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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76

       *

         

         

         이른바 ‘훈련 받은’ 모든 요원들은, 한 번의 사소한 행동에도 수많은 의도를 내포하고 있다. 분노한 이반이 파벨을 동상 아래로 불러내는 것처럼.

         

         감히 선왕의 동상 앞에서, 감히 단상 위에서 그를 내려보면서, 왕실근위대의 지난 세월을 무의미하다 말하는 것은 용서할 수 없는 일이니까.

         

         그러나 동시에, 상대의 시선을 자신에게 잡아둠으로서 변수를 차단해야 했으니까. 상대의 목적과, 상대가 준비한 ‘한 수’가 무엇인지 모르는 상황에선 최소한의 변수가 최대한의 결과를 가져오는 법이니까.

         

         그리고 그건.

         

         

         ‘조력자가 있다.’

         

         

         그건 상대도 마찬가지란 뜻이다. 파벨 또한 ‘훈련받은’ 요원이니까.

         

         이반을 설득하고, 또는 이반의 분노를 부채질하는 상황 자체가 그를 지금 이 장소에 멈춰 세워두려는 의도를 품고 있다.

         

         거기에 더해 이반을 정면으로 상대한다는 뜻은 곧 조력자의 존재를 암시한다. 이반을 상대하며 동시에 테러를 벌일 수는 없다는 것쯤은 파벨도 알고 있을 테니.

         

         

         “….”

         

         

         

         

         이반은 시선을 고정한 채로 주위의 기색을 살폈다. 축제를 즐기는 행인들, 그의 주위를 감싼 인파 사이에서 도드라지는 이질감을. 정확히 말하자면….

         

         

         ‘시선.’

         

         

         이건 특별히 육감이라고 부를 만한 감각이 아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타인의 시선에 민감하다. 기본적으로 모두가 타고나는 감각이다. 모든 종류의 피식자, 또는 사회적 동물들이 가진 기초 감각이니까.

         

         그리고 인간은, 자연이 선택한 감각을 기술적으로 발달시키는 데에 탁월한 종족이다.

         

         

         ‘셋.’

         

         

         다만 시선을 느끼는 것 만으로도 상대의 위치와 방향을 모두 역산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인간은 정물이 아니다. 가만히 서 있다고 인식하는 순간에도 호흡, 감정, 그리고 주변 상황에 따라 언제나 미세하게 움직이고 있다.

         

         충분한 훈련을 받았다면 그런 특징조차도 기술적으로 발달시킬 수 있다.

         

         조금씩 변하는 미세한 시야각마저 자연스럽게 흘려서, 시선은 상대에게 못박힌 듯 고정한 채로 주변시야만으로 배경을 분석하는 테크닉이다.

         

         그렇게 산출한, 용의선상의 인물들은 총 셋.

         

         이제 저들의 정체를 확신할 수 있는 방법은, 하나.

         

         

        -철컥.

         

         

         뒤로 돌린 손이 권총의 그립을 움켜쥔다. 금속 뭉치가 마찰하는 차가운 소음과 함께,

         

         소리를 인지한 것은 마찬가지인지라, 파벨은 그의 손길을 눈으로 쫓으며 자세를 낮춘다.

         

         0.1초. 콤마 초 아래의 반응이다. 초인의 전투는 이토록 짧은 순간에, 서로의 눈과 반응만으로도 시작되는 법이다.

         

         

        -타앙—!!

         

         

         그의 소매에서 뽑혀 나온 것이 권총이란 것을 확인하자마자, 파벨의 얼굴에 의아함이 서린다.

         

         권총 따위로는 초인을 해칠 수 없다. 거기에다, 총구를 하늘을 향해 돌려—

         

         

         ‘하늘…?’

         

         

         파벨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는 이반의 손에 쥐인 권총이 불을 뿜는 것과 거의 동시에 뛰었다.

         

         허리에 감긴 벨트가 풀린다.

         

         

        -차륵, 차륵, 차륵.

         

         

         사슬이 감기는 소리와 함께, 파벨이 쥔 벨트가 어느새 길쭉한 형태를 띄고 단단하게 굳어갔다. 마법공학의 산물이다.

