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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76

       “그런고로 다들 하나씩 뽑아가!”

         

       파스텔은 종이 상자를 흔들었다. 토너먼트 배정 번호가 적혀 있는 종이들이 바스락거렸다.

         

       “딱 하나야! 더 뽑고 싶어도 두 개는 안 돼! 그러면 욕심쟁이!”

         

       기권 불가 조항에 굴복한 앨시어가 머뭇거리다가 뽑아갔다. 그 이후 친구들이 한 명씩 나와 종이를 뽑았다.

         

       “다음다음!”

         

       파스텔은 손을 휘저었다.

         

       “내 차례야.”

         

       단상 뒤에서 뽑힌 배정 번호를 갱신하던 더스틴이 다가왔다.

         

       오잉.

         

       더스틴?

         

       성적순으로 자른 토너먼트 A인데 학생회의 현장 담당 잡일꾼, 더스틴이 있다구?

         

       파스텔은 눈이 동그랗게 됐다.

         

       “잡일 하려고 왔던 게 아니었어?”

         

       종이 상자에 손을 넣으려던 더스틴이 멈칫했다. 그러더니 당황하며 물끄러미 쳐다봤다.

         

       파스텔은 반색했다.

         

       “더스틴! 노력했구나!”

         

       입학 비공정에서 본인의 하위권 필기 성적에 씩씩대다가 연약하고 유약한 소녀―핑크핑크 파스텔을 골라 분풀이 대련을 신청했던 모습과는 천지 차이야!

         

       상자에 들어가려던 더스틴의 손을 잡아챘다. 손을 번쩍 들며 단상 아래를 내려봤다.

         

       “얘들아! 이것 봐!”

         

       시선이 확 쏠렸다.

         

       파스텔은 밝게 웃었다.

         

       “더스틴이 노력 끝에 최상위 성적을 얻었어! 너희 대부분은 입학 때부터 전투나 학문에 뛰어났지만 더스틴은 아니었기 때문에 더욱더 대단한 결과야!”

         

       우와우와!

         

       “이번 대회 다크호스네! 다크호스! 너희 아무런 준비도 없이 더스틴과 맞붙으면 큰코다칠 거야!”

         

       슉슉 퍽퍽 깨꼬닥이라구!

         

       더스틴이 경악하며 쳐다봤다. 그리고 단상 아래 애들의 시선을 돌아보더니 얼굴이 새빨개졌다.

         

       떨리는 중얼거림이 들려왔다.

         

       “너 가끔 이러는데 설마 입학 때 손수건 맞은 원한으로 일부러 이러는…….”

       “뭐가?”

         

       파스텔은 고개를 갸웃했다.

         

       일렁이는 분홍 눈동자가 바라보자 더스틴은 입을 달싹이더니 다른 느낌으로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돌렸다.

         

       “이, 일단 손 좀 놔줘.”

       “아! 번호 뽑아야 하는구나! 미안!”

         

       붙잡은 손을 놓아주자 더스틴은 자기 몫의 번호를 후다닥 뽑더니 원래 자리로 돌아가 번호를 갱신했다.

         

       “자! 다음다음!”

         

       테이블에 발을 얹고 삐딱하게 앉아있던 레너드가 걸어 나왔다. 주머니에 손을 넣고 불량한 자세로 멈춰서더니 번호는 안 뽑고 뒤편의 더스틴을 노려봤다.

         

       “야! 너 왜 나대냐.”

         

       번호를 갱신하고 뻘쭘하게 서 있던 더스틴이 움찔했다.

         

       오잉.

         

       파스텔은 눈이 동그랗게 됐다.

         

       “레너드, 지금 질투하는 거야?”

         

       레너드가 멈칫했다. 여러 의미로 경악한 표정으로 돌아봤다.

         

       “뭐?”

         

       파스텔은 단호하게 말했다.

         

       “그러면 안 되지! 마음속에서 질투심이 우러나올지라도 그렇게 표출하면 못 써! 더스틴이 얼마나 노력해서 끌어올린 성적인데! 입학 때 대련해 본 나는 확실히 알아! 더스틴은 엄청 노력했어!”

         

       레너드가 잠시 이마를 짚으며 눈을 감았다. 그러더니 더스틴을 삿대질하며 어이없어했다.

