금의 에단과는 다른 인물이었다.

         

        단순히 게임 속에 있는 캐릭터와 눈앞에 있는 인물이라는 차이점이 아니라, 그냥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것이 다른 인물이라고 보는 편이 옳았다.

         

        무엇보다 전생의 게임 속 혐단이 죽음까지 이르게 된 이유는 자신의 전속 메이드를 성노예로 만들고 학대했던 전과를 주인공에게 응징당한 결과였으니.

         

        지금의 에단은 그런 전과를 짓기는커녕 오히려 수많은 사람의 목숨을 구해낸 구원자나 마찬가지였다.

         

        자기 목숨이 거의 꺼지기 직전의 순간에도 어떻게든 버텨서 황궁 서문을 수비한 것은 아무리 치하받아도 모자란 수준의 공이었으니까.

         

        소시오패스가 아닌 이상 그런 애한테 어떻게 혐단이랑 똑같은 취급을 할 수 있겠어.

         

         

        어쨌든, 그 극한의 상황에서 세라핀이 아그네스가 아닌 나를 선택해준 덕에, 에단의 목숨은 아슬아슬한 순간 겨우 구해질 수 있었고.

         

        어떤 의미로는 나 또한 세라핀의 판단 덕에 구원을 받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뭐, 결과적으로는 이곳저곳에서 어떻게든 다 잘 풀렸으니까. 지금은 좋은 것만 생각하자.’

         

         

        굳이 안 좋은 생각으로 기분이 찝찝해질 필요는 없겠지.

         

        몬스터 웨이브를 사용한 황궁 습격 사건이 희생을 아예 일으키지 않았다고는 말할 수 없겠지만, 원래 스토리에서의 희생 규모에 비하면 당연히 지금 세계가 훨씬 피해 규모가 작았다.

         

         

        일단 확실하게 내가 개입해서 목숨을 구해낸 오귀스트 변경백 가문의 영애, 리지 린 오귀스트.

         

        어찌 보면 겨우 한 명의 목숨처럼 보이겠지만, 사실 그녀는 오귀스트 가문의 금지옥엽으로 자란 귀중한 장녀였으니.

         

        사실상 오귀스트 가문의 타락을 막고 이후 이어질 더 많은 희생을 방지했다는 점에서 단순히 한 명의 목숨 이상의 가치를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북문을 제외한 나머지 세 문에서의 희생 수준도 그 규모가 나름대로 축소되었고.

         

        원래대로라면 다른 지원 병력 없이 황궁 경비대로만 수비해야 했던 황궁 동문은 대규모 희생이 일어날 뻔했으나, 아그네스가 합류하면서 큰 피해 없이 막아낼 수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리고 남문에서는 황궁 병사뿐만이 아니라 일부 귀족 자제들까지도 몬스터에 의해 목숨을 잃을 뻔했으나, 세라핀이 등장과 동시에 한 차례 몬스터들을 정리해준 덕에 이쪽도 큰 희생 없이 막아낼 수 있었고.

         

        킹 서펜트가 나타난 서문은 당연히 막대한 희생이 있었지만, 이쪽마저도 원래 스토리에 비하면 그나마 적은 수준이었다.

         

         

       기본 줄거리대로라면 다른 병사가 전부 죽고 아그네스 혼자 남아있던 상황에서 세라핀이 합류하고 킹 서펜트를 처치하는 게, 원작 스토리에서의 정사.

         

        그렇다면 당연히 기존 줄거리에서 황궁 서문을 지키던 수비대는 거의 다 전멸했을 테지.

         

        반대로 이 세계에서는 에단과 내 활약 덕에 몇 명이나마 목숨을 건졌으니, 불행 중 다행이라고 말할 수 있었다.

         

         

        …그리고, 단순히 이런 공리주의적인 면에서의 좋은 점뿐만이 아니라, 내 개인적인 이득도 어느 정도 챙기긴 했으니까.

         

        킹 서펜트를 처치하면서 분배되어 들어온 2000의 경험치.

         

        그 경험치 덕에 릴리스는 무려 한 번에 3레벨을 올리는 쾌거를 이룩했다.

         

         

         

       『이름 : 릴리스 로즈우드 (Lilith Rosewood)

        칭호 : 용감한 전속 메이드

         

        성별 : 여

        나이 : 22

        직업 : 전속 메이드

        소속 : 블랙우드 가문 사용인

         

        공격력 : 13 → 23

        방어력 : 19 → 34

        지능 : 14 → 25

        매력 : 44 → 79

        운 : 1 → 2

         

        현재 레벨 : 6 → 9

        남은 경험치 : 657

         

        현재 보유 기술 >>

         

        클린

        충격파

        마력 화살

        마나 블래스트

         

        현재 체력 : 52 / 52 → 94 / 94

        현재 마력 : 941 / 941 → 1694 / 1694』

         

         

         

        황궁에서 킹 서펜트를 처치했다고 치하하며 주는 보상을 못 받는 거? 그딴 건 아무래도 상관없어.

         

        난 이미 이것만으로 좋아서 미쳐버릴 것 같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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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Became the Maid of the Lout Prince

I Became the Maid of the Lout Prince

망나니 공자의 메이드가 되었다
Score 7.6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3 Native Language: Korean
I transmigrated into a character from my favorite game in my previous life. Moreover, as the character I despise second most in the game. (Not a wasteman) The cover was designed by Deep Dark Wolf, and the typography was done by 유일유화 (Yu Ilyuhw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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