         

         [용격창, 올로브의 바늘]

         

         파벨이 이반의 눈 앞까지 달려갔을 때, 그의 손아귀엔 이미 한 자루의 창이 온전한 형태를 띈 채로 쥐어 있었다.

         

         

        -후우웅—.

         

         주위 인파가 반응을 하기도 전이다. 휘우뚱 느려진 시간, 행인의 소매가 너울지는 것마저 낱낱이 보일. 정지된 시간 속에서.

         

         창날이 쏘아져 날아간다. 소리보다 앞서서,

         

         이반의 눈동자는 처음부터 끝까지, 창대의 움직임을 타고 흐르며.

         

         검게 칠해진 단검 한 자루, 평범한 군용 나이프가 그의 손아귀에서 빙글 돌아 단단히 감기고.

         

         

        -카가각!!

         

         

         초인들의 격돌이 시작되었다.

         

         시간과 시간의 사이에서. 순간이 멈추고 찰나가 정지한 그 틈에서.

         

         시선과, 마력과, 감각과, 분노로서.

         

         

        *

         

         

         초인들의 전투는 신화적이지 않다. 장엄한 손속과 기묘한 오의가 뒤얽힌 환상 속의 싸움이 아니다.

         

         오히려 이들의 민낯은 보다 더 처절하다. 간합, 찰나, 시간의 분절. 그 사이에서 서로의 몸에 단 한 번이라도 닿기 위한 몸부림이다.

         

         상대시간 탓이다. 초인이라는 같은 카테고리 안에 묶여 있더라도, 개개인의 기량은 당연하게도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

         

         마력을 통한 신경 가속엔 한계가 명확하다. 갈무리할 수 있는 시간은 물리적 한계를 넘지 못한다.

         

         그러나 설령 초인들이라 하더라도, 사람의 육신으로 0.1초, 0.01초의 기록을 단축해 나가는 것은 매순간이 스스로의 극한을 갈아내는 일이다.

         

         따라서, 초인의 간합 사이엔 우위가 있다. 모두가 같은 시간 속에 살아갈 수는 없는 법이니까. 누군가는 다른 누군가보다 더 빠르고, 정교하고, 세밀하게 움직일 수 있는 법이니.

         

         

        -카앙!!

         

         

         창이 빗살처럼 날아들어 이반의 목덜미를 노린다.

         

         이반은 단검을 뽑아 창대를 비틀어 튕겨내며 시선을 돌렸다.

         

         파벨의 눈엔 당혹과 분노가 어려 있었다. 대충 그 의미를 파악하자면 이와 같다.

        ‘

         

         ‘대체 왜? 그리고 감히?’

         

         

         다른 감정이지만 원인은 같았다. 이반이 선공을 낭비한 사실에 격노하고 있는 것이다.

         

         초인의 전투에서 선공이란 그 의미가 다르다. 시간의 간합을 정돈하기도 전에 벌어지는, 일종의 전략적 급습이었으니까.

         

         첫 기선을 놓친 이후부터 이반이 오직 수비에만 전력을 투사하고 있는 것만 봐도 그렇다. 두 사람의 격전이 시작되고 한참동안, 이반은 수세에서 쉽사리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카앙!

         

         

         단검으로 장창을 상대하는 것 자체가 곡예의 영역이다. 파벨은 인정해야 했다. 이반의 실력은 그가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그 어린 시절의 신입 수준을 아득히 벗어나 있다.

         

         그렇기에 화가 났다.

         

         감히, 근위대장에게 선공을 양보하다니. 하늘을 향해 격발을 해? 고작 권총으로 할 수 있는 일이 대단하지 않다 하더라도, 그렇더라도.

         

         오만하다. 그리고 지금 이반은 그 대가를 받아내고 있었다.

         

         

        -카앙! 캉! 카드드득!!

         

         

         휘둘러치고, 끊어치고, 쏘아져 목덜미와 양 어깨, 심장과 명치, 복부와 두 허벅지를 거의 동시에 찔러 들어오는 창격.