         

       “내가 왜 저놈을 질투해?! 한주먹 감이구만!”

         

       으잉.

         

       “야! 더스틴! 네가 말해봐라!”

       “어? 어?”

         

       더스틴이 당황했다.

         

       으이이.

         

       바로 친구를 윽박지르려 하다니.

         

       대장놀이가 취미인 애들은 이래서 곤란하다니까.

         

       파스텔은 종이 상자에서 대충 번호를 뽑았다. 레너드의 손에 쥐어주고 밀어냈다.

         

       “자자! 뽑았으니 자리로 돌아가! 어서어서!”

         

       고학년 체격의 레너드가 괴력에 휘청였다.

         

       “그걸 왜 네가 뽑는, 오? 아니다. 이거 할게.”

         

       뽑힌 번호 종이가 손에 들려 팔랑였다.

         

       “야! 나대는 놈! 이거 봐라! 대진표 갱신해! 한판 뜨자!”

         

       더스틴의 상대인 번호였다.

         

       오이잉.

         

       파스텔은 입이 세모 모양으로 벌어졌다. 번호를 뽑아준 자신의 손을 내려보며 경악했다.

         

       내 손, 이 상황에 무슨 번호를 뽑은 거야?

         

       더스티인!

         

       지켜주지 못해 미안해……!

         

       차마 더스틴을 볼 수 없어 고개를 돌렸다.

         

       그 방향에 있던 엘리가 악질을 보는 시선으로 쳐다봤다. 완전 악질 흑막을 보는 눈빛이었다.

         

       엘리, 왜 그런 눈으로 봐아?!

         

       파스텔은 굉장히 억울해졌다.

         

       억울억울.

         

       레너드가 내려가고 멜리사가 올라왔다. 푸른 눈동자가 파스텔을 미심쩍게 응시했다.

         

       조곤조곤한 목소리가 들렸다.

         

       “혹시 일부러 그러는 건 아니죠?”

         

       멜리사까지?

         

       내가 뭘 했다구!

         

       으아아!

         

         

         

       #

         

         

         

       토너먼트 A의 대진표가 완성되고 해산했다. 학생회 일원은 토너먼트 B의 대기실로 이동했다.

         

       파스텔은 엘리를 돌아봤다.

         

       “앨시어 대 멜리사네. 가문끼리 앙숙이긴 해도 대련에서까지 심하게 싸우진 않겠지?”

       “나야 학술 전공이라 전투는 할 줄 모르지만 벨라몬트와 캐머롯의 악연은 들어봤어.”

         

       으잉.

         

       설마 그 풍문에 크래프트의 흉흉한 이간질도 섞여 있는 건 아니겠지이.

         

       엘리가 고심했다.

         

       “중재자로 네가 대기하는 게 좋지 않을까? 교수님도 계시지만 둘은 가문의 위세가 만만치 않으니까 제때 말리기 난감할 수 있어.”

         

       으에.

         

       “더스틴은 어떻게 생각해? 더스틴?”

       “어?”

         

       혼자 생각에 빠져 있던 더스틴이 깨어났다.

         

       “미안 못 들었어. 뭐라 했어?”

         

       파스텔은 고개를 갸웃했다.

         

       “레너드와 붙는 게 신경 쓰여?”

         

       하긴 어려운 상대를 만났으니까. 나야 뚜샤뚜샤 해서 가뿐히 이기지만 동급생이라 하기엔 너무 곤란할 정도로 덩치 차이가 있으니.

         

       “뭘 그렇게까지 신경 쓰는 거야.”

         

       엘리가 더스틴을 한심하게 바라봤다.

         

       “네 승패에 좌지우지될 천사는 없어.”

         

       더스틴이 귀를 붉히며 창피해했다.

         

       “아니 그건 아니고. 어떻게 상대해야 할지가 너무 막막해서.”

       “엘리! 평소엔 사무 행정이라 더스틴이 일을 어설프게 하던 건 사실이지만 이건 엄연히 전투 영역이니 너무 나무라지 마!”

         

       파스텔은 자신의 가슴팍을 팡팡 쳤다.

         

       “더스틴! 고민 있으면 내게 상담해! 뚜샤뚜샤 빠샤빠샤의 비법을 알려줄게!”

