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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76

     

    “다시 와도 좁디좁은 방이구나.”

     

    내 방에 들어온 아셀라가 불평부터 늘어놓았다.

     

    그럴 거면 얌전히 제공해준 방이나 쓰면 될 것을, 왜 그리도 사람을 귀찮게 하는지.

     

    시종과 호위기사들도 우르르 함께 들어왔다보니 나는 외투조차 벗지 못했다.

     

    업무 중이 아니니 가운을 안 걸친 게 마지막 자존심이다.

     

    시녀장 누님의 주도하에 내 방에 아셀라가 머물 준비가 순식간에 완료됐다.

     

    그새 아셀라와 내 구역 사이에 칠 커튼까지 설치해놨다.

     

    내 방이라고.

     

     

    다른 이들이 나간 후 내가 불평했다.

     

    “꼭 여기서 지내셔야 했나요.”

     

    “어차피 같이 잘 거잖아. 밤마다 이리저리 이동하는 게 더 귀찮잖니. 월광궁처럼 바로 옆도 아니고.”

     

    “그 정도는 감내해주셔야죠.”

     

    “무슨 말이야. 공자가 매일 밤 잠옷 차림으로 내 방까지 올 일을 없애줬잖아.”

     

    “아, 제가 가는 거였군요. 물론 그래야죠. 배려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고맙지?”

     

    아셀라가 나를 쳐다보며 소악마처럼 싱글거린다.

     

    기왕 기분이 좋아 보이는데 괜히 자극하지 말자. 나도 바보처럼 웃어주기로 했다.

     

    “그럼 둘러보러 나가자.”

     

    “저 휴가 왔잖아요. 밀린 잠 좀 몰아 자면 안 될까요.”

     

    “그동안 나는?”

     

    “밖에 간호사 대기시켜 놨으니 무슨 일 있으면 걔한테 진찰받으세요.”

     

    나는 어디까지나 휴가 중이니 클로에에게 출장을 오게 했다. 그동안 아셀라의 진찰은 그녀가 맡는다.

     

    휴고는 내의원 사무실에서 몇 달째 빡세게 저주를 연구 중이다. 논문도 집필할 기세다.

     

    “일 말고, 나 뭐하냐고. 심심해.”

     

    “제게 물어보셔도 모르죠. 마법 연습?”

     

    아셀라가 내 대답이 못마땅한 듯 입술을 일자로 다물었다.

     

    “심심하다니까.”

     

    “저택 둘러보고 계셔요. 한 번 더 보고 싶다고 하셨잖아요.”

     

    “하, 정말. 공자가 안내해 줘야지. 주군을 즐겁게 하는 게 신하의 도리잖아.”

     

    “업무 중일 때만이겠죠?”

     

    “어이없어.”

     

    아셀라가 짜증을 냈지만 나도 이번엔 물러설 생각이 없다.

     

    거의 1년 반 만에 사용한 첫 휴가다. 자택에 겨우 돌아왔단 말이다. 당장 내 침대에 드러누워 낮잠을 즐겨야겠다.

     

    무엇보다 여기는 후작가.

     

    내 홈그라운드다.

     

    아셀라보다 내가 강할지도 모른… 모른다.

     

    “알았어.”

     

    대치 끝에 아셀라가 꼬리를 말았다.

     

    정 강경하게 나오면 방도가 없다 싶었다. 잘못 보여서 영영 휴가를 안 주면 그것대로 큰일이니까.

     

    납득해줘서 다행이다.

     

    아셀라는 사뿐사뿐 걸어 내 침대에 슬며시 걸터앉더니 톡톡, 이불을 두드렸다.

     

    “와서 자. 단, 한 시간만이야.”

     

    “여섯 시간 잘 생각이었는데요.”

     

    “말도 안 돼. 그게 무슨 낮잠이야. 한 시간 반만 자.”

     

    “세 시간.”

     

    “두 시간. 더는 안 돼.”

     

    “그러죠 뭐.”

     

    처음부터 두 시간 잘 생각이었다. 그 이상은 절로 눈이 떠진다.

     

    완벽한 승리였다. 나는 기쁜 마음으로 외투를 벗고 셔츠와 바지만 입은 채 침대로 다이브했다.

     

    이불 밑으로 기어 들어가니 푹신하고 시원한 솜의 감촉이 느껴진다. 이거지.

     

    눈을 감으니 스륵, 스치는 소리가 났다.

     

    아셀라가 내 어깨 주변으로 위치를 바꾼 모양이었다.

     

    몰래 실눈을 떠보니 아셀라는 입가에 손을 올리고는 쿡쿡 웃음을 참으며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재밌는 일을 찾으셔서 다행이네.