         

         사람이 한 가지 무기로 익혀낼 수 있는 기교의 극한. 그 정수에 닿아 있는 기술이다.

         

         그러나 동시에, 이반의 눈은 그 모든 일격의 경로를 두 눈으로 쫓는다.

         

         

        -콰득! 키이잉!

         

         

         파벨은 인정했다. 신경의 마력 강화 수치가 그보다 낫다는 것을.

         

         이따금씩, 창을 다루는 그조차도 동체시력으로 쫓지 못하는 수준의 일격을 두 눈으로 온전히 바라보며 매 공격에 대응하고 있다. 괴물 같은 신경줄이라 할만 하다.

         

         그러나 준비된 무장의 격차가 그 모든 것을 상쇄한다. 선공을 가져간 상황에서 장창을 들고 있다면, 상대의 무장이 단검 한 자루에 불과하다면.

         

         설령 그 상대가 용사 막시밀리앙이라 할지라도 승산을 논할 수 있다…!

         

         

        -카앙!!

         

         

         창날을 튕겨낸 단검이 크게 흔들렸다.

         

         리치의 차이 문제가 아니다. 힘의 문제다.

         

         장병기가 더 큰 힘을 낼 수 있는 이유는, 장병기를 들고 있는 자의 근력이 더 우월하기 때문이 아니니까.

         

         근력을 첨단에 집중시키는 과정에서, 장병기는 원심력과 추력을 고스란히 활용할 수 있다. 일정 이상의 테크닉을 갖췄다면, 단검이 뽑아낼 수 있는 포텐셜은 ‘따위’로 취급할 수 있을 정도로.

         

         이반이 단검 한 자루로 창날을 막아내고 있는 지금 이 순간 자체가 차라리 기적이라 불러야 적당하다.

         

         

        -카드드득, 콰직.

         

         

         싸늘한 소리와 함께 단검의 날밑이 동강나 떨어진다.

         

         초인의 시간에서 벗어난 날은, 느릿한 궤적을 그리며 바닥을 향해 곤두박질 쳤다.

         

         

         “끝이다, 이반…!”

         

         

         제식 단검 한 자루와 달리, 용격창은 올로브 가(家)의 가보다. 만듦새 자체의 격이 다르다. 즉, 이반의 패배는 전투 시작과 동시에 정해진 것과 다름 없는….

         

         

        -철컥.

         

         

         날아드는 창날 끝에, 권총의 총구가 가볍게 올라섰다.

         

         

         “이제 전부 보았다. 파벨.”

         

         

         이반은 창날에서 시선을 떼고, 파벨의 눈을 똑바로 노려보고 있었다.

         

         보았다고? 뭘?

         

         파벨의 눈이 흔들렸다. 물론, 전투의 시작과 함께 이반의 시선은 언제나 창날을 쫓았지만… 그건 물론 대단한 동체시력이라 할 만했지만….

         

         

        -타앙—!!

         

         

         창날에 올라선 총구에서 불똥이 튄다.

         

         탄환에 맞은 창날이 흔들리며, 그 궤도가 비틀려서.

         

         이반의 뺨 근처를 긁고, 허공을 때린 뒤에야 멈췄다.

         

         그 사이에도, 이반은 파벨의 눈을 바라보며 움직이지 않고 서 있었다. 마치 당연히 그 일격이 빗나가리란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듯이.

         

         손목 한 번만 옆으로 꺾었어도 머리 전체를 날려버릴 수 있는 ‘사정권’ 내에 있음에도.

         

         시리도록 새파란 눈으로, 파벨을 우묵히 바라보며.

         

         

         “왕실근위대의 율법에 따라, 본관 이반 페트로비치는. 전 근위대장 파벨 세르게예비치 올로브에게 배반의 대가를 묻겠다.”

         

         

         철컥, 금속 뭉치가 마찰하는 소음과 함께, 이반은 권총을 들어 단단히 움켜쥐고 파벨을 노려보았다.

         

         

         “근위대장 파벨 세르게예비치 올로브의 직위를 해제한다.”