       “뚜샤뚜샤 빠샤빠샤……?”

         

       더스틴이 멍해졌다.

         

       그러더니 무의식적으로 작게 중얼거렸다.

         

       “귀여워.”

         

       오잉.

         

       파스텔은 눈이 동그랗게 됐다.

         

       “그래? 고마워!”

         

       와아!

         

       칭찬은 언제 들어도 즐거운 일이야~!

         

       악마님도 자주 칭찬해 줬으면 좋겠는데!

         

       엘리가 더스틴을 매우 한심하게 바라봤다.

         

       “순진하긴.”

         

       더스틴이 시선을 피하며 귀를 만졌다.

         

       “어쨌든, 레너드를 어떻게 상대해야 할지 모르겠어.”

       “하긴!”

         

       파스텔은 팔짱을 끼고 고심했다.

         

       “대장놀이가 취미인 레너드와 아랫사람이 적성인 더스틴이라니, 상성이 안 좋긴 해.”

         

       그냥 둘이 같이 다니면 어울릴 텐데!

         

       더스틴이 말없이 멍하게 쳐다봤다.

         

       응응!

         

       네 마음 알고 있어!

         

       너무 막막하잖아!

         

       “하지만 파스텔의 특효약이 있다면 상성 관계쯤은 가뿐히 뒤집을 수 있어!”

         

       파스텔은 품에서 유리병을 주섬주섬 꺼냈다.

         

       “빠라밤~!”

         

       유리병을 높이높이 들어 올렸다. 유리병 속에서 노란 액체가 찰랑였다.

         

       파스텔의 특효약!

         

       무려 상대를 마비시킬 수 있어요!

         

       우왕.

         

       더스틴과 엘리가 슈퍼 울트라 초특급 아이템을 멍하게 올려봤다.

         

       파스텔은 으스댔다.

         

       “너희도 겪어봤듯이 이건 사람을 마비시킬 수 있어!”

         

       덩치 큰 레너드도 아마 한 방에!

         

       우왕.

         

       더스틴의 손을 잡았다.

         

       “스승님께 배운 게 있어!”

         

       분홍 눈동자가 순수하게 반짝였다.

         

       “처참한 패배보다 비열한 승리가 낫다!”

         

       참된 가르침!

         

       언제나 본받겠습니다!

         

       조용하던 악마가 어이없어했다.

         

       『그렇게까지 말하진 않았다.』

         

       그러더니 생각하곤 뒷말을 덧붙였다.

         

       『하지만 맞는 말이군.』

         

         

         

       #

         

         

         

       레너드는 토너먼트랍시고 주어진 검과 방패를 살펴봤다.

         

       “하 씨. 싸구려네.”

         

       내뱉은 말과 다르게 장비는 고품질이었다. 싱겁게 깃털검 같은 대련용 장비도 아니고 제대로 된 검과 방패였다.

         

       안전을 위해 날도 안 서고 여러모로 열화시키긴 했지만 그럭저럭 쓸 만은 하다.

         

       그래도 백작가의 자본으로 준비한 개인 장비와 비교하기엔 손색이 있어 기분이 썩 좋진 않았다.

         

       기껏 새 장비를 마련했건만 떨거지들이랑 똑같은 장비나 써야 한다고? 조합하게 이게 무슨.

         

       “하.”

         

       자신이 학생회였다면 진작 규정을 바꿨을 거다. 아니, 학생회에 가입할 수 있었다면 말이다.

         

       ―학생회 가입을 왜 안 받는 거냐?

       ―뿌루뿌 빠빠~!

         

       레너드는 상공을 올려봤다.

         

       괴상한 대답으로 말을 얼버무린 소녀가 빗자루를 타고 날아다니고 있었다.

         

       푸른 하늘에 분홍 머리카락이 흘러갔다. 소녀가 하얀 빗자루를 잡고 몸을 빙그르르 회전시켰다.

         

       “우와앙!”

         

       밝은 웃음소리가 울렸다.

         

       크래프트 가(家)의 소녀.

         

       그 악명대로 속내를 안 밝히고 사는 존재였다.

         

       발랄한 행동과 순진한 표정에는 정작 딴판인 행적이 그림자처럼 뒤따랐다.

         

       이중적, 모순적.

         

       무엇이 진실인지 어느 게 가면인지.

         

       학생회 가입을 막은 이유만 해도 그렇다. 발랄한 척 얼버무리긴 했지만 고심해 보면 이유를 추측할 수 있다.

         

       권력 독점을 위해 학생회에 권한을 집중시키고 원활한 내부 통제를 위해 인원을 최소화한 건가.

         

       손에 넣은 권한을 한 점도 나누지 않고 통제하에 두려는 시도는 권력 중독자의 전형적인 행태다.

         

       “우와아앙!”

         

       소녀가 위아래로 수직 비행을 반복하며 묘기를 부렸다. 즐거워하는 웃음소리가 울렸다.

         

       후작 각하의 퍼포먼스에 관중이 환호했다.

         

       이 와중에 민심 관리인가.

         

       존나 음흉한 애 같으니.

         

       고개를 돌렸다. 정면에서 복잡미묘한 얼빠진 표정으로 검을 든 더스틴이 보였다.

         

       레너드는 인상이 팍 찌푸려졌다.

         

       왜 저런 놈이 학생회에 있는 거지?

         

       ―왜 나는 안 되고 저놈은 학생회냐?

       ―잉? 그냥!

         

       그냥일 리가.

         

       보나 마나 머리가 나빠 다루기 쉬우니 가입시킨 거겠지.

         

       엘리라는 애도 마족이라는 뻔한 약점을 가지고 있으니 가입시킨 거고.

         

       하지만 이유를 짐작하는 것과 별개로 레너드는 기분이 좋지 않았다. 뭣도 모르는 놈이 운 좋게 권력을 쥐게 됐기 때문이다.

         

       왜 하필 저놈이.

         

       학생회의 인원 최소화는 얼핏 좋은 듯싶지만 명확한 약점을 지니고 있다. 부품처럼 돌아가던 인원 중 누군가가 빠지게 되면 일 처리에 큰 차질이 생긴다.

         

       그런데 마침 토너먼트 상대가 됐으니 좋은 기회다. 자격 없는 놈에게 큰 부상을 적당히 입히고 빈자리에 자신이 들어가면 되겠지.

         

       입힌 부상에 대한 사죄의 의미든.

         

       인력 공백의 땜빵 처리든.

         

       빗자루 퍼포먼스가 끝나고 대련 시간이 됐다.

         

       레너드는 더스틴에게 검을 겨눴다.

         

       “야! 미리 말하는데 관중이 많아서 내가 지금 꽤 흥분 상태거든? 힘 조절이 어려울 수 있으니 참고해라!”

         

       명분 쌓기.

         

       그런데 정작 더스틴은 듣지도 않고 파스텔을 올려봤다. 망설이는 눈으로 소녀를 간절히 바라봤다.

         

       소녀가 밝게 웃으며 엄지를 세웠다.

         

       뭐야.

         

       레너드는 아무리 봐도 부정행위 같은 심판과 참가자의 신호 교환에 대해 고심했다.

         

       정작 이유는 대련 시작 후에야 알 수 있었다.

         

       대뜸 날아온 유리병이 노란 가스를 터트렸다.

         

       “크아악!”

         

       가스에 휩싸인 레너드는 누가 봐도 준비한 듯한 마스크를 쓰고 달려드는 더스틴을 보곤 경악했다.

         

       서둘러 상공의 파스텔을 올려봤다.

         

       “심판!”

         

       저 자식 반칙 쓴다!

         

       실격패야!

         

       지켜보던 심판 파스텔이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다.

         

       “우왕!”

         

       소녀의 손가락이 구름을 가리켰다.

         

       “강아지 구름!”

         

       구름이 강아지 모양이네요~.

         

       레너드의 눈이 부릅떠졌다.

         

       너……!

         

       이거 편파 판정이야!

         

       실격패 선언을 순진하게 기다리던 레너드는 속절없이 검을 얻어맞았다.

         

       “커억!”

         

       이 음흉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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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 It’s Mental Immunity

No, It’s Mental Immunity

Status: Ongoing Author:
The guardian demonic sword is troubled and in distress, believing it has been ruined because of me. Does striving for advancement through consuming demonic energy seem too evi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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