     

    “공자, 즐길 수 있을 때 즐겨 둬.”

     

    “무슨 의미세요.”

     

    내가 눈을 감은 채 대답하니 아셀라가 속삭이듯 대답했다.

     

    “언젠가 공자는 무릎 꿇고 내 치맛자락을 잡게 될걸. 한 번만 도와달라고 빌면서.”

     

    그런다고 도와주실 분도 아니시면서.

     

    확실히 아셀라는 군주에 어울리는 성격이다. 남 위에 서는 것을 즐기고, 또 그 자리를 잘 소화해낸다.

     

    장점이라면 장점이지.

     

    “…얘는 왜 아무 반응이 없을까.”

     

    맘대로 남의 귀를 만지작대지 않으면 더 좋을 텐데 말이다.

     

     

     

    ***

     

     

     

    간만의 낮잠 덕에 피로가 풀렸다.

     

    아셀라, 네리아와 함께 하는 오찬 중 아버지가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꺼냈다.

     

    내게 공사가 시작된 제약 공장 터를 확인하고 어드바이스를 달라는 것이었다.

     

    제약 공장은 내 조제법이 있어도 결국 내 노하우가 없으면 원활하게 가동하기 힘들다. 이번 휴가의 주목적이기도 해서 나는 기꺼이 받아들였다.

     

     

    그리고 아셀라도 따라왔다.

     

    “흐응, 이렇게 되어있구나.”

     

    공장 부지에 도착한 아셀라는 가벼운 감상을 냈다.

     

    후작령에서 남동쪽으로 마차를 타고 이동하면 세찬 강가 근처에 기초 공사 중인 땅이 있다.

     

    약을 조제할 때 깨끗한 물은 필수다. 상류 쪽에 터를 잡은 건 좋은 선택이었다.

     

    아버지가 네리아와 함께 부지를 둘러보는 아셀라를 보더니 내게 귓속말을 했다.

     

    “그런데 라스, 황녀님과는 벌써 동침하는 사이까지 간 게냐?”

     

    “예. 몇 가지 사정이 겹쳐서요.”

     

    “으음….”

     

    아버지가 턱을 괴더니 귓속말을 이었다.

     

    “물론 네 선택이니 말리진 않겠다만 아직 성인도 안 됐는데 아이가 생기면 이래저래 고생거리가 많아진단다. 나도 딱 네 나이 때 너를 가져서 잘 안단다.”

     

    “갑자기요?”

     

    “당연히 행복한 일이지만 아직 황녀님도 성인식까지 시간이 있으시니 조금은 여유를 갖는 게 어떻겠니. 아직 이 나이에 할아버지라 불리는 것도 좀…”

     

    “아버지, 뭔가 오해하시는 것 같은데 이어서 부지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알았다.”

     

    아버지가 뭔가 착각하는 게 분명했기에 내가 말을 끊었다.

     

    “바로 근처에 기숙사를 겸비한 약제사 훈련시설도 짓고 있단다.”

     

    아버지가 남쪽에 올라가는 건물을 가리켰다. 치유사 육성소와 비슷한 구조였다.

     

    “지금 육성중인 약제사는요?”

     

    “치유사 육성소에서 기르고 있는데 솔직히 가르칠 사람이 적다 보니 진도는 더딘 편이란다. 네가 보낸 자료를 이해하기도 바쁜 상태구나.”

     

    “내의원에서 치유사를 파견하도록 하죠. 저희 쪽은 교육이 거의 끝났으니 잘 가르칠 겁니다.”

     

    “음. 나도 내용을 봤다만 조금은 어렵더구나. 쓸만한 약제사가 갖춰지려면 2년은 걸릴 것 같다.”

     

    “어차피 공장이 완공되기 위해서도 그만한 시간은 필요하겠지요. 장기적인 가업이 될 테니 조급할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초기 단계인 지금 준비를 철저히 해야 해요.”

     

    “맞는 말이란다, 라스. 그런데….”

     

    아버지가 말을 흐리며 턱을 긁적였다.

     

    “걸리는 거라도 있습니까?”

     

    “자금이요, 오라버니.”

     

    네리아가 문서를 보여줬다.

     

    “본격적인 수익이 나는 시점을 3년 후로 잡으면 그동안은 금화를 소모해야만 해요. 공사비, 약제사 교육비, 나중엔 상단과 계약도 해야 하구요.”

     

    “이게 이렇게 많이 들어?”

     

    생각보다 사업 규모가 어마어마했다.

     

    그러고 보면 공장 부지부터 내가 상상한 것보다 크긴 했다.

     

    작은 공방에서 약제사 몇 명이 수작업으로 경단이나 굴리는 그림을 생각했는데 공장만 축구장 크기는 되니 말이다.

     

    “사업은 초기 선점이 중요하잖아요. 어차피 약이 대중화된다면 나중에는 자본이 큰 후발주자에게 빼앗겨요. 그러느니 저희가 규모를 크게 가져가야죠.”

     

    네리아가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벌써부터 큰 그림을 그리는 게 정말이지 시야가 다르다.

     

    제국민을 모두 품을 정도의 성녀가 될 몸이었어서 그런가.

     

    “그만큼 리스크도 커지지. 약이 대중화가 안 될 수도 있잖아.”

     

    “오라버니의 약제잖아요. 다들 좋아하실 게 분명해요!”

     

    네리아가 양손을 꽉 쥐고 커다란 눈망울을 반짝였다.

     

    믿어주는 건 고마운데 그만큼 책임이 막중해졌다.

     

    ‘뭐, 어차피 업적은 올려야 하니까.’

     

     

    ―――――――――――

     

    · 굿엔딩

    · ■■■ ■, ■■ ■■에서     14%

    · ■■■■, ■■■, ■■■■   0%

    · ■■■ ■■                           0%

     

    · ■■■■

    · ■■■■ ■■■ ■■■ ■■■■

      0.1%

     

    ―――――――――――

     

     

    굿엔딩 발생확률도 조금씩이지만 스멀스멀 올라가고 있다.

     

    내가 업적을 착실히 잘 쌓아가고 있다는 의미였다.

     

    아래쪽의 두 개는 여전히 그대로다.

    직업을 의사가 아니라 다른 걸 선택해야 시도할 수 있는 굿엔딩이었을까.

     

    사실상 지금 내게 주어진 굿엔딩은 하나.

     

    의사로서 업적을 잔뜩 달성하고, 배드엔딩을 착실히 삭제하면 손에 넣을 수 있다.

     

    그 과정엔 의학을 대중에 널리 퍼뜨리는 일도 포함되어 있다.

     

    내 약이 민중에 받아들여지는 건 어차피 필요한 일이라는 뜻이다.

     

     

    …맨 밑에 있는 건 뭔지 모르겠네.

     

     

    나는 네리아의 등을 툭툭 두드려주며 대답했다.

     

    “열심히 해볼게.”

     

    “헤헷, 오라버니라면 분명 잘 해내실 거예요!”

     

    네리아의 응원을 받으니 기운이 난다.

     

    “라스, 어쨌든 자금은 조금 문제가 있다.”

     

    “당장 말입니까? 월광궁에서 투자받은 금액이 있었잖아요. 계약서도 작성했는데.”

     

    아셀라는 고트베르크 제약공장에 금화 이천 개 분의 지분을 가지고 있다.

     

    전체 초기 투자금의 비율로 계산해, 나중에 수익이 나면 그만큼 월광궁이 가져가는 계산이다.

     

    계약은 5년 후부터 갱신하지 않으면 해지되고, 내가 초기 투자금만 돌려주면 된다.

     

    “후작, 어떤 문제인가? 무려 이천 개나 융통했는데 벌써 순환 가능한 금화가 없을 리는 없잖는가.”

     

    이야기를 들은 아셀라가 물었다. 아버지가 난감한 태도로 대답했다.

     

    “그게, 3년간 들어갈 걸로 예상되는 초기 투자금은 이만 개입니다.”

     

    “뭐어?”

    “예?”

     

    예상치 못한 액수에 나도 아셀라도 입을 쩍 벌렸다.

     

    “아니, 지금 제도 한복판에 20층 호텔이라도 지으세요?”

     

    “어쩌다 보니 그만큼 들어가게 됐구나.”

     

    “그럼 지금 한 푼도 없겠네요?”

     

    “그렇게 됐다. 가문의 잉여금은 모두 투자한 상태란다.”

     

    “오히려 추가 대출을 일으킨 상황이에요.”

     

    네리아가 덧붙였다.

     

    “대출? 어디서요?”

     

    “그게….”

     

    아버지가 머리를 긁적였다.

     

    “실은 얼마 전에 서부의 슈바르츠슈바이크 공작이 찾아왔었다. 라스, 네게 큰 빚을 졌다며 흔쾌히 이자나 기한도 없이 금화 만 개를 빌려줬지.”

     

    “뭐라고요.”

     

    서부 공작이라면 내가 해독제로 살려줬던 양반이다.

     

    공작령은 황실이 워낙 강해서 눈치를 보고 있을 뿐 사실상 공국으로 독립할 수 있을 수준이다.

     

    친목을 다지러 왔다가 이야기를 듣고 끼어든 모양이다.

     

    “아버지, 가문 간에 그런 큰돈이 오갔는데 대가가 없을 리가 없잖습니까.”

     

    “그야 그렇겠다만 공작가와 친하게 지내서 나쁠 것도 없잖느냐?”

     

    “혹시 사업 규모를 키운 것도 공작의 제안이었습니까?”

     

    “음… 생각해보니 그랬던 것 같구나. 정확히는 공작 각하의 딸인 공녀였다만.”

     

    “아이고.”

     

    나도 모르게 이마에 손을 짚었다.

     

    어째 아버지나 네리아의 발상 치고는 사업 규모가 크더라니.

     

    이번 건으로 확신했다.

     

    카밀라에게 속아 나와 아셀라를 홀랑 약혼시킨 것도 그렇고, 아버지는 정치고 사업이고 손대면 안 되는 타입이다.

     

    지금까지 어떻게 후작령이 제국에서 살아남았는지 의심스러울 수준이다.

     

    북부라 그나마 고립되어 있어서 정치에서 평화로웠나.

     

    한 발짝만 나가면 제국 전역은 암투와 음모가 난무하는 야생의 사바나 그 자체인데.

     

    “마침 공녀님도 우리 저택에서 머물고 계시니 이야기를 나눠보면 어떻겠느냐?”

     

    “공녀가 여기 있다고요? 왜 그걸 이제야 말씀하세요?”

     

    “지금 얘기하잖느냐.”

     

    “돌겠군요.”

     

    이 사업은 어디까지나 고트베르크 가문의 가업이 되어야 한다.

     

    공작가가 계약도 없이 끼어버리면 본전도 못 찾을 가능성이 생긴다.

     

    공녀가 여기 있다는 건 거금을 투자한 사업이 잘 돌아가나 감시하기 위해서겠지.

     

    백 프로 선의에 의한 것일 리가 없다.

     

    “아버지, 공작이 구두로 분명 이자와 기한이 없다고 한 게 확실합니까?”

     

    “확실하단다. 아, 공녀가 한 가지 조건을 덧붙이긴 했구나.”

     

    왜 그걸 이제 말씀하셔.

     

    “무슨 조건이요?”

     

    “너를 소개해달라는 이야기였단다. 뭐, 친목을 다지자는 의미 아니였겠느냐.”

     

    “공자, 이 얘기.”

     

    “예. 담보가 저란 소리입니다.”

     

    아버지!

    대체 무슨 거래를 하고 오신 겁니까!

     

     

    나는 즉시 후작가로 돌아가 공녀를 찾았다.

     

    동관 안뜰에서 여유롭게 차를 마시던 그녀는 나와 아셀라가 도착하자마자 격식 있게 인사를 건네왔다.

     

    “슬슬 찾아오실 때라고 생각했어요. 존안을 뵙습니다, 황녀 전하.”

     

    아셀라가 공녀의 앞으로 나서 팔짱을 끼고 불쾌함을 표현했다.

     

    “지금 공작가의 영애가 제국의 황녀를 먼저 맞이하지 않고 찾아오기를 기다렸다 이 말인가?”

     

    “아이, 참. 사소한 무례는 용서해주세요. 전하처럼 위대하신 분께 겨우 저 같은 소인을 신경 쓰시게 하면 실례라고 생각했답니다.”

     

    공녀가 숙였던 고개를 들자 노골적으로 패인 드레스와 화려한 장신구가 눈에 들어왔다.

     

    그만한 옷도 무리 없이 소화할 수 있을 정도로 그녀는 스타일이 좋은 편이었다.

     

    공녀가 나를 보더니 활짝 웃음을 머금고는 쪼르르 다가와 팔을 잡았다.

     

    “꼭 다시 뵙고 싶었어요, 고트베르크 선생님. 황궁의 파티 이후로 처음이지요? 아버님을 구해주신 감사를 하고 싶었거든요.”

     

    공녀가 내게 눈웃음을 쳤다.

     

    “프레다라고 해요. 저, 라우가에게 선생님 이야기 정말 많이 들었답니다?”

     

    그녀가 내 팔을 쓰다듬으며 입술을 훑었다.

     

    “선생님과도 꼭 직접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은데요, 시간 있으세요?”

     

     

    [No. 077 : 질투의 화신 14% → 92%]

     

     

    아셀라를 돌아보니 눈빛만으로 나와 공녀를 함께 태워 죽일 기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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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Doctor Cured The Villainess And Ran Away

The Doctor Cured The Villainess And Ran Away

주치의는 악녀를 고치고 도망쳤다
Score 3.6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Becoming the physician of the villainess who brought about the world’s destruction, I tried to escape to survive, but the reactions were stran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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