         

         

        -타앙—!!

         

         

        *

         

         

         엔리케는 종종 제자 루시아에게 그 시절 용사 파티에 대해 설명한 적이 있었다.

         

         가장 앞서 걷는 자, 막시밀리앙.

         가장 곧게 선 자, 질 베르.

         가장 흉포한 자, 에이나르.

         제일 재수없는 새끼, 베올그린.

         조금 꺼림칙한 여자, 파트리시아.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암살자, 엔리케. (자기주장이다.)

         

         

         그리고,

         

         

         “가장 눈이 좋은 녀석.”

         “눈이 좋다고요?”

         “그래. 그 녀석이 미숙할 때부터 그랬어. 보통 사람 본능이란게, 위험하면 눈을 감기 마련이잖니.”

         

         

         그래서 기초 단계에서부터 칼날이나 주먹 따위에 둔감해지도록 반사신경 훈련을 하는 편이다. 눈 앞에 들이닥치는 칼날에서 눈을 돌리지 못하도록.

         

         이반은, 처음부터 그럴 필요가 없는 녀석이었다.

         

         

         “다른 모든 기술들이 별볼일 없을 때에도, 보는 법 하나 만큼은 타고난 녀석이었지.”

         

         

         보는 것을 잘하니 배우는 것도 빠르다. 생존술은 물론이고 전투법 또한 그 녀석 앞에선 두 번을 시연할 필요가 없었다.

         

         다른 재능은 도드라지지 않았다. 특별히 강인한 것도, 특별히 재빠른 것도 아니었으니.

         

         하지만 ‘시야’ 하나 만큼은, 가히 초월적이라서.

         

         보는 것만으로도 자기 몫을 할 수 있는 녀석이라서.

         

         

         “그래서 우리가 다들 같은 파티라고 생각해버렸지 뭐야.”

         

         

         용사 파티는 7인이다. 척후병 이반을 포함해서. 그렇게 여겼던 탓에.

         

         정작 마왕성에 도착했을 때 척후의 부재로 기겁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더랬다.

         

         이젠 모두 추억이지만.

         

         

         “하지만 스승님. 그, 보는 것이란 게…?”

         “한 번 보면 익혀. 그 녀석은.”

         

         

         배우는 것이 아니다. 온전히 따라할 수 있다는 것도 아니다. 그런 재능이 있었다면 용사를 했을 테니.

         

         그러니, 이반의 재능은 한 번 본 것을 잊지 않는다는 의미에 가깝다. 온전히 ‘본’ 순간부터, 같은 공격과 같은 속임수에 결코 당하지 않는다.

         

         그 녀석은 이따금씩 ‘패턴파악’ 같은 기묘한 어휘를 쓰곤 했지만. 그거야 어쨌건.

         

         

         “그래놓고 한다는 말이 뭐? 훈련 받은 요원은 같은 것에 두 번 속지 않는다. 이러는 거 있지!”

         

         

         세상에 어떤 요원이 그런 훈련을 받아! 하며.

         

         엔리케는 깔깔거리고 웃었더랬다.

         

         

        *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와타시, 수상 이후부터 후원글을 보지 못했어요.
    사유) 후원에 이제 메세지를 작성할 수 있게 된 모양이더라구요. 굉장히 수상한 메세지들이 많이 왔어요.
    그래서 후원메세지를 감히 보지 못했어요…. 납쁜놈들…!

    하지만 와타시 힘을 냈어요.
    어제 실눈으로 조심스럽게 쌓인 후원 메세지들을 봤어요….

    그리고 울었어요.

    조만간 후원 감사 공지 다시 한 번 정리하면서 무릎 꿇고 사죄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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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Years Have Passed Since the Prologue

30 Years Have Passed Since the Prologue

프롤로그에서 30년이 흘렀다
Score 7.8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3 Native Language: Korean
I got transmigrated into a game I’ve never seen before. I thought it was a top-notch RPG and spent 30 years on it. I retired as a war hero and planned to spend my remaining time leisurely. But it turns out, it was an academy